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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철학적 사유

doll eye 2018. 7. 4. 17:33

철학적 사유


철학은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개념적으로 반성하는 작업이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어떤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이것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내가 세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세계, 혹은 자연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나는 인간에 대해서, 인간의 삶에 대해서, 삶의 의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철학적 사유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따라서 철학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내 생각들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작업이다.


나는 세계에 대해서 혹은 자연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철학자들은 물리주의(physicalism) 혹은 자연주의(naturalism)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세계는 바로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모습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물리학에서는 세계와 자연은 물리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 물리적인 것의 본성 및 특성에 대해서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 바로 물리과학이다.

우리는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세계의 모습에 대해서 이미 과학을 통해 배웠다.

나아가 과학은 인간의 다른 지성적 활동보다 더 높은 지성적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이유 때문에 적어도 자연과 세계에 대해서 물리주의, 혹은 유물론(materialism)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 우리가 자연스럽게 갖고 있는 자연에 대한 생각은 절대로 물리주의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친숙한 생각은 자연을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자연은 우리 인간의 불안과 상처에 따스한 이야기를 건네주는 그런 것이기도 하다.

시인들은 자연의 이러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이런 자연에 대한 생각은 과학을 통해 배운 물리주의,

혹은 과학의 기본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주의와 마찬가지로 우리 동양인에게 친숙한 것이기도 하다.


<중국인이 보는 삶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다시 번역된 <중국인의 생철학>에서 방동미는 중국인의 자연관을 다음처럼

요약한다.

<우주란 만상(萬象)을 포괄하는 생명의 약동이며, 만상에 충만한 생명의 기틀로서 잠시도 창조와 화육을 쉬지 않으며

어느 곳에든 유행하고 관통하지 않은 데가 없다.>


우주는 생명의 약동이다. 따라서 우주는 기계적 물질이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다.

생명은 물질적 조건 이외에 정신적인 의미와 가치도 가득 차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우주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인이 생각하는 우주는 정신과 물질이 철두철미하게 삼투되거나 여과되어 생명의 합일체를 형성하도록 되어 있는

화해의 영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이 스며들 틈은 없다.

나아가 우주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마치 어머니와 같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우주에 <도덕성과 예술성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즉 우주는 보편생명의 표현이며, 그 샘명은 물질과 정신이 융통되고 혼연일체가 되어 어떠한 내적 모순도 없다.

<지극한 선과 완전한 아름다움을 포함한 모든 가치 이념은 생명의 기운이 힘차게 용솟음쳐 나오듯이 가득하게 실현될

수 있다.>


우주는 과연 생명의 약동인가?

그렇다고 해도 그 생명의 현상을 물리주의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은 도출되지 않는다.

방동미는 정신적 의미와 가치 때문에 물리주의적 세계관 혹은 근대과학의 세계관을 거부하고 있는데, 오히려 철학적

으로 중요한 문제는 김재권이 그의 <물리적 세계에서의 마음>에서 지적하듯이 그 물리주의 안에 어떻게 정신적 의미와

가치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나는 자연 안에 도덕적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는 중국인의 자연관이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을 들어다 보라. 거기에 어디 가치가 존재하는가? 오직 자연적 사실만이 있을 것이다.


방동미의 <중국인이 보는 삶의 세계>는 중국인의 철학, 우주관, 인간관, 생명정신, 도덕, 예술, 정치 등을 고찰하고 있다.

<중국인의 생철학>으로 번역되었을 때, <인도인의 생철학>이란 책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왜 <한국인의 생철학>이란 책은 없는가?

한국인이 생각하는 철학 혹은 학문, 한국인의 우주관과 인간관, 도덕, 예술, 정치에 대한 한국인의 사유, 이런 것들이

해명하고 있는 책이 왜 없는가?

철학이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들에 대한 개념적, 논리적 반성이라고 할 때, 이런 종류의 책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함축하는가?


비록 철학책은 아니지만, 세계와 인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추론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 하나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것이 이어령의 <한국인의 신화>라는 문고본이다.

이어령의 <한국인의 신화>는 <삼국유사>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해명하고 있는 책이다.

거기에서 이어령은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자연의 산수를 따르는 마음, 그것이 한국인의 정신적 고향이었으며, 신이 사는 곳이었다.

하나의 이론보다, 계시(啓示)보다도, 어떤 예언보다도 장엄한 산, 맑은 물, 그리고 아름다운 그 모든 자연의 경관을

바라볼 때, 그들은 신의 모습과 그 음성을 들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태백산 높은 영마루에서 그들은 환웅(桓雄)의 신이 내려오는 것을 상상했고, 그 산정의 경치에서

신시(神市)의 마음을 꿈꾸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정신적 고향은 자연을 따르는 마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어령은 자연에 터잡은 위치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절을 세우는데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종교도 한 가정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부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산수의

아름다움을 통해서였다. 부처는 불경(佛經)보다 자연의 산수 속에 있었다.>

자연, 산수의 어떤 장소는 아름답다.

어떤 중요한 것은 그 아름다운 자연의 장소에서 보존되거나 실현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왜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국가를, 조상을, 신을 파악>해야 되는가?

과연 자연의 아름다움은 국가, 조상, 신을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원형적 틀을 보여주는가?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소박한 소망의 표현은 아닐까?



<루틸리지 철학백과사전>에서 <유물론>에 대해서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유물론은 실재의 궁극적 요소가 물질적 혹은 물리적 물체, 요소,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일반 이론이다.

유물론은 일원론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유물론은 이원론과 대립한다.

이원론에 의하면 육체와 정신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다.

나아가 유물론은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는 관념론과 대립한다.

