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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3) /막스 베버 /카를 마르크스/하이데거

doll eye 2018. 7. 4. 17:56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 자본주의 동력은 돈이 아니라 삶의 의미


ㆍ막스 베버 (1684 ~ 1920)

자본주의 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돈이 최고라는 생각인가? 지금 우리는 이러한 통념에 도전한 한 인물을 만나볼 것이다.

그는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다.

그가 살던 당시 유럽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두 가지 대립된 관점이 퍼져 있었다.

하나는 공리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였다.

여러 형태가 있지만, 공리주의는 인간을 ‘욕망 추구 존재’로 보고, 욕망의 만족=선, 욕망의 불만족=악’으로 본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일치한다.

영국에서 발전한 경제학은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활동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시장을 사람들의 욕망을 가장 조화롭게 충족시킬 수 있는 장치로 보고, 그것이 자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내버려 둘

것을 제안했다. 그들은 대체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공리주의 인간관을 수용하였지만,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시장이 욕망들의 조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 충돌과 투쟁을

불러 일으켜 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사유재산과 시장을 폐지하는 공산주의를 추구하였다.


이 두 관점은 자본주의에 대해 상반된 생각을 갖고 있지만 ‘욕망 추구 존재’로서의 인간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간관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단순한 욕망들의 체계이며, 물리적 자연 법칙처럼 욕망의 법칙에 따라 작동한다.

그 법칙이 공리주의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조절 기능에 의해 조화를 유지하고,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를 가져오는 상반된 방식으로 작동하긴 하지만. 욕망들의 체계에서는 돈이 최고가 된다.

베버는 이들과 달리 인간을 ‘의미추구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자기 나름의 주관적 의미를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이다.

욕망은 동질적이므로 일반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의미는 독특하고 이질적이며, 구체적 맥락에 따라 달라서 그렇게 할 수 없다.

문화는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된 의미의 구성물이다.

의미는 욕망처럼 단순히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자본주의를 욕망추구 이상의 의미추구 현상으로 보고 탐구하였는데, 그 결과물이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책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자본주의의 동력은 자본의 크기보다는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에 있다.

자본주의 정신이 존재하면 자본이 생성되고 화폐가 공급되어 그 정신을 수행하는 수단 노릇을 하지만, 자본이 있다고 해서 자본주의 정신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베버가 말하는 자본주의 정신은 ‘노동의 합리적 조직’이다. 그것은 다섯 가지로 설명된다.

①노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②정직하고 근면한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이다.

③감정의 동요에 따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경멸하고, 1분 1초까지도 이성으로 잘 계획해서 실천하는 생활을 한다.

④돈을 더욱 많이 벌기 위해 쾌락, 행복, 즐거움 등을 포기하고 쓸데없는 휴식과 게으름을 물리친다.

⑤돈을 모으기 위해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한다.

자본가든 노동자든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자본주의이다.

그러면 왜 합리적 자본주의가 서구에서만 나타났을까?

중국, 인도, 그리고 여타의 지역에서는 왜 그것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베버는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에 많은 영향을 준 칼뱅주의 기독교의 ‘예정 교리’에 주목하

였다.

예정 교리는 그것을 수용한 사람들에게 전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제공하였다.

이 새로운 삶의 의미가 자본주의 정신의 원천이 되었다.

예정 교리는 절대주권자인 신이 자신의 뜻대로, 일부 사람만 구원되도록 예정해 놓았다고 주장한다.

누가 구원으로 예정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인간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살아야 한다.

예정 교리는 사람들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놓았다.

첫째, 예정 교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가도록 자극했다.

누구도 신의 결정을 알 수 없으며, 한번 내려진 결정은 결코 번복될 수 없다.

신조차도 그것을 번복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존재도 자신의 구원에 도움을 줄 수 없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성직자도, 그리고 신도 ……. 사람은 홀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

이러한 신앙 태도에서 근대 개인주의가 형성되었다.

둘째, 예정 교리는 개인들을 신의 영광을 증대시킬 수 있는 능력, 예를 들면 전문 지식과 기술 등을 위주로 하는 합리적 조직 형태로 결합시켰다.

이 조직은 혈연, 지연, 신분 등과 같은 인맥이 아니라 합리적 규칙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것은 어떤 전통적인 조직보다 탁월한 효율성을 나타내었다.

