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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현대철학 71인 (1)

doll eye 2018. 7. 5. 10:07

현대철학 71인




1.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독일의 문헌학자이자 철학자이다.

'망치를 든 철학자'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에 천착하였고, 이성적인 것들이 기실 비이성

과 광기로부터 기원했음을 주장했다.

관념론기독교는, 세계를 두 개로 구분짓는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이승 이외에도 하늘나라가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플라톤은 세계를 현상계와 이데아계로 이분한다.

니체는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며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현실에서의 삶을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켜 퇴락한 인간이라 부르며 비판하였다.

이렇듯, '영원한 세계'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 혹은 칸트가 말하는 '목적의 왕국' 등에 반대하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기독교의 아류로 보고 비판하기도 했다.

니체는 전체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반유대주의 등을 비판했다.

그러나 인종주의자였던 동생이 니체의 책을 조작하여, 그의 사상이 파시스트들에게 왜곡되기도 했다.

진리의 가치를 묻는 그의 질문은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2.칼 마르크스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독일어: Karl Heinrich Marx, 문화어: 칼 하인리흐 맑스;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인란트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

창시자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맑스, 막스, 칼 마르크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나,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표기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지금 세계는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와 매우 유사하다.

과학 기술의발전으로 생산과 소비가 급증한 반면 빈부의 격차는 극심하다.

인간이 이윤과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여 인간 고유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상실해 가는 심대한 위기에 처해있다.

마르크스는 이런 것들은 일찍이 명을 걸고 고민했고 나름의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했다.

이는 현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불평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되는 한 마르크스 또는 마르크스

주의는 새롭게 해석되고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 김윤태. 《교양인을 위한 세계사》-



3.지그문트 프로이트


지그문트 프로이트(독일어: Sigmund Freud, 1856년 5월 6일 ~ 1939년 9월 23일)는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정신

분석학파의 창시자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억압의 방어 기제에 대한 이론, 그리고 환자와 정신분석자의 대화를 통하여 정신 병리를 치료

하는 정신분석학적 임상 치료 방식을 창안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또 그는 성욕을 인간 생활에서 주요한 동기 부여의 에너지로 새로이 정의하였으며, 자유 연상, 치료 관계에서 감정

전이의 이론, 그리고 을 통해 무의식적 욕구를 관찰하는 등 치료 기법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뇌성마비를 연구한 초기 신경병 학자이기도 하였다.

신프로이트주의에서 프로이트의 많은 이론을 버리거나 수정하였으며, 20세기 말에 심리학 분야가 발전하면서 프로

이트 이론에서 여러 결함이 드러났으나, 프로이트의 방법과 관념은 임상 정신 역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다.

그의 생각은 인문 과학과 일부 사회 과학에서 계속 영향을 주고 있다.


1885년 10월 프로이트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신경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와 공동 연구차 파리에 갔다.

그는 나중에 이 때 파리에 체류한 경험이 재정적으로 그리 희망적이지 않은 신경학 연구 대신, 정신 병리치료로 진로

를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샤르코는 히스테리와 히스테리 환자의 최면 감수성을 전공하였으며, 그는 청중 앞 무대에서 히스테리 환자를 자주

시연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프로이트는 최면 기법을 더이상 치료 가능성이 있는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유 연상과 꿈 분석

선호하게 된다.

샤르코 자신도 말년에 히스테리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였다.

1886년에 프로이트는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한다.

그 뒤 자신의 신경과 진료소를 차린다. 아내의 아버지 베르만은 함부르크의 수석 랍비였던 이작 베르나이스의 아들

이었다.

프로이트는 신경계 환자들에게 최면 기법을 실험하였으나 많은 대상자들에게 최면이 쓸모 없는 것으로 드러나자

이 치료 방식을 포기하였으며, 환자와 본인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치료법을 썼다.

이 방식은 "대화 치료"로 알려지게 되는데, 대화의 최종적인 목적은 환자가 처음에 거부하고 있으며 무의식에 갇힌

강력한 감정 에너지를 풀어주어 위치짓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환자가 어떤 감정을 거부하는 것을 "억압"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이것이 종종 정신의 정상적인

기능에 해를 끼치며 육체적 기능까지도 저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를 "정신 신체증"(심신증)이라고 설명

하였다. ("대화 기법"이란 용어는 원래 프로이트의 동료인 요제프 브로이어의 환자인 안나 O.(Anna O.)가 만든 말이

었다) "대화 기법"은 정신 분석학의 기초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나이 40대에 프로이트는 수많은 심신증 장애와 더불어 죽음에 대한 지나친 공포, 그 밖에 공포증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꿈, 기억 그리고 본인의 인격발달의 변천에 대해 탐색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렇게 자신을 분석하면서 프로이트는 1896년에 죽은 자신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에 대해 적대감을 느꼈으며,

또 어린 시절 매력적이고 따뜻하며 포근했던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에게 느낀 성적 감정을 상기하였다.

