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인문

[스크랩]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2) /비트겐슈타인/니시다 기타로

doll eye 2018. 7. 4. 17:56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의미’란 불리고 쓰일 때 완성된다



ㆍ비트겐슈타인 (1889 ~ 1951)


1929년 세계적 경제학자 케인스가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이 도착했다!” 도대체 누가 왔기에 케인스는 ‘신’이라는 말을 했을까?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었다.

젊은 시절 <논리철학논고>라는 불후의 저작을 완성하고 철학의 문제를 모두 해결했노라고 선언한 후 철학하기를 포기한

그가 10여 년의 수많은 방황을 접고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무엇을 위해? 다시 철학을 하기 위해. 동성애자라고 밝혀져 한때 영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20세기가 낳은 그 위대한 철학자가 다시 철학적 문제와 싸우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논리철학논고>에서 필사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철학적 문제란 무엇이었을까?

책 제목만 보면 ‘논리’와 관련된 문제였을 것이라고 추측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실존적 문제, 삶의 의미 문제이다.

젊은 시절 세계와 나 자신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 누구나 한 번쯤은 묻지 않는가.

도대체 이 모든 것이 뭐냐고. 도대체 나란 무엇이냐고. 도대체 왜 없지 않고 존재하느냐고.

도대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비트겐슈타인의 젊은 시절은 지독했다.

오스트리아 철강 산업의 대부호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은 어린 시절 꿈과 같은 시절을 보낸다.

호화스러운 비트겐슈타인 저택에는 브람스, 말러, 피아니스트 요하임, 지휘자 발터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모여들어

매일같이 연주회가 열렸다. 모든 것은 풍요롭고 안정적이었고 아름다웠으리라.

그러나 이 행복한 가정에 불행의 그림자가 닥친다.

청교도적 윤리를 지닌 아버지는 아들들이 가업을 잇기를 희망했지만 아들들은 그러기에는 예술적 감수성이 너무 깊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결국 루트비히 나이 13세 때 큰형이 자살하고, 2년 후 둘째 형이 자살했으며, 1차 대전 중에 셋째 형이 자살한다.

루트비히는 낙원에서 쫓겨나듯, 행복과 환희가 사라진 이러한 실존적 상황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가 삶과 죽음, 자살, 그리고 세계와 신에 대해서 수많은 실존적인 물음을 던졌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기존의 철학과는 달랐다.

그는 삶의 의미, 세계의 의미, 나의 의미를 묻지 않고, 오히려 ‘의미’ 자체가 무엇이냐고 먼저 물었던 것이다.

도대체 의미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낱말의 의미란 무엇인가? 한 문장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도대체 우리는 어디까지 논리적으로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러한 물음들에 대답함으로써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특히 그는 <논리철학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그음으로써 언어의 한계와 사유의 한계를 밝히고자 하였다.

<논리철학논고>는 80쪽밖에 안 되지만 머리에 쥐가 나지 않고서는 읽을 수 없는,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저작이다.

이 저작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세계, 언어, 의미, 논리에 대한 논의를 거쳐, 자연과학, 수학, 철학, 윤리학과 미학에 대한 논의를 제시하고 있으며, 철학적 자아와 삶의 문제에 대해 자신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책의 말미에서 세계, 의지, 가치, 삶과 죽음, 신에 대해 자신의 결론을 제시한다.

이 저작의 마지막 결론은 준엄한 선언으로 끝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를 완성한 것은 1차 대전 중 이탈리아 군의 포로수용소에서였다.

그가 포로로 수감되었을 때 그의 배낭에는 전쟁 중에 틈틈이 적어놓았던 원고가 들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참혹한 전쟁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 자신의 철학적 문제를 구체화하고 해결했던 것이다.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후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기부한다.

그 이후 그는 극도로 검약하게 생활하면서 교사, 수도원의 정원사, 조각, 건축 등에 종사하며 10여 년을 방황한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논리철학논고>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결국 자신이 처음에 철학을 시작했던, 당대 최고의 철학자 러셀과 무어가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복귀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케임브리지로 복귀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를 치열하게 비판하는 작업을 했다.

이와 함께 그의 독창적이고 성숙한 사상이 형성되는데, 이는 그가 생전에 출판하지 못했던 그 유명한 <철학적 탐구>에 응축되어 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대표하는 <논리철학논고>는 차가운 대리석과 같이 짧고 간결한 경구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적 탐구>는 마치 대화하며 여행하듯 여러 철학적 문제들을 오가며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저작은 ‘의미’의 문제를 치열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렇다면 두 저작에서는 각각 ‘의미’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논리철학논고>에서는 그림 이론이 제시된다.

