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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철-1-----현상학---화가의시선과몸

doll eye 2018. 10. 14. 22:05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화가의 시선과 몸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8> 메를로-퐁티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화가의 시선과 몸

화가의 시선과 몸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와 함께 20세기 새로운 철학의 지평을 열었던 사람이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이다. 메를로-퐁티 철학의 핵심 키워드는 '몸'이다. 그의 철학은 이른바 '몸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몸철학'을 가장 정교하게 잘 제시한 것이 메를로-퐁티이다.

1990년대 들어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와 페미니즘 운동 등이 활발해지면서 이즈음 '몸'이라는 화두가 부각되기 시작했는데, 1990년대 후반에는 '몸'이 인문ㆍ사회과학적인 담론에 있어 핵심 키워드로 작용했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보통 '정신과 이성'은 남성적인 것과 관계하지만 몸을 바탕으로 한 '감각'은 여성성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전반적인 구도에서 봤을 때 이성이 일으키는 부작용을 충분히 가정할 수 있고 몸을 통해 이성을 근본적으로 한계 지을 수 있다는 사유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평가 된다.

이 배경에 메를로-퐁티의 '몸철학'이 있다.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사유의 중심으로 삼지 않았고 몸의 '감각'을 중요시 했다는 점은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이 욕망을 통해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의 '코기토(cogito)' 중심의 철학적 사유를 전환시켰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몸철학의 관점에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바탕은 몸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 아래 물에 잠긴 큰 얼음덩이와 같다. 메를로-퐁티는 정신과 의식 보다는 몸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여덟 번째 시간에는 '몸과 살, 그리고 세계'라는 제목 아래 메를로-퐁티가 얘기했던 몸철학의 세계를 경험했다. 메를로-퐁티의 특징 중 하나는 사유의 출발점을 과학적 합리성을 담보한 이론이나 철학적 반성으로 보지 않고 구체적으로 주어져 있는 삶의 현장이라고 했던 점이다. 메를로-퐁티의 몸철학을 전공한 조광제 교수는 "수업이 진행되는 지금 이 공간이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는 장이면서 동시에 앞에서 말하는 자와 앉아서 듣는 자가 서로 감각적 소통이 가능함을 몸소 느끼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 메를로-퐁티ⓒ위키피디아

메를로-퐁티 사유의 출발점 

메를로-퐁티가 『행동의 구조』에서 밝히고 있는 '현상의 장'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그는 '실재적인 빛(lumière réelle)'과 '현상적인 빛(lumière phénoménale)'의 구분을 통해 객관적인 과학 세계와 현상세계 간의 대립을 이해시키고 있다. 가령 벽에 둥근 광점(光點, spotlight)이 나타나 여기저기 위치를 바꿔 옮긴다면 그것을 보고 있는 '나'는 광점이 주위를 끄는 대로 그것을 향해 시선의 방향을 돌릴 것이다. 이 때 광점의 움직임은 나의 행동(시선의 움직임)을 유발한다. 이런 설명은 현상 그대로를 설명하는 것이다.

과학은 이런 특징을 외현으로 취급하고 그 아래 다른 종류의 실재가 있어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재적인 빛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광점을 비추고 다시 반사되어 내 눈의 망막과 시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된 대상을 보게 만드는 실재적인 빛은 나(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극은 실재적인 빛이고 이 자극이 주어지면 반응(결과로서 행동)을 한다.[자극→반응;행동(결과)] 하지만 실제로는 이 반응이 자극이 되어 다시 우리의 반응을 촉구하는 것이다.[반응→자극(반응)]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현상의 장'에서 볼 때 과학적인 실재의 빛이 되는 순수한 자극은 없다. 자극이 이미 반응이다.

과학은 '실재적인 빛'을 연구하는 것이고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들은 과학의 실재적 빛이 아니라 '현상적인 빛'을 얘기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빛이란 실재적인 빛이 아니라 현상적인 빛이다. 실제 우리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장은 과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순수한 '물리적 사태(事態)'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현상의 장' 속에 들어온 후에 과학을 연구한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사유의 출발점은 배후의 어떤 객관적 실재가 아니고 직접 보고 만지는 현상의 장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현상학적 태도이다. 과학주의적 태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량, 속도, 힘, 가속도 등의 개념을 다룬다. 물리학적 세계에서는 색과 소리, 밝고 어둡다는 개념도 없다. 이런 것은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모든 감각을 쏙 빼버린 순수 이론적인 세계를 진짜 세계(진리의 세계)라고 배워 왔지만 이런 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우리의 생각이 현실을 떠나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과학적 태도가 아닌, 현상에서 출발해보자는 입장이 메를로-퐁티 사유의 시작이다.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그리고 '반성철학' 

우리가 직접 체험하는 이 '현상의 장'은 과학에서 말하는 객관적 실재도 아니고 의식철학에서 말하는 순수 의식의 세계도 아니다. 흔히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세계를 설명하려 하지만 현상에서는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없다. 

메를로-퐁티는 기존의 '반성(反省)철학'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코기토' 명제와 관련해서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가 반성철학의 모습이다. '반성'은 근대철학을 규정하는 기초인데, 이 때 '명석 판별함'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반성이고 이 반성을 통해 진리를 알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반성을 통해 명석 판별함을 찾고 명석 판별함을 통해 반성이 진리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성주의'라고 규정했다. 

지성주의 관점에서는 진리를 구현하는 체계 바깥의 세계를 도저히 입증해낼 길이 없다. 여기서 '반성=의식'이 되고, '의식=자기의식'이 된다. 결국 '반성=자기의식'이다. 지성주의는 자기의식을 바탕으로 모든 진리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데카르트다. 그리고 자기의식을 최대로 발달시켜 절대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 사람이 헤겔(Hegel, 1770~1831)이고, 자기의식 '나는 생각한다(Ich denke)'를 중요하게 여겨서 온 세계를 구성하는 총론적 의식을 중시한 것이 칸트(Kant, 1724~1804)이다. 

이런 것들을 고전주의시대의 지식 형태라고 보는 인물이 푸코(Foucault, 1926~1984)이다. 푸코는 17~18세기를 '고전주의시대'라고 했다. 푸코는 고전주의의 근본형태는 '재현(representation)'에 있다고 했고 재현은 '표상'이며 표상은 '의식의 표상'이다. '의식'과 '반성' 중심으로 일체의 모든 지식을 말하던 시대가 바로 고전주의시대이다. 고전주의시대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가 표상이고 재현이다. 푸코에 의하면 그러다가 19세기 초중반부터 근대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지식에 있어 의식과 반성이라는 구도가 깨지게 된다.

조광제 교수는 푸코의 이런 구분에는 반(反)지성주의ㆍ의식주의ㆍ반성주의ㆍ재현주의가 들어있다고 하면서 비(非)반성적 영역, 혹은 선(先)반성적 영역을 앞에서도 언급했던 빙산에 비유한다. "빙산의 일각 밑의 몸체가 되는 바탕이 있다. 빙산의 일각은 반성의 영역이다. 빙산의 일각='의식(정신)'이고, 몸체가 되는 바탕='몸'이다. 헤겔은 '감각적 확실성(무엇인지는 모르고 그냥 확실히 보이는 것)'에서부터 절대적인 상태에 이르는 체계적 단계를 말하지만 메를로-퐁티는 이런 반성적 과정 이전에 사유와 철학은 바탕이 되는 몸에서 출발함을 주장한다."

몸과 지각의 근원성 

'현상의 장'은 행동이 중심이다. 그리고 '지각'과 '현상'의 관계에서 보면 현상의 장이 곧 '지각의 장'이 된다. 모든 철학은 몸의 지각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조광제 교수는 우리는 '몸'이라고 하면 정신보다 하찮은 존재, 혹은 그 아래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사실 그렇다. 우리는 정신을 주체로, 몸을 대상이나 그 다음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몸은 나에게 '저항적인 존재'이다. 앞에서 말한 반성은 정신으로 생각한다. 정신으로 생각만 한다면 순간 에베레스트 정상에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정신적 자유이다. 인간은 정신은 자유로운데 몸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저항이 있어야 자유가 있는 법이다. 맘대로 아무렇게나 자유로움을 상상할 수 있는 자유가 참된 자유인가? 주체와 대상을 의미하는 영어 'subject'와 'object'를 보자. 먼저 'object'는 '대상'이란 뜻이지만 동사로는 '반대하다', '이의를 제기하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subject'는 '주체'를 뜻하지만 원 뜻은 '신하'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대상이라는 것은 저항적인 존재가 될 수 있고 주체는 대상의 아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주체는 대상에 의해 영향 받는다는 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길거리를 걷다가 장애물 있으면 피해 간다. 장애물이 우리를 피할 수는 없다. 장애물이 걷는 주체의 행동을 유발시킨다. 그렇다면 실제에서는 주체가 대상을 만들지 않고 대상이 주체를 만들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철학에서 이것이 전도되었다. 철학에서는 주체가 온갖 대상을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관념론이다. 주체는 대상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실제적인 것을 무시하면 현실감각이 없어진다. 관념론이 그렇지 않은가? 관념론은 대상을 무시한다. 사회적인 힘을 무시하면 현실에서 떠나게 된다. 그리고 황당한 생각이 시작된다. 예를 들어 염력, 초능력에 대한 상상력과 집착은 '황당한 주체에 대한 신화'이다. 현실을 보면 주체는 사회적 힘에 의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사회의 변화와 새로운 대상들인 자동차, 전화기, 세탁기, 스마트폰까지, 대상이 주체(인간)를 만들어 가는 것을 우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데카르트 이후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면서 항상 주체와 대상(객체)이라는 존재적 위치를 부여했다. 조광제 교수는 보통 강의실에서 강사를 주체, 학생들은 대상이라고 여기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관점으로는 도저히 접근해서 분석할 수 없는 것이 몸이라는 존재라고 한다. 특히 강사의 정신이 강의하는지 아니면 몸이 강의하는지에 대해 물으면서 앎에 대한 정의와 운동과 감각에 대한 얘기를 이어갔다. 

앎에는 두 가지가 있다. ① '~ 임을 안다'(지식, 이론, 표상)는 것과 ② '~ 할 줄 안다'(실천, 변형, 노동, 놀이 등)는 앎이다. ①의 경우에는 '주체=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②의 경우 '주체=몸'이다. 몸은 행동의 주체로서 행동은 감각+운동의 두 가지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운동에 따라 감각의 내용이 달라지지만 감각에 따라서도 운동이 달라진다. 대상의 움직임을 자기의 시선이 쫓기도 하고 차 경적 소리에 사람이 몸을 피하기도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연주자는 오만가지 인상을 다 쓴다. 인상을 쓴다는 것은 얼굴의 운동이다. 왜 운동할까? 최상의 소리를 지금 내고 있는데 그 감각을 조금이라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조금만 운동에 신경을 덜 쓰면 감각이 바뀌어 최상의 소리가 깨진다. 온몸이 운동을 해서 바이올린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감각'과 이에 대응하는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운동', 이런 것이 행동을 설명하는데 같이 얘기되어야 할 것들이다.

'인생을 사는 맛'이라는 말이 있다.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생을 사는 이유는 '감각'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면 그 사회는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갖춘 인간들을 사회적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그 사회는 다양하게 미세한 운동을 할 수 있는 인간이 다양하게 모두 존재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그래서 인생은 감각과 운동이고 이것은 '향유'이다. 

몸의 감각과 운동을 통한 행동은 지각과 결합되어 있음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지각 할 때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무런 지각을 하지 않는 행동은 예를 들면, 등산할 때 절벽에서 조심조심 걷던 걸음을 평지에 내려와서도 똑같이 하는 것이다.

또 행동은 정신에 앞서 있다. 흔히 우리가 심리학을 말하는데 심리학은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이상심리(abnormal psychology)' 즉 비정상 심리는 말 그대로 정신이 이상해서 연구하는 게 아니다. 행동이 이상해서 그렇다. 조광제 교수는 "만약 정신이 이상하다고 평가 받는 사람이 있는데 행동은 전혀 문제없다면 심리적으로 전혀 문제없는 거다. 그런데 어떤 인간이 하루에 5000번 웃는다고 치자. 이상하다. 이런 사람이 심리학에서 이상 심리의 연구대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행동에 대해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동철학이다. 정신과 이론의 논리에 대해서만 얘기하다보면 행동에 대해서는 다 놓치게 된다. 행동에 따라 인간 존재가 달라지는 것을 잡아내야 철학이 시작된다.
▲ 『지각의 현상학(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과 조광제의『몸의 세계 세계의몸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몸틀'이라는 개념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예전에 느꼈던 감각 운동이 차곡차곡 축적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웬만한 감각이 들어와도 충격 받지 않는다. 행동이라는 것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차곡차곡 축적된다. 감각의 축적이다. 그러면 몸이 점점 바뀐다. 이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쌓이는데 메를로-퐁티는 이를 '몸틀(le schema corporel)'이라고 한다. 한자식으로 말하면 '신체도식(身體圖式)'이라고 하겠다. 

메를로-퐁티식으로 말하면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것'은 '자전거를 탈 줄 아는 몸틀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과 같다. 몸틀은 한번 정해지면 오래간다. 그런데 이 몸틀은 처음에 한 동작을 할 때 온 몸이 그 동작에 집중해야 어떤 하나의 행위가 가능해진다. 자전거 배울 때도 그렇지만 글을 쓸 때는 글 쓰는 몸틀, 책을 읽을 때는 책 읽는 몸틀에 맞아야 한다. 그 행위의 몸틀이 만들어져야 가능하다. 온 몸이 그 몸틀에 따라서 집중되는 것이다. 이제 온 신경을 쓰던 정신의 집중이 몸으로 들어옴으로써 몸틀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체득(體得)'이라고 한다.

행동은 반드시 어떤 상황 속에서 하게 된다. 상황은 과제이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 과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상황에는 반드시 타인(타자)들이 있다. 과제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 몸과 과제와 상황은 각각 구조가 있어서 그것이 일치가 되면 몸틀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몸틀을 미리 갖추지 못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이때 사람은 '생각'하게 된다. 생각은 더 효율적인 행동을 위해 하는 것이다.

몸은 항상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하려 한다. 이것을 메를로-퐁티는 '세계에의 존재(l'être-au- monde)'라고 한다. 세계 속에 있으면서 세계를 통해 하나가 되려는 과정에 있다는 것. 또 그 과정에서 벗어나길 거부한다.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상황 지어진 존재'라고 한다. 힘이 들면 숨이 가빠지는 것이 그 아주 쉬운 예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계속 역동적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복합적인 세계이다. 주어지는 상황에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몸틀 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계속 새로운 몸틀을 만들어 간다. 한 인간에는 여러 몸틀이 만들어져 있고 또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있다. 이것을 '가소성(plasticity)'이라고 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아주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늑대소년을 상기해보자.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의 몸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이다.

들뢰즈(Deleuze, 1925~1995)가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에게서 가져온 중요한 개념 중 'intensité'라는 개념이 있다. '강도', '강밀도' 등으로 번역되는데 감각이 밀도가 높아지면 강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 강도는 어떤 몸틀을 갖추느냐에 따라 다르고 또 인간의 삶은 전혀 달라진다. 천재라고 소문난 예술가들은 그 방면으로 엄청난 몸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보다 인간들 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조광제 교수는 몸틀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본주의는 한 인간을 특정한 몇 가지 몸틀 만을 가지고 살도록 만든다고 한다. 이런 것을 반영한 작품이 찰리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36)이다. TV프로에 나오는 달인(전문직)들을 보면 그 전문 분야에 대한 몸틀이 정말이지 대단하다. 하지만 10년 이상 그것만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몸틀은 강도가 높아지지만 여러 몸틀이 결핍된다. 그러면 몸은 왜곡된 형태로 변하게 된다.

"나는 내 몸이다" : 습관과 체화  

"나는 내 몸이다"이라는 말이 있다. 이 때 내 몸은 계속해서 새롭게 몸틀을 갖추게 되고 새롭게 운동하는 그 몸이다. 몸틀은 자기 무의식적이다. 몸이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말이다. 내 몸은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자아이기 때문에 내 몸은 나의 의식에 다 체크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의식으로는 알 수 없는 내 몸이 작동하면서 나를 형성한다. 이 때 자아는 정신적 차원의 자아가 아니다. 메를로-퐁티는 정신적 차원에서 말하는 자아를 '허공의 자아'라고 한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자아이다.