자기 분석을 계속하여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 1899년 11월, 라이프치히와 비엔나에서 동시에 《꿈의 해석

을 출판했다. 그리고 정신학 분석을 연구하여 빈 정신 분석 학회를 조직했다.

1900년과 1902년에 책을 출간한 이후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증가하였으며, 지지자 집단도 생겼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을 비평하는 지지자들과 충돌하기도 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원래 프로이트의

생각을 지지하던 카를 융이었다.

두 사람이 결별한 이유는 융이 종교와 신비주의에 흥미를 가지고 다룬 탓도 있는데, 프로이트는 이를 비과학적이라고

보았다.



4.앙리 베르그송


앙리-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년 10월 18일 ~ 1941년 1월 4일)은1859년 10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폴란드유태인인 아버지와 영국유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7남매 중 둘째,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젊어서 프랑스로 이민을 온 폴란드계 유태인으로 음악가였으며 모친은 영국인이었다.

베르그송은 모친을 통해 일찍부터 영어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작곡가였으나 그렇게 신통하지는 않아서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68년, 아홉 살이 되던 해 베르그송은 프랑스에서 교육 환경이 좋기로 유명한 고등학교, 리세 보나빠르트(Lycée

Bonaparte)에 입학한다. 1869년 그가 10살이 되던 해에 가족이 모두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였으며, 어린 베르그송은

혼자 파리에 남아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생이었고 고등학교 때는 국내외의 경시

대회에서 고전에서 불문학, 수학에 이르기까지 각종 분야의 상을 독차지했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해 천재였다. 프랑스 전국 학력경시대회에서 라틴어 작문, 영어, 기하학, 불작문, 수학에서 1등을

차지하였으며, 그 외 과목도 3등, 4등을 차지하는 등 전과목에서 뛰어났다.

1877년 수학 경시대회에서 제시된 그의 <파스칼의 '세 개의 원'에 대한 해법>은 다음 해 수학 연감(Nouvelles annales

de mathématiques)에 실렸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집에서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고 칠판 앞에서 풀기만 하면 되는" 정도로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라슐리에의 ≪귀납의 기초에 관하여≫를 읽고 "철학에도 뭔가 '심각한sérieux' 것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고" 철학으로

진로를 선회한다.

베르그손은 19세 때 파리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 입학한다. 고등사범학교는 인문학 분야를 공부하

고 싶은 프랑스의 영재들이 모이는 곳으로 샤르트르, 자크 데리다, 장 조레스 등 수많은 명사를 배출한 곳이다.

베르그손은 당시에 수석인 장 조레스에 이어 3등으로 학교에 입학했다.

22살에 철학 교수 자격시험(Agregation)에 2등으로 합격하여(3등은 장 조레스) 앙제 고등학교에 철학 교수로 발령된다.

후에 끌레르몽-페랑, 앙리4세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수를 지냈다.

33살때인 1892년, 14세 연하인 루이즈 뇌뷔르제와 결혼한다. 이듬해에 외동딸인 쟌느가 출생한다.

그는 소르본느 대학 교수직에 2번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39살 때 고등사범학교 전임강사, 41살 때에 꼴레쥬 드 프랑스

의 그리스-라틴 철학 담당 교수, 1904년에는 현대철학 교수가 된다.

이후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는 등 철학 교수로서 활발히 활동을 벌이게 된다.

1917년에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을 위해 윌슨 대통령을 설득하러 외교관으로 미국에 다녀오기도 한다.

그의 저서들은 매우 유려한 문체와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매우 높아, 주저중 하나인 창조적 진화

등의 주저들이 수십 쇄를 찍는 등 높은 판매량을 보이기도 했다.

62살 때에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이듬해에는 현 UNESCO의 전신인 국제 지적 협력 국제위원회(CICI)

회원이 되었다. 8월에는 의장에 올랐다.

그가 63살 되던 해에 아인슈타인과 시간 개념에 대한 유명한 논쟁을 벌였다.

그의 철학을 돌이켜봤을 때 과학계와는 다툼이 불가피했으리라 여겨진다. <지속과 동시성>이 그 책이다.