그림 이론에 따르면, 명제는 사실에 대한 그림이며, 참 또는 거짓일 수 있는 논리적 그림이다.

명제가 그림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과 어떤 일정한 형식, 즉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을 그린 명제는 말할 수 있지만, 그 논리적 형식 자체는 말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라는 주장을 ‘지시 의미이론’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지시 의미이론에 따르면, ‘벽돌’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 말이 가리키는 벽돌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도 일종의 지시 의미이론인 셈이다.

언어·논리·의미와 치열하게 싸워 ‘유아론’서 실존의 세계로 나아가

반면에 그는 <철학적 탐구>에서 ‘사용 의미이론’을 제시한다.

사용 의미이론이란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용 의미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그가 고안한 ‘언어놀이’라는 개념이다.

가령 어떤 건축가와 조수가 건물을 짓고 있다고 하자.

건축가는 “벽돌”, “석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조수는 그가 말한 것을 가져간다.

이렇게 언어놀이란 “언어와 그 언어가 뒤얽혀 있는 활동들의 전체”를 뜻한다.

이제 이 언어놀이에서 “벽돌”은 “벽돌을 가져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제 다른 언어놀이를 생각해 보자. 어떤 태권도 사범과 훈련생이 격파시범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자. 사범은 “벽돌”,

“석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훈련생은 말한 것을 격파한다.

이제 이 언어놀이에서 “벽돌”은 “벽돌을 격파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두 저작에서 의미이론은 상이했다.

더 나아가 실존적 문제에 대한 대답도 달랐다.

<논리철학논고>의 대답은 소위 ‘유아론’이다.

유아론이란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다른 사람이 감각하고 느끼는지를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다면 오직 확실한 것은 내가 감각하고 느낀다는 것, 그리하여 오직 나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유아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나의 세계이다.”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의 한계이다.”

반면에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놀이와 함께 함(행위, Tun)과 실천(Praxis)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유아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철학적 탐구>는 유아론과의 치열한 투쟁의 기록이다.

그는 말한다.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 주어진 것은 삶의 형식들이다.”

우리가 말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철학적 문제와 싸운다는 것도 우리 자신의 삶의 형식을 이루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논리, 의미와 관련된 철학적 문제들과 치열하게 싸운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싸움을 통하여 그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자아와 세계로부터 현실에서 생생하게 활동하는 자아와 소통의 세계로 나아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그의 사상이 논리실증주의, 일상언어학파 그리고 현대 분석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비트겐슈타인을 더 알고 싶다면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한 해석은 학자마다 다양하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그의 저서를 직접 읽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대표하는 <논리철학 논고>(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6)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책세상, 2010)는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그의 저작은 ‘연습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독자가 책을 읽어나가면서 어떤 문제든 스스로 대답하려고 시도하는 일이야말로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의도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알고자 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이해>(분석철학연구회 편,
서광사, 1984)와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전개>(한국분석철학회 편, 철학과현실사, 1991)를 권한다.
이 책들은 비트겐슈타인 철학이 국내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여러 학자들이 쓴 논문 모음집이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 심도 있게 접근하고자 한다면, <비트겐슈타인과 철학>(R. 수터 지음, 남기창 옮김,
서광사, 1998)을 추천한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의 전체 내용과 그 깊이를 이해하는 데 손색이 없는 입문서이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도 좋은 책이다. 마지막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전체 철학에 대해 전반적인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란 무엇인가?>(K. T. 판 지음, 황경식·이운형 옮김, 서광사, 1989)를 읽는 것이 좋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의 전체 철학을 쉽고 명쾌하게 해설한 입문서이다.



<박정일 | 숙명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니시다 기타로> - 삶의 고뇌를 넘어 ‘참자아’를 찾아가다



ㆍ니시다 기타로 (1870~1945)


일본의 사상·철학은 신도(神道), 불교, 유교의 전통을 가꾸어 왔으나, 메이지 후기에 이르면 서양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이들에게 서양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역설한 것처럼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곳이기도 했으나, 또한 쇼와 전기의 사상가들에게서 흔히 확인할 수 있듯이 극복해야 할 적이기도 했다.

전자만을 따라간다면 일본은 언제까지나 서양의 학생일 수밖에 없고, 후자만을 따라간다면 편협한 국수주의를 면치 못할

것이다.