메를로-퐁티는 몸은 복합적이기에 근본적으로 '불투명(opacité)'하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명석 판별함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의식으로 '투명(transparence)'하게 주어지는 것만 진리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불투명한 것이야말로 진리라고 했다. 낯낯이 밝혀지는 것이 진리가 아니다. 불투명한 것이 역량을 발휘한다. 불투명을 정신분석학에서는 트라우마, 무의식의 상태라고 설명할 것이다. 몸 철학적으로 트라우마를 설명하면, 삶의 과거 어떤 지점에서 특정하고 이상스럽게 강력한 감각이 와서 순식간에 몸틀을 만들어 버린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잠복해 있다가 유사한 상황이 나오면 증상이 나타난다.

조광제 교수는 그래서 '습관'이 중요하다고 한다. 세계 속에 살다보니까 몸이 바뀌는 것이다. 조광제 교수는 세계와 몸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① 세계는 몸을 구조화 한다. 그리고 ② 구조화된 몸이 세계를 재구성한다. 이 때 구조화 되었다는 것은 몸틀을 갖추게 되었다는 말이다. 내가 어떤 몸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라지고 그 속에서 운동하는 것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요가나 국선도 수련을 해보니까 정말 좋다고 추천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 사람에게는 요가나 국선도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들어왔고 그 몸에 요가와 국선도를 하는 몸틀이 갖추어지다 보니까 세계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시 상호교환'이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공동체적 의미에서 '집단적 몸'이라고 한다. 만약 흔히 말하듯이 세계는 객관적이고 몸은 주관적이라고 해보자 이렇게 되면 상호교환이 안 된다. 

'체화(體化)'라는 개념이 있다. '체현', '육화'라고도 한다. 우리가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하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면 생각을 한다. 생각이 올라왔다가 몸틀을 갖추면 올라왔던 생각은 다시 사라진다. 그런데 이때 그 생각은 어디로 갔을까? 바로 몸에 체화되었다. 몸1ㆍ2ㆍ3(...), 의식1ㆍ2ㆍ3(...)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몸1이 의식1을 바꾸고 의식1이 몸2로 체화된다. 몸2는 체화된 의식을 바탕으로 의식2를 바꾸고 몸3으로 체화된다. 이것이 반복된다. 결국 의식은 몸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조광제 교수는 이걸 설명할 때 메를로-퐁티는 아메바를 예로 든다고 한다. 아메바가 환경이 좋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상황이 바뀌면 몸을 옮기는데, 방식은 자기 몸을 한 쪽으로 쭉 늘어뜨려 몸을 옮기고 나면 다시 예전의 형태를 회복한다. 이때 늘어지는 아메바의 일부를 허족(虛足)ㆍ위족(僞足)이라고 한다. 

우리 인간에게 정신과 의식은 허족ㆍ위족과 같다. 필요가 있을 때는 쭉 뻗어 발휘했다가 필요가 없으면 거둔다. 그래서 정신적 사유를 하거나 의식하고 있을 때에는 에너지가 분산되어 감각이 약해진다. 그러나 '몰입' 상황은 대체적으로 감각적인 것에 몰두할 때다. 이때는 정신과 사유가 없는 상태이다. 예를 들어 섹스를 할 때, 이렇게 하면 좋을까, 저렇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면 사실 잘 안 된다. 그냥 미쳐버려야 잘되는 것이다. 가장 감각적인 상태가 되어 생각하지 않는 도취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 몰입은 순수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했지만 생각의 궁극적인 목적은 '감각의 향유'이다. 조광제 교수는 내 몸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면서 또 어떤 감각적인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염두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각은 재미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생각을 너무 오래하다 보니까 생각하기 위해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생각을 생각하기 위해 생각했던 것이 '근대'이다. 이렇게 되면 데카르트는 혹 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인간이 늘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항상 새로운 감각, 운동, 상황에서 내 존재를 계속 역동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 존재는 갇혀 있지 않고 결정론적이지 않으며 변화의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향해 계속 나가는 존재이다. 

인간의 몸틀은 어떤 특별한 중심이 되는 몸틀이 없다. 파시즘적인 전제적 형태의 피라미드 체계가 아니다. 필요에 의해서는 서로의 위치와 배치를 바꾸기도 한다. 몸은 그래서 탈중심적인 존재이다. 메를로-퐁티는 "각각의 나는 다른 모든 나의 교차점이다"라고 했다. 세상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ㆍ역사 등등의 복합적 영향을 받으며 내 몸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내 몸은 내가 의식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인간들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조광제, (사)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몸에서 살로 : '살존재론' 

몸을 철학적 사유의 바탕으로 삼는다는 것은 몸 바깥에 있는 모든 세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고 세계와 항상 접촉한다는 것은 서로 감각적인 것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몸들은 감각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 왜 하필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감각적으로 들어올까? 우리는 감각하면서도 감각되는 자이다. '본다는 것'과 '보인다는 것', 악수처럼 '만진다는 것'과 '만져진다는 것' — '봄을 본다는 것', '만짐을 만진다는 것' 이런 것이 몸의 성격이다. 몸은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다. 몸은 내 안의 개별적인 몸이 아니라 세계와 항상 소통하고 있는 것이고 소통은 감각을 통해서 한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끼리 보고 만지고 만져지는 것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인간과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까? 

이 부분에서 메를로-퐁티는 화가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에게 영향을 받았다. 세잔은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Le paysage se pense en moi, et je suis sa conscience)"라고 했다. 세잔은 풍경을 한참 쳐다보다가 풍경이 자기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으면서 "풍경이 내 속에 자기를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라는 일종의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감각적 세계를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바탕으로 '몸의 나르시시즘(Narcissism)'을 말했다. 

조광제 교수는 "보이는 것이 보는 나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보는 나는 온데간데없고 보이는 대상이 꽉 나를 채우고 있다. 사실 보는 나도 그런 것을 원한다. 본다는 것은 보이는 것이 오히려 주체가 된다. 보이는 대상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내가 사물을 만질 대 만져지는 것은 사물이 오히려 나를 만지는 것이다. 이런 나르시시즘적인 감각의 소통이 어떻게 가능하냐면 메를로-퐁티는 모든 존재는 살로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메를로-퐁티는 '감각덩어리(masso du sensible)'라는 말을 했다. 덩어리는 사물이다. 사물이 감각으로 덩어리져 있다는 것인데, 색도 알고 보면 시각 중심의 색 덩어리이다. 색은 사물의 표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을 자르면 그 단면에도 색이 있다. 사물은 모두 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물을 인식적으로 규정하지만 감각적으로 만져서 단단하게, 혹 물렁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사물 그 자체'라고 한다. 일종의 감각적 유물론이다.

마르크스가 자유를 얘기할 때 기본으로 접근하는 것이 감각이다. 노동이라는 것은 감각적인 소통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것을 좀 더 존재론적인 '살'이라는 개념으로 심화시킨 것이 메를로-퐁티이다. 그래서 우주의 살, 세계의 살, 보는 자의 살, 보이는 것의 살 등의 얘기를 한다. 

여기에 플라톤(Plato)의 이데아는 보이지 않는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가지적[可知的, 가지적인 것(noēton)]'으로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것이다. 이데아는 아이러니 하게도 색이 없다. 예를 들어 빨강의 이데아는 전혀 빨갛지 않다. 이러한 플라톤의 사유를 끌어다 놓은 것이 과학적 세계이고 물리학적 세계인데 이것과 정반대로 보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살존재론'이다. 이것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핵심 내용이다. 살존재론은 예술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1943)에서 "애무는 몸을 살로 바꾼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몸은 노동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도구를 사용할 때 우리는 손을 이용해 도구를 잡는다. 그러나 애무는 노동과 다르다. 무엇을 도구적으로 잡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애무는 도구적인 몸이 도구성을 벗고 순수 감각적인 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우리 인간은 살이 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살이 된다'는 것은 사르트르의 경우 '즉자(卽自)'와 하나가 된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인간이 완전한 살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아무리 다양한 많은 시도를 해도 완전한 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은 알았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내가 살이 되는 만큼 파트너를 살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사르트르는 살이라는 개념을 인간에게만 적용한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전 우주에 확대 적용시켜 온 우주가 애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살이라는 것은 늘 감각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모든 각 존재는 살의 상태에 있다. 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존재의 상태는 살의 상태라는 것. 그래서 온 우주는 살로 되어있는데 이 살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다. 온 우주는 살이라는 단 하나의 원소로 되어있다.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살일원론'이라고 명명한다. 우주의 정신과 물질도 살의 변형태이고 몸도 살의 변형태이다.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신=자연=실체는 메를로-퐁티가 말한, 살이 다양한 양태로 변함을 언급한 것이다. 

조광제 교수는 메를로-퐁티가 살일원론을 다 말하지는 못하고 죽었지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교직-교차' 장에 보면 이에 대한 원론이 나오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말년에 쓴 『눈과 정신』에 메를로-퐁티의 회화론이 보인다고 한다. 회화는 살을 만나고 살을 접촉하면서 그 살을 그려내는 것이다. 순수 감각적인 상태를 회화라고 본다. 곧 존재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래서 메를로-퐁티의 회화론은 '존재론적인 회화론'이다. 조광제 교수는 회화론적 존재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한다. 

하늘의 별을 보고 바람을 맞으며 시적 감성을 느끼는 것은 온 우주가 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속에 빨려 들어가 나르시시즘을 느끼는 것이다. 온 우주가 나고, 내가 우주가 됨을 느낀다. 이것이 메를로-퐁티의 후기 살존재론이다. 유물론 치고는 매우 감각적이다. 감각적 유물론이라고 말할 만한데 유물론에서 물질은 순수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메를로-퐁티에게 순수 객관적인 것은 찾을 수 없다. 

메를로-퐁티에게 순수 객관적인 것은 없다. 주관적인 것은 의식이나 정신이 아니고 몸이다. 이것이 들뢰즈에 가게 되면 감각론으로 나오는데 『감각의 논리』(1984)에 보면 신경체계에 대한 설명에서 따가움과 같은 신체적 고통의 순간, 신경을 통해 느끼는 감각이 진짜 감각이라고 한다. 이것이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 1992)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통해 극적으로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살존재론을 들뢰즈는 극단적으로 풀어냈다고 할 수 있다. 『감각의 논리』에서 감각은 세계의 존재라고 한다. 메를로-퐁티가 영향을 끼친 푸코나 들뢰즈는 이런 감각론에 기초하고 있다. 

메를로-퐁티의 순수 감각적인 상태로서 세상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면 평소에는 별 느낌 없이 보던 예술 작품을 볼 때도 뭔가 느낌이 달라지고 길을 걷다가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들에서도 순수 감각적인 것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예술적인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메를로-퐁티의 살일원론에 입각한 살존재론은 예술존재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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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1강 : 2월 5일 푸코: 근대 이성의 본질을 폭로하다 - 광기, 권력, 폭력 (박민미, 대진대 외래교수) 

12강 : 2월 12일 들뢰즈 : 들뢰즈의 반복과 영원회귀 (김범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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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1> 쇼펜하우어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서양 철학사에서 데카르트부터 헤겔까지가 근대철학의 영역이라면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는 현대철학을 시작한 세 줄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하고 진행하는 강좌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는 서양 현대철학 분기점 중 하나인 니체를 중심으로 니체 계열의 철학줄기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는 자신의 말을 들어줄 귀가 없다고 탄식했지만 후에 자신의 말을 귀담아 준 수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했다. 이번 강의는 그들을 읽는 여정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니체 바로 이전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부터 시작한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박은미 건국대 교양학부 강의교수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매우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대학 강단은 물론 일반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접할 기회가 그만큼 적다는 얘기일 것이다. 인문학에 관심 좀 있다는 사람들도 대부분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그만큼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니체 계열의 철학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그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할 때 비합리주의로서 '의지'를 말하지만 선배 철학자에 있어서는 플라톤(Plato)과 칸트(Kant, 1724~1804)의 주지주의(主知主義) 계열에 영향을 받았다. 일면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 있지만 어찌 보면 반대로 충분히 흥미로운 철학자이기도 하다.

▶ Arthur Schopenhauer


궁핍하거나 권태롭거나! 어쨌든 삶='苦' 

쇼펜하우어를 두고 염세주의자 혹은 허무주의자라고 말하는데 이런 평가는 아마도 쇼펜하우어 자신이 이래도 저래도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긍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욕망이 있으면 채우지 못하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욕망이 없으면 욕망이 없음으로 인해 삶의 무의미에 시달리는 것을 기본적인 인간의 속성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불행'하다. 인간에게 불행은 행복보다 항상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박은미 교수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장점에 익숙해지는 속도는 빠르지만 단점에 익숙해지는 속도는 느리다고 한다. 이 둘의 시간차가 항상 부부간, 형제간, 고부간 또 직장 동료간에 서로가 서로에 대한 괴로움의 대상이 되고 아픔을 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쇼펜하우어는 열일곱 살 때 "이 세상은 선한 존재자의 작품일 수 없다"고 생각했고 20대 초반에는 "삶은 불쾌한 것"이며 "나는 이러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보내기로 마음먹었다"고 고백한다. 

칸트의 '물(物) 자체'와 쇼펜하우어의 표상과 존재 

쇼펜하우어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대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칸트 철학에서 말하는 '물 자체(Ding an sich)'란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 자체'는 '사물 그 자체(thing-in-itself)'를 지칭한다. 칸트는 내가 보고 있는 이 세계가 진짜 세계인가? 라는 질문을 상정하고 존재하지만 인간세계에서는 알 수 없는 '진짜 그 세계'를 '물 자체'라고 표현했다. 이 물 자체의 영역을 '예지계'라 하고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는 '현상계'라고 한다. 현상계를 다시 말하면 '드러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드러난 세계'라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빛을 통해 사물에서 반사되는 색을 보고 대상 사물의 색깔을 그대로 인식할 때 형성되는 그 세계이다. 인식하는 대상 사물에서 반사되는 색을 나의 주관적 인식으로 오염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여 인식하는 것. 이것은 일반 물리학으로 설명 가능한 세계이고 칸트 이전에 사물을 인식하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칸트 이후에는 바뀐다. 인간이 대상 사물의 고유한 색을 인식하는 것은 원래 사물의 색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대상 사물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 없지만 인식주체인 '내'가 그 사물의 색이 그렇다고 인식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현대 물리학에서 가청주파수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주파수 영역을 말한다. 보통 16~20Hz의 영역이다. 이를 기준으로 사람은 돌고래나 박쥐의 초음파를 들을 수 없고 반대로 이들 생물이나 곤충, 파충류 등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영역의 주파수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들리지 않으면 없는 것인가? 칸트의 용어로 다시 돌아오면 물 자체에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분명 있다. 그러나 인간의 현상계에는 그 소리가 없다. 

그래서 칸트는 물 자체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고 이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의 형식으로 포착될 수 있는 것만 알 수 있다고 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 밖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고 어떤 영역이 존재함을 알게 되더라도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신은 물자체에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현상계에 없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에 대해 유의미한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칸트 사유에서 보이는 일련의 이 과정은 대상중심에서 주관중심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칸트가 현상계와 예지계를 나누어 인간 인식의 한계를 증명한 것처럼 쇼펜하우어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칸트가 말한 현상계 내에 한정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표상의 세계의 특징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관심에 따라 세상을 본다고 말했다. 이것이 인식 대상을 이미지로 떠올려 표상하는 인간 인식의 '선택적 경향성'이다. 이런 표상방식은 결국 존재방식을 규정하게 된다. 