이어 그가 68살 때인 1928년에는 그간의 공로와 꾸준히 찬사를 받아오던 문장력을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는 죽을 때까지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다가 1941년, 81살 때에 파리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는 인간의 생명을 가장 중시하며 '생의 철학' 을 주장한 사람으로서, 그의 철학을 창조적 진화의 철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있다'는 것은 오직 우리들의 체험을 통한 경험이나 느낌으로만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또 현재라는 의식 속에는 과거나 미래도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변하는 현재의 시간이야말로 우주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과 사회에 관한 그의 관점 또한 '시간', '변화', '운동' 에 중점을 두고 재해석한 것이다.

종교에는 고정적인 제도, 고로 폐쇄적이게 되는 종교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개방적 종교가 있다고 하여 후자가 필연적

으로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도덕에 관한 관점 또한 기존의 고정되어 있는 전통적 도덕의 체계보다 시시각각 움직이고 계속 변화되어 가는 원칙을

가진 유기체적 도덕의 우수성을 옹호하였다.

사회에 대한 관점에서도 그는 고정되고 닫힌 폐쇄된 사회보다는 변화되고 움직이는 '열린 사회'를 주장하였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열린 사회'라는 용어가 그에게서 빌려온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 사회철학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이라는 그의 마지막 주저에 서술 되어 있는데, 베르그송은 이 마지막 저서를

1932년, 그의 나이 73세때 출판 하였다.

이때는 이미 <창조적 진화>가 출판된 지 25년이나 지난 후였는데, 이 책이 출판된 후 사람들은 이미 70대인 이 노철학

자의 사유의 유연함이 청년같음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5.에드문트 후설


에드문트 후설(독일어: Edmund Husserl, 1859년 4월 8일 - 1938년 4월 27일)은 현대철학의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인

현상학의 체계를 놓은 철학자이다.

그는 심리학주의역사주의에 대한 비평을 통해 실증주의와 결별하였다.

그가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유대인은 인종적 분류가 아니라 유대교를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종교적 분류일 뿐이다.

현상학(Phänomenologie)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은 독일에서 태어나 할레 대학교의 강사, 괴팅겐 대학교의 강사와

교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를 거쳐 은퇴 후 오히려 더욱 왕성한 의욕과 새로운 각오로 연구와 강연에 매진

하면서 죽는 날까지, “철학자로 살아왔고 철학자로 죽고 싶다”는 자신의 유언 그대로, 진지한 초심자의 자세로 끊임

없이 자기비판을 수행한 말 그대로 ‘철학자’ 자체였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급속하게 발전한 과학기술은 전통적으로 철학의 영역이라 여겨지고 있었던 분야들을

자신의 범주로 포함시켰다.

특히 심리학의 형성과 발전은 인지, 정신과 같은 철학 본원의 영역으로 인정 받던 분야 역시 과학의 탐구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과학의 거센 도전을 맞은 철학은 영국, 미국의 철학과 같이 보다 과학쪽으로 다가가거나, 리케르트와 같은

신칸트주의에서 처럼 과학과 철학을 별개의 학문으로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후설은 앞의 움직임과는 다른 방향에서 과학을 바라보았다.

그는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실증주의를 공격하여 그것이 참된 의미의 객관이 될 수 있는지 물었다.

이러한 실증주의 비판을 통해 후설이 제창한 철학을 현상학이라 한다.


빌헬름 분트(독일어: Wilhelm Wundt, 1832년 - 1920년, 독일의 심리학자)의 실험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인

실험의 대상으로 다루었다.

그는 이로 인해 종종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분트에 의해 시작된 실험 심리학은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로 인해 "심리학이 모든 과학의 근원"이라는 믿음인

심리학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후설은 그의 저서 《논리연구》에서 경험주의에 입각한 과학적 방법론이 언제나 반박될 수 있는 귀납적 사례들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심리학주의를 비판하였다.

후설은 철학을 과학보다 엄밀한 학문으로서 자리잡게 하고자 하였다.


후설은 실증주의가 의식과 대상을 실체적으로 분리시켜 사고하는 것이 철학적 오류라 비평하였다.

후설은 우리의 의식은 항상 어떤 무엇(즉 대상)을 향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대상 역시 의식을 매개로 하지 않고

서는 대상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후설의 이러한 주장을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at)"이라고 한다. 이는 후설 철학의 대표적인 개념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을 보면서 한 쪽으로는 과학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다루면서 한 쪽으로는 예술적인 대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별을 인식하는 주체의 지향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후설은 실증주의가 객관성을 절대적으로 부각한 나머지 가치 판단과 같은 인식의 주관성을 부정함하는 것은 오류이

라고 지적하였다. 후설은 "실증주의가 철학의 목을 잘랐다"고 표현하였다.