또한 유물론은 추상적 대상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유물론의 함축에 의하면, 다양한 질적 경험은 궁극적으로 양적 변화로 환원된다.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들의 속성은 물질의 속성으로 환원된다.

비록 의도, 믿음, 욕망, 의식 등의 심적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들이 물리적 사건을 지칭하는 용어들과 다른 의미와

사용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일관성 있는 유물론자는 그러한 심적 용어들이 물리적 사건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지칭

한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과학의 발전은 유물론을 지지하고 옹호할 수 있는 거대한 증거를 축적해 놓았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런 유물론에 매력을 느낀다. 그것은 환원적 단순성과 과학적 지식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사실 나는 맨 처음부터 유물론이나 물리주의라는 철학적 입장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지녔던 어떤 문학적 혹은 실존적 성향 때문에 유물론이나 물리주의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다.

이러한 반감은 때로 모든 것을 과학적 관점과 척도에서만 판단하고, 오직 과학적인 것만 가치가 있다는 과학주의에

대한 반감과 손을 잡는다.

그러나 과학적인 것은 가치가 있지만, 그렇다고 오직 과학적인 것만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런데 유물론이나 물리주의에 대한 반감은 은연중에 과학적인 것은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게 만든다.

과학의 형이상학은 물리주의이다.

따라서 이 물리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적어도 <존재적 측면>에서 과학적 가치를 부정한다.


과학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쉽게 물리주의나 유물론을 부정할 수 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가 지적한 것처럼 과학은 기껏해야 표상의 세계, 현상의 세계, 우리가 구성한 세계를 다룰 뿐이지

결코 실재의 세계를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오히려 실재의 세계는 과학적 표상, 혹은 오성의 세계를 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기껏해야 과학의 세계는 방동미가 지적하는 것처럼 추상적인 법칙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추상적 법칙은 생생한 실재, 구체적인 실재를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이것이 비과학적 형이상학, 예술, 혹은 종교나 신화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사유 경향이다.


나는 내가 예전에 지녔던 이러한 사유 경향이 과학이 지니고 있는 힘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과학은 과학의 형이상학, 즉 물리주의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활동이다.

세계의 존재를, 생명의 존재를, 마음의 존재를 그 물리주의라는 형이상학을 통해서 인과적으로 설명해 준다.

이 과학의 설명은 다른 설명보다 더욱 합리적이며, 그만큼 설득력이 더 많다.

이것이 실재에 대한 설명에서 다른 설명보다 과학적 설명에 더 신뢰하는 이유이며, 이것을 부정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셀라스가 이야기하듯이 과학은 언제나 우리 사유에 도전적이다.

나아가 과학은 사물들을 바라보는 탈인간적 사유이다.

가령 자석에 못이 들러붙는 현상을 ‘사랑의 원리’로 설명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그러나 이런 인간적 사유가 투영된

설명은 그만큼 비과학적이며 비합리적이다.

그가 진흙에 입김을 불어 넣어 인간의 생명을 만들어 냈다는 설명은 시적으로 매력적이지만, 그러나 적어도 내 상식

으로는 전혀 믿을 수 없다.

우주가 이치와 기운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는 설명이나 존재가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명은 비록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지라도, 비과학적이거나 과학적 형이상학에 배치된다.

이럼에도 과학적 형이상학, 혹은 물리주의를 거부하는 연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 과학이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 혹은 과학과는 다른 인간의 활동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부정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가치를 부정하고 과학적 세계의 유일성만을 인정하는 것이 쉬운 철학적 전략이기도 하다.

따라서 과학적 세계관에 배치되는 것들, 가령 신의 존재, 정령의 존재, 모성적 자연, 목적론적 자연, 이치와 기운으로

되어 있는 자연, 혹은 태극, 물리주의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난 생명의 약동, 영혼의 존재, 마음과 의식의 존재, 미세하게

느끼는 감각의 숨결, 이 모든 것을 환상적인 것으로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 전략은 마치 과학을 부정하고 자신이 강한 인상을 받았던 종교, 예술, 신화의 경험을 강조하는

사유 전략과 마찬가지로 투박한 사유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김재권이 물리 세계 안에 마음의 위치를 설득력 있는 규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진정한 철학적 과제는 이 두 가지

사유 경향을 세계와 인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적 지도 안에 적절하게 위치시키는 것이다.

셀라스는 이것은 과학적 영상과 현시적 영상(manifest image)의 통합이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철학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과학적 영상만을 강조하거나 혹은 현시적 영상만을 강조한다면, 이러한 과제는 사라져 버린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사유해야 할 철학적 근본 문제를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본다면 방동미가 묘사했던 중국인의 자연관 혹은 우주관이나 이어령이 묘사했던 한국인의 근원적 생각을

부정해 버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중국인들이 그런 자연관을 가진 것은 아직 과학이, 근대적 의미의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기에 가졌던 소박한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아름다운 산수에 절을 위치시키려고 했던 우리의 사유는 이어령이 지적했듯이 기껏해야

풍수지리설의 미신으로 전락해 버린다.

따라서 이런 생각을 버리고 과학적 생각으로 우리의 생각을 대체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실재의 문제, 혹은 존재의 문제에서 과학적 지식과 과학적 세계관의 우선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것이

그와 다른 사유를 부정한다는 것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을 유기체로 보는 것은 적어도 실재와 존재의 측면에서 틀렸다.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측면의 중요성과 의미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자연을 우리 인간과 동형적으로 유기체로 간주한다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름다운 산수에서 한 가족이나 집단의 행사를 한다는 것, 이런 행위의 밑바탕에 깔린 생각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심미적으로 세상 바라보기>라고 생각한다.