충분근거율과 표상으로 드러나는 세계 

쇼펜하우어는 표상을 말하면서 '의지'의 작용을 말하는데 이성이 단순한 두뇌현상이라면 '의지'는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이고 이성은 의지에 기여하는 2차적인 것이라고 한다.(박은미 교수는 이 대목에서 쇼펜하우어가 헤겔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부연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의식이 있어 스스로를 인식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다. 이 자의식은 '표상'의 능력이다. 표상의 세계에서 인간은 이성으로 스스로를 인식 대상으로 삼고 그 능력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목도하면서 고통스러워한다. 한마디로 고통 자체 보다는 고통의 표상 때문에 고통 받게 되는 셈이다. 세계의 고통이 모두 나의 표상에서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박은미 교수는 "아무 생각 없이 수영 열심히 하던 박태환 선수에게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가 '달리기는 운동하면서 볼 풍경이라도 있지만 매일 수영장 바닥만 보면서 운동하면 무슨 재미가 있느냐'는 농담조의 얘기를 했는데 그 날부터 박태환 선수는 수영이 괴로워졌다고 한다. 바로 이 순간이 고통이 표상에 기인하여 발생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세상과 관계하여 표상해내고 '의지의 세계'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인간의 인식과 관련하여 칸트는 12범주를 드는데 이 범주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인과범주'이다. 즉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원인과 결과 관계로 포착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쇼펜하우어의 경우 이것을 '충분근거율(충족이유율)'이라고 한다. 인간은 사유방식의 특성상 근거를 찾아서 인식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현실의 세계에서 '충분근거율'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표상'해 내는 것이 된다. 칸트가 "현상계는 '물자체'가 현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면 비슷한 맥락에서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개념을 비교해보면 <'물자체'-'의지의 세계'>, <'현상계'-'표상의 세계'>, <'현상'-'표상'>정도로 도식할 수 있겠다. 

쇼펜하우어 '충분근거율'을 정리해보면 인간이 '충분근거율'에 의지해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지 원래 세상 사물의 존재하는 방식이 '충분근거율'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충분근거율'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충분근거율'의 생성-인식-존재-행위의 네 가지 특성에 입각해 세상과 관계한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세계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근거율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표상의 세계를 경험할 뿐 세계 자체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박은미 교수는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압축해서 한 문장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고 한다. "세계는 '의지'의 세계인데 인간에게는 이 의지의 세계가 '표상'으로 드러난다" 이 말을 쇼펜하우어의 말로 이어보면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직접 인간에게 인식되지 않고 인간은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만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의지의 작용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우리가 인식하는 표상의 세계는 맹목적인 의지가 충분근거율에 입각해서 드러나는 세계일뿐이다. 

의지의 작용과 삶의 맹목성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모든 사물의 내적 원리'이며 '생명의 원리, 생명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우주 전체를 관통한다. 이 의지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객관화되고 다양한 표상들의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생명체와 무생명체에 작용하여 그 존재를 다양성 속에 드러나게 한다.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의지가 나의 마음에 드러난 것은 또 '의욕'이라고 한다. 의욕을 통해 인간은 행위 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몸[육체]'은 의지가 발현된 것이다. 인간은 높은 정도의 의지가 객관화 된 것이고 동물은 그 반대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먼저 있고 그 의지의 객관화 정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결정된다고 말했다. 유물론적 입장과는 반대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맹목적인 삶의 충동임을 간파함으로써 그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 상태로 인해 지나치게 고통 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삶의 맹목적인 충동으로서의 의지이다. 그리고 나를 지배하는 맹목성에 대한 극복의 주체가 나 자신일 때 비로소 그 극복의 고유한 가능성과 가치가 드러날 수 있다. 자기 인식이 되어야 의지는 실현되는 것이다. 세계의 본질은 의지이지만 인간에게는 세계가 표상으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본질인 의지의 움직임이 표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관찰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필연에 빠지게 된다.

박은미 교수는 만일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잘 이해가지 않는다면 동양에서 말하는 '기(氣)'개념을 대입시켜도 어느 정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기라는 것의 변화성, 우연성이라는 속성이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의 본질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개별적인 인간의 죽음에 대해 "의지가 객관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마치 장자(莊子)가 삶과 죽음을 기의 '이산취합(離散聚合)'이라고 설명한 것과 유사한 면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이해해 본다면 '의지'가 맹목적으로 작용한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이 벌어지게 되어 있는 삶의 맹목성을 인정하고 자기 인식의 선택적 경향으로 내게 좋고 나쁨을 따지는 '자기중심성'을 탈피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남들도 나와 같이 의지의 맹목성 때문에 힘들어 하는 동지이자 동료임을 깨닫게 된다. 피아(彼我)의 세계가 모두 고통임을 알게 되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생겨난다.

자기중심성과 개별화의 원리 탈피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경향성이 있고 현실에 대한 인간의 기대치는 타인의 장점과 단점을 인식하는 시간차와 마찬가지로 차츰 높아져 간다. 세계의 경향성과 다양한 인간의 취향은 어차피 서로 다 접합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구조적으로 언제나 불가능한 삶을 바라는 존재로써 미래의 모순적인 상황에 희망을 걸고 거기에 행복을 유보시킨다.

인간은 '자기중심성'에 기인하여 곧잘 나의 의지로 다른 사람의 의지를 침탈한다. 그러나 '의지'는 하나이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서 침탈된 의지는 곧 나에게 다시 돌아오게 된다. 고통이란 것이 그렇다. 이 개별자와 저 개별자에게 체현된 의지는 본래 하나이지만 서로 다른 개별자들에게 체현되면서 충돌하고 이 때 고통이 생긴다.

박은미 교수는 인간 개개인은 모두 하나의 '의지'에서 표상으로 드러난 구현체이므로 서로가 서로의 의지를 이해하고 그 각각의 존재방식이 분명하게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개별화의 원리에 갇혀서 근거율에 구속되고 그 인식에 갇힌 시선을 통해 세상의 표상만이 관조될 뿐이다. 

이념을 보는 힘과 정관(靜觀) : 순수한 인식 주관과 의지의 부정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가장 고차원적으로 객관화된 것"을 '이념'이라고 했다. 이념의 다음 단계가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념을 직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런데 이념은 의지의 작용에 의해 드러나는 결과물이 아니라 의지의 직접적인 작용이기 때문에 이념을 파악한다는 것은 의지를 본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성과 개별화의 원리를 벗어나지 못해 충분근거율에 입각해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절대 '의지'를 볼 수 없다. 

이념은 이성에 의한 주객의 분리와 시공의 제약에서 벗어나야만 직관 할 수 있고 '더 이상 근거율에 따르지 않고 다른 사물과의 연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주어진 대상을 응시하는 정관(靜觀) 속에 침잠되어 동화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것을 쇼펜하우어는 "순수하고 의지가 없으며 고통이 없고 시간에 매이지 않는 인식주관"이라고 설명했고 다시 표현하자면 '순수한 인식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 '정관'을 통해 욕망의 세계가 수반하는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 태연함의 세계에 도달 할 수 있다.

아마 '예술'의 경지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예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자기 자신에 속박되지 않아 육체의 구속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경험을 준다. 예술은 의지의 다양하면서도 통일된 모습을 직관한다. 그러기에 의지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한다. 자신이 직관한 이념을 예술작품에 구현해놓는 사람이 '천재'이고 천재는 표상들의 원형이 되는 이념을 직시하는 성찰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쇼펜하우어는 '습득된 성격'이라는 표현으로 자기의 성격과 경향성을 벗어나 계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얘기한다. 습득된 성격은 스스로 일궈낸 성격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경향성을 조절해 나감을 의미한다. 연장선에서 '덕(德)'이란 "피아가 의지의 구현체일 뿐이므로 나의 고통을 미루어 타인도 고통스럽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때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기 위해 타인의 의지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 또는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구분되지 않음을 알아 타인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덕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나의 개별화의 원리에 갇히지 않고 의지의 큰 흐름을 느끼면 '동정심'이 생긴다. 쇼펜하우어는 실제로 이것을 '조용하고 자신 있는 명랑함'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의지의 맹목성에 의해 의지가 나에게 의욕을 너무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조절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의지가 나에게 다가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유혹을 견뎌내야 함을 역설했다. 이른바 '덕에서 금욕으로의 이행'이며 '의지의 부정'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이 '의지를 부정'을 내가 부정하려는 의지작용과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면 일체의 생각을 없애기 위해 참선하는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번뇌가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리하자면 의지의 부정은 개별화의 원리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신과 타인들을 통해 나타나는 의지작용의 흐름에 대해 치열하게 사색해서 얻게 되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 이 전환이 성공한다면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의지가 맹목적인 삶의 충동임을 간파함으로써 그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 상태로 인해 지나치게 고통 받지 않아야"하는 이상적 경지가 현실화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의 성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복잡하게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이유가 아닐까.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라고만 볼 수는 없다. 

*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스2> 다음 강의는 11월 13일 오후 7시 30분 연효숙, 연세대 외래교수의 '니체: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철학자'로 이어집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철학자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2> 니체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철학자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현대철학을 개시한 장본인이다. 그는 근대철학을 마감하고 현대를 새롭게 여는 경계에 서 있던 사람으로 흔히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부른다. 근대를 마감하면서 플라톤(Plato) 이후 2,500년간 서구인들이 가져왔던 중심 가치를 가차 없이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의 것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 한 철학자이다.

전통적 가치의 전복 

현대성은 아직까지 정체가 명확하지만은 않다. 20세기의 시작을 현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좁게는 1968년 5월 프랑스 '68혁명'이 진정한 현대의 분기점이며 현대성을 구현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니체의 철학의 길안내를 도와줄 연효숙 교수는 "현대성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분류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니체가 그 징후들을 포착했고 그것들을 니체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점"이라고 한다.

헤겔(Hegel)은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고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이성의 시대'를 말했다. 그러나 니체는 그 이성 중심의 시대를 마감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점이 니체가 당시에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가 된다. 소크라테스(Socrates) 이후 헤겔에 이르는 중심 가치는 이성의 사유를 중시하는 전통이었기에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의지' 같은 개념은 당시 서구인이 이해하기에는 생소했다.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니체의 저작이 헤겔의 저작에서 보이는 일목요연한 체계와는 정반대의 특징을 보이는 점도 그의 사상이 당시에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던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초기 예술적인 관점에서 쓴 저작 『비극의 탄생』(1871) 이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 『도덕의 계보학』(1887), 『힘에의 의지』(1887), 『니체 대 바그너』(1888) 등 그의 에세이적 글 속에 보이는 주옥같은 말과 통찰력 있는 문구들이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창조적 발상의 길을 열어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 ⓒ프레시안

현대적 사상의 기원으로서의 니체 : '신은 죽었다'가 의미하는 것

서양의 19세기 말, 서구인들은 스스로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일종의 '위기감'이다. 헤겔이 말한 '역사의 주인'이었던 인간이 근대의 막바지에는 오히려 '악마적'인 성향에 의해 규정될 수도 있다는 이중적 측면이 드러났고 역사를 지배하던 낙관주의적이고 통일적이었던 근대의 문화가 정점에 있다가 하향 곡선을 그리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800년대 말 서구 유럽의 모습이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당시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그것을 예술 활동을 통해 드러냈듯이 니체는 이 징조들을 감지하고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다. 이른바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는 니체의 말은 근대적 주체인 '인간'의 죽음을 예고하는 말이다. 『안티 크리스트』(1888)에서 니체는 실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기독교 절대존재의 허구성과 기독교적인 덕(德)의 체계는 절대 인간을 구원할 수 없고 진리를 구현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고 했다. 마르크스(Karl Marx)가 "종교(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니체가 기독교를 비판했던 또 다른 요지는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감내하게 하는 거짓된 모순에 있었다. 

근대인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기독교 중심의 삶의 가치는 더 이상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로 인해 오히려 삶의 허무함이 드러나게 된다.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Nihilism)'은 바로 근대 주체의 사망을 선고하는 신호탄이었고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대신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니체는 삶을 제대로 살아보자는 의미에서 '삶을 긍정하는 철학'을 통해 미학ㆍ심미적인 것과 예술적 창조성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부상시킨다.

미학주의와 반관념론(anti-idealistic)적 경향 

연효숙 교수는 니체 이전 서양에는 '진선미(眞善美)'의 위계가 뚜렷했다고 한다. '진(眞)'은 소크라테스부터 헤겔에 이르는 진리체계를 지칭하고 '선(善)'은 인간이 지녀야 할 윤리적 덕목의 가치이며 '미(美)'는 인간의 심미성과 미적 감각을 말한다. 니체는 가장 하위에 있던 미학적인 것을 가장 우위에 두면서 서양 고대의 형이상학, 근대의 인식론, 진리 위주의 경향을 전복시킨다. 

니체는 이러한 가치의 전복을 통해 플라톤적 이상주의의 종말을 고하면서 근대까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만이 아름다움과 선함을 가지는 실체라는 생각을 버린다. 인간 외의 사물(생명)에 대해 그 존재가치를 평가 절하해 버렸던 것이 근대까지 서양 인식론의 기본이었다. 이 연장선상에서 서양은 서양 이외의 아시아, 아프리카 등 다른 문화의 가치도 '인간 이외의 것'으로 치부하면서 서양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의식을 확고히 했다. 니체는 '반인간주의(anti-humanitarian)'를 주장하면서 '인간주의(humanism)'가 오히려 인간을 더 인간답지 않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보았다. 자연에 대한 인간 우위의 비판이다.

연효숙 교수는 이런 니체의 사상이 현대철학에 지적 영감을 불어 넣었던 작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와 피에르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1905~2001), 그리고 현대 철학자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와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위시한 중심가치의 전복과 전도를 시도했던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한다. 

니체는 또한 탈근대(post-modern)사상으로의 전환에 있어 맹아를 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근대까지 서구의 철학이 보편성에 기초하여 전체를 아우르려는 '동일성(identity:정체성)'의 철학이었다면 니체는 개체의 '차이(difference)'를 중시하는 철학을 전개하면서 개체성을 확보한다. 수직적인 사고에서 수평적인 사고로의 전환이다. 이 모든 것은 전통의 '해체'이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비극은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기원한다"고 말했다. 플라톤이 평가 절하하던 예술가와 예술을 오히려 높게 보고 예술 중에서도 '음악'에 대해 강조한다. '그리스 비극'은 소크라테스가 탄생하기 이전 시대를 풍미했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을 연원으로 하는 '그리스 정신'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던 이성 중심의 주지주의(主知主義)와 상관없다. 삶의 원초적인 힘과 본능이 오롯이 살아있는 것이 그리스 정신이며 '충동(힘)과 본능과 격정(pathos)의 홍수 속에서 예술 창조의 원동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리스 비극의 의미이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미학의 전형으로 보았고 이 '고전 비극의 예술'을 독일에서 재창조 하려 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처럼 '음악예술'은 삶의 부속물이 아닌 "상이한 매체를 이용해 삶을 총체적으로 새롭게 재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원래 인간은 비극의 정신 속, 인간의 충동 속에서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 같은 체험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성이 등장하여 인간의 자각을 통해 자아와 세계가 하나라는 통일성에 균열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소크라테스이고 그리스 정신이 쇠퇴하는 지점이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이 세계의 원리 혹은 인간의 원리로서 두 가지 상반되는 원리가 잘 조화되어 있다고 평했다. 그 원리가 '아폴론적 원리'와 '디오니소스적 원리'이다. 아폴론은 질서 정연한 형식의 신, 꿈의 신으로 조형적인 미, 질서, 형식의 예술을 통해 미를 창조하는 힘을 가지며 개별적인 것의 원리가 된다. 조각, 회화 등 조형 예술에 관련한다. 반면 디오스소스는 카오스(chaos)와 황홀경의 신, 술의 신이다. 도취적이고 형식을 파괴하며 통제되지 않는다. 비조형적인 음악 예술의 영역과 관계한다. 디오니소스적이라는 것은 개인을 중시하지 않고, 개인을 말소시켜 신화적인 일체감 속에서 개인을 해체시킨다. 이 원리는 그리스 비극을 살아 있게 하는 주요 원리로 자리매김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원리를 아폴론적 원리보다 더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 연효숙 교수는 "그러나 니체가 디오니소스적 원리를 강조했지 거기에 치우친 것은 아니었다"고 부연한다. 

그러나 니체는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를 들면서 후자로 갈수록 점점 아폴론적인 색채가 강해졌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비극적 감정이 희미해지는 사이 비극은 쇠퇴하고 퇴장하게 되고 만다. 감성이 퇴장하고 이성이 등장하면서 디오니소스적 원리는 퇴조하고 아폴론적 원리가 지배적이 된다. 그리스 비극은 쇠퇴되고 이성의 등장 이전에 있었던 인간과 세계가 합일되는 황홀경의 경지는 억압받고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니체가 바라본 그리스 비극과 소크라테스 등장 사이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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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학 

니체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다는 기준에 의문을 제기한다. 연효숙 교수는 강의 내내 니체가 고전 문헌 학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니체는 자신이 그리스 비극과 그리스 정신을 규명하기 위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갔듯이 도덕이라고 하는 기준을 설정하고 선과 악을 규정하는 것의 계보는 결국 거슬러 올라가 보면 도덕 기준을 정하는 자에 의해 설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그 결정자는 니체에 의하면 역사의 승리자이며 권력자라고 말할 수 있고 도덕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선악의 절대적인 기준은 어디에도 없으며 당사자가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가변적이다. 니체는 기본적으로 근대의 보편적 인간,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거부한다. 연효숙 교수는 "니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할 삶의 규범'들과 칸트나 헤겔 철학에서 얘기하는 이른바 '인간의 보편적인 선(善)'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도덕의 실체를 두 가지로 나누어 봤다"고 설명한다. 그 하나가 '주인의 도덕(master morality)'이고 다른 하나는 '노예의 도덕(slave morality)'이다. 

