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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1)

doll eye 2018. 7. 4. 17:55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진보와 퇴행이 몰아친, 그 때의 소명과 응답을 되짚다



20세기는 인류사를 통틀어 유례없는 변화와 소용돌이, 삶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시기다.

식민지 전쟁, 패권주의와 각종 이익을 둘러싼 전 지구적 분쟁이 속출했을 뿐 아니라 경제규모나 문화현상 등 모든 것이

글로벌화되어 근대적 의미의 국가주의로는 설명될 수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들이 탄생했다.

학문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전례 없는 지식의 풍요로움을 누렸는가 하면 산업혁명의 달콤한 열매가 안겨졌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시민 담론이 등장하고 구체적인 자유의 맛을 알게 된 것도 지난 세기다.

 

하지만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은 법.

핵분열과 같은 학문적 다양성은 오히려 가치론적 지표를 잃게 만들었고, 끝 모를 산업 성장은 자연을 황폐화시킨 주범이

되었다.

날로 확대되는 글로벌 경제는 계급 간, 민족 간 빈부격차를 가속화시켰고, 이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은 오히려 자유를 반납

하는 것이 더 자유롭다는 환시까지 생겨나게 하였다.

무엇보다 이 모든 분야에서의 퇴행은 인류가 그토록 믿어왔던 보편성과 영원성에 대한 신뢰마저 뒤흔들었다.

이 모든 것들이 불과 한 세기 동안 이루어진 일이다.

엄청난 진보와 퇴행이 공존했던 시기가 바로 20세기였던 것이다.

아니 공존이라기보다는 양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리라.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다른 두 실재가 동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한 실재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풍요로움과 혼돈, 발전과 파괴, 개방과 소외, 자유와 구속…….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가 뒤로 가면 다른 하나가 앞으로 오고, 또 다시 뒤집어보면 다시 원래처럼 되어버리며, 그래서 결국 구별 자체가 모호해진다.

이른바 탈중심적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보편성과 영원성마저도 그 존재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이 현상. 이를 흔히 포스트모던이라는 말로 규정한다.

포스트모더니즘, 20세기가 우리에게 남겨준 마지막 유산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티는 논리적으로 완전한 이론을 지칭하는 말은 못된다.

어떤 이론이나 대상들에 붙는 명명의 일차 원칙은 다른 이론이나 대상과 구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명칭을 붙이더라도 서로 중복되지만 않으면 일차 목표는 달성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명명은 그 이론이나 대상을 가장 적절하게 한 용어 안에 담아내고자 하는 고민의 결과물이다.

포스트모더니티 또한 그렇다.

모더니티에 붙은 접두사 포스트는 무언가의 뒤에 오는, 하지만 또한 앞으로 오게 될 또 다른 무언가의 준비가 되는 과정을 암시한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는 앞과 뒤에 있을 그 무엇들의 패러다임적 전환점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를 사는 우리가 전환기적 불안정성을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모더니티가 무엇이기에 그에 대한 반발로 포스트모더니티가 나왔는가.

포스트모더니티 그 너머의 지향점은 또 어디인가.

그보다 ‘포스트’가 진정 그 이전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보완의 과정인가.

이 모든 수수께끼는 결국 모더니티의 정체 안에 숨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더니티가 동일한 정체를 가진, 혹은 유일한 실체를 가진 하나의 사상체는 아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변별적 차이와 다양한 담론들이 존재한다.

이런 다양한 사고와 담론들이 서로 경쟁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커다란 지적 커뮤니티를 형성해 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상은 각각의 분야에서 그 고유의 시대적 소명에 응답해 왔다.

 

현대 사회가 무엇에 대한 ‘포스트’인지를 추적하는 우리의 전략은 바로 이들의 소명에 대한 응답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포스트’ 이후의 세계에 대한 전망과 길라잡이를 내놓는 것도 가능해진다.

우리가 앞으로 전개할 20세기 사상지도는 이러한 목적의식과 방향을 가지고 그려질 것이다.

시작에 앞서 앞으로 진행될 여정에 대한 로드맵과 리딩 포인트를 일별하자.