이 심미적 관점은 비록 실재와 존재의 차원에서는 거짓이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우리 인간 사유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근대적 세계관, 혹은 데카르트와 뉴턴으로 이어지는 기계론적 우주관이나 선형적 진보사관에 의존한 과학기술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관, 즉 생태지향적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은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혹시 이러한 생각은 과학적 지식과 그 응용적 사용인 과학기술을 구분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나아가 새로운 가치관이라는 그 패러다임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가치관인가?

아니면 자연 혹은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틀인가?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은 이러한 문제들을 자세하게 따지지 않은 채 아주 쉽게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마치 진리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비판적인 철학적 사유는 성장할 수 없다.


나아가 제시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언제나 그 곳에서 먼저 주장되고, 그것을 우리 사유의 흔적들에 적용하면서도

이러한 비판적인 철학적 질문을 하지 않을 때, 결국 우리의 사유는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언제나 그 도구의 틀을 제시해 주는 것이 그 곳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이론이 될 것이다.

우리의 것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촌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무비판적으로 그들의 것을 사용하는 것은 경박

하다.

우리의 것이 되었던, 혹은 그들의 것이 되었던 간에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지금의 문맥에서 철저하게 따져보는 일이다.


그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본적 주장이 무엇인가?

인간과 자연의 공존 혹은 일치, 모든 생명체의 평등성, 유기체적 세계관 혹은 관계적 세계관 또는 전일적 세계관,

그리고 일원론이 그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본적 주장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우리 전통적 사유에서 아주 쉽게 지적해 낼 수

있다.

따라서 서구의 생태주의가 주장되기 이전부터 우리는 이미 그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을 알고 있었던 셈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전통적 사유는 미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보석이다.


진정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이다. 인간은 이미 이 자연 안에 편입되어 있다.

나아가 이 자연이 진정한 자아이며 대문자 자아이다.

우리 인간은 이 진정한 자아인 대문자 자아 속에 편입된 작은 자아이다.

<생태주의의 두 축인 전일적 패러다임과 생물중심적 평등성 중 자아실현은 전일적 패러다임과 관련된 것으로서,

우주라는 큰 자아 속에 편입된 작은 자아인 자신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자아실현은 편협하고 고립된 경쟁적 에고에서 벗어나 우리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인류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 시작되는 것이므로 인간됨을 넘어서 비인간 세계와의 동일시까지도 포함되는 셈이다.>


하나의 큰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는 그것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실재인가?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주장이다.

그 진정한 실재는 예술가 김동리의 상상력을 통해서 입증되는 것도 아니고, 우주에 내재한 리듬을 절실하게 체험

한다고 이야기하는 개인적 감동에서도, 또 노자와 장자의 형이상학적 주장에서도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모든 주장들이 정당하다고 가정할 때, 과학의 성공 가능성을 해명할 방법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전체론(holism) 혹은 전일적 세계관이 반드시 유기체적 세계관의 독점물은 아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보여준 과학의 세계는 비록 유기체적 세계관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전체론적이다.

셀라스는 이 전체론을 간명하게 표현한다.

즉 개별적 혹은 단칭적 판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반 원리를 선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체를 규정하는 그 일반 원리들이 개별적이고 단칭적 판단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다.

이런 전체론을 개념적 전체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개념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우리의 판단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반적 원리를 선제해야 한다.

이 일반적 원리 때문에 비로소 과학이 지닌 필연성과 보편성이 해명될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전체가 개념적으로 혹은 인식론적으로 그렇다는 것뿐이다.

그것이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함축은 모른다.

내가 수용하고 있는 물리주의는 칸트가 보여주는 이런 소심함을 넘어서 그것을 자연 혹은 실재에까지 확장시킨다.

맥도웰이 그렇게 불렀듯이 자연의 논리적 공간, 혹은 자연과학의 논리적 공간이나 법칙의 논리적 공간은 바로 자연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며, 셀라스에 의하면 바로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성공적인 이야기가 실재의 본성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셀라스는 진정한 존재론적 힘은 형이상학의 소관사가 아니라 바로 과학의 소관사라고 주장한다.

우주의 리듬, 장자가 말하는 하늘의 소리, 이 모든 것은 존재론적으로 거짓이다.

이런 사유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다. 


하나 지적할 것은 근대와 탈근대, 혹은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사유를 대조시킬 때, 언제나 나오는 원자론적 세계관과

전체론적 세계관의 대조, 혹은 실체론적 세계관과 관계론적 세계관의 대조가 아주 엉성한 이분법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근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칸트의 경우, 결코 그는 원자론적 세계관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전체론적이며 관계론적이다.

문제는 이 관계가 유기체적 관계가 아니라, 인과적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실체론적 세계관의 한계를 지적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유기체적 세계관이 정당하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비록 자연이 유기체적이지 않다고 해서 마치 자연을 유기체적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 부당한 것은 아니다.

존재적 차원이나 실재적 차원과는 다른 관점에서 우리는 자연을 마치 유기체인 것처럼, 마치 자연에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우주의 리듬이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할 수 있다.

비록 자연은 삭막한 인과적 작용이나 수학적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 자연을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생명이 살아 숨쉬고, 인간적 소통이 불가능한 모든 자연 사물들이 마치 우리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것처럼

간주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칸트가 심미성에 대해서 주장한 것이다.


자연 그 자체는 아름답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에 있는 어떤 흔적을 통해 내가 그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 흔적을 지적하면서 내가 구성한 아름다움에 누군가 동참할 수 있다면 나와 그는 동일한 심미성의 세계, 혹은 취향의

세계에 존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동참이 단지 논리적이고 이론적 인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상상력과 감정이 개입된다.