'주인의 도덕'은 귀족계층과 같은 고매한 정신을 소유한 자들의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을 담고 있다. 주인의 도덕이란 가치의 창조자, 가치의 결정자가 된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에 있어 주인의 도덕을 소유한 자들은 타인의 불행에 대해 연민과 동정이 아닌 자기 스스로의 풍요로운 '힘'에서 나오는 배려의 차원에서 관심을 가진다. 반면 '노예의 도덕'은 사회의 최하 계층들의 도덕을 대변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기독교의 도덕'이다. 노예를 만드는 도덕이다. 그들의 선은 단지 고통 받는 자들의 고통을 '줄여주기만'하는 행위이다. 동정, 자비, 인내, 박애, 친절이라는 덕목을 가진 자들은 선한 자들이고 악인은 고통을 주고 공포를 조장하며 억압하는 자들이 된다. 선한 자들은 악한 가해자들을 물리치고 이겨내야 한다는 스토리를 제공하는 것이 노예의 도덕이다. 

니체가 보기에 서구의 도덕은 이 노예의 도덕이 주인의 도덕에 대해 도전하면서 노예들의 평범한 가치를 추켜 올린 것이다. 니체 당시는 물론 지금 현대에 있어서도 동정과 연민을 받는 대상자들이 선한 가치를 점유하고 '당신은 핍박받고 있고 보호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라는 주문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노예의 도덕은 인간을 더욱 '약한 자'로 만들어 버리고 그 가치만이 우리 삶의 선함에 대한 기준으로 적합하다고 착각 하게 만든다. 이것이야 말로 노예의 도덕이 지배하고 있는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연효숙 교수는 '주인과 노예의 도덕', 이 대목에서 니체가 오해를 많이 받는다고 하면서 특히 "니체가 '금발의 야수'라는 표현을 써서 창조적이고 진취적이며 능동적인 인간상을 설정했는데 이 표현이 마치 <사회적 계층으로써 귀족의 우월성을 강조했다고 오해받는 것처럼> 백인 우월주의를 강조하는 듯이 보이고 히틀러, 나치에 영향을 주었다는 오해를 받는다. 일면 이 말 자체가 애매모호하고 그런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노예가 주인을 딛고 진짜 주인이 되는 얘기를 하지만 이것은 헤겔의 이야기"이다. "니체는 동정과 연민을 통해 선한 가치를 획득한 노예의 도덕이 일어선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을 뿐더러 기독교의 잣대에 맞추어 그런 식의 도덕을 강요하는 사회가 정말 억압받는 자들을 구원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적 사회가 몰락하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주인의 도덕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고 모든 도덕적 가치들은 인간의 참된 본성과 환경 위에서 재평가되고 재정립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주인의 도덕에 대한 이해에 있어 우리가 조선 당시의 사회적 현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반문화의 정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사실로 바라보는 사대부의 실상과 문화적 측면에서 문화적 표본으로써 바라보는 사대부의 문화는 다르다는 점을 상기할 만하다. 

'힘에의 의지'와 '위버멘쉬(Übermensch)' 

니체는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비판하면서 이 둘을 형용하기를 '이성만 남아서 살과 근육은 다 발라지고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형태'라고 표현한다. 이 두 문화는 동정과 연민을 유발하면서 인간을 '약함'을 계속 강조한다. 

그래서 니체는 '삶(Leben)'에의 의지 강조한다. 그 삶은 창조적인 삶이고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비극과 정신이 삶의 원초적인 힘과 본능이 살아있고 충동(힘)과 본능과 격정(pathos)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원동력이 됨을 볼 때 삶의 의지가 사라져 버린 근대의 신은 죽어야 마땅한 것이 된다. 

근대적 주체에 오르고 이성적 사유만을 통해 뼈만 남아버린 인간을 니체는 극복하기를 바랐고 그것을 극복하는 인간을 '위버멘쉬(Übermensch)'라고 했다. 흔히 '초인(超人)'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위버멘쉬는 삶의 원초적인 본능과 의지가 살아서 끊임없이 자기를 창조해나가는 능동적인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독일어 'Übermensch'의 동의어가 'Supermann'이고 영어로는 'Superman'이 된다. 이를 보면 니체가 당시 서구 현실에 대해 느꼈던 위기감의 경중(輕重)과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의지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니체 사상의 의의 

연효숙 교수는 근대는 이성이 너무 과하게 강조된 것이 문제였다고 한다. 특히 헤겔과 쇼펜하우어가 서로 같은 장소와 시간에 강의를 하면서 헤겔의 수업에는 사람들이 넘쳐 났지만 쇼펜하우어의 강의실에는 파리만 날렸다는 설명을 통해 당시 이성주의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니체는 이러한 이성의 과잉포장을 파토스, 감성, 미, 예술, 직관이 승리해서 깨부숴야 함을 역설했다. 연효숙 교수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말도 있듯이 플라톤이 제시한 철학에서의 모범답안과 플라톤주의가 주는 서양철학의 '진리 강박증'은 사람들을 서열화 하고 줄 세워 한 가지 방식과 가치만을 기필하게 만든다. 이러한 척박한 시대에 인간의 숨통을 틔운 것이 바로 니체의 사상"이라고 한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데서 니체의 철학이 출발한다.

니체의 철학 속에는 '분열(균열)된 주체'가 등정한다. 통일된 주체가 허구라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규정하기는 너무 어려운 사안이다. 그러나 근대는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고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 냈다. 도대체 통일된 주체로서의 '나'가 어디 있는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 니체이고 이런 문제는 이미 현대 철학에서 증명하고 있다. 

연효숙 교수는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가 헤겔의 철학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헤겔은 세계의 체계를 거머쥐는 큰 철학을 세웠는데 비유하자면 큰 집을 지어 놓고 헤겔 자신은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조그만 문 앞 수위실에 망만 보는 형국이다. 왜 그는 그 큰 집에 안 들어가고 있나? 왜냐하면 그 집은 실속이 없는 집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니체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며 해석의 다양성을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니체주의자들은 '관점주의(Perspektivismus)'라는 말을 써서 설명한다. 상대주의와 비슷한 말이다. 플라톤적 철학이 제시한 관점과 해석이 전부가 아니라 각자 자기의 눈에 맞게 도출된 의견과 해석은 존중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이 니체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주목받는 철학자가 되는 이유이다.

*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스2> 다음 강의 

3강 : 11월 20일 베르그송: 직관, 즉 내재적이고 심층적 의식의 생성과 변전으로서 권능 - 신비주의자, 권능의 구현자 (류종렬, 창원대 외래교수) 





직관, 내재적ㆍ심층적 의식의 생성과 변전으로서의 권능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3> 베르그송


직관, 내재적ㆍ심층적 의식의 생성과 변전으로서의 권능



도덕과 종교의 사기꾼들

"악마들이 날뛰는 세계"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 높은 권좌에 앉아 '우매'하고 '무지'한 대중들을 굽어 살피며 모두 한결같은 '바른 삶'으로 계도하는 '그들'이 도덕과 종교적 신념이 불확실한 현시대를 안타까워하면서 내뱉는 탄식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악마는 도덕과 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속이고 사기를 치는 '그들'을 말한다. 이름 붙이면 '기세도명(欺世盜名)'하는 자들이다. 

우리 역사에서 왜곡된 가부장적 유교주의 체계를 통해 탄생되었고, 그것을 통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을 만들어냈던 중국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 서인-노론,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들이 만든 국가보안법, 그 바통을 이어받아 현실을 지배하는 미국 제국주의까지, 압제의 역사를 떠올리게 되면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봐야하며 어떤 철학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막연함에 부딪힌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던 서양의 역사가 있다. 1632년 갈릴레오(Galileo)가 하늘의 원리가 지상에도 있다고 말하면서 회부된 종교재판에서 가톨릭교회와 교황은 동일성의 원리 아래에서 변화와 생성의 사유를 해방시키려는 시도를 짓눌렀다. 이들이 바로 도덕과 종교를 연설하면서 전쟁과 공포를 말하고(전 미 대통령 조지 부시) 죽음 이후를 핑계로 다른 사람들의 돈과 영혼을 긁어모으는 '사기꾼'들이다. 

동일성의 철학을 반대한 베르그송 

이 도덕과 종교의 이름으로 민중들을 탄압하던 자들이 주장하던 '동일성'의 원리는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이며 현실세상의 불완전한 존재들은 저 너머 상층 이데아의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을 모방해야한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이 동일성의 원리는 종교에서 절대적인 유일신을 상정하게 만들고 기독교의 종교적 입장을 굳건히 하는데 일조해 왔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세 번째 시간에는 동일성의 원리에 반대했고 변화와 생성의 철학을 주장했던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의 내재적인 심층의 철학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베르그송 철학의 길안내를 해준 류종렬 교수는 "공중에 붕 떠서 발 디딜 곳이 없던 추상적 이상주의 철학을 땅 위에 발붙인 것이 베르그송"이라고 하면서 베르그송이 이런 철학적 사유를 하게 된 배경에는 프랑스의 역사와 사회적 현상들이 많은 영향을 주었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서구 철학사에서 도덕과 윤리를 사회 또는 국가와 연관된 문제로 삼게 된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이고 이 혁명과 더불어 서구인들의 삶을 바꾼 것에는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가 관련한다. 루소는 1600년 로마 교황청 광장에서 자연의 무한성을 얘기하며 화형 당한 르네상스 시기 자연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의 자연의식을 승계하여 "인간은 피조물이 아닌 그 자체로 자연 속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으며 "인민은 뛰어난 한 개인보다 중요하고 더 힘세다는 자는 없다"고 말했다. 베르그송 또한 루소의 발언과 같은 맥락에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

▲ 베르그송 ⓒ프레시안

베르그송의 네오칸트주의 비판 

베르그송은 첫 저작 DI(『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에서 "인격"을, 그 다음 심리학적 작품 MM(『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을, 생물학적 작품 EC(『창조적 진화』)에서 "생명"을, 그리고 사회학적이고 종교적인 작품 MR(『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인류"(새로운 공동체)를 꼽고 있다 류종렬 교수에 의하면 베르그송은 자신의 첫 저작에서 칸트를 비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네오칸트주의를 비판했다고 한다. 또 칸트가 기본적으로 입자론자에 가깝다고 하면서 칸트주의자들이 세계와 인간, 신의 관념을 요소나 부분의 집합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베르그송은 비판적 견해를 제시했다고 한다. 요소나 부분들의 조합으로 어떤 하나가 된다고 보는 것은 '공간적 사유방식'이고 전체가 다양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관점은 '시간적 사유방식'이다. 

"내가 어제와 다르다는 것은 내가 어제의 나를 이루는 요소의 수와 오늘의 나를 이루는 요소의 수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고, 어제의 변화를 포함한 오늘의 변화가 다르다는 것이다" 전자는 '산술적'이며 '기하학적'인 것이고 후자는 '심리적'이며 '생물학적'인 것으로 양자 간에 차이가 존재한다. 차이는 매우 커서 이 둘은 전혀 다르다고 봐야한다.

변화는 운동을 수반하는데 주지주의-플라톤에서 칸트-헤겔에 이르기까지 운동의 의미는 정지 상태 'A'지점에서 정지 상태 'B'지점으로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베르그송은 기하학적인 점과 점을 연결한 직선이 운동을 표현했다고 보지 않는다. 연속선상에서 원과 곡선운동을 수반하는 계속적인 움직임을 운동이라고 본다. 

베르그송의 '기억'이라는 개념도 칸트주의자 혹은 네오칸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네오칸트주의자들은 기억에 대해 설명할 때 예를 들어 인간의 나이를 '10~20세의 기억'/ '21~30세의 기억' 이런 식으로 구분하여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을 전체 기억이라고 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이 말하는 기억은 이것저것의 다양한 방면에서 분열적으로 발생하는 기억들을 섞어놓은 것이다. 

이렇듯 부분의 결합('1'-'2'-'3'-'4'-'5'...)과 요소의 결합('점'-'점'-'점'-'점'⇒'선')이라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놓은 것이 기하학이며 리만(Riemann)이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정지 상태 'A'지점에서 정지 상태 'B'지점을 연결하는 직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제출하기 전까지 통설로 인정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1632년 갈릴레오의 종교재판 이후 시작된 종교의 기만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베르그송은 주지주의가 가지고 있던 2,500년의 신념을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부수기 시작한다.

이 세계는 '아자르(hasard)' : 동일성의 체계 거부 

동일성의 철학은 '체계의 철학'이다. 이 철학은 칸트와 헤겔에 들어와서 그 체계가 잡히는데 부분이나 요소로 하는 철학은 체계라고 할 수 있지만 베르그송에 있어 실제세계는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체계가 없는 것이 맞다 했다. 

베르그송은 세상이 체계를 가진 채로 어떤 법칙이나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지 않았다. 베르그송은 "내일 이 세상과 우리가 어떻게 변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주사위를 의미하는 아랍어 'al zahr'에서 파생된 프랑스어 '아자르(hasard[azaːʀ])'는 '우연' 또는 '운명'이란 뜻으로 확률성을 함축하고 있다.(독일어 'hasard[ha|zart]' 도박;모험) '나'라는 존재의 안에는 수많은 '내'가 있어 어떤 '내'가 발현되고 밖으로 드러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고 그 가능성은 다양하다. 다시 말해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정해진 채로 박혀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 간에 연속되고 서로 상호 침투되며 흐르고 운동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실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완전하고 부동하며 절대적인 개념이지만 심층은 불완전하고 움직이며 어떤 경우에는 모자란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류종렬 교수는 "누구나 자기 얼굴에는 수많은 자기인생의 내용적 변화들이 담겨져 있다"고 하면서 이 내용적 변화들을 하나로 뭉쳐서 얘기한다면 '흐름', '유동성'이라고 한다. 

베르그송은 이 세상이 이질적인 것들의 종합이라고 했다. 류종렬 교수는 "인간은 20조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 인간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생물의 세포에는 '미토콘드리아'가 들어있어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런데 미토콘드리아는 식물세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이질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방식은 다른 이질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수행되며 동일적인 체계로 계속 동일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이것을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식물-되기', '동물-되기'라는 '되기'의 개념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두고 들뢰즈는 국가가 제약하는 사회적 인간보다 훨씬 자유롭고 더 인간다운 것이라고 한다. 들뢰즈는 우리 안에 이미 많은 가능성이 존재하고 이것이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다양한 양태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대상도 필연성과 관련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연성과 관련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도덕과 인륜 : 인격성의 문제 

베르그송은 서양의 철학사를 '상층(上層)', '평면(平面)', '심층(深層)'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Plato)에서 1500년 까지 기독교주의가 지배했던 중세를 기점으로 상층의 철학이라고 한다. 이후 르네상스에 이르는 시기를 거치고 1632년 갈릴레오가 관성의 법칙을 끄집어낸 것을 데카르트(Descartes)가 철학적으로 정리하면서 평면의 철학으로 내려온다. 1809년에 오면 라마르크(Lamarck, 1744~1829)가 『동물철학』에서 동물 종의 변화에 대한 내용으로 책을 출간한다. 그 후 1830년까지 프랑스에서는 생물학 분야에서 학문적 전개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된다. 심층에서 자연내재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변화하고 움직이고 생동하는 자연의 진짜 모습과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을 진행한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1800년대 전후로 철학이 다시 상층으로 올라간다. 칸트(Kant)는 사회와 국가라는 인격성을 인륜 속으로 포함시켜 상층으로 올려버린다. 그리고 1831년 헤겔(Hegel) 이후 계속 독일철학은 상층의 철학 노선을 가게 되었다. 헤겔철학은 국가라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이것을 상층에 둔다. 류종렬 교수는 이 점에서 독일철학이 제국주의 철학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학문적으로 그리스 주제를 삼등분 할 때 '로고스(logos)',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분야로 나눌 수 있는데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시작하여 19세기 낭만주의는 에토스의 넓이를 확장하고, 파토스가 상호 침투하는 것이 주제로 부상한다. 한편, 개인의 품행과 행실이라는 면에서 개인의 '인격성(personnalité[프랑스어])'을 다루게 되는데 다른 한편으로 사회 공동체도 인격이 있다고 제기한 것이 인륜성(die sittlichkeit[독일어])이다. 헤겔이 사회 공동체도 인격이 있다고 하면서 국가의 인격성을 말한 것이 이 맥락이다.