셋째, 예정 교리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존경을 표해야 했던 전통 사회의 위계서열 풍습을 개혁하였다.

칼뱅주의자들은 인간에게 과도한 존경을 표하는 것을 피조물 숭배라고 여겨 배척했다.

이러한 반(反)권위적 태도는 민주주의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넷째, 예정 교리는 직업을 소명으로 여기고, 정직하고 근면한 직업 생활을 하도록 격려했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것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겨야 한다.

정직하고 근면한 직업 활동에서 오는 성공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증거이다.

예정 교리에 의하면, 직업 활동에서 신의 영광을 아무리 많이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그러나 직업 활동에 성공했다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될 수 있다.

다섯째, 예정 교리는 삶 전체를 금욕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도록 자극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마음 내킬 때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악을

억제하고 선을 행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아주 계획적으로 꼼꼼하게 관리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매일 생활 계획표를 꼼꼼하게 만들어 그 계획표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자세하게 점검해야 했다.

감정적 충동에 따라 무계획적으로 행동해서는 지속적으로 선행을 할 수 없다.

1분, 1초라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성격을 통제할 수 있는 금욕적인 행동이 필요했다.

여섯째, 예정 교리는 부의 축적을 긍정적으로 보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부의 축적은 신의 소명을 수행하는 미덕이었다. 직업 생활의 성공을 통해 얻어진 물질과 돈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증명하는 표시였다.

위험시되었던 것은 재산을 가지고 놀면서 흥청망청 쓰는 것이고, 그 결과 게으름과 성적 욕망에 빠져 종교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죽으면 영원히 휴식할 수 있으므로 살아 있을 동안에는 자신의 구원을 증명하기 위해 신의 일을 쉼 없이 행해야 한다.

인생은 자신의 선택을 증명하기에는 너무 짧고 귀중한 시간이다.

사람들과의 교제나 한가한 잡담, 사치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건강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잠을 자는 것도

비난받았다.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예정 교리는 노동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일단 하나의 제도로 작동하기 시작하자, 그 정신의 원천이었던 종교적 신앙은 사라졌다.

이제 자본주의는 종교적 신앙의 의미를 추구하는 활동에서 단지 생존을 위해 적응해야 하는 거대한 우주로 변했다.

아직도 자본주의 하면 돈이 최고라는 생각이 떠오르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자본주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추구하는 천민자본주의라고 한탄한다.

정신이 썩은 천민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면 어떤 나라도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없다.

꼭 칼뱅주의 기독교일 필요는 없지만, 자본주의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돈 이상의 삶의 의미와 윤리가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을까?


막스 베버를 더 알고 싶다면

베버는 민족을 궁극적 삶의 의미로 삼았던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독일을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만들기 위한 ‘이상적인 권력 국가 모형’을 제시하였다. 그의 국가 모형에서 정치가, 경제인, 학자, 관료는 각각 민족에 헌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고유
규범을 갖고 있다. 이러한 국가 모형은 유사 나치즘을 지향한다.

정치가의 규범은 <직업으로서의 정치>(전성우, 2007, 나남)에 나와 있다.
정치가는 집합체의 가치와 목적을 제시하는 존재로서 대의에 헌신하는 열정, 객관적인 결과에 대한 책임감,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는 균형감각을 갖추고, 언제든지 악마와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이런 정치가를 카리스마적 지도자라고 불렀다. 나머지 직업은 정치가의 지휘를 받는 수단적 존재이다.

경제인의 규범은 가혹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정신을 갖추는 것이다.
<유사 나치즘의 눈으로 읽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윤원근, 2010, 신원문화사)은 이런 시각에서 쓰였다.
학자의 규범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전성우, 2006, 나남)에 나와 있다.
학자는 가치에 대해서 언급해서는 안 되고 오직 사실만을 취급해야 한다.
이것이 학문의 ‘가치중립성’이다. 관료의 규범은 자신의 호불호와 관계없이 성문화된 규칙에 복종하는 것으로,
<경제와 사회>(박성환, 1997, 문학과 지성사)의 관료제 논의에 제시되어 있다.


<윤원근 |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그가 요청한 것은 ‘행동하는 주체’

카를 마르크스(1818 ~ 1883) : 변증법, 프락시스

“<자본론>에는 이른바 경제학보다도 더욱 풍부한 통찰이 들어있고 경제학자는 도리어 그것을 알 수 없다.”