흔히 생각하듯이 이 상상력과 감정조차 개념적인 것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상력과 감정은 비확정적인 개념에 내용을 구성하는 기능을 한다.

칸트가 지적했듯이 바로 이러한 작용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다.

따라서 문학 생태학에서 주장하듯이 문학은 근본적으로 생태학적이라는 주장도 정당화될 수 있다.


자연, 실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자연과학이 보여주는 이야기를 통해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생각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친근하게 갖고 있는 생각과 충돌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자연과 실재의 문제에서 우리가 친숙하게 느끼는 그런 생각은 포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가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무가치한 사유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과학적 사유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가지 태도라는 것이다.

비록 실재의 진정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다른 차원, 즉 심미적 차원이나 인간적

차원에서 그것은 과학적 사유가 보여주지 못하는 혹은 과학적 사유가 관심을 갖지 않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준다.


장자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는 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날라 다닌다.

데카르트도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는 나비가 되었다가 깨어난다. 그리곤 심각하게 생각한다. 내가 꿈속에서 나비

였는데 깨어나 보니 데카르트이다.

유사하게 나는 지금 나를 데카르트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이 혹시 꿈이 아닌가? 이래서 실재와 환상, 혹은 현실과

꿈의 차이성에 대한 인식론적 탐구가 시작된다.

그러나 장자는 이런 사유의 길을 선택하고 있지 않다. 비록 꿈에서라고 할지라도 내가 내가 아닌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분명히 나는 네가 아니지만, 그러나 나는 네가 될 수 있고, 너는 내가 될 수 있다.


장자는 자기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다고 이야기한다.

친구인 혜시가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나아가 알았다고 해도 그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인지,

물고기의 고통인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혜시의 도발적인 질문에 장자가 이야기한다.

너는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해보자. 그런데 너는 내가 아닌데 어찌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인간인 장자가 인간이 아닌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찌 알 수 있는가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가 된다.

그러나 혜시는 장자의 반문에 입을 다문다.


때로 이 장자와 혜시의 논쟁을 타인의 마음 존재 문제로 다루고 있다.

타인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핵심은 그런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핵심은 동참의 문제이다.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다는 장자의 이야기에 동참한다면 분명한 것은 네가

그것을 어찌 알았는가 하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장자와 혜시 사이에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타인의 마음이 선제되어야 한다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선제될 수밖에 없는 타인의 마음을 철학적으로 증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대화의 내용 자체가 보여주는 진실성이 더욱 중요하다.

유사하게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한 장자의 이야기와 그 묘사에 동참하여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이야기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으며, 그 공감이 무엇을 함축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고, 물고기나 나무의 즐거움을 이해하고, 거기에 있는 자연 사물의 속마음을 이해한다고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에 동참하는 것이다.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타인의 경우에도 이해와 공감적 상상력을 발휘할 때 그가 나와 유사하고 어떤 의미에서

동일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와는 전혀 취향이 다른, 따라서 상종할 수 없었던 존재였던 그가 사실 나와 유사하게 인간적 고통과 불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비록 생물학적 종은 다르지만 내가 상상력의 공간에서 그 동물이라고 생각할 때 그 동물이 갖고 있는 고통과

상처를 이해하는 듯이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동물이나 나는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한 형제이다.

비록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가 저기에 서있는 바위가 된다고 상상할 때, 한 시인이 노래 불렀듯이

바위의 고통과 의지를 이해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이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와 한 가족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세상을 이런 방식으로 보자는 제안이며,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있다면 이런 사유에 동참할 것을 요구

하는 제안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형제와 가족을 이룬다는 생각, 나아가 그 전체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동등한

존재론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생각, 내가 보기에 이것이 장자의 제물론이 말하고 싶은 핵심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이상학적 주장은 진리인가?

나는 이런 형이상학적 주장을 동참을 요구하는 하나의 제안으로 보고 싶다.

그 제안에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있으면 동참하라. 그리고 그런 방식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라.

만약 이러한 제안이 시시하거나 엉터리처럼 느껴진다면 동참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에는 인간의 연대성, 생명의 연대성, 존재하는 사물과의 연대성이 깔려 있으며, 그것이 주는 함축이 바로 넓은 의미에

도덕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제안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런 연대성이 함축하는 도덕적 의미를 대체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대안이 필요할 것이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다양한 의미가 가능할 수 있겠지만, 아마 타인을 배려하고 염려하는 것이 도덕적인 것의 한 부분 혹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타인을 배려하고 염려해야 하는가?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왜 그것이 옳은가? 그것이 옳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만약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한 가족을 이루는 존재라면, 내가 내 가족 구성원을 도구로 간주하여 사용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배려하고 염려해야만 한다.

그러나 진짜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한 가족을 이루고 있는가?


타인을 배려하고 염려하는 것이 결국 우리에게 이익을 준다.

그런데 그것이 주는 이익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개인적 즐거움 혹은 쾌락인가? 아니면 행복인가?

혹은 어떤 보상인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만약 우리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타인을 배려하고 염려

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염려하는 것보다 내 자신을 깊게 배려하고 염려하는 것이 더 많은

이득을 준다. 따라서 나는 기꺼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염려를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래야 되는가?


맹자로부터 비롯된 전통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다. 진정한 인간은 올바름을 생각하지만, 소인배들은

이익을 생각한다.

내 이익, 내 행복, 내 쾌락이 진정한 올바름에 어긋날 때 그것은 그렇게 큰 가치가 없다.