프랑스 혁명은 개인의 자유를 기반으로 일반의지와 닮은 사회[공동체, cité]의 인격을 다루기도 하지만, 사회 인격은 개인 인격처럼 주체로서 이루어지기보다 집합으로서 인격화(personnifier)이다. 헤겔은 변증법적 통일에 의해 사회성의 최고단계로서 국가는 인륜성을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고, 그 인륜성 속에서 개인의 자유가 실현될 것으로 보았지만 베르그송은 이 변증법적 통일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합의와 연대가 개인의 자율성 없이 이루어질 경우에 그 통일은 강압과 폭력일 수 있으며, 이를 은폐하려는 수단으로 외부에 전쟁을 거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류종렬 교수는 참고로 당시 헤겔을 반대했던 네 명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거론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중요한 시기에 독일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독일철학이 상층으로 올라가던 시기에 그 철학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는 덴마크 사람으로 국가보다 개인의 결단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자아의 실체성과 실존성에 대해 강조했고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1845년에 이미 독일을 떠나 자본론을 쓸 때는 영국에 있으면서 영국의 모습을 통해 본 자본제의 현실을 파악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철학의 국가 윤리적 동일성이 이항대립에서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게 되면 이것이 사회의 폭력성을 양산한다고 생각하여 반대하였다. 또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도 일찌감치 독일을 떠나 스위스에 있었는데 『비극의 탄생』에서 독일 철학이 상층으로 올라가는 걸 보면서 그렇게 흠모해 마지않았던 바그너(Wagner)와 결별한다. 

그런데 그의 '힘에의 의지'와 '짜라투스트라', '영원회귀'와 같은 개념들은 프랑스화 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는 자연이라는 거대 속에서 되돌아와 새로운 사물이 되는 것으로 프랑스적 관점이다. 그래서 힘에의 의지는 '권력에의 의지'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프랑스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권능에의 의지'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니체와 베르그송의 공통점은 상층의 실체성이 아닌 평면의 현존성을 중요시 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무의식이 의식보다 더 중요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우리들의 삶의 현실들이 밖으로 드러난 것 보다 내재성이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의식은 빙산의 일각처럼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헤겔의 동일성에 대해 반대하는 경우와 유사한 주장이다. 이 당시 프로이트는 비엔나에 있었다. 

베르그송의 철학과 도덕론 

베르그송은 독일의 체계철학과 상층의 철학을 비판했다. 상층에서의 명령과 계율의 철학은 전쟁의 철학이고 저 밑 심층에서 솟아나는 철학은 연대의 철학이고 공생의 철학이다. 류종렬 교수는 "다시 말하면 전자는 이른바 가부장적인 철학으로 절대의 철학이며, 후자는 생산의 철학으로 여성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베르그송은 도덕과 종교에는 두 원천이 있다고 했다. 주지주의 철학과 내재성의 철학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9세기 후반부터 자연수 밑의 음수도 수(數)라고 볼 수 있는지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네오칸트주의자들은 이것들을 동일성의 논리로 통합시킨다. 이를테면 무리수 'π'와 '√2'는 사실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같다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주지주의의 동일성의 논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류종렬 교수는 베르그송이 주장하는 내재성의 철학이 주지주의자들의 철학보다 더욱 실재성이 있다고 본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단한 공과 같은 것이라 여겨지던 '원자(atom , 原子)'를 쪼개면 쪼갤수록 원자핵과 전자에서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나눠지고 더 작은 미립자와 소립자로 나누어진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물질의 내부로 갈수록 그 양태는 훨씬 더 다양해지고 그것이 실재와 더 가깝다는 것이다. 동일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 실재성의 한 부분 껍데기만을 강조하며 심지어 통일성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전체로 통일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도덕성과 종교에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주지주의-상층의 철학에서 동일성을 생각하는 자들은 완전을 모방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이 세상의 여러 현상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마치 기독교에서 완전한 신과 반대되는 불완전한 인간에게 원죄를 멍에를 씌우듯이 완전한 것을 가지지 못했기에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하지 못한 '빚'을 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결핍되어 모자라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 존재들은 빚을 상부에 갚아야 한다는 것이 주지주의적인 판단이며 동일률의 원칙이 된다.

이것은 인격에게 사회가 강제하는 강요이며 칸트의 정언명법을 따르게 만든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이러한 사회는 생명의 본질을 배제하는 사회라고 하면서 이 습관이 배어버려 폐쇄된 사회(문명화 된 사회)에 저항하는 인간이 있다고 한다. 이 인간은 자기 홀로 저항을 위한 저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닫힌 사회의 '저항'에 새롭게 '저항'하는 인간이다. 이런 인간을 사회에서는 비정상이고 '별종'이라고 한다. 이것은 습관적인 사회가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자부하는 데서 나오는 현상이다. 베르그송은 이 저항하는 인간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이 '도덕적 영웅'은 사회의 일반성의 밑바탕에 있는 영혼의 심층에서 끌어낸 인격이다. 류종렬 교수는 이런 사람들의 내재적 본성에 대한 호소는 아마도 루소의 연민(la pitié), 예수의 사랑, 베르그송의 헌신(devoument)일 것이라고 한다. 이 공감은 정언명법처럼 순차적인 이어짐이 아니라 상호 침투하는 공감이며, 직관처럼 단번에 서로에게 관통하는 것이다. 이 관통하는 힘은 감동과 정서에서 생성하는 내재적 추진력이다. 인식을 주관하는 이성이 아닌 '의지'의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실천은 이 감동에 실려서 '확장'된다. 이 '확장'의 개념은 선적이고 단적인 개념으로서의 '진보' 개념과는 다르다. '확장'이란 여러 관계를 만나고 자신을 확장시켜 더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과 모두를 '진화'시켜 나가는 측면에서의 개념이다. 

동일률을 넘어 내재성의 확장으로 

류종렬 교수는 현대 우리의 주변에는 아직도 동일률에 의거하여 우리 위의 아버지-아버지의 저 먼 아버지에게 부채(負債)를 지고 있다는 생각에 아직도 자신이 현존하는 근거를 상층에 갚기 위한 수행의 일환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동일성의 논리를 통해 인간을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집어넣는 사회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류종렬 교수는 강의록 말미에 『부채인간(인간 억압조건에 관한 철학 에세이』(마우리치오 라자라토 저, 허경_양진성 역, 메디치미디어, 2012)의 내용을 들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일론자들이 씌어놓은 부채(원죄, 죄의식, 모자란 존재, 결핍존재, 유한존재)라는 것은 권력자의 피지배자에게 쳐놓은 덫과 같은 것이다. 동물원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소외로 죽고, 들어가면 피를 빨려 죽는 그 동물원에 인간을 몰아넣는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아직도 신자유주의에서 윗목이 따뜻하면 아랫목도 따뜻할 것이라고 믿는가? 야만의 제국, 자본의 제국, 권력의 제국, 권력의 제국, 전쟁과 공포의 제국에서 윗목(이익)은 항상 피라미드 체계의 윗부분에만 있지 그 외에는 없다. 이 위계의 체계에 저항하고 봉기하는 혁명의 길이 진정으로 인간성을 찾는 것이다. 이 위계의 밖에서 고립된 '덕후(별종)'들의 공연성(公然性)을 공명하는 다양체가 새로운 '인민의지'이다. 이 인민의 의지로서 봉기와 혁명이야 말로 부채인간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동일률에 반대하는 인민 다양체의 자기 확장(생성)의 논리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한 방법일 것이다" - 류종렬 강의록 중 『부채인간』(45VLF)

▲ 류종렬 교수 ⓒ프레시안

내재성의 확장이야 말로 새로운 생성이며 힘센 한 사람의 지배적 지성이 아닌 집단적 지성이 존중받는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고 질서에 균열을 만들며 뚫고 나오는 것이 베르그송이 말하는 '도덕적 영웅'이다. 류종렬 교수는 '디시인사이드(DCinside)'의 집단지성이 보여주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하면서 '스키조(schizophrenic)'가 세상을 바꿀 것이며 신만 아는 편집증의 시대와는 고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버지의 후배가 아니고 이 세상의 모든 생명존재의 마지막이다. 이 자각이 있으면 우리는 자연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며 어떤 기준에 의해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기존에 만들어 놓을 것을 바꿔나갈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도덕이 살아있는 사회이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티끌 속에 온 우주가 깃들어 있어 티끌 하나도 반짝이는 금과 같은 존재'처럼 모든 인간이 다 소중함을 체득해야 한다. 우리의 내재성이 확장된 방식으로..." 

*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다음 강의 

5강 : 12월 11일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 언어와 삶 (김성우,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형이상학의 본질을 다시 묻다 – 니힐리즘의 극복 시도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4> 하이데거

형이상학의 본질을 다시 묻다 – 니힐리즘의 극복 시도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을 다시 묻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서구 사회 삶의 양식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소유의 양식'과 '존재의 양식'이 그것이다. 그에게 '존재의 삶의 양식'은 그리스도교의 순교자 인간개념이고 그 미덕은 '존재하기', '주기', '나눔'과 같은 가치들이다. 이와 대비되는 '소유의 삶의 양식'의 전형은 그리스 게르만 이교도의 영웅들이다. 이들의 미덕은 '소유', '정복', '승리'와 같은 '강함'의 가치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프롬이 얘기한 이교도의 영웅의 가치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철학이 지닌 가치가 서로 유사하다고 보았다. 호머(Homer)의 『일리아스(Ilias)』는 그리스와 게르만의 영웅이나 정복자의 도덕을 미화하고 아름답게 서술한 서사시인데 그리스 게르만 영웅들은 죽음이 도사리는 전장에 언제라도 나가 싸우다가 죽을 수 있는 명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한다. 

프롬은 이교도의 삶의 방식이 서구 현대의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과 같다고 했고, 인간은 다시 그리스도교 순교자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반대로 니체는 그리스도교의 순교자 삶은 '노예의 도덕'을 찬양하고 굴종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인간 모델은 플라톤(Plato)적 인간, 기독교적 인간이다. 니체가 말하던,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을 고양시키는 인간'은 이른바 귀족적인 인간이고 자긍심과 품위를 지니는 인간이다. 니체에게 '선(善)'은 인간에게 '힘에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이다. 

서영화 교수는 오늘날에 '힘'이나 '강함'과 같은 개념이 우리 삶에 큰 가치를 줄 수는 있지만 반대로 '존재', '주기'와 같은 개념은 주체적인 삶으로 기능하기에 어느 정도 부족하다고 인식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물론 이 가치를 판별하는 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각 개인의 몫이기는 하다. 
▲ 서영화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프레시안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 1 

하이데거는 프롬과 니체가 지향하는 가치의 다른 점을 지적하면서 결국 자신은 니체가 말하던 정복하고 승리하는 힘과 귀족적인 삶의 가치와는 반대의 입장에서 니체를 바라본다. 프롬의 입장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이를 통해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은 니체와 하이데거 둘 사이의 대결로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전기에는 니체의 입장을 보완하는 측면에서 니체를 해석하지만 후기로 가면서 자신의 사상과는 대척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서 니체의 철학을 해석한다. 특히 하이데거 이전에는 니체의 철학이 전통 형이상학을 극복하려 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하이데거는 니체 철학이 오히려 전통 형이상학을 완성하고 있으며 플라톤주의의 핵심개념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니체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 이전의 해석을 전복하는 사유이다. 

니체는 기본적으로 플라톤주의 진리체계를 비판한다. 플라톤주의의 진리는 수학적 진리와 관계하고 수학적 진리에는 시간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는 무시간적으로 참된 것이다. 삶에 있어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확고한 것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편집증적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생의 보존을 위한 지지대나 의지처로 보았고 나약한 자들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서영화 교수는 "만일 성경에서 말하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는 구절은 니체에게는 맞지 않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니체는 플라톤의 이데아적 세계관이나 서구 기독교의 세계관은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힘에의 의지를 발산한다고 보았다. 플라톤주의와 서구 기독교는 죽음 이후 저편의 이데아계와 천국을 말하면서 지금 보이지 않는 평화롭고 안락한 세계를 통해 사기를 치는 것과 같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니힐리즘과 새로운 가치의 창출 

니체는 서구 기독교의 가치를 전부 무의미한 것으로 바꾼 사람이다. 니체는 자신의 '우주론적 가치들의 붕괴'라는 제목이 달린 단편 2번(ⅩⅤ145쪽 이하)에서 니힐리즘에 대해 "그것은 '최고의 가치들(die obersten Werte)'이 무가치하게 된다는 것이다(sich entwerten)."라고 메모를 남겼다.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은 새로운 것의 개시를 의미한다. 인간의 모든 가치가 허무해지고 살아야할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무기력의 대명사가 아니다. 니체 이전 플라톤적인 세계 속의 진리는 인간이 개입할 수 없었지만 니체는 이 '진리'를 '가치'의 개념으로 바꾸었고 인간 스스로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니체에게 있어 니힐리즘의 도래는 어떠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에 의해서 비로소 도래되어야 할 것이고 최고의 가치들은 결코 저절로 붕괴되지 않으며, 인간에 의해 투입된 가치들을 박탈하는 것은 새로운 인간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근거로 삼아 존재자 전체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니힐리즘의 극복을 주장했다. 무엇보다 가치가 박탈된 후, 세계가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될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결정적인 의지는 인간에게서 발원하는 것이다. 니힐리즘의 극복으로서 새로운 가치정립의 행위 주체는 인간이 된다. 

서영화 교수는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조차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창조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고 평한다. 기존의 것을 통해 새로운 기호의 대상만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기업이나 산업시스템의 혁신이라는 것은 '기호의 창출'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가치의 창출'은 될 수 없다. 
▲ 서영화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프레시안

주체성의 형이상학의 완성 : 니체 

전통 형이상학의 주지주의적 관점은 사물의 본질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니체는 모든 사물에게 공통적으로 내재하는 원리는 의지의 작용이거나 혹은 맹목적인 충동의 산물로 보는 입장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연장선에서 니체 사유의 고유성을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는 무시간적인 이데아의 세계와 일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진리였지만 니체는 생성하는 세계와 일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생의 최상의 가치로 보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니체를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완전히 무너뜨린 사람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니체가 단지 플라톤주의를 전도하여 위아래를 바꾸어놨을 뿐, 플라톤주의의 핵심개념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바라본 니체의 한계점이다. 서영화 교수는 "기존의 것을 뒤집는 파격은 감행할 수 있지만 그 파격은 기존의 것에 한정되는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이데거 이전에는 니체를 형이상학자로 보지 않고 니체의 잠언들을 문학적 이해의 유산으로 보았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기존에 문학가로 알려져 왔던 니체를 서구 근대 형이상학의 완성자로 위치시킨다. 하이데거에게 서구 근대의 특징은 인간이 존재자의 척도와 중심이 되는 시대이고 그것의 완성은 니체에게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니체를 플라톤적 형이상학과는 구별되는 '주체성의 형이상학자'로 보았다. 이후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은 니체 철학을 구분하는 큰 분기점이 된다.

니체의 초인에 대한 교설 

니체에게 인간은 새롭게 가치를 정립하는 자이어야 한다. 니체가 말한 '초인(Übermensch)'은 세계 속에서 새로운 가치 정립의 주체로서 있으며,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고 명령하는 자라는 점에서 이제까지의 어떤 인간 종보다도 근본적인 힘을 획득한 자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이 초인에 대한 교설은 존재자 전체의 척도와 중심이라는 근대 형이상학적 인간상을 본질로 규정한다. 

하이데거는 『니체와 니힐리즘』에서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시대는 인간이 존재자의 척도와 중심이 되는 것을 통해 규정된다."고 하였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의 사유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았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런 근대적 사유가 칸트에서 라이프니츠로 이어지고 니체에게서 완성된다. 