메이지 초기(1873년)에 모리 아리노리, 니시무라 시게키, 후쿠자와 유키치, 니시 아마네, 가토 히로유키 등등 당대의 일급

학자들이 모여 만든 메이로쿠샤(明六社)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던 것도 이런 문제였다.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는 유럽을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고 ‘동양’을 고집하는 것도 아닌, 유럽과 동북아 전통을 대등하게 놓고서 그 종합 위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에도 후기 이래, 본격적으로는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인들이 염원하는 ‘우리의 철학자’를 이룩한 인물이 니시다 기타로이다.


교토의 명물인 ‘철학의 길’은 바로 니시다가 산책하던 길로서, 그의 사유에 꼭 어울리는 아름다운 길이다.

일본 철학자들이 서양 철학의 견습생으로 그치지 않고서 자신들의 철학 전통을 만들어낸 것은 암흑기인 쇼와 전기(1925~

1945)이다.

특히 니시다 기타로, 와쓰지 데쓰로, 미키 기요시, 구키 슈조는 이른바 ‘교토 사철(四哲)’로 불리는 거장들이다.

교토 큰 서점의 철학 코너에 가면 이들을 위한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일본 철학자들은 각자의 전공에 상관없이 이들의 사유를 연구하거나 최소한 언급하곤 한다.

요컨대 니시다 기타로와 교토 사철는 현대 일본 철학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니시다 철학의 주제는 베토벤의 9 번 교향곡을 참조해 말한다면 ‘고뇌를 넘어 환희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니시다는 “철학의 동기는 비애의식(悲哀意識)이다”라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철학자들의 ‘동기’에는 독창적인 착상, 논리적-개념적 연역, 거시적인 종합, 사회의 변혁, 종교·윤리의 창건 등 여러 가지가 있겠거니와 니시다의 경우 삶의 비애야말로 철학적 사유를 하게 된 동기였고 이 점에서 그 심층에서 불교라든가 실존주의 철학 등과 통한다.


니시다는 그의 삶에서 많은 죽음들을 목격했다.

여린 소년 시절에 각별히 사랑하던 누나의 죽음을 경험했고, 후에는 그의 삶의 대들보였던 어머니의 죽음은 물론 세 명의

자녀들(장남과 차녀, 오녀)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으니(여기에 처와 사녀는 밤낮 침상에 누워 지내는 병자였다), 이런

사람이 비애의식을 가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하겠다.

게다가 니시다는 사회생활에서도 기구해서 갖가지 부조리와 차별, 냉대, 서러움을 겪기도 했다.

인생 후기의 교토대학 교수 시절은 그나마 비교적 평온했지만, 그의 삶은 고뇌와 비애의 연속이었다.

니시다는 자신의 생에 찾아온 이런 시련들을 철학으로 극복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니시다 철학’이 탄생했다.

니시다는 고뇌에 찬 삶을 살았지만, 항상 그를 나락으로부터 구해준 것은 스승, 친구, 제자 등 주변 인물들이었다.

이는 니시다의 인격이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니시다의 철학은 첫 번째 주저인 <선(善)의 연구>에서 전개된 ‘순수 경험’에서 출발한다.

순수 경험이란 “조금도 사려분별을 섞지 않은 참된 경험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이 때문에 서구 철학자들은 니시다를 현상학의 범주에 넣어서 이해하기도 한다.

두 번째 주저라 할 <자각에 있어서의 직관과 반성>에서는 그의 일생의 테마인 ‘자각’의 문제가 전면에 드러난다.

니시다 철학의 기본 주제는 그의 삶 그대로 ‘고뇌를 넘어 환희로’이다.

어떻게 삶에 엄습해 들어오는 각종의 고뇌를 털어내고 환한 빛의 차원으로 나아갈 것인가, 여기에 니시다 사유의 기본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제3의 주저로 일컬어지는 <작용하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에서는 그 유명한 ‘장소의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그의

자각론이 지나치게 유심론적으로 주관주의적으로 흐르는 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여기에서의 장소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자각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진정한 자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만이 아니라 자각이 이루어지는 장소 자체에 대한 자각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때의 자각이야말로 ‘절대무의 자각’인 것이다.

이 ‘절대무의 자각’에 이르러 니시다 사유는 최고조에 달한다.

삶의 고뇌를 넘어서 참자아를 찾아가려는 니시다의 사유는 일정 정도 헤겔의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

의식은 그 순수성·무매개성(‘직관’)에서가 아니라 반성을 매개해 자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밟는다.

이는 곧 순수 경험이 반성을 통해서 분열·전개해 감으로써 개체적·직관적 경험이 보편적·논리적 경험으로 확장됨을 뜻한다.