6.마르틴 하이데거



마르틴 하이데거(독일어: Martin Heidegger, 1889년 9월 26일 ~ 1976년 5월 26일)는 메스키르히에서 출생한 독일

철학자이다.

흔히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하이데거 자신은 그러한 칭호를 거부하였다.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를 지냈다.

독일의 히틀러 집권시기에는 나치 독일을 공공연히 지지하는 발언을 자주 해 한나 아렌트 등과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 패전후 독일 비(非)나치스화 청문회에서 그의 정부였던 유태인 한나 아렌트의 증언등으로

처벌을 피했고 이후 5년 동안 학문 활동을 금지당했다.



현존재의 본질적인 실존론 구조를 해명


『존재와 시간』이 발표된 것은 1927년이지만 집필은 1923년에 시작되었다.

이는 이 저술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일어난 사상계의 격동을 배경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전쟁이 가져온 혼란은 그 무렵의 정신 세계 역시 격동의 시대로 밀어 넣으며 오랫동안 철학계를 지배해 온 신칸트학

파의 몰락을 재촉했다.

이를 대신해 인간 존재의 적나라한 모습을 한 점 남김없이 응시하고자 한 생의 철학과 현상학이 새로이 대두했다.

또한 니체와 키르케고르의 사상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변증법 신학이 등장하며 또 현대 문학의 새로운 동향

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였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인간 존재의 ‘실존’의 모습을 맨 처음 획기적으로 그리고 신선한 모습으로 비춰 낸 20

세기 철학계의 금자탑이 된 저작이었다.

이 저술은 원래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재고찰하려고 한 ‘존재론’적인 야심에서 의도된 것이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그 의의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실증과학 면을 살펴보자.

실증과학은 그것이 자연과학이든 역사과학이든 자연과 역사라는 ‘존재자’의 다양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부여된 것

으로 간주하고 조사해 그 현실적 모습을 파악하려고 한다.

물론 이때 실증과학 그 자체는 이들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의미를 당연히 분명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캐물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 ‘존재자’의 ‘존재한다’는 의미가 명백하게 고찰되지 않을 경우, 이를 다루는 과학의 근본

개념도 올바르게 확립될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실증과학은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전제로 삼고 있다.

원래 다양한 형태의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본질적 의미를 근본적으로 캐물어 인간과 세계의 전체 구조를

고찰하고자 하는 철학상의 시도는 ‘존재론’이다.

하이데거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의미의 존재론을 철저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실행될

때 사용하고 있는 방법과 기초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기초는 어디에 있는가.

그 기초는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 같은 물음의 대상이 되는 우리 인간,

곧 다른 존재자와는 다르게 뛰어난 특질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존재 구조를 고찰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다양한 존재자가 존재하고 인간과 세계의 모습이 전체로서 성립하고 있는 것에 대해 ‘존재적으로 이해’

하면서 살아가며, 아울러 존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존재 양태의 구조와 의미에 대해 되묻고 그를 해명하고자 하는

점에 존재론의 기초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의 시도에 가장 근본적 기초를 제공하는 ‘기초존재론’이다.

『존재와 시간』은 이러한 기초존재론의 시도로 행해진 것이다.

하이데거는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현존재(現存在, Da-sein)’라고 부르고 있다.

현존재란 세계 속에 ‘현재’ 존재하고 생활하며, 자기 자신 이외의 존재자와 맺은 관계 속에서 특히 자기 자신의 ‘존재’

의 모습을 어떠한 형태로든 스스로 결정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자라는 의미이다.

‘현존재’란 ‘그 존재에서 현재의 자신의 존재에 관련되어 있는 존재자’인 것이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이러한 현존재가 그와 같이 관련되어 있는 현재의 자기 자신의 ‘존재’를 ‘실존’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기초존재론’은 ‘현존재의 실존론적인 분석론’이라는 형태로 전개된다.

‘실존론적’이라는 의미는, 실존의 본질적인 구조를 추출해 낸다는 뜻이다.

곧, 모든 사람이 실제로 실존할 때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내용은 각 개인 자신의 ‘실존적’ 문제이며, 실존적인 분석

론이 관여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와 시간』이 시도한 것은 현존재의 본질적인 실존론 구조의 해명인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시도하면서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방법을 모색했다.

현상학이란, 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드러나는 그대로 그 자신으로부터 보이게 하는 것이다.