가라타니 고진이 설명한, 자신이 <자본론> 읽기를 그만둔 이유다. 경제학 이상의 풍부한 통찰…. 그랬다.
카를 마르크스는 경제학을 넘어 역사와 철학에 정통했고, 문학·예술·외국어 등 매우 광범한 영역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풍부한 통찰이 가능했던 원인을 단순히 지적 관심의 다양성에서 찾을 수는 없다.

마르크스의 폭넓은 관심 영역에서 항상 중심적 지위를 차지했던 임금노동자 계급은 ‘시민이면서도 시민이 아닌 자,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자’였다. 그들은 소외된 인간이었던 것이다.
소외는 젊은 시절 마르크스 저술들의 배경화면과도 같았다.
마르크스는 소외를 인간적 현상이 아니라 정치적 현상으로 파악했다.

마르크스의 정치적 저술들은 그의 정치관과 열망을 함께 보여준다.
<공산당선언>과 프랑스혁명에 대한 세 저술(<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내전>)이 혁명에 대한 개념과 열망을 보여준다면, 그를 뒷받침해야 할 당파성은 <고타강령비판>에서 표현되었다.
그는 동시대의 혁명가들조차 그 폭력성과 구성원에 대해 혐오를 표시했던 파리 코뮌을 지지하고 이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전형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시도했다.
그의 관심은 실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 정치란 궁극적으로 경제적 운동을 반영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그 토대를 이해하고 법칙을 해명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다. 이 문제의식은 <자본론>을 통해 집대성되었다.

정치와 혁명에 대해 언급할 때, 또는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예언자처럼 보인다.
에리히 프롬이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한 세간의 편견이 대부분 오해였다고 말했을 때, 아마도 세계는 이 측면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분석할 때 그는 차라리 (죽은 신체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살아있는 유기체를 취급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해부학자에 더 가깝다.

그는 어떤 이상적 세계나, 마땅히 존재해야만 할 영원한 자연법칙 같은 것을 상상하지 않았고, 주어진 대상이 존재하는 특수한 방식과 역사적 조건을 분석했다.
따라서 그의 비판은 도덕률과는 관련이 없었다.
노동가치설은 노동자가 세계를 지배해야만 한다는 도덕적 가정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가치 창조적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전도되어 자본이라는 사물의 자기증식으로 나타나게 되는지에 대한 분석이었다.
노동은 분석의 전제가 아니라 결과였으며,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모순된 행위로 현상되어야 했다.
노동의 이중성이야말로 그의 학설의 핵심적 문제였던 것이다.
세계는 단순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에 지배된다.
그것이 그가 파악한 세계의 실체적 본성이었고 실존적 진실이었다.

정치·자본 말할 때 도덕률이 아닌 특수 방식·역사적 조건으로 분석

동시대의 다른 혁명가들과 달리 마르크스는 어떤 이상이나 새로운 윤리를 호소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한 요구는 하나의 환상을 다른 종류의 환상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주어진 사회를 운동시키는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었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움츠러든 자아를 확인하는 대신 행동하는 주체가 된다.
비판의 무기가 아니라 무기의 비판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정의롭지 않은 현재의 질서를 비판하는 대신 그러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역사적 조건을 공격하고자 했으며, 인간성을 탓하기 전에 무지를 질타했다. 이성을 강조한 사람은 물론 많았다.
하지만 마르크스처럼 엄격하고 일관되게 자기의 주장을 밀고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칼라일과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외딴 문명이나 이상화된 과거로 도피하게 하고 자기 시대의 최대의 적인 니체를 히스테리와 광기로 몰고 간 어지러운 시대에 오직 마르크스만이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자신을 지켰다.”(이사야 벌린)

<자본론>은 1867년에 출간되었고, 마르크스는 1883년에 죽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20세기를 지배했고, 동유럽의 몰락 이후에도 살아남았으며,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숙고한 19세기의 현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가 이미 그 증거다. 대중의 저항이라는 현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20세기 전체(실은 자본주의가 지배적이었던 시대 전체)에 걸쳐 존재했다.
공황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상을 발견하고 고민했지만, 그 치유책은 발견되지 않았다.
케인스의 세계는 채 30년이 가지 못했고, 신자유주의 역시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희생은 불가피했다. 사회주의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사상이 여전히 유의미하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의미의 내용이 항상 같았던 것은 아니다.