나아가 그런 가치가 없는 이익, 행복, 쾌락을 추구하는 자는 소인배,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왜 동양철학 혹은 중국철학이 이익을 강조하고 도덕의 구체적 현실성을 강조하는 경향, 나아가 공리주의

에 대해서 그렇게 비판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비록 구체적이고 실질적 효과가 없다고 할지라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며, 추구해야 할 것은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분명히 나에게 이런 전통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공리주의의 윤리학이 싫다. 도덕적 가치는 단지 사회적 유용성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모든 것이 다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에게 유용하지 못하고 나아가 이익을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우리 사회를 도덕적으로 만드는 데 어떤 도움을 준 것인가?

장자를 비판하는 혜시의 지적처럼 그것은 단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공허한 목소리에 지나지 않는가?

유교를 비판하는 묵자의 주장처럼 그것은 비현실적인 목소리가 아닌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백종현에 의하면 이런 경향이 바로 칸트의 윤리학이 우리에게 친근하게 받아들여지는 한 계기가

된다.

동기주의, 법칙주의, 의무주의 윤리학은 어떤 의미에서 도덕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 사유 혹은 동양적 사유와 친근하다.


비록 심미성이나 예술은 그 자체 자율적이지만, 그럼에도 칸트에 의하면 미는 도덕성의 상징이다.

칸트는 이것에 대해서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심미적인 것은 윤리적으로 좋은 것의 상징이며, 그리고 또한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또한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의무를 요구하는 관계의 이러한 관점에서만 심미적인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요구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감각인상에 의한 쾌의 한갓된 수용을 넘어서 어떤 순화와 고양을 의식하며,

다른 사람의 가치도 그들의 판단력과 비슷한 수준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칸트가 이야기하는 상징은 어떤 의미에서 <은유>라고 불러도 좋다.

따라서 심미적인 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의 은유적 표현이다. 칸트에 의하면 개념의 실재성에 직관이 요구된다.

경험적 개념일 때, 그 직관을 실례라고 부른다.

지성 개념일 때 그 직관은 도식이다. 반면에 이성 개념, 혹은 이념에서 그 직관은 주어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이성 개념, 이념에 대한 형이상학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성 개념을 감성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이 감성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상징

이다.

<상징의 경우 오직 이성만이 사고할 수 있으며, 그에 적합한 어떠한 감성적 직관도 있을 수 없는 개념의 근저에, 그것을

가지고 판단력이 도식화에서 준수하는 방식에 한낱 유비적으로 수행하는 직관이 놓인다.>

아마 이런 유형의 문장을 독해하는 좋은 방법은 끊어 읽는 것이다. 상징의 경우 이성만 사고할 수 있다.

그에 적합한 감성적 직관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거기에는 유비적으로 수행하는 직관이 있다. 따라서 이성 개념이나 이념을 감성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는

상징은 달리 이야기하면 유비, 혹은 비유이거나 은유이다.

유비나 은유가 그렇듯이 그것은 어떤 개념의 실재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표상 방식이 대상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이론적으로 규정하는 원리가 아니라, 대상의 이념이 우리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이념의 합목적적 사용에 대해서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실천적으로 규정하는 원리에 이런 일이 충

분히 허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신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인식은 한낱 상징적이다.>


존재의 전체성 혹은 그 전일성이 장자가 이야기하듯이 우주나 하늘의 소리로 표상된다.

그 하늘의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하늘의 소리는 칸트적 맥락에서 바로 도덕성의 상징이다.

모든 것이 제 각기 자기 소리를 내지만 그럼에도 그 소리가 묘하게 조화되어 아름다운 우주의 소리로 들릴 때, 우리는

그 소리에 동참하기를 타인에게 권유한다.

만약 누군가 그 소리에 동의하고 동참한다면 우리의 판단력을 동일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취향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아니면 세계를 바라보는 유사한 시각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칸트는 이 시각에 다음과 같이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판단력은 주관에서의 이러한 내적 가능성으로 인해서, 주관 자신 안에 그리고 주관 밖에 있는 어떤 것에, 자연도

아니고 자유도 아니면서도, 그러나 자유의 근거와, 곧 초감성적인 것에 연결되어 있는 어떤 것에 자신이 관계 맺어

있음을 본다.

그리고 이 초감성적인 것에서 이론적 능력은 실천적 능력과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어떤 공통적 방식으로 결합

되어 통일된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초감성적인 것, 자유의 근거가 되는 어떤 것, 거기에서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은 통일된다.

칸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판단력이 초감성적인 것에 연결되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감관의 자극으로부터 습관적인 도덕적 관심으로의 이행을 너무 억지스러운 비약 없이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자연에 대한 전통적 사유가 바로 이 점에서 일종의 도덕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와 예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무엇인가?

미와 예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어야만 비로소 그 생각을 정당화하고 그 생각이 갖고 있는

의미와 한계에 대한 규명이 가능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이 바로 철학적 미학이다. 이 철학적 미학을 예술철학과 구분하면서 더 이상 미나 심미성을 철학적 사유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되지만, 이러한 주장조차 넓은 의미의 철학적 미학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따라서 나는 철학적 미학과 예술철학을 엄밀하게 구분하여 부르는 것보다 그냥 편의에 따라 포괄적으로 부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미와 예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있을 것인데, <한국미학>이라는 명칭으로 나온 철학적 연구 작업은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물론 문학이나 연극, 혹은 미술사 등에서 <미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여유와 느림의 미학, 여유와 풍자의 미학

등의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때의 미학은 마치 <축구의 미학>이나 <폭력의 미학>처럼 그것을 아름다움과 심미성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나온 지 오래되었지만 박용숙의 <한국의 미학사상>도 이와 비슷하다.