칸트는 표상되는 세계 이외의 것은 알 수 없어서, 물(物)자체는 알 수 없다고 했다. 표상된 세계가 곧 그냥 존재하는 세계이고 이 외부에 참된 세계를 설정할 수 없으며 설정해도 곧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 형이상학자들은 우리에게 표상되고 현상된 것을 참으로 인정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칸트의 '공적'이다. 서구 근대인들은 인간의 표상체계에 대한 나름의 확신이 빨랐고 세계를 구상하는데 있어 백지 위에 새로운 문명을 이룩한다는 신념을 이어나간다. 서영화 교수는 "고대와 중세의 인간이 만약 퍼즐판 위에 맞는 퍼즐조각을 끼워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면 서구 근대인들에게는 퍼즐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계획 하는 대로 건물과 도시를 건축하고 산업사회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초인의 교설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최고의 승리를 구가한다"고 평했다. 그리고 니체에게서 발견되는 초인의 개념은 에른스트 윙어(Ernst Jünger, 1895~1998)에게서 형이상학적인 의미로서 노동자와 군인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오늘날 존재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인 것 전체를 규정하는 형상을 노동자와 군인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이로써 인간 스스로가 만드는 자가 되었고 스스로 이데아와 신의 영역에 자리하게 되었다. 

영원회귀와 소멸에의 복수의지 

오늘날 니체는 누구보다 생성의 철학자이자 생에 대한 긍정의 철학자로서 간주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는 니체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결과물로서 '동일한 것'은 모든 존재자의 공통적인 본질인 '힘에의 의지'라는 존재의 표현이라고 한다. 동일한 것이 '영원하게 회귀한다는 것'은 존재의 존재방식을 가리킨다. 

니체는 생성과 소멸하는 것에 대해 감당 못하는 나약한 인간들이 여기에 복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초시간적인 이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정립하여 시간적인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경멸했고 또 『파이돈(Phaidon)』에 보면 소크라테스(Socrates)가 자신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제자들에게 설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니체는 이것을 매우 비겁한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소멸에 대한 복수 정신과 생에 대한 경멸의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복수정신을 통해서 내세는 보장되겠지만 우리가 숨 쉬고 사는 이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니체에게서 시간에 대한 긍정은 '사라짐이 공허한 것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의욕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생성이 있으면 소멸이 있다. 하이데거는 니체가 생성은 긍정하지만 함께 결합될 수밖에 없는 소멸은 긍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 마치 소멸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영원하게 되돌아오는 것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런 니체 해석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Dasein)'라는 삶의 방식을 분석하면서 '죽음'에 대한 해석에 기인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기본조건은 죽음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앞에 두면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회상하게 된다고 한다. 회상은 과거 자기로의 복귀이다. 이는 통속적 인간으로서 본래적이지 않은 삶을 사는 '세인(世人;Das Mann)'의 삶에서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리는 시점이기도 하다. 아직 경험하지 않은 미래인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하면서 '일상의 공공의 세계'가 새로운 세계로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경험되는 죽음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고 아무도 경험해줄 수 없는 것으로 철저히 단독화 되어 자신의 삶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에게 죽음과 같은 의미인 소멸은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니체의 전통 형이상학의 전복은 생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전통 형이상학의 무시간적인 것, 이데아에 대한 것, 신에 대한 긍정이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니체의 생에 대한 긍정은 소멸을 영원히 회귀하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하이데거에게 소멸은 영원히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이라 상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니체가 인간중심적인 철학을 전개했고 전통 형이상학을 비판했음에도 하이데거에게는 여전히 형이상학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니체에게서 소멸에 대한 적의가 고도의 정신화된 복수 정신으로 변형된 것일 뿐, 니체 자체도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하이데게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 2 : 죽음, 나약함, 늙음의 의미 

"니힐리즘은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근본입장, 즉 무(無)를 그의 본질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이상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 입장을 향해서 치닫는 형이상학의 역사일 것이다." - 하이데거, 『니체와 니힐리즘』 中 - 

하이데거는 니체가 사유의 무능력을 보여준다고 했다. 무와 소멸의 의미를 정신화된 영원한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참된 본질에 대해 사유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서 주요점은 니체의 생의 의지라는 것에서 늙음이나 나약함, 죽음과 같은 가치는 아예 빠져있다고 본 것이다. 하이데거는 죽음과 나약함, 늙음과 같은 가치조차 배제되지 않은 생성을 말한다. 들뢰즈(Deleuze)도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천개의 고원』에서 동일자의 영원회귀가 니체가 형이상학적인 원리로 받아들인다고 비판한다.

서영화 교수는 그 사회가 생의 약동만을 최고의 가치로 표상할 때, 그리고 생과 젊음과 같은 긍정적 힘이 최고의 가치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죽음, 늙음과 나약함은 존재의 저편으로 내몰릴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니체 개인의 삶에서 죽음은 생에 부재하는 것이면서도 끊임없이 생을 전체화시켜 더 좋은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늙음과 나약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타자와 다른 여타의 존재자와 관계하면서 서로 빚을 지고 있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우게 한다.

니체 철학의 대척점에서 하이데거는 죽음, 나약함, 늙음 등의 가치는 생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을 지탱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즉 잘 사는 법에 대한 성찰을 선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자기에 대한 이해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공동체 내에서의 삶에 대한 이해는 달라질 수 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이교도의 영웅인가 아니면 존재하기, 주기, 서로 나눔의 세계관인가?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아 깊이 생각해봐야할 이러한 질문을 끝으로 이번 강의는 마쳤지만 이 마지막 문제제기는 아마 우리가 우리의 삶 전반을 통해 체득해야할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 우리 눈으로 보는 서양현대철학사2 다음 강의는 6강 [12월 18일 화이트헤드: 존재의 계보 - 화이트헤드의 발생학적 생성 (최종덕, 상지대 교수)] 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 언어와 삶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5>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 언어와 삶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 언어와 삶

현대철학은 크게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를 위시한 '실천 지향의 철학'과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를 위시한 '해체의 철학'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둘은 기본적으로 기성의 사회제도나 기존 고정관념을 해체하여 새로운 사회제도와 인간의 출현을 도모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둘은 밀접하다.

신플라톤주의를 모토로 주체와 진리의 철학을 주장하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는 니체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1889~1951),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등을 '반철학자(antiphilosophe)'라고 규정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체계의 철학은 진리관에 기초하여 이상적 사회나 국가를 이룩하는 견고함을 보여주는데 니체 계열의 학자들은 이 견고함을 부수고 해체하려 한다. 그래서 바디우는 이들을 기존의 철학 개념에 반(反)하는 철학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언어와 분석의 철학자로 알려진 비트겐슈타인이 '반철학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은 '침묵'을 통해 철학을 이론적 사유에서 실천적 사유로 전환시켰다. 이런 모습은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의 철학에서 받은 영향이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본격적으로 불교와 인도철학을 수용한 인물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침묵'이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행위'가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현대철학에서 해체주의는 실체를 비실체화 시키는 것을 중요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철학을 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불교적 사유방식을 흡수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그리고 그 계열인 비트겐슈타인은 불교의 방식을 서양의 철학에 구현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인도와 불교의 사유체계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다섯 번째 시간, 김성우 교수는 20세기 서구인들이 어떻게 불교나 인도철학을 소화·수용하여 서구문명의 과제를 해결하려 했는지, 그 모습과 의미를 살펴보는 과정이 곧 니체 계열의 철학적 정체를 처음부터 통틀어 확인해보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를 선불교적 스타일과 상응하여 연결시켜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아울러 김성우 교수는 니체 계열의 철학을 탐구하기 이전에 근대서양철학의 기본 골격을 규명하는 공부가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했다. 
▲ 비트겐슈타인 ⓒ위키피디아

관념론이 남긴 유산과 헤겔의 지평 

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주체(자아)'와 '객체(세계)' 양자의 구분을 두고 근거로서 '신(神)'을 설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이것은 서양철학의 기본적 3자 구도이다. 17세기에 들어오면서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가 명제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를 통해 근대적인 사유의 출발점을 열었고 이것은 근대적 자아의식의 출발이 된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도 실체일 수 있다는 생각이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철학 제1원리는 '내 생각'이 '내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유아론(唯我論)적 색채를 띤다. 이 유아론적 성격에 대해 로크(John Locke, 1632~1704)나 흄(David Hume, 1711~1776) 같은 경험론자들은 인간(주체)이 외부(객체)로부터 감각을 통해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존재로서 수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이 고립된 실체로서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존재임을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칸트(Kant, 1724~1804)는 수용성을 제외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객체는 주체가 구성한 것이라고 했다. 주체에게 포착되어 주체가 구성한 것은 '현상'이고 주체에게 포착되지 않는 순수한 객체는 '물자체(Ding an sich)'이다. 칸트가 남긴 것은 바로 이 '현상'과 '물자체'의 이원론이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유아론적 사고방식과 경험론자들이 표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으로서 수용성을 강조하는 사고방식에 대해 칸트는 이 두 가지 사고방식을 주체 지향적인 방식으로 재편하여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성(외부 사물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의 형식과 지성(수학처럼 바깥사물에 의지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개념적이고 분별하는 사고)의 형식으로 나눈다. '감성의 형식'은 '직관형식'으로 시간과 공간에 관계하고 '지성의 형식'은 시간과 공간에 걸리지 않는 선험적인 형식으로서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 속에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자연을 초월한 도덕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칸트는 '물자체'의 세계를 '도덕의 세계'라 하였고 '객체 사물의 세계'를 '자연과학적인 세계'라고 하였다. 이 둘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인데 칸트의 의도대로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피히테(Fichte, 1762~1814)는 주체를 '절대자아'로 보아 모든 객체를 자신의 앞에 정립시킨다. 헤겔(Hegel, 1770~1831)은 이것을 주체적인 주체·객체라고 보았다. 반면 셸링(Schelling, 1775~1854)은 자연으로부터 주체와 객체의 통일을 만든다. 헤겔이 보기에는 지극히 객체적인 주체와 객체의 통일이다. 그래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피히테와 셸링이 남겨놓은 주체와 객체의 통일 관계를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정신이 어떻게 발전하여 이 단계에 이르렀는지 밝힌다. 김성우 교수는 이것으로 철학이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지평이 완성되었다고 설명한다. 헤겔은 이 지평 위에 철학 체계를 세운다. 주체와 객체가 통일된 존재론적 원리가 논리학이고, 그 원리가 객체인 자연으로 드러난 것을 탐구하는 것이 자연철학, 주체의 영역에서 정신철학과 법·사회철학이 나온다. 그리고 이 둘의 결합을 '절대정신'이라 하여 절대정신은 '예술', '종교', '철학'으로 발전한다.

칸트의 '선험적 자아'는 아직 실체가 아니었고 피히테의 '절대자아'도 행위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실체로서의 자아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김성우 교수는 헤겔이 자연과 정신의 종합을 과연 이루었는지, 헤겔의 '절대정신'이 피히테의 '절대자아'를 의미하는 것인지의 문제는 아직까지 이견이 분분하다고 하면서 관념론의 지평에서 칸트가 말한 '선험적 자아'이건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이건 모두 '보편적인 이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보편적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자아의 해체와 변혁의 사고

김성우 교수는 현대 철학에서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해체하는 세 방향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첫 번째, 이성 대신 육체와 삶의 철학, 생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들이다. 이것이 니체 계열의 '해체주의 철학자'들이 속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 삶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하며 분배 활동을 하는 경제적인 관점과 연결하여 우리 삶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해 보자는 것이 마르크스이고 '역사유물론자'의 태도이다. 
세 번째, 자아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배후'에서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나의 생각과 나의 여러 모습들을 결정하는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것이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이다. 

오늘날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할 때 앞의 이 세 인물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 맥락이 달라진다. 예컨대 프랑크푸르트(Frankfurt)학파는 마르크스 사상의 지평 위에 프로이트를 받아들여서 독일 나치즘의 권위주의와 대중들이 그 권위에 어떻게 굴복했는지를 분석하려 시도한다.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니체를 통해서 마르크스를 새롭게 해석하고 기존과는 다르게 어떻게 선험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지젝(Slavoj zizek, 1949~)은 프로이트와 라캉, 마르크스와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때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점이 있다. 칸트는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하거나 어떤 존재의 존재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지는 가능성의 지평을 찾아보자고 하는데 그것이 '선험성의 지평'이다. 이 출발점 위에서 독일 관념론은 출발하고 헤겔은 '절대정신'이라는 차원으로 해명한다. 중요한 것은 헤겔처럼 그 물음을 확대해서 플라톤적인 '체계'를 말하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칸트처럼 여전히 이율배반적인 비판(고진이나 지젝이 '시차'라고 말하는 개념)이 중요한가의 문제이다. -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의 경우는 칸트적 사유(니체화된 칸트)를 통해 다시 변혁적 사고의 기초를 놓으려는 반면, 지젝은 비록 부정성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헤겔처럼 주체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

니체 계열의 비판과 해체주의 철학 

오늘날의 서양철학에 있어서 변혁의 두 사고는 이렇다. 중심적인 조직이 필요한가? 아니면 개별적인 분자운동과 분자들의 연합이 더 중요한가? 김성우 교수는 "다시 말하면 사회의 영역에서 집중적인 변혁의 주체를 설정할 것인지, 아니면 분산적인 자유로운 연합을 택할 것인지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니체 계열의 철학이 주장하는 것은 세계의 구성과 체계,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한 노력들이 경화(硬化)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사회 내부에서 폭력이란 방식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표지판과 같다. 해체주의 철학자들은 경화된 사회와 생각들을 어떻게 탈 실체화 할 것인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니체 계열의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① 근거가 꼭 필요한가? ② 주체는 왜 그리도 오만한가? ③ 자연과학만이 진리인가?

이것은 주체의 문제이다. 주체가 객체를 보편적인 이성에 의해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수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바로 탈 중심적인 사고와 논리를 지향함으로써 보편적인 형식의 이성이나 주체-객체의 논의를 버리고 '구체적인 삶'과 '생명력'에 주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보편적 정신에 가려진 '개체성(원자화된 자연과학적 단독자가 아님)'에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인간의 삶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푸코(Foucault, 1926~1984)가 말하는 '인간의 죽음'이나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가 말하는 '반휴머니즘'은 모두 이 주체가 현대 사회에서 보여주는 '반역성'을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중심주의 비판을 통해 '누구와 바꿀 수 없는 유일자로서의 나'의 삶에 대한 철학이 바로 '실존'하는 개체로서의 '나'를 규명하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으로 들뢰즈나 가타리((Félix Gattari, 1930~1992), 가라타니 고진,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등이 이러한 해체론적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디우나 지젝은 아마 이 반대의 지점에 서 있는 철학자들일 것이다. 

20세기 '선사(禪師)'의 측면으로 보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니체 계열의 쳘학자들에게 보이는 해체론적 입장에서 근거를 제거하고 실체 없는 사유를 한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개념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존주의로서 '삶의 철학'을 지향하는 중심에 서 있는 개체인 '나'는 부처가 말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인 존재이다. 이런 생각을 자신의 철학에 수용하여 언어와 수학적 한계를 명시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기존 서양의 언어를 해체하여 서양이 지닌 환상을 깨뜨리려는 20세기의 '선사(禪師)'로서 이해할 수 있다.

현대 해체론자를 의미하는 '반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불교적인 색채가 많은데 불가의 '선사(禪師)'들이 '선(禪)'을 중심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은 언어의 '매개성'을 극복하려는 태도이다. 언어는 우리를 진리에 이끄는 손가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혹시키는 손가락이기도 하다. 선종은 직접적인 깨달음을 추구한다. 선종에서는 전통적인 유학과 불교는 물론 부처도 부정한다. 이런 태도는 서양철학에 있어 기존의 전통적 학설관계를 무시하는 면모라고 볼 수 있다. 