사실상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현존재의 실존이라는 존재 양식을, 그것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

나게 해 주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는 후설의 ‘의식의 현상학’과 달리, 어디까지나 ‘실존의 현상학’이 된다.

그리고 이때 실존에 둘러싸인 잘못된 편견이나 일반적인 속견, 곧 잘못된 존재 이해를 파괴해 현재의 현존재에 스스

로의 존재 구조와 존재 의미의 본래적 내실이 ‘고지’되는 방식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올바른 본질 사태를 ‘고지’한다는 것이 다름 아닌 바로 ‘해석학’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사실상 실존에 관련되는 ‘해석학적 현상학’이 수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존재의 시간성


그렇다면 이러한 분석의 결과, 하이데거는 어떠한 결론에 이르고 있는가.

『존재와 시간』은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 ‘현존재의 예비적 기초 분석’에서 하이데거가 도달한 결론은, 현존재의 ‘존재’는 그 통일적 전체 구조에 대한

‘관심(Sorge)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제2편 ‘현존재와 시간성’에서 도달한 결론은, 현존재의 ‘존재 의미’는 ‘시간성’에 있다는 점이다.

곧, 현존재의 실존론적 존재 구조는 다양한 계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관심’이라는 근본 구조 속에

묶여 있으며, 그 ‘관심’은 현존재의 존재 의미인 ‘시간성’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주장이다.

그리고 ‘시간성’에 기초하는 ‘시간’이라는 시각을 통해 모든 존재자의 존재 의미도 해명될 수 있다는 뜻에서 총체적인

표어적 의미를 담아 『존재와 시간』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 이외의 존재자도 포함한 이 같은 존재 전체의 존재 의미, 곧 ‘존재 일반의 의미’를 시간이라는 시각을

통해 논한 부분은 결국 미완성으로 머물렀다.

곧, 오늘날 소개되어 있는 『존재와 시간』은, 현존재라고 하는 우리 인간적 존재자의 존재 구조가 시간성에 의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밝힌 데에서 끝나고 있다.

현존재의 존재가 ‘관심’이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는 ‘세계 내의 존재’로 간주된다.

이는 현존재가 존재할 때에는 반드시 자신 이외의 다양한 존재자, 예를 들어 도구적 존재자를 그 목적과 수단이라는

연관 속에 묶어 두므로 이를 ‘배려’한 관심 또는 공동의 현존재인 타인을 다양하게 ‘고려’하는 관심을 보이며 살아간

다는 것이다. 또 그뿐 아니라 이른바 자신의 지나온 과거에도 관심을 가지며 살고 있다.

현존재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세상 속에 던져진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을 스스로 등에 진 채 현재 존재하고 있

는 자신의 ‘사실성’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태는 ‘정상성(情狀性)’이라는 기분을 통해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이다.

또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이해’하고, 이를 장래를 향해 ‘기투(企投, Entwurf)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존재의 구조 전체는

첫째로 ‘자신에게 앞서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장래를 향해 ‘기투’한다는 ‘실존성’을 포함하고,

둘째로 ‘이미 세계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피투적’인 ‘사실성’을 지고 있으며,

셋째로 그와 같은 상태인 동시에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들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곧 도구와 타인에 대

해 배려하거나 고려하면서 존재한다는 세 가지 계기로 이루어진 통일적 전체 구조를 의미하며, 그 전체 구조는 다름

아니라 바로 ‘관심’인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당장 대부분’의 ‘평균적 일상성’에서 현존재는 특히 제3의 계기인 도구와 타인에 대해

배려하고 고려한다는 이른바 ‘함께하는 존재’에 깊이 몰입되어 있는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퇴락’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현존재는 세상 속의 불특정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의 방법에 좌우되어 살면서 본래의 자기를 상실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여기에서의 불특정한 사람을 ‘세상 사람’이라고 불렀다.

‘세상 사람’ 속에 매몰되어 도구에 대해 배려하며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보통 세계 내의 존재가 보이는

존재 방식으로, 이는 활기에 넘치는 삶의 방식이다.

이것이 어째서 평균적 일상성을 지닌 존재 방식이 되는가를 파악한 점에서 하이데거의 매우 특이한 사고방식이 엿

보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는 본래의 자기 자신의 적나라한 세계 안의 존재로 되돌아가게 되면 이유 없이 내던져지고,

또한 자신의 존재의 모습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피투적 기투 존재와 직면해 ‘불안’한 기분에 휩싸

이므로,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실제로 퇴락한 존재 양태 속으로 도피해 살고 있는 것이다.