이 사상지도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첫 부분에서는 20세기의 인물은 아니지만 20세기의 사고가 형성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상가들을 다룬다.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니체, 지크문트 프로이트,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바로 그들이다.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사상사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역사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니체가 없었다면 20세기에 형이상학이 사라졌을지 모른다.

혹은 아주 다른 모습이었으리라. 프로이트는 이전까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학문의 개척자이자 다양한 분야에 영감을 준 인물이다.

소쉬르는 20세기의 중후반을 휩쓸었던 ‘구조’ 담론의 출발지였다.

 

 

 

 

그 뒤를 이어서 각각 인간의 네 가지 이성영역에 따라,


‘인식과 관념(homo loquens),

‘아트(art)혁명, 노동과 여가(homo faber),

‘자아, 주체, 사회(homo politicus),

‘욕망의 꽃, 윤리(homo eticus)의 제목으로


분야별 대표적 사상가들이 소개될 것이다.

 

‘인식과 관념에서는 전통 철학에서 핵심 테마 중의 하나였던 인간 인식의 문제가 주제다.


근대 칸트의 비판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은 현상학(에드문트 후설),

위기를 새로운 활로로 극복하는 새 형이상학(앙리 베르그송),

현상학과 더불어 현대철학의 큰 축을 이루는 분석철학(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과학혁명의 구조(토머스 쿤),

구조주의의 비판적 해석으로 새롭게 구성되는 인문학(장 가뉴팽),

동서양의 학문적 융합으로 탄생되는 새로운 형이상학(니시다 기타로)가 차례로 소개된다.

 

‘아트혁명, 노동과 여가에서는 인간의 입이 아닌 손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이 기획의 가장 야심찬 시도이기도 하다.


유희의 새로운 학문적 관심(요한 호이징가),

복제시대의 예술론(발터 벤야민),

노동의 조건·신체(모리스 메를로-퐁티),

정보화 시대의 탄생(앨런 튜링),

포스트모던시대의 예술론(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다뤄진다.

 

‘자아, 주체, 사회에서 다루게 될 내용은 실존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재발견에 관한 것들이다.


자본주의의 또 다른 해석(막스 베버),

심도 있는 실존적 인간 분석(마르틴 하이데거),

자유의지와 실존(장 폴-사르트르),

구조주의적 인류학의 탄생(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아비투스와 문화자본(피에르 부르디외),

사회변혁과 자본(안토니오 네그리),

정책과 정치의 상호 영향(자크 랑시에르)를 차례로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욕망의 꽃, 윤리에서는 욕망의 주체, 욕망의 승화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관한 것들을 다룬다.


상징계와 상상계·욕망의 구조(자크 라캉),

권력과 지식으로 본 근대성(미셸 푸코),

타자의 윤리(엠마누엘 레비나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질 들뢰즈),

탈구축과 정의(자크 데리다),

이데올로기와 욕망(슬라보예 지젝)이 조명될 것이다.

 

한 가지, 이 사상지도에서 유의할 점은 사상가들의 선정 기준이다.

네 가지의 각 영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당대에 큰 반향을 얻지는 못해도 독특하고 개성 있는 발상으로 후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상가들을 가렸다.

블루오션의 행운아들이라고 격하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기획의 시각에서는 외로운 선지자들이다.

이는 역으로 당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졌던 사상가도 경우에 따라 이 지도에서 누락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당수의 구조주의 또는 후기구조주의에 활약했던 인물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몇몇 인물들, 그리고 분석철학을 이어받은 많은 이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한 포지션에 스타플레이어들이 집중되어 있다 해도 이들 모두를 선수로 선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용의 풍부함 못지않게 합리적 구조의 중요성 또한 20세기에 출현한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끝)

 

 

(01) 칼 맑스(1818~1883): 그가 요청한 것은 ‘행동하는 주체’ (김동수)

(02)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긍정 (이정우)

(03) 지크문트 프로이트(1856~1939): 그의 이론은 콤플렉스로 점철된 ‘무의식’의 자기분석 (유충현)

(04)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 구조주의의 태반 (임상훈)

 

(05) 에드문트 후설(1818~1883): 초월적 환원을 위한 투쟁 (신충식)