홉스봄의 말마따나 20세기는 극단의 시대로 평가받을 만했다.
경제발전의 속도가 그랬고, 전쟁의 규모가 그랬다. 공황이라는 부작용이 미치는 폐해도 극단적이었다.
극단성 속에서 인간의 소외를 목격한 지성은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에 심각한 회의를 가졌다.
인간의 본질이라는 형이상학적 단언이 인간의 존재를 소외시킨다고 본 실존주의는 본질이 아니라 존재를 되살리고 싶어
했으며, 존재 그 자체에 본질적 의의를 부여하고자 했다.
실존주의가 마르크스에게서 유의미성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소외의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실존의 주제는 개인이었지 계급은 아니었고, 그들이 보기에 마르크스의 이론은 수정될 필요가 있었다.
근대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 문제로 되었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했다.
그들은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했고 이를 거부하고자 했지만, 문제를 단순히 경제로 환원시키는 것에 반대했다.
이들에게 세계는 획일화된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가진 것이었고, 획일성의 강요는 곧 인간성의 파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는 자본주의의 문제는 인간의 본성인 다양성을 억압하고 자본의 논리에 따른 획일적인 구성을 강요한다는 데
있었다.
비록 마르크스가 여전히 유의미한 존재였을지라도 역시 변형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변형이란 곧 발전과 동의어였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사상이 훼손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반드시 마르크스와 일치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의 사상과 다른 사람의 사상이 융합되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일례로 부르디외가 말하는 자본의 개념은 대체로 마르크스와 같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따라서 계급적이다.
그는 자본의 개념을 경제적 영역에 국한시키기보다 교육, 사회, 문화 등의 영역으로 확대해 사용함으로써 자본을 사회 모든 영역에서 작동하는 기제로 만들고 그에 대한 저항을 촉구한다.
하지만 개념을 이렇게 확대하는 방식 자체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베버의 것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다중과 제국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정치의 복권을 주창한 네그리는 발리바르로부터 슈미트주의의 혐의를 받아야 했다.

마르크스가 현대 사상, 특히 인문학에 미친 영향을 한두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르트르에서 지제크에 이르기까지 그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게 매료된 현대 사상가들의 사유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마치 편린처럼 펼쳐져 있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만큼 광범위한 영역에서 적용이 가능하다는 의미도 된다.
고진이 마르크스를 ‘가능성의 중심’이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다양하다는 것은 이질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질성의 중심에는 동질성이 존재하고, 그 동등성의 실체는 증식만이 목적인 자본의 욕망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간들의 저항을 옹호하고, 저항하는 인간들을 주체로 고양시키려는 데 있다.
마르크스의 요청은 실천적 지성이었고, 행동하는 주체였다.

마르크스를 더 알고 싶다면

한 사상가의 사상을 이해하는 첩경은 그의 전기를 읽는 것이다. 보통 대상에 비판적인 쪽은 과(過)를 과장하여 실체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사야 벌린이 쓴 전기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는 마르크스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과장을 최대한 피하는 남다른 재주를 보이고 있다. 자크 아탈리의 전기는 화려한 듯 보이지만 뭔가 밋밋하다.

마르크스의 최대 업적은 역시 <자본론>이다. 지나치게 많은 분량이 흠이지만 그의 사상의 정수를 맛보려면 이만한 게 없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법칙이라는 고유의 대상을 넘어 한 사회의 상부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그에 조응하는지를
짐작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가 열렬히 강조한 방법론(변증법)의 진정한 교본이기도 하다.
풍부한 역사 이해는 또 하나의 부록이라고 해도 좋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로만 로스돌스키)은 <자본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역사란 곧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강조는 마르크스가 처음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다른 혁명가들과 달리 단순히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의 일시적 필연성과 역사적 의의를 지적하고자 했다.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은 산업혁명 기간 동안의 노동자계급의 경험, 러다이트운동에서 드러나고 있는
노동자들의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연구한 탁월한 저서이다.
그가 제시한 ‘도덕경제’라는 문제의식은 경제사의 연구에서도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김동수 | 대안연구공동체 연구위원>


- 지금, 여기, 나… 이것이 ‘존재’다

ㆍ하이데거 (1889 ~ 1976)