본래의 세계 안의 존재는 어쩐지 불안하고 마음 편하지 않으며 그러한 상태가 가장 근본적 기분이므로 현존재는 퇴락

적으로 도피해 세상 사람 속으로 숨어 들어가 대개 무책임하고 안락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같은 퇴락한 존재 양태를 ‘비본래성’이라고 부르며, 그것에서 벗어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에서 바로

‘본래성’이 성립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본래성은 어떻게 하여 실제로 가능하게 되는 것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죽는다.

이 ‘죽음’이야말로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의 실존에 가장 깊이 관련되고 또

추월이 불가능한 것이다. 현존재란,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죽음이란 자신의 실존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될 가능성에 대해 ‘선구(先驅)’함으로써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의

가능성’을 발휘하게 된다.

그렇지만 인간은 본래 자기 자신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받아들이기를 꺼리며 이로부터 눈을 돌리고자 한다.

이러한 비본래적 도피를 타파하고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전체 존재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것이 바로

‘양심’의 목소리이다.

양심의 목소리는 무언의 말로 퇴락한 비본래적인 존재 모습에서 현존재를 박탈해 본래적인 존재의 모습이 되도록 만

들고 있다.

이러한 양심의 목소리에 따를 때 본래적인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결의성’은 결실을 맺게 된다.

결의성이란 앞에서의 ‘선구’와 연결될 때 비로소 근본으로 돌아간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선구적 결의성’이 바로 현존재가 추구해 온 ‘본래적인 전체 존재의 가능성’이 실존적 증거를 거쳐 나타나는

본래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때 현존재는 어떠한 모습을 통해 본래적으로 실존할 수 있는가. 실은 현존재란,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본래성을 잃고 ‘비본래적’ 존재의 모습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 모든 것을 기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만 이룰 수 있는 존재로 철저하게 ‘무력’하며, 이른바 될 수 없는

곳에 있는 ‘책임 있는 존재’이다.

이처럼 책임은 있지만 무력한 자기 자신을 본래적인 것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철저히 그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선구적 결의성’의 실상이다.

구체적으로 이는 자신에게 의탁되어 있는 존재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받아들인 채 살아가는 삶이며, ‘운명’을 사랑하는

삶의 생존 방식이다. 곧, 본래적인 ‘역사성’의 존재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재의 선구적 결의성뿐 아니라 ‘관심’의 일반적 존재 양태, 곧 본래성과 비본래성을 포함한 현존재

의 존재 자체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에서 실은 ‘시간성’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본래적이든 비본래적이든 자기 자신에 앞서 자신의 존재 가능을 기투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이르게(도래, 到來) 하는 것’이며, 이것은 ‘도래’라는 시간성에 대해 현존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둘째로 이미 세계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 역시 원래 현존재가 ‘이미 계속해 존재한다’고 하는 시간성에 대해 존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다.

셋째로 세계 내부적 존재자와 관련될 수 있는 것도 원래 현존재가 그들의 존재자를 ‘만날 수 있게 한 것’이라는 의미에

서 ‘현성화(現成化)시킨 것’이라는 시간성에 대해 존재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현존재는 ‘이미 계속되고 있으며 현성화되어 도래한다’는 ‘시간성’에 대해 존재해 있기 때문에 바로 본래적인

선구적 결의성의 존재 모습은 물론, 관심의 세 가지 계기도 가능하게 되어 현존재는 그 존재 의미에서 ‘시간성’이라고

하이데거는 단정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시간성’이란, 시계로 측정되는 시간이 아닌 ‘근원적 시간성’이다. 이러한 시간성이 ‘시간의 성숙(時熟)’에

의해, 현존재의 본래적이며 비본래적인 실존의 모든 양상이 모두 가능하게 되는 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하이데거는

해명하고 있다.

또한, 비본래적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성이 시간의 성숙에 의해 마침내 시계로도 측정 가능한 통속적 시간 개념

이 파생되는 과정까지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하여 ‘시간성’의 시간의 성숙이라는 구조 속에서 현존재의 세계 내 존재 전체가 그 존재에 대해 가능하게 되는

것을 해명하면서 나아가 존재 일반이 그러한 의미에서 시간이라는 점을 규명하고자 하는 대목에서 이 저서는 끝나고

있다.

『존재와 시간』은 하이데거의 연구 생활에 관한 전반부를 대표하는 저술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인간

이라는 ‘현존재’의 ‘존재’를 해명하면서, 그 같은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의미’를 ‘시간성’을 통해 밝히며 또 그에 기초

해 존재 일반의 의미를 ‘시간’으로 규명하고자 했지만, 이는 결국 미완성으로 끝났다.