(06) 앙리 베르그송(1859~1941): 시간을 공간에 가둔 허구를 극복 (이정우)

(07) 토머스 쿤(1922~1996): 과학은 ‘지식의 축적물’이란 생각을 뒤집다 (임상훈)

(08)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 ‘의미’란 불리고 쓰일 때 완성된다 (박정일)

(09) 장 가뉴팽(1923~2006): “인문과학은 여전히 가능하다” (임상훈)

(10) 니시다 기타로(1870~1945): 삶의 고뇌를 넘어 ‘참자아’를 찾아가다 (이정우)

 

(11) 요한 호이징가(1872~1945): 놀아라, 그것이 문화가 될지니 (임상훈)

(12) 모리스 메를로-퐁티(1908~1961): 그냥 본대로 느낀대로 세상을 포착하라 (주성호)

(13) 앨런 튜링(1818~1883): 지식정보화 사회 연 ‘인공지능’의 아버지 (박정일)

(14) 장-프랑수아 리오타르(1925~1998): ‘숭고를 통해 니힐리즘 극복 (민승기)

 

(15) 막스 베버(1864~1920): 자본주의 동력은 돈이 아니라 삶의 의미 (윤원근)

(16)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지금, 여기, 나……이것이 ‘존재’다 (김동수)

(17) 장-폴 사르트르(1905~1980): ‘인간 이해’에 집중한 마지막 철학자 (변광배)

(18)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2009): 주고 받아라, 그것이 관계요 곧 존재다 (유충현)

(19)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 자본과 권력의 폭력에 맞서 ‘사회투쟁’ (성일권)

(20) 안토니오 네그리(1933~   ): 역사를 주도하는 건 자본이 아니라 노동 (조정환)

 

(21) 자크 라캉(1901~1981): 하고 싶은 대로, 네 욕망에 따라 행동하라 (유충현)

(22) 엠마누엘 레비나스(1906~1995): 너와 나 ‘마주침’의 윤리학 사유 (이정우)

(23) 미셸 푸코(1926~1984): 보편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지적 폭력’ 통찰 (임상훈)

(24) 질 들뢰즈(1925~1995): 존재와 접속하라, 그리고 창조하라 (유충현)

(25) 자크 데리다(1930~2004): 형이상학의 폐쇄적 원리 해체 (진태원)

(26) 슬라보예 지젝(1922~1996): ‘예’라는 잉여물 통해 걸러낸 진실 (민승기)



※ 예고된 소개 목록을 참조하면 실현된 목록에는 두 명의 사상가가 빠져 있다.

발터 벤야민과 자크 랑시에르이다.

어쩐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적합한 필자를 못 구해서가 아닐까?

벤야민은 모르겠고, 랑시에르는 은근히 소개할 만한 사람이 없는 사상가이기도 하다. 

컨대 랑시에르는 우리나라에서 지젝이나 네그리 같은 호사(!?)를 못 누리고 있는 대표적인 프랑스 사상가 중의 하나이다(더 정확히 말하면 마땅한 필자가 없어서 못 구했다기보다는 마침 그 시간에 글을 써줄 필자를 못 찾았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어쨌든, 어느 경우가 됐든, 랑시에르가 호사를 못 누리고 있는 건 틀림없다).

 

그나저나 저 분류는 다시 봐도 정말 흥미롭다. 

‘욕망의 꽃, 윤리’라는 분류도 (내게는) 참 신비로웠지만, ‘아트혁명, 노동과 여가’에 비하면 뭐……. 실로, 푸코 편의 시작에 인용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동물 분류별’에 버금가는 기상천외한 분류법이다.

아마 이 시리즈가 단행본으로 나온다면 나는 이 분류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책을 사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정작 문제는 분류법 자체가 아니라 그 분류법을 (충분히) 증할 만한 내용으로 개별 사상가가 소개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령 푸코를 ‘욕망의 꽃, 윤리’라는 범주에 포함시켰다면, 짧은 지면을 감안해 차라리 ‘후기 푸코’에 초점을 맞추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 (끝)



임상훈







출처 : 한국 문화의 원류
글쓴이 : 솔롱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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