'선사'들의 일화에는 극단적인 표현들도 많다. 김성우 교수는 그런 측면에서 비트겐슈타인도 자신의 삶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유태계 철강의 부호였던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재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고 일부를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기부한 점이나, 안정된 대학교수의 길을 거부하고, 당시에 저명했던 지도교수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자신의 저서에 서설을 써준다는 호의를 내용이 오도될 수 있다는 자기 판단 하에 거절한 점, 그리고 스스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논리철학논고』를 참호 속에서 집필한 점 등. 이 순탄치 않은 그의 인생이 자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그가 죽음에 직면한 삶을 살면서도 '인식하는 삶'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1916년 8월 13일 일기에 "인식하는 삶이야말로 세계의 궁핍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이라고 쓴다. 그러나 "인식하는 삶은 단순히 과학적 언어의 명료화에만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의미에 대한 인식도 추구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또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그는 분석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삶과 분리된 언어의 한계를 언급하면서 "세계와 삶은 하나이며 삶이 세계"이기 때문에 '세계는 삶의 세계'가 된다고 말했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김성우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수학과 과학적 언어의 한계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저서인 『논리철학논고』의 구조는 7개의 문장으로 압축되는데 가장 마지막 7번째 문장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학과 과학적 언어의 한계를 의미한다. 

해체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이나 수학의 연구를 통해 그것들의 한계를 목도한 사람들이다. 일례로 화이트헤드(Whitehead, 1861~1947)는 가장 추상적인 수학적 기초를 탐구하다가 '과정철학'이라는 실존철학과 만나는 사유를 보여주었다.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과학과 수학의 언어가 지니는 한계를 극한까지 가보려 한 사람이고 그 안에서 절대적 진리 명제로서 완결된 인간 존재의 삶이 아닌, 삶의 과정으로서의 삶을 발견한다. -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이나 비트겐슈타인, 화이트헤드 같은 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이나 수학의 연구를 통해 그 언어의 끝을 가 본 사람들이다. - 

형이상학을 뜻하는 'metaphysics'는 'physics'의 meta이다. 즉 'physics'를 이해하지 못하면 'metaphysics'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인데,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연 속의 존재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말로 이해하면 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世界-內-存在)'라고 표현했다. 주체란 삶의 과정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뜻으로 서양적 주체에 대한 해체의 한 방식이다.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에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수학과 과학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고 그의 저서 『논리철학논고』는 이른바 '윤리적 metaphysics'라고 할 수 있지만 칸트처럼 보편의 철학이 아닌 과정으로서 삶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비트겐슈타인은 'physics'의 문제점과 한계들의 극복을 언어의 한계를 명시하는 방식으로 이뤄낸다.

김성우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이 "사상 자체의 한계가 아니라 사상을 표현하는 것의 한계를 고려하려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과학적으로 무의미하지만 우리 삶에 의미가 있는 것들은 과학적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라고 한다. 또 그의 저서 『논리철학논고』가 중요한 이유는 탐구의 대상이 의식이 아니라 언어라는 점을 강조한다. "20세기의 철학은 19세기와는 다르게 의식을 탐구하지 않고 언어를 탐구한다. 언어는 의식보다 더 객관화되고 보편화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버마스(Habermas, 1929~)는 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공동체의 규범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언어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사적인 언어는 없다고 했다. 언어는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도 마지막에 『언어로의 도상에서』라는 책을 썼다. 이와 관련하여 김성우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표현하려면 기존 언어의 한계에 맞닥뜨린다. 그렇지만 새로운 언어를 만들 수는 없다. 기존의 오류를 극복한 새로운 언어는 불가능하다. 기존 언어에 대한 '경고판'들만 있을 뿐이다. 이걸 언어적으로 잘 보여준 사람이 하이데거와 데리다이다. 비트겐슈타인도 초기에는 러셀의 영향을 받아서 새로운 언어를 구상하다가 한계에 부딪히자 철학적 탐구라는 새로운 작업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논증이 아닌 비유의 방법 : 선사의 화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보통 비엔나 학파나 옥스퍼드 언어철학 등의 분석철학적 전통과 연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일면이다. 다른 해석자들은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 데리다, 선불교(禪佛敎), 아방가르드 예술과 연결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철학적 스타일이 대단히 복합적이라 규정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어(Nicholas F. Gier)는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삶의 철학(Lebensphilosophie)'이 '언어철학(Sprachsphilosophie)'보다 우선한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매우 중요한 평가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언행이 매우 독특함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세계는 삶의 세계"나 "언어는 주요한 삶의 형태"처럼 그의 언행은 마치 선사가 화두(話頭)를 던지는 것과 비슷하다. 또 비트겐슈타인의 '인식하는 삶'으로서의 '철학적 스타일'은 '비유'를 통해 드러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세계는 객관적인 과학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삶의 세계'이다. 이 세계를 위에서 비행하며 바라보는 것이 조망이다"라고 했는데 이런 문장에 논증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창안한 것은 비유"라고 했다. 논증하지 않고 비유한다는 것은 선사들의 어법이다. "좋은 비유는 이해를 신선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말은 비트겐슈타인과 선종의 선사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비유를 통한 의미 전달의 방식은 직접 진리를 상대하고 사유하는 힘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비유의 방식들은 모두 불교를 받아들인 쇼펜하우어에게서 유래한다. 기어(Nicholas F. Gier)는 "비트겐슈타인과 불교(또는 선불교)와의 연관성은 쇼펜하우어를 통해서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트겐슈타인이 즐겨 사용하는 인간과 세계와의 연관성을 상징하는 '눈의 비유'나 '사다리의 비유'는 바로 쇼펜하우어로부터 차용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다리의 비유'는 사다리를 통해 높은 곳에 올라갔으면 자기가 딛고 올라간 사다리에 집착하지 말고 사다리를 걷어 차버려야 한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사다리'는 바로 '언어'이다. 언어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의미가 전달되고 소통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언어 자체를 두고 논증을 하거나 분석하는 방식은 일종의 집착과 같은 것이다. 

이런 비유를 통해 그는 이 세계가 객관적인 과학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삶의 세계이고 세계를 '조망(Übersicht)'하는 것이 바로 '인식하는 삶'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유의 길에 "세계도 계속적인 흐름이며 삶도 계속적인 흐름"이라는 이정표를 세우는데 이 말은 니체의 말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스스로를 독창적인 사상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새로운 사유노선들을 창조한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그는 "내가 창안한 것은 비유"라고 한 것이다. 

삶의 변화와 방향전환 : 치유의 철학 

김성우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을 단편이 아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대단히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이 '침묵'의 의미"라고 한다. '침묵'은 바로 삶을 드러내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깨달음이라고 할까. 깨달음이란 지극한 앎이고 삶의 의미를 체득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수학과 과학적 언어의 한계를 경험한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인간의 삶으로 돌아와 삶의 철학을 전개한다. 그 과정에서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드러내는 데에는 수학과 과학적 언어를 통해서는 불가능하고 '침묵'이라는 방식으로 비로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변화와 '방향전환(혹은 깨달음)'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의 윤리는 지극히 종교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바뀜이 바로 종교적 깨달음이자 '구원(기독교적 구원의 의미는 아님)'이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치유, 즉 구원하기를 원한 것이다. '사람이 달라졌다'고 하는 말이 바로 삶이 변화하여 방향전환된 것이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사회계약론』을 집필할 때 귀족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된 것도 이런 의미에서 '방향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런 모습이 현대철학에서 마르크스의 경우 새로운 삶에 대한 사회적인 분석으로 나타나고 니체 계열의 경우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과 각오가 엿보인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혼합되어야만 삶의 변화에서 사회의 변화 혹은 사회적 구원이 실현될 가능성이 보일 것이라고 김성우 교수는 지적한다. 

이어서 김성우 교수는 강신익 선생의 말을 빌려 "진화의학에서 질병은 몸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질병은 정복해야 할 적이 아닌 순간 적응해 나가야 할 조건일 뿐"이라고 하였다. 즉 건강을 이상적 상태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 변화의 과정으로 보며 질병을 삶의 문제로서 적응해야할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이 "올바로 사는 사람은 문제를 비애로, 그러니까 문제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느낀다; 말하자면 그의 삶을 둘러싼 빛나는 에테르로 느끼지, 문제성 있는 배경으로 느끼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일종의 '삶의 변화'와 '방향전환'을 통해 '철학적 치유'를 이뤄내는 것으로, '철학적 치유'란 삶의 문제로부터 기원한 질병을 사유의 길을 통해 감내하며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을 삶의 문제를 배제하고 오로지 언어분석에만 집중한 분석철학의 대표철학자로 알고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삶과 언어는 분리될 수 없고 우리의 주체는 언어와 연결되어 생겨난 산물이기에 내가 나를 인식할 때 언어를 통해서 인식하게 됨을 분명히 하였다. 특히 과학적 언어에 대한 맹신이 현대에서 인식이나 언어를 삶과 분리시켜 보게 만들어 삶을 왜곡하는 '마야(Māyā)'로 기능하며 우리의 의식과 삶을 지배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삶에 대한 잘못된 그림을 버리고 삶의 방향전환을 이룰 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는 전체 언어를 갈아 일구어야 한다(하이데거의 말)"고 주장한다. 
▲ 「논리철학논고」1922년 판. 출처 ⓒ Wikipedia

침묵의 이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마법으로부터 치유되면 온전히 드러난 삶의 뜻을 명료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침묵'을 말한 이유이다. 언어의 문법적 환상으로부터 생겨난 문제의 덩어리들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치유이기 때문에 치유 후에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어진다. 만약 다시 말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환상에 사로잡히고 말게 될 것이다. 

김성우 교수는 이것을 유리에 비유한다. "유리는 아무리 투명해도 유리이다. 사람이 맨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도 이른바 유리와 같은 수정체를 통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투명해도 유리는 유리인 것처럼 삶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는 이상언어(본질적 언어, 순수한 언어)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침묵해야 마땅하며 또 침묵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삶의 뜻은 스스로 드러나는데 이 직접성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이후에 사다리는 필요 없으므로 버려야 하는 '직접성'이다. 높은 지붕 위에서 사다리를 지니고 걸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사다리를 버린 이 직접성은 그래서 신비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 '신비스러운 것'이라 해도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과학이나 수학도 여전히 맑은 유리로 만든 사다리를 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필요한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삶의 의미에 대한 '단순한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이 바로 '삶의 방향전환'이고 '돈오(頓悟)'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이 과학보다 더 중요한 삶과 가치로 나아가는 길을 탐구했다고 강조했다.

비트겐슈타인 사유의 선불교적 스타일 

비트겐슈타인은 서구철학의 지적 주류인 본질주의, 유아(唯我)주의, 논리주의(형식주의 및 그 한 형태로서의 실증주의)를 모두 비판한다. 지젝이 바디우를 공격할 때 불변의 형식을 지향하는 칸트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플라톤주의의 핵심 또한 논리형식주의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세 가지를 문법적 허구에서 오는 질병으로 본다. 기존의 서양철학을 해체한다는 것의 정수가 바로 이런데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상가는 모든 연관들을 묘사하고자 하는 소묘가와 매우 비슷하다"고 언급한다. 김성우 교수는 "언어의 한계를 명료화함으로써 논리, 자아, 신과 같은 본질주의적 신학과 같은 문법적 환상을 없애고 직접적 단순함의 '일별(Einsicht)'로 삶의 세계의 전체 연관을 조망하고자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스타일에서 우리는 선사들의 울림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벤야민이 말한 '짜임관계(constellation;星形)' 또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연기법(緣起法)'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또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며 삶의 세계와 그 뜻이 스스로 드러나는 '직접적 단순성'을 추구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스타일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추구하는 선불교의 선승(주로 화두선을 하는 선승)들의 스타일과 닮아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선승들은 똑같이 '우상'의 파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섬광'과도 같은 '번득이는 통찰'의 '직접성'과 '단순성'은 선승을 그대로 빼닮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삶의 문제는 '번뇌(煩惱)'라고 할 수 있는데 삶의 뜻이 언어화 하는 순간 그 뜻은 실체화 되어 다시 문제(번뇌)에 빠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논리철학논고』에서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김성우 교수는 "여기서 드러난 삶과 그 뜻이 신비스럽다는 것은 이 드러난 진리를 다시 새로운 우상으로 세우지 말라는 경고의 표지판이지 언어의 한계를 초월한 이상적인 영역의 존재가능성을 예고한 것은 아닌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비'라는 것은 메타가 아니라 '심층'이다. 선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일상이 바로 열반인 것이다. 열반은 현실을 넘어 초월한 다른 영역이 아닌 삶의 깊이에서 나온다. 결국 일상과 깨달음은 같다. 그리고 심층이기에 일상을 긍정하는 보수주의자의 태도에 머물지 않고 선승과 비트겐슈타인은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보수주의자의 일상은 환각에 빠진 일상일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이나 선승은 능동적인 자기 긍정에 도달하기 위해 엄격한 자기 부정(사다리 버리기)을 요구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삶의 길이 드러나면 기존의 길로부터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이 변화가 '치유'이다. 이런 이유로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침묵이란 그저 철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또는 삶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변화하도록 요구하는 길의 '안내판(이정표)'이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지극히 선불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침묵은 인식하는 삶의 이정표 - 

안과 밖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로서 인식하는 삶 

비트겐슈타인은 『문화와 가치』에서 "철학자들의 언어는 이미, 말하자면 너무 꽉 끼는 구두에 의해 변형된 언어"라고 말했다. 김성우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는 언어의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파리통으로 그 출구는 언어의 한계에 부딪혀 언어의 마법적 허구가 사라지면 드러난다. 언표 될 수 없는 침묵이 나의 세계를 드러내는 불교적 선수행이며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일대의 소망인 '인식하는 삶'의 이정표"라고 한다. 언어적 질병 속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던 삶은 이 질병의 치유 속에서 제대로 된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침묵의 수행을 통해 데카르트적인 안과 밖으로서의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 사라진다. 안과 밖에 사라지고 삶, 즉 세계가 드러난다. 안과 밖이 사라지면 본체계와 현상계가 사라지고 선험적 주체가 사라진다. 다시 말해 '의식'이라는 '안'과 '감각대상으로서 객관세계'인 '밖'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생겨난 문법적 허구로서의 심리주의 실증주의, 논리주의와 선험주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본질주의적인 신학적 마법이 사라지면 동시에 생생한 삶의 세계의 흐름이 드러난다. 이로써 기존의 철학적 문제들이 사라지고 치유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성우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삶의 문제가 환상일지라도 이를 해결하는 치유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방편적으로나마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그야말로 침묵함으로써 삶의 문제는 철학적 문제가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인식하는 삶'을 겨냥하다가 '살아가는 삶'은 놓쳐버린 것은 아닌가?" 

김성우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이 비록 삶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결국 인식하는 삶에 머물고 만 것은 아닌지에 대해 일종의 비판으로써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김성우 교수에 의하면 선불교가 지혜의 측면과 자비의 측면이 결합으로써 그 스타일의 완전성이 추구된다면 이 자비의 측면, 즉 사회적 실천이 비트겐슈타인에게는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로서의 선불교와 철학으로서의 비트겐슈타인 사유의 차이가 드러난다.

*2013년에도 강의는 계속 됩니다. 



7강 : 2013년 1월 8일 사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존재와 무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8강 : 1월 15일 메를로퐁티: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화가의 시선과 몸 (조광제, (사)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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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계보 - 화이트헤드의 발생학적 생성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6> 화이트헤드
존재의 계보 - 화이트헤드의 발생학적 생성
화이트헤드와 자연철학

서양의 철학사에 있어 전통적인 '플라톤(Plato)의 존재론' 관점은 '기독교 철학'과 함께 보편적인 실체 개념 위에서 보편의 체계를 설립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근대과학'의 정신은 보편성을 찾아가는 활동으로 이러한 정신에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 '사물'과 '자연'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본능적 확신이 있기에 가능했다.

반면 경험론의 철학자 흄(David Hume, 1711~1776)은 원인이나 결과가 본질적으로 내재한다는 인과율을 부정한다. 이것은 흄에게서 관찰되는 주장이다. 흄의 입장을 감안하면 과학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존재론을 상정하는 면이 있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관찰과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는 흄과 같은 경험론적 방법론을 가정해야 한다.

20세기 들어오면서 근대과학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수많은 개념의 변화로 뉴턴(Isaac Newton, 1642~1727)과학이 그 안정성과 확실성을 상실하면서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 1861~1947)는 뉴턴과학(전통, 근대과학)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고민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물질과학의 변화를 인지하고 과학의 개념이 분석의 관점에서 탈피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후에 '유기체 철학'의 맹아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라는 책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로 자연철학의 시대와 형이상학의 시대를 연결하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여섯 번째 시간에는 최종덕 교수의 안내로 이 책에서 화이트헤드가 만든 여러 새로운 개념들의 해석을 통해 화이트헤드가 2,500년의 서구사상의 흐름을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라고 한 말이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고 그가 이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화이트헤드의 전공은 원래 수학이다. 1910년경에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과 만나면서 수학에 관한 책을 같이 쓰기도 하지만 1925년 이후 두 사람은 사상적 차이 때문에 결별한다. 이후 화이트헤드는 수학으로부터 물리학과 생물학의 자연과학으로 전환한다. 이것을 '중기 자연철학시대'라고 한다.(1913~1924, 약 10년간)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1924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데 화이트헤드가 미국으로 간 1925년 이후를 '후기 형이상학시대'라고 한다. 