이와 달리 후기의 하이데거는 ‘전향’의 길을 걷는다.

곧, 그것은 『존재와 시간』과는 반대로 ‘존재’ 자체에서 ‘현존재’를 비춰 보고자 한 것이다.

연구 생활 후반부의 복잡한 도정의 결과, 마침내 하이데거는 1969년 『시간과 존재』라는 저술을 발표하면서 『존재와

시간』에서 미완성으로 남겨 놓았던 문제에 대한 최종 해답을 시도했다.

곧, 존재와 시간 사이에 놓여 있는 일반적 관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존재자만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는 가장 심오한 것에 의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또 그것이 제공되는 양상은 시간을 통해서라고 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 어떤 심오한 것이 우리 인간에게 시간을 보내주고 있지만, 그러나 시간은 우리 인간이 존재

에게 다가가게 하기도 하고 멀어져 가게 하기도 한다.

시간은 이미 있는 것은 물론, 앞으로 도래할 것도 포함하고 있어 모든 것을 현재에만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 시간에는 거부하거나 이룩되지 않도록 하는 성격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에 기초해 우리에게 존재를 보내 주는 심오한 것을 하이데거는 ‘에라이그니스’라고 불렀다.



7.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독일어: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1951년

4월 29일)은 오스트리아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이며, 논리학, 수학 철학, 심리 철학, 언어 철학 분야에 업적을 남

겼다.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일상 언어 철학에 영향을 끼쳤고 분석 철학을 대표하는 인재로도 알려져 있다.

20세기 말 한 철학 포럼이 정리한 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와 《철학 탐구

는 상위 5위권에 모두 선정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후일 인문학사회 과학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고 분석 철학자로서는 예외로 예술가들

에게 전파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종종 천재를 가리키는 낱말로 쓰인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논리 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와 《철학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로 나뉜다.

《논리 철학 논고》에 나타난 전기 사상은 명제에 사용된 낱말은유다운 관계를 분석하여 기존 철학에서 잘못된

개념 탓에 빚어진 논리에 상충하는 점을 지목하는 것인 일변, 후기 사상에서 언어-놀이에서 상호 변환되는 자연 언어

가 논리에 부합한 구조로 정형화한 언어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말이다.


논리철학논고 이 책은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내가 믿기에는, 이러한 문제들의 문제 제기가 우리의 언어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뜻은 대략 다음의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

나에겐 여기서 전달된 사고들의 진리성은 불가침적이며 결정적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나는 본질적인 점에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철학적 탐구》에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을 상당부분 수정하게 된다.

초기의 그림 이론과는 달리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그림 이론을 포함한 기존에 있었던 사물과 언어가 일치한다는 주장을 반대하였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가 있기 전에 생활 양식이 있다.

또한, 언어는 그 '뜻'이 아니라 '사용'에 본질이 있으며,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을 공유한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는 하나의 공통된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쓰임에서 나타나는 여러 유사성

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것을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s)이라고 불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놀이에 비유했는데, 줄넘기 놀이, 술래잡기, 가위바위보 등의 '놀이'에서도 어떤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처럼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

대니얼 솔로브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접근을 현대형 프라이버시 개념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활용하

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명료하고 논리적인 이상적인 상태의 언어를 추구하는 것을 비판했다.

이러한 철학은 옥스퍼드학파라고도 불리는 일상언어학파가 잇게 된다.



8.로버트 화이트헤드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OM, FRS, 1861년 2월 15일 ~ 1947년 12월 30일)는 영국철학자·

수학자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호논리학(수학적 논리학)의 대성자 중 한 사람이다.


사적(史蹟)이 많은 영국 남부의 켄트 주 램스게이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영국 성공회의 신부로 사립학교 교장

이었다. 이러한 환경은 역사·종교·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을 함양시켜 주었다.

188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하여 수학을 전공하였으며, 이어 장학금 연구원(펠로)으로 선발되고 강사가 되었다.

1910년런던 대학교의 응용수학 교수가 되기까지 버트런드 러셀과 10년간에 걸쳐 협력하여 수학의 논리적 기초를

논한 고전 《수학 원리》 3권을 완성하였는데, 이미 1898년의 《보편대수학론》(이 논문으로 왕립 학회 회원으로 선

출되었다) 등에 이러한 논리-수학적 관심이 나타나 있었다.