지식인의 정치참여는 온당한가? 굳이 안 될 이유야 없지만 나치 같은 범죄적 세력에 참가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그러면 지식인의 정치적 의사와 그의 이론적 견해 사이에 필연적 연관이 있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정치참여의 정당성 여부는 대개 분명한 연관이 있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 더 문제가 되곤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정치지향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견해가 반드시 나치 지지로 귀결되는지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분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마지못해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총장을 맡았고, 유대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임무가
성공하자 총장직을 그만두었고, 적어도 허위에 사로잡힌 열정 때문에 나치를 지지했지만 곧 그 환상에서 벗어났다고
믿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노년의 하이데거는 자신의 가르침을 거부한 나치 때문에 독일인이 자신들의 운명을 이끌 힘을 잃게 된 것이며 그 역시 나치의 희생자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방대한 독서량과 독특한 사유로 에른스트 카시러와의 논쟁에서 승리했고, 현대 서구사상에 놀랄 만큼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유독 정치와 정치적 사유의 영역에서만 순진했다는 것이 진실일까?
사실은 달랐다. 그는 총장이 되기 위해 로비를 했고, 대학개조에 적극적이었으며, 순회연설은 늘 히틀러 만세로 끝맺곤
했다.
총장을 그만두었을 때도 그의 옷깃에는 나치를 상징하는 핀이 꽂혀 있었고, 제자 칼 뢰비트에게는 <존재와 시간>에 등장
하는 개념과 자기의 정치개입의 관계를 설명해주기까지 했다.

나치 지지는 윤리적인 문제도 낳았다. 부자관계에 비할 만큼 유대가 깊었던 스승 에드문트 후설을 배신(1940년대 초
<존재와 시간>에 포함된 후설에 대한 헌사를 삭제했다가 나중에 슬쩍 끼워 넣었다)했고, 평생의 벗이었고 지적 동료였던
야스퍼스의 부인과 끝내 자신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던 제자이자 연인 한나 아렌트를 외면했으며, 동료교수 헤르만
슈타우딩거와 제자 에두아르트 바움가르텐을 정치적인 이유로 탄핵했다.
그들은 유대인이었다. 나치 지지는 용서받기 힘든 과거였다.
적어도 하이데거의 초기 사상에 대해서만은 지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야스퍼스조차 그가 대학 강단에 서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도덕적 평가만이 중요했다면 하이데거의 사유는 아무런 영향을 행사할 수 없었을 테지만, 그는 20세기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남았다.
놀랍게도 그의 지적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인정한 사람들 중에는 가장 좌익적이며 최근의 철학적 사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이데거의 지적 영향력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좌우익 모두에 대해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역사적인 면에서만 보면 하이데거 옹호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이데거와의 이론적 유사성에 대한 동의를 구했다가 거절까지 당했던) 사르트르는 누구보다 인상적인 언사로
하이데거의 사상을 변호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철학자의 사상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면, 만일 우리가 새로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기술과 방법들을 다른 철학자에게 요구하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가 그의 이론을 전부 신봉한다는 것을 의미하겠는가? 마르크스는 헤겔로부터 변증법을 빌려 왔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론>을 프로이센 공국의 저작이라 말하겠는가?”

사르트르의 변호는 설득력이 있다.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려 할 때 그의 모든 것, 예컨대 사생활이나 악행까지 모두
배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이데거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고 믿은 사람들은 그의 행위와 사유 사이의 연관성을 배제하거나, 적어도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
들뢰즈, 데리다, 푸코, 라캉 등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친나치 행적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으면서도 그의 영향을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재현하거나, 그의 사상에서 받은 영감을 자기의 이론 구성에 사용하는 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하이데거의 제자로 만들었을까?
그의 사유에 정말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는 존재(sein, be)와 존재자(존재하는 것, seiendes, is-ness)를 구별했다.
철학은 존재자만을 사유할 뿐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다며 존재자는 존재에 입각해서 사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존재(sein)란 어떤 것의 존재, ‘있음’을 의미했고, 존재자(seiendes)란 존재하는 ‘그 무엇’, ‘있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가 보기에 사람들이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어떤 것, 존재자였고, 존재자는 단지 주어져 있을 뿐, 뭐라 설명하든 결국은 우연한 것 이상으로 나갈 수 없었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면 사태가 달라질까?
그는 진리를 대상과 개념의 일치로서만이 아니라 실체의 본질이 드러나는 과정이라고 이해했다.
전자는 우연히 얻어질 수도 있지만 후자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존재자의 진리가 존재에 있는 한 존재자는 존재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은 필연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경험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존재자란 존재의 실현이었기 때문이다.
존재는 자신을 드러낼 특정한 장소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실현되어 특정한 형태를 갖는 존재자가 된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 sein에 관사 da를 붙여 dasein, 현존재라고 불렀다.
현존재는 항상 ‘거기(da)’, 즉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현실적인 존재이며, 장소(공간)를 내포하는데, 장소의 본질은 시간이다.
현존은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세계는 공간과 시간에 의해 그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현존재는 세계 내에 존재하는 ‘세계-내-존재’로서 관계를 통해 실현된다.