원래 책의 제목이 <한국음양사상의 미학>이었는데, 수정판을 내면서 <한국의 미학사상>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책에 의하면 우리의 미학사상은 바로 음양사상이며, 우리의 미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시미>이다.


<실제로 이 책의 내용을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게 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한국인에게 과연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며, 아직도 우리 시대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해결해 보려는 소박한 희망 때문이다.

이미 조지훈이 제기했던 앎, 아름이라든가, 맛, 멋의 용어들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그러하며, 바시미와 같은 새

용어를 써 본 것도 그런 의도 때문이다.

바시미는 건축용어의 하나로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와 나무를 잇거나 끼워 맞추는 법을 뜻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음양사상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한국인의 아름다움의 구조는 바시미의 구조미에

있다고 보고 싶은 것이다.>


비록 예술에 대한 자율적 의식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아름다움에 대한 어떤 의식이 우리에게 없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자연에 대한 경탄이나 황홀한 풍경에 대한 감탄은 그만큼 우리 인간에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미학의 소재이다.

철학적 미학은 그 소재를 깊이 생각하는 지성적 작업이다.

자연에 대해서 느끼는 이 경탄이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는가? 그것은 과연 자연 자체가 갖고 있는 특성인가?

아니면 내가 느끼는 성질에 지나지 않는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지성적 작업이 우리에게 낯설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우리가 향유하고 느끼는 대상이지, 그것에 대해서 성찰하고 숙고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성찰적 작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도 과거 우리가 생각했던 미와 예술에 대한 생각들에 대한 체계적 정리가

필요하다.


과거 한국인들은 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

어떤 단일한 본질적인 요소를 추출해 낼 수 있는가? 그런 미의식이 있었다면 그것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과

연속적인가? 아니면 단절적인가? 그것과 예술은 어떤 관계인가?

이런 문맥에서 박용숙이 제기한 문제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조지훈이 했던 선행 작업을 더 확장해서 바시미의 구조가 한국미의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

따라서 <우리의 아름다움은 바시미의 구조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정당화해주는 근거가 무엇인가?

우리의 아름다움이 바시미의 구조라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우리의 아름다움이 서로 대조되는 것, 상보되는 것, 혹은

상극되는 것들의 조화, 통일이라는 말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 답변이 바로 음양사상에서 마련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음양사상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주장인가?


비록 음양사상이 우리 전통적 사유나 문화 양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나는 그 주장에 대해서 그렇게 호의적

이지 않다.

그러나 묵경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A.C. 그래험은 <음양과 상관적 사유>에서 음양사상이나 중국사상에 나타나는

기본적 사유 양태를 음양적 사유, 상관적 사유, 유비적 사유라고 부르며, 그것이 분석적, 개념적, 논리적, 인과적 사유에

비해 더 원형적이며 근본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래험의 주장과 유사하게 에임스와 홀에게도 상관적 사유, 유비적 사유, 혹은 심미적 사유 양태가 더욱 근본적이며

원형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과학에서 비롯된 인과적이며 분석적인 사유는 오히려 이러한 근원적 사유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

는다.

그래험이나 근대적 사유를 비판하면서 탈근대주의를 내세우는 에임스와 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문제는 단지 서양

근대적 사유와 동양적 사유라는 대립을 넘어서 자연과 실재를 바라보는 과학적 사유와 비과학적 사유의 대립, 나아가

근대적 사유와 탈근대적 사유의 대립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문제에 맞닿아 있다.


상관적 사유, 유비적 사유, 음양적 사유, 심미적 사유 혹은 구조적 사유는 다른 곳에 은유적 사유라는 명칭으로 나타

나기도 한다.

우리에게 이미 유명해 진 레이코프와 철학자 M.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관점이

되는 일상적 개념체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다>고 주장한다.

이마 이 은유에 대조되는 것이 글자적(literal) 사유일 것이며, 그것은 우리 언어의 기본 문장들이 참이거나 거짓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글자적 의미로 되어 있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레이코프와 존슨에 의하면, 이러한 주장은 말 그대로 <객관주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러한 주장을 더욱 확장하여 심신문제에도 적용한다.

그 결과가 바로 <몸의 철학>이라고 번역된 그들의 작업이다.

이 방대한 저술에서 그들은 다음처럼 주장한다.

<인간의 의미와 개념화 사유 작용이 신체적 경험, 특히 감각운동 경험에 근거한다는 것이며, 이성의 이러한 신체화된

양식이 개념적 은유의 상징적 기제를 통해 추상적 사고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마음과 사고에 관한 이러한 경험적 탐구에 관해 알게 되면서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서구적인 철학적, 종교적 전통

으로부터 물려받은 마음과 언어에 관한 거의 대부분의 주괸 철학적 가정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정당하고 참이라면, 분명한 것은 내 사유 방식이 이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서구적 사유의 철학적

가정이라는 것이다.

내가 존재적 차원, 혹은 실재적 차원에서 거의 헛소리 정도로 취급한 동양적 사유 양태가 오히려 경험적, 인지과학적

탐구에 의하면 우리의 본래적이며 근원적인 사유 방식이며, 내가 갖고 있는 사유 방식이 오히려 객관주의의 신화에

빠진 혹은 여전히 데카르트적 이원성에 빠진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이들의 주장이 정당한가?


셀라스는 어디에선가 철학의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연관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내가 존재나 실재의 차원에서 물리주의를 주장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철학의 다른 분야나 문제들에 대해서

갖는 중요한 함축들이 있다.

그 함축들을 찾아 해명하고 그것들 사이에 일어나는 비정합성을 치유하고 교정하면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통관적

(synoptic) 견해를 갖는 것이 바로 철학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셀라스는 주장한다.