▲ Process_and_realityⓒ 위키피디아

서구과학의 특징과 플라톤주의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은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이다. 최종덕 교수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존재' 개념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철학을 포함 신학, 예술, 사회과학 분야에까지 서구사상은 플라톤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플라톤을 넘지 않고는 현대까지의 서구사상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유럽에는 산업혁명 이후 환경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로 자처하던 백인들 세계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한 1차 세계대전의 경우 만해도 그렇고, 완전한 존재로 진보하는 중이라고 믿었던 인간 존재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여러 문제가 발생하면서 화이트헤드는 이런 것들의 핵심 원인으로 플라톤 철학의 사유체계를 지목한다. 화이트헤드는 철학적 사유구조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플라톤을 넘으려 하였다. 최종덕 교수는 화이트헤드가 수학을 연구하던 시기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1915~1925년 사이에 이런 생각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화이트헤드는 이 세계가 완전하게 플라톤적인 껍질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뉴턴과학(전통적 근대과학)의 특징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colorless(무색)', 'dry(건조함)', 'cold(냉정함)'의 표현은 서구 근대과학의 특징을 상징한다. 이 서구과학 낳게 한 것이 플라톤의 체계인데, 이것은 당시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이런 흐름을 20세기 2차 세계대전이후에 '모더니즘(modernism)'이라고 불렀다. 모더니즘은 세 가지 서구과학의 존재론적 특징과 이것의 기반이 되는 플라토니즘과의 관계를 말한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야 세상을 진정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고 이런 생각들의 기본적인 틀은 이미 19세기 말에 형성이 된다. 그러나 당시 선봉에서 2,500년의 플라톤적인 것을 뒤집을 사람을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서구과학은 기독교라는 종교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체계는 너무나 굳건해서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stubborn(고집이 센)'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깨부술지 솔직하게 말해보자고 나선 사람들이 니체(Nietzsche, 1844~1900), 마르크스(Marx, 1818~1883), 프로이트(Freud, 1856~1939) 세 사람이다.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존재'라는 개념은 플라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존재만이 진리를 담고 있고 이 현상계는 존재의 그림자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이 존재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로서 감각적인 것들은 존재의 축에 끼지도 못했다. 플라톤 존재의 5가지 속성은 '불변', '유일', '독립', '절대', '무모순'의 다섯 가지이다. 이런 성질을 가진 것들을 플라톤은 존재라 명명했고 이 존재가 어떤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느냐가 2,500년 서양사상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데아', '헤겔(Hegel, 1770~1831)-절대자', '기독교-신',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실체' 등등. 

여기에 저항한 것이 니체 계열인데 화이트헤드는 '변화'ㆍ'운동'하고 '상관적'이며 '상대적'인 틀을 가지는 것을 플라톤의 존재개념에 대체해야하는 새로운 존재개념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을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라고 했다. 

19세기 물리학은 확장적 성격이 강해지면서 통계적인 확률의 측면이 강화되었는데 화이트헤드는 19세기 물리학을 바라보며 플라톤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많음을 인식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의 경우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지구와 달 사이의 역학관계를 설명한 것인데 알고 보면 태양계의 수많은 행성들의 사실적 존재는 무시해버리고 이론적 틀의 상황설정을 '이상화'시킨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빗대어 플라톤의 존재는 '이상화된 존재'라고 했다. 또 열에너지 개념 있어 공기 단위 안의 분자량 6×10²³ 개의 수많은 분자들이 서로 부딪히게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 이것은 이상화 시킬 수도 없다. 방법은 분자들이 벽에 부딪히는 압력을 통해 확률적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열에너지 개념과 같은 것들은 플라톤적 존재론과 그 영향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뉴턴과학 전통의 영향 아래의 서구인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고 화이트헤드는 이 새로운 존재론을 설명하기 위해 '현실적 존재론'을 주장한다. 

현실적 존재의 운동성이라는 것은 주체가 대상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용어 '파악(prehension)'으로 표현한다. 주체가 대상을 볼 때 대상이 운동 중이라면 나의 간섭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과정(process)'이라는 개념 속에 '운동', '상관', '상대', '통계', '확률', '분할'의 개념을 설명하려 했다. 그래서 '현실적 존재'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실적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 量子力學 )'을 도입한다. 

- 원자상태 이하의 세계가 '양자역학'이다. 누가 볼 때마다 결과 값이 달라진다는 것은 파동함수로 증명해 낸다. - 

'대상(object)'은 뉴턴의 입장에서는 상호간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은 '색깔(colorless)이 없고', 자연 대상은 감정이 없어 'dry'하다. 이상적 상황을 설정하고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이 객관적 관찰이다. 객관적인 것은 누가 관찰해도 결과 값이 같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객관적인 것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설명할 때는 '양자역학'을 얘기한다.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것은 관찰자가 사물을 관찰할 때 관찰자가 사물에 간섭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성을 가지고 운동하지 않는 고정된 존재는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 화이트헤드ⓒ 위키피디아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 

화이트헤드는 근대고전과학과 뉴턴과학을 비판하기 위해 오류상황을 설정했다. 최종덕 교수는 그것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얘기를 풀어낸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느 마을에서 해마다 너무 울창하여 두렵기까지 한 검푸른 숲에 처녀를 바치는 풍습이 있다고 치자. 그 숲 속에는 아무도 들어가 본적이 없다. 그러나 고전적 진리의 전통은 확실한 것을 찾으려면 현실세계에서의 감각적인 공포를 피해야 가능하다. 겁이나 누구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숲 속에 한 남자가 용감히 들어갔다. 이 자는 누구인가? 이성을 상징한다. 공포를 회피하지 않는 이성주의. 이로부터 우리의 과학은 발달했다. 그래서 서구를 발전시켜 온 모더니즘, 그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두 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철학자들은 모더니즘으로는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의견에 모두 합의했다. 서구의 언어는 모더니티로 무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대상을 설명하려면 어찌 할 줄을 모른다. 갈 길을 잃은 것이다." 

최종덕 교수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숲은 외경심을 가지게 하는 숭앙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다. 숭앙과 공포는 꼭 같이 간다. 그래서 과거 권력자들은 숲을 정확히 묘사하는 사람들을 다 잡아서 죽이는 짓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헛갈리는 거다. 사실 우리는 그 숲을 보면서 아름다움과 같은 감성을 느끼거나 과학적 관찰대상으로 여길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보면 인간에게는 아마 두 가지 언어가 있을 것이다. 시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가 그것이다." 

최종덕 교수의 말을 정리해 보면 뉴턴의 근대과학 이후의 현대인은 그 숲의 모양을 상상만 하지 숲으로 막상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사랑을 할 때는 시적 언어를 써야하고 과학적 대상을 파악할 때는 과학적 언어를 써야하는데 이것을 헛갈려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연애에 있어 스펙을 분류하는 정량화된 과학적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 연애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이것도 이를테면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과학적 언어, 시적 언어는 호불호 대상이 아니다. 이것을 '혼동'하는 것이 문제이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철학은 '내면적 성찰' +'비판적 실천'인데 어느 하나만 기필하는 것이 문제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예를 들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면 구체적인 현상들을 대입시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의 구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성으로 들어가게 되면 유기체적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60조개 세포 하나하나는 서로 무관하지 않고 상관적이다. 그 세포 하나하나는 전체와 '섭동(攝動, 의미를 교환)'하고 있다. 기존의 무기체 철학에서는 모든 개체들이 서로 독립적이어서 서로 교통할 수 있는 존재론적(형이상학적) 근거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개체와 개체, 세포와 세포들이 현실적 존재로서 서로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 큰 상위 존재와 상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철학이며 이것이 '유기체 철학'의 큰 배경이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 

플라톤에게 있어 창조는 신의 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고백록』에서 "신이 세계를 창조한 이전의 시간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고 한다. 이것을 묻게 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결국 플라톤의 존재론과 기독교 철학의 전통의 바운더리는 신이 창조한 세계 안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금기시한 질문을 정면에서 되묻고 있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고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기 이전에는 '일자(一者, oneness)'만 존재한다. 일자인 신이 세계를 창조하면서 '다자(多者)'가 형성된다> 이것이 전통적인 플라톤-기독교 철학의 흐름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정반대로 여러 구체적인 존재인 'a'-'b'-'c'-'d'-'e'가 만나서 'f'가 되고 또 'a'-'b'-'c'-'f'-'z'-'t'가 만나 'u'가 되는, 다자로부터의 또 다른 다자의 탄생을 얘기한다. 서로 교통하면서, 이른바 'togetherness'를 형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합생(合生)'이다. 예를 들어 펜-종이-연필 이런 것들이 문구라는 명칭으로 설명되듯이 새로운 연구적 대상이 만들어진다. 다자가 모여 일자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에서 유기체철학의 가장 큰 개념은 '합생'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현실적 존재란 개념, 또 창조성 개념 등이 나온다. 이미 있는 것에서 새로운 것 다른 것을 낳는 것을 '과정의 생성성'이라고 한다. 우리는 창조를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있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가는 것이다. 과정의 생성성은 1910년대에는 'becoming'을 썼지만 지금은 'prehension'이란 영어표현으로 그 개념이 정착되었다.

화이트헤드의 실재론과 '영원적 대상' 

실재론의 영역에서, 플라톤의 철학은 실재론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19세기 후반에서 말하는 실재론과 유사하다. 몇몇 현상학자와 실재론자들이 착시의 오류를 일으키는 원인이 이데아계에 있다거나, 예를 들어 '1+2=3'이라는 명제를 가정할 때 이 둘을 더한다는 관계성의 이데아가 있다는 따위의 가설이 그것이다. '더한다는 것'도 구체적이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게 실재적이라는 말은 곧 구체적이라는 의미이다.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재를 구성하는 존재가 '불변', '유일', '독립', '절대', '무모순'이 아니라 운동성과 상관성으로 된 존재라는 것이고 그 실재의 모습을 대표하는 것이 '영원적 대상(객체)'이다. 화이트헤드는 '영원적 대상'을 생명체에 비유한다. 생명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신진대사를 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내부의 자기목적성을 가진다. 자기목적성이 '영원적 대상'을 생명이도록 만드는 기능을 한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할 때는 신의 의지대로 창조했을 것이고 신의 청사진 설계도면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학에서 신의 디자인대로 모든 것이 운동하고 신이 설계한 목적으로 간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플라톤-기독교적 존재론의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의 동력 전부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플라톤적인 세계관과는 무관하게 모든 존재 개체(영원적 대상)는 어떤 절대적 개체에 의해서가 아닌 자기 내부의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가 생각한 신은 현실적 존재의 하나이다. 신도 수많은 '영원적 객체' 중 하나인 것이다. 신도 신 만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인간 개인 '철수'가 내부의 '합목적성'을 가지고 산다면 '신'도 또한 '합목적성'을 가지고 존재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실재적인 생명성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부분-부분은 모두 내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 
② 부분-부분은 전체와 '합생(통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세포 하나하나는 별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내적으로 상관된다. 상관성의 핵심은 자기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고 부속인 존재가 또 새로운 것을 낳을 수 있다.(창조성) 

▲ 최종덕 상지대 교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화이트헤드의 '초월체(superject)'개념과 합목적성 

얼핏 보면 자기 목적성이라는 것이 칸트의 합목적성과 헛갈릴 수 있다. 목적은 '내재적 목적성'과 '외재적 목적성'이 있는데 칸트의 합목적성은 외재적 목적성이다. 그러나 내재적 목적은 '자기 합목적성(self-organiz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생명이 기계와 다른 중요한 점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조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 합목적성과 등치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prehension'하는 '주체(subject)'가 있는데 그것을 자신만의 용어로 'superject(초월체 혹은 자기 초월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화이트헤드가 주장하는, 초월체가 'prehension'하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어떤 사건에 있어서 주체와 행위는 항상 같이 있어야 성립된다고 보는 점이다. 언어의 영역에서 볼 때 주어와 동사가 함께 있어야 성립되는 것과 같아서 주어(주체)만 따로 존재하는 방식은 성립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최종덕 교수는 '나는 빗속을 걷는다'라는 명제가 있다면 비오는 날, 빗속을 걸어가는 것은 내가 주체이지 비가 주체는 아니다. 비가 오든 말든 내가 거기에 없으면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불교의 화엄사상에도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또 나를 의미하는 주어 하나만 가지고 문장이 성립할 수는 없고 사건이 성립할 수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어(주체)와 관련한 동사 행위를 분리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 'a', 'b', 'c'가 있을 때 'a'가 '나는 빵을 먹는다'는 문장이 성립할 때 'b, c는 그만큼 더 배가 고프다'라는 문장 성립이 가능해진다. 'a'의 행위는 또 다른 'b', 'c'의 상태(행위)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그런데 합목적성에 맞는다는 것은 'a', 'b', 'c' 모두 배고프지 않게 그 양이 대충 맞아떨어진다는 말이다. 외재적 목적을 부정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작동하는 방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외재적 목적은 없지만 내재적 목적은 'superject'가 자기 합목적성을 가지는데 큰 차이가 없다. 그 이유는 생물학적 태생이 같은 균일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표현에 의하면 'uniformity'라고 한다. 'oneness'란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uniformity'라는 말은 자연의 '제어성'을 뜻하고 'oneness'란 말은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세계의 통일성을 말한다. 어쨌든 주어진 목적성은 아니지만 자기 제어가 되는 통일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들이 목적성에 자기 갈 길을 가지만 마구잡이로 가지는 않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유기체의 힘 

자생성은 유기체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 힘은 어디서 나올까? 'superject'는 'subject'의 포괄적인 개념이다. 'subject'가 달성되면 또 다른 'subject'가 만들어 진다. 생명이 가진 존재의 순환 논리이다. 존재론에 있어 존재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묻는다면 플라톤은 이데아, 기독교는 신에서 나온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이 자생성의 힘이 어디서 나온다고 딱 꼬집어 정확히 말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최종덕 교수는 답변한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의 존재는 순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우리가 시간을 너무 공간화 시켜 분절된 시간으로 말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와 'prehension'하는 주체를 분리해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도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 중의 하나가 되겠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유기체의 범주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유기체만이 아닌 과학적 대상인 무생물도 유기체의 범주로 본다.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subject'는 서로 수평적이다. 이분법적 존재론에서는 '존재'가 현상계의 대상들을 지배하고 있지만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을 우리 삶의 정치에 접목시켜 보면, 플라톤과 기독교적인 체계의 논리는 물론 동양도 마찬가지지만 '존재'는 대상을 지배하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사회적 절연체를 형성한다. 넘을 수 없는 강을 만들어야 권력이 안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는 '현실적 존재'와 '영원적 대상'을 연속성의 상관관계로 본다. 그래서 상부의 어느 한쪽이 하부를 구조적으로 지배한다는 정당성이 생길 수 없다.

사실 화이트헤드는 정치적인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1980년대 이후 화이트헤드 연구자들이 정치와 연결시켜 이렇게 해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존재들 사이의 연속성을 'nexus(결합)'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권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자체를 전체에 편제시킨다는 개념이다. 

최종덕 교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강의 말미에 "『화엄경(華嚴經)』 마지막에 나오는 '입법계품(入法界品)'의 어린 구도자 '선재동자(善財童子)'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도 아마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선재동자가 구도과정에서 여러 높고 낮은 다양한 존재들을 만나며 얻은 깨달음도 결국에는 어떤 절대 불변하는 깨달음의 경지가 아니라, '보현행(普賢行)'이라는 실천의 한 과정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화엄의 본뜻임을 상기 해보면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다음 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0강 : 2013년 1월 29일 레비나스 : 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 (문성원, 부산대 교수)

11강 : 2월 5일 푸코: 근대 이성의 본질을 폭로하다 - 광기, 권력, 폭력 (박민미, 대진대 외래교수) 

12강 : 2월 12일 들뢰즈 : 들뢰즈의 반복과 영원회귀 (김범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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