그러나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의 논리를 구사하는 니시다에게서 결국 경험은 자아 안에서의 사건으로 머무른다.

자각이란 “자기 안에서 자기를 비추는 것(自己の中に自己を映す)”, 자기가 자기에 있어서 자기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각 개념의 이런 의식철학·주의(主意)주의 등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서 장소론이 등장한 것이다.

니시다의 장소 개념은 주관 쪽에 치우쳤던 그의 사유를 주관과 객관, 자아와 비아가 그 안에서 관계 맺게 되는 터에 대한

사유에로 이끌었다.

이는 자각이라고 하는 의식의 점에서 사물을 보는 입장에서 그것을 감싸안는 장소의 면에서 보려는 입장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니시다는 물리적 공간이나 역장(力場:힘의 작용이 미치는 범위) 등을 ‘유의 장소’라 부르고, 그에 대비적으로 훨씬 추상적

수준에서 의식과 그 대상이 관계 맺는 장소를 ‘무의 장소’라 부름으로써 구분한다.

이는 사르트르에게서의 유로서의 즉자와 무로서의 대자의 구분과 통하는 사유이거니와, 니시다는 이 무의 장소를 ‘의식역(域)’ ― ‘의식의 뜰’ ― 으로서 제시함으로써 사르트르의 이원론에 비해 보다 유심론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물론 니시다는 무의 장소를 다시 ‘대립적 무의 장소’와 ‘절대무의 장소’로 구분한다.

대상과 주체가 여전히 대립해 있는 ‘대립적 무의 장소’와 달리 ‘절대무의 장소’는 대상과 의식의 대립을 해소하는 가장 포괄적인 장소로서, 그 자체는 절대적 무가 됨으로써(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만유를 담는 일반자(‘일반자의 일반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일반자는 ‘의식의 뜰’을 무한히 확장함으로써 가능한 장소이며, 이 점에서 차라리 의식의 타자가 존재했던 ‘대립적 무의 장소’보다 더욱더 유심론적인 장소라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절대 무의 장소에서 의식 자체도 무로 화하지만, 그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국 선불교적인 뉘앙스에서 절대 무를 자각한 ‘참 자기’인 것이다.

이 점에서 니시다 사유의 몇 차례 변모에도 불구하고 ‘순수 경험’, ‘직접 경험’의 추구라는 그의 기본 정향은 일관되게 이어

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그의 사유가 타자가 아니라 주체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음을 뜻한다.

그의 사유는 주체의 빛을 추구하는 사유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에서 그의 사유의 한계가 노정된다.

니시다 철학은 주체·자아의 빛을 추구하는 사유였기에, 타자로 향하는 시선보다는 자아로 향하는 시선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윤리적 한계를 띠게 되기 때문이다.

니시다 사유의 이런 한계는 구체적으로는 ‘대동아 공영권’이 운운되면서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던 당대 상황에 대한 니시다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니시다는 일본사의 암흑기라 할 쇼와 전기에 활동한 인물이다.(그는 정확히 1945년에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가 과연 대표 지식인으로서 이 시대에 감연히 맞섰는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는 태평양전쟁에 적극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시대가 지운 의무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해야 하며, 동북아의 다른

국가들, 당대의 타자들보다는 일본중심주의에 머물렀다.

이는 하이데거나 박종홍의 경우가 그렇듯이 단지 그의 인간적 실수가 아니라 그의 사유 자체 내에 내재하는 어떤 본질적인 한계 때문이었다고 해야 한다.

빛을 어디까지나 주체·자아에 두는 그의 사유에서는 ‘타자의 사유’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니시다 기타로를 더 알고 싶다면

니시다 기타로의 저작들 중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것으로는 <선의 연구>(서석연 옮김, 범우사, 2001)가 유일하다.
니시다 철학에 입문하는 데에는 고사카 구니쓰구, <절대무의 견성철학 : 니시다 기타로의 사상>(심적 옮김, 장경각, 2003)이 큰 도움을 준다. (일본 학자들의 이름이 한자로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 각각의 이름을 밝혀주면 좋을 것 같다.)
니시다 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로는 허우성,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문학과지성사, 2000)이 있다.
유아사 야스오(湯淺泰雄)의 <신체>(김영희 옮김, 박영사, 1991)에는 니시다 기타로의 신체론을 다룬 한 장이 포함되어 있다.



<이정우 | 대안연구공동체 파이데이아 학장>


출처 : 한국 문화의 원류
글쓴이 : 솔롱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