게다가 과학적 사유는 우리가 친숙하게 여기는 사유에 도전적이기에 언제나 새로운 철학적 문제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새로운 문제들과 그 해결이 주는 함축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분야에 미묘한 영향을 미친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사유를 반성하고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원론자이다.

그것은 내가 존재의 차원과 인식의 차원을 서로 다른 두 차원으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와 실재의 차원에서 물리주의, 자연주의, 유물론을 옹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식, 의미, 사유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의 마음 작용이 두뇌의 활동이듯이 인식, 의미, 사유가 존재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셀라스가 이야기하듯이 우리 마음의 작용은 두뇌의 신경 생리학적 작용이다.

그러나 셀라스는 이 사소한 진리가 해명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나는 셀라스의 이런 주장이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가 물질 알갱이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해도 놀랍게도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어떤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물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실제로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 그 정당성을 묻는 질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며 행위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을 사실로서 혹은 진정한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적이며 개념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바로

이 가능성의 물음이다.

칸트는 이 물음을 정당하게 물을 수 있고, 또 물어야만 한다는 것을, 바로 철학만이 고유하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보았다.

물질 알갱이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 존재가 생각하고 말하고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개념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여기에서 셀라스가 주장한 과학적 영상과 현시적 영상의 통합이라는 문제가 성립한다.


내가 존재론적 환원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의미에서, 즉 인식적이거나 방법적 의미에서 결코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

하는 언어, 의미, 개념, 사유, 인식의 차원이란 무엇인가?

나아가 왜 그것은 환원될 수 없는가?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의미에서 이 문제는 현대 분석철학 혹은 심리철학에서 가장 생생하게 토론되는 문제이며, 그만큼 중요한 문제

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물리주의와 동일한 유물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질이라는 주장이다.

자연과학은 존재하는 대부분의 사물들을 물리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음은 다음 두 가지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의식이다. 그것은 주관적 경험의 감각질(raw feel)이다.

둘째, 사유의 지향성이다. 우리 사유는 언제나 어떤 무엇에 관한 것이다.

이 관함이라는 지향적 관계는 일상적 의미에서 물리적 관계가 아니다.>


자연과학적 세계관, 혹은 물리주의적 프로그램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장애물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마음과 언어이다.

마음은 물리주의적 프로그램에 감각질, 혹은 표상질의 문제에 직면한다.

내가 지금 절절하게 느끼는 이 아픔은 전혀 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생생하게 느끼는 색깔경험은 물리적 과정으로 환원되어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어떻게 물리주의의 전체 프로그램에 맞게 설명할 수 있는가?

또한 우리 사유의 지향성도 물리주의적 프로그램에 대한 장애물이다.

내가 어떤 무엇을 생각하고 믿고 욕망하며 희망할 수 있다는 것, 즉 나와 그 사유 대상 혹은 사유 내용과의 관계는

물리적이거나 인과적 관계가 아니다.

이런 사유의 지향성은 언어의 경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언어의 의미는 물리적 소리나 물리적 형태로 환원될 수 없다.

언어의 의미는 사유의 지향성처럼 심리적이지 않은 언어적 지향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가장 강성인 것이 제거론이다. 제거론에 의하면 감각질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심적 상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과 그 구성물이라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과학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다.

제거론과 다른 접근 방식은 환원주의이다.

환원주의는 우리의 내적 경험과 지향성을 물리과학이 수용하는 그런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따라서 마음을 행동을 설명하는 역할에서 분석하려고 한다.

세 번째 접근 방식은 유물론자가 마음의 실재성과 비환원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은 인과적 의존성보다 더 밀접하게 물질에 의존해 있다. 이런 유물론은 마음의 비환원성에 의해서 위협받지 않는다.>


이 세 가지 입장 중에서 아마 내가 갖고 있는 생각과 가장 가까운 것이 비환원적 유물론일 것이다.

그러나 비환원적 유물론은 그 명칭이 보여주듯이 심적 현상은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것이 환원되지 않는다면 다만 인식적 차원에서 그럴 뿐이라고 생각한다.

왜 마음은 인식적 차원에서 환원되지 않는가?

셀라스는 이러한 환원의 시도가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인식의 차원 혹은 사유의 차원, 마음의 차원이 ‘이성의 논리적 공간’ 안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 이성의 논리적 공간은 규범성이 지배하고 공간이다.

어떤 규범성이 지배하는가? 그것이 셀라스가 만든 조어로서 존재 당위(ought-to-be)의 규범성이다.

이 공간은 물리적 법칙이라고 도저히 부를 수 없는 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공간은 물리적 법칙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의미론적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나아가 이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 형식적,

혹은 분석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질료적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이 공간에서 어떤 주장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은 자연적 사태를 서술하거나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공간 속에서 비로소 인간으로 태어난다.

우리는 이 공간 덕분에 말하고 사유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물리적 알갱이가 바로 인간으로 되는 계기이다.

셀라스는 이 이성의 논리적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갖는 영상을 ‘현시적(manifest) 영상’

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영상은 물리적, 인과적, 자연적, 과학적 영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셀라스 철학의 한 쪽을 이어받고 있는 처칠랜드는 결국 이러한 현상적 영상의 세계는 제거되고 오히려 과학적

영상의 세계로 대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혹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통속적 심리학은 제거되어 과학적 심리학으로 대체된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통속적 심리학이 아주 자명하게 가정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구성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론을 통해 구성된 이론적 대상물이다.

데카르트가 들었다면 아마 깜작 놀랐을 이러한 주장은 한 철학자가 바로 셀라스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은 이론적 구성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해 우리가 고안해 낸

이론적 대상물이다.