세계는 상대적이다.
공간조차도 멀면서 동시에 가까울 수 있다.
타인과 관계하는 이상 자아는 자신과 더불어 있는 타인의 요구에 종속되어 존재한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있는 나이며, 타인과 공통적인 존재양식을 갖지만 그것은 나 자신의 고유한 현존재를 망각하는 비본래적인 존재양식이다.
타인은 몰개성적이고 익명성을 갖는 집단으로서의 대중이며, 그것이 바로 타인의 힘이다.
(대중성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인간은 평균화를 벗어나지 못하며, 잡담, 낙서, 호기심에 빠져 고유의 현존재성이 퇴락한 결과가 자기소외다.
타인에게 지배된 세계에 몰입함으로써 자기와 세계의 사멸을 망각하고 비본래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기의 실존과 실존의 근본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사회, 산업사회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된다.

타인에게 지배되는 현존재는 죽어야 할 운명이다. 죽음은 현존재의 특성, 거기에 있음을 포기하게 하는 절대적 지평, 현존재의 끝이지만 하이데거는 죽음조차 존재의 한 방식으로 이해했고, 존재 가능한 방식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가 부활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죽음을-향한-진의적 있음’을 마주하라는 그의 요청은 존재가 부여한 현존재의 진의성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타인에게 지배당한 상태로부터 자신을 회복하라는 의미다. 이 요청은 결단을 요구한다.

하이데거는 독일의 현존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마도 서구의 위기(죽음)에서 부활은 진의성의 회복, 즉 존재문제로의 회귀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지리적 중심, 유럽 언어의 시원적 언어인 독일어, 이러한 요소들에서 하이데거는 독일의 운명, 서구의 몰락 속에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독일의 사명을 발견했다.
하지만 나치는 하이데거의 제안을 거부했고, 자신을 희생자로 생각한 하이데거는 나치가 자신의 해법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독일인이 자신의 운명과 만나게 될 길을 막아버렸다고 믿었다.
존재는 사라졌고 구원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노년으로 갈수록 하이데거는 더욱 신비주의에 빠져들었다. 이것이 그에게서 독일 보수혁명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이유다.

하이데거가 통합유럽이라는 동시대의 유토피아에 현혹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들은 하이데거의 실천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그 철학도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진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이 거꾸로 서있고, 따라서 그대로 쓸 수는 없다고 했다.
그 말은 하이데거에게도 해당된다.

하이데거를 더 알고 싶다면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 대한 해설서로는 <존재와 시간 강의>(소광희, 문예출판사), <쉽게 풀어쓴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 영향>(이기상, 누멘)이 읽을 만하다.
두 사람 모두 <존재와 시간>의 번역자이기 때문에 내용은 신뢰할 수 있다.
다만 후자가 하이데거의 현재성과 의의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반면, 전자는 텍스트 해설에 더 충실하다.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를 주제로 쓴 책은 <하이데거는 나치였는가>(박찬국, 철학과현실사), <하이데거와 나치즘>(박찬국, 문예출판사), <하이데거와 나치>(제프 콜린스, 이제이북스)를 들 수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나는 철학자다 :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이매진)은 하이데거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서술된 아마도
거의 유일한 책일 것이다.
<니체, 횔덜린, 하이데거, 그리고 게르만 신화>(최상욱, 서광사), <보수혁명-독일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전진성,
책세상), <낭만주의의 뿌리>(이사야 벌린, 이제이북스)는 독일 지식인의 사유를 암암리에 지배했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김동수 | 대안연구공동체 연구위원>











출처 : 한국 문화의 원류
글쓴이 : 솔롱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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