또한 런던 대학교 시절에 상대성이론에 강한 관심을 보였고, 그의 철학자로서의 업적은 《자연이라는 개념》 등 과학

철학에 관한 여러 저작에 의해 확립되었다.

1924년 63세로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초빙되어 미국으로 건너갔고, 매사추세츠 주케임브리지에 살며 《과학

과 근대 세계》, 《상징작용》, 《과정과 실재》, 《관념의 모험》, 《사상의 제 양태》가 계속 간행되어 우주론 내지

형이상학 체계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과학의 기초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수학자 화이트헤드는 실재론적 기초 위에서 넓은 시야의 문명론을 전개

하면서 '유기체 철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철학 사상을 구축했다.

그는 부인과 함께 담화의 명수였으며, 그의 집은 계속 찾아드는 학생이나 동료를 위해 개방되어 있었다.

또 전 생애에 걸쳐 사회와 정치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가졌다. 1945년에 문화훈장인 '오더 오브 메릿'(Order of Merit)을

수여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수학 원리》(버트런드 러셀과 공저, 3권 1910-1913), 《과정과 실재》(1929),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 1933)이 있다.



9.장 폴 사르트르


사르트르(1905~1980)는 유명한 철학자를 다수 배출한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한 뒤, 리세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1932년

부터 1934년까지 베를린의 프랑스 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후설, 하이데거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이 무렵부터 『NPE』에 기고하기 시작해 소설과 논문, 평론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해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해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가 되었다.

1943년에 『존재와 무』를 발표해 철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 뒤 교직을 떠나 문필 활동에 전념했으며, 1945년 세계

대전이 종결되자 잡지 『현대』를 주관하며 약자의 입장에 선 차별 철폐와 평화수호운동 등을 추진했다.

이 운동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도 관련을 맺게 되었다.

『유물론과 혁명』(1946)에서는 반스탈린주의의 입장에서 공산당에 대해 비판적 사회주의를 주장했지만, 그 뒤 당의

의지를 인정하면서 자유주의만을 고수한 카뮈, 메를로퐁티 등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러나 헝가리 사건으로 다시금 정면으로 당을 비판하면서 시비를 밝히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1960년대에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출판해 마르크스주의를 유일한 현대 철학으로 인정하며 이를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뒤 새삼 급진적 입장을 견지했지만 눈이 나빠져 작품 활동을 단념했다. 주요 저서로는 사상과 관련된 저작인

『보들레르』, 『장 주네』, 『플로베르』, 평론집 『상황』, 소설 『구토』, 희곡 『파리』 등이 있다.

『존재와 무』는 722페이지에 이르는 대작으로 대담한 발상과 강고한 사고력을 갖춘 독창적인 철학을 전개한 책이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한 전체 내용은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론 ‘존재의 탐구’에서는 존재론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

으며, 제1부 ‘무의 문제’에서는 우리의 세계에는 끊임없이 비존재의 가능성이 존재하며, 이러한 비존재의 기원이 의식,

곧 대자(對自, pour-soi) 존재임을 논증하고 있다.

제2부 ‘대자 존재’에서는 대자 존재는 자신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대자 존재의 직접적 구조, 곧 대자가

자기에게 현전(現前)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며 과거를 떠맡는 것과 동시에 끊임없이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구조를 규명

하면서 시간의 존재론을 전개한다. 아울러 이러한 대자가 관련된 세계의 여러 양상을 해명하고 있다.

제3부 ‘대타(對他, pour-autrui)’에서는 타인의 존재를 해명하고 그러한 타인에 의해 객관화되는 자신의 존재, 곧 대타

존재의 고찰을 통해 인간이 타자와 합일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제4부 ‘소유, 행위, 존재’에서는 개개의 인간의

행위가 어떤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며, 어떤 개성적인 방식으로 ‘즉자(卽自, en-soi)-대자’를 실현하고 있는가를 분석

하고 있다.

이어 결론에서는 존재론과 형이상학과의 관계를 다시 살펴본 뒤, 존재론에서 윤리학으로 옮겨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존재와 무』는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자유롭고 개성적인 모습에서 찾으려 한 노력으로, 전후의 황폐화된 세계인의

가슴에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세상이 진정되고 단순히 개성적인 것만으로는 현대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오히려 사르트르

역시 개인의 기반이 되는 문제를 추구하며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저술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이 같은 기반의 구조를 해명하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로 구조주의가 등장했다.

또한 1968년의 5월혁명은 이 같은 철학의 일부가 실천적으로 나타난 운동이기도 하다.

     


 




 











출처 : 한국 문화의 원류
글쓴이 : 솔롱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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