무엇에 근거해서 그런 이론적 대상물을 고안해 내었는가?

셀라스에 의하면 그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유는 언어의 유비적 확장이며, 사유의 지향성은 언어적 지향성에 근거하고 있다.


썰(J. Searle)이 강조한 것처럼 언어철학과 언어적 철학은 서로 구분되는 개념이다.

언어적 철학은 언어를 통해서 철학하는 철학적 방법론의 개념이다.

따라서 언어적 철학은 철학적 문제들이 언어적 문제들이라고 보고, 언어를 고찰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해소하려고 한다.

반면에 언어철학은 철학적 주제에 대한 명칭이다.

그 언어철학의 주제가 바로 언어이다. 썰이 예시하고 있는 것처럼 언어의 의미, 지칭, 진리, 언어행위 등이 언어철학이

다루고자 하는 철학적 주제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구분된다면, 언어적 철학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도 언어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적 철학의 방법이나 이 방법을 주장하는 경향이 속해 있는 분석철학 이외에 철학적 경향에서 언어철학에

대한 탐구들이 눈에 띠질 않는다.

분명히 소쉬르의 언어학이나 기호학에서도 언어철학적 탐구가 있을 것인데, 분석철학의 언어철학은 이러한 경향들을

잘 다루지 않는다.

분석철학이 언어를 강조한 것처럼 하이데거도 그 어떤 철학자보다 언어를 강조하고 있지만, 하이데거의 독특한 언어

철학도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나아가 동양철학에서도 언어철학이 가능할 수 있다.

물론 동양철학에서 나타나는 대표적 사유, 가령 노장철학이나 불교철학이 보여주는 언어 불신주의 때문에 언어를

탐구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지만, 그러나 이 언어 불신주의도 언어철학적 논제이다.


이즈쓰 도시히코의 <의미의 깊이>는 그 부제가 <동양사상으로 본 언어, 언어철학>이다.

동양철학적 사유 전통에서 이렇게 언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그는 이슬람 철학의 전공자라고 한다. 그가 번역한 <코란>은 일본에서 표준 번역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 책 첫 장 <인간 존재의 현대적 상황과 동양 철학>에서 전지구화 시대의 획일성과 다양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지구화 시대의 어떤 통일성, 전체성이 문화적 다양성을 무시하지 않는가?

나아가 문화적 다양성을 강조할 때 그것이 이런 통일성이나 전체성에 한계가 되지 않는가?

그가 바라보는 지금 전지구화 시대의 동인은 과학기술에 근거한 획일화이다.


<과학과 기술의 지나치게 빠른 진보가 기계 문명이라 불리는 지구 사회적 문명의 특수한 형태를 여기저기 만들어내고

있다.

모든 것을 기계화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단일화하는 것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방대하게 추진한 공업화는 인간의 물리적 존재 형태를 단일화해 왔다.

거의 비슷한 주거 형태의 표준적인 주거 공간에 살면서, 기본적으로 동일한 형태와 재료의 의복을 입고, 다 같이 오염

된 공기를 마시고, 누구나 오염된 고기와 채소를 먹으며, 수억 명의 인간들이 도처에서 다 같이 회색 빛깔의 밋밋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균일화의 밋밋함은 인간 생활의 표피에 머물지 않고 어느새 마음속까지 스며들고 있다.

현대 과학 기술의 특징적인 산물 중 하나인 매스 미디어의 폭력적 지배를 받으며,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리

계획된 어떤 일정 프로그램에 따라 사고하도록 훈련받고 있다.

이런 상태가 사람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획일적인 사고 습관으로 유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주장이야 많이 보아온, 그런 의미에서 식상한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가 겪는 위기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바로 과학기술에 의한 기계 문명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마 강한 전략은 그런 문명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문명을 제시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유력한 후보자는 이런 기계

문명에 이질적인 동양적 사유가 될 것이다.

어찌 동양적 사유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그 한 논거가 바로 그 사유가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을 보라. 그것을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계론적 사유가 아니라 동양전통에서 발견되는

사유이다.

이것이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카프라(F. Kafra)의 주장이다.

따라서 이즈쓰 도시히코에게서 카프라에 대한 언급을 있다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뉴턴의 기계론적 물질관은 한 마디로 말해 현실을 마음과 물질로 구분하는 기초적 이분법 위에서 성립하며, 마음과

물질을 서로 정면에서 대립하는 존재론적 양극으로 생각한다.

철학의 영역에서는 데카르트의 사상에서 전형적 형태로 나타나는 물심이원론이 이에 해당한다.

데카르트에게 마음과 물질은 결코 서로 환원될 수 없는 궁극적인 존재론적 실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는 절대로 내면

적인 관계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카프라의 표현을 빌리면, 물질 세계는 “그 자체가 본성상 생명이 없는 무수한 물체가 한데 모여 만들어진 터무니

없이 큰 기계”일 뿐이다.

물질 세계에 관한 이와 같은 기계론적 견해가 인간 생활 공간의 기술적 단일화라는 현상에 대해 강력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만약 데카르트가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무척 억울해 할 것 같다.

현대 문명의 모든 잘못, 그 원천을 모두 데카르트에게 돌린다.

그러나 그가 했던 작업은 물질의 범주와 정신의 범주를 명백하게 구분한 것이다.

물질이 생명이 없는 기계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물질 범주에서만 그렇다.

반면에 정신이나 신은 이러한 물질 범주와는 철저하게 다르다.

정신은 이러한 기계적, 인과적, 법칙적 범주로부터 벗어나 있다.

따라서 그러한 범주를 정신이나 정신이 활동하는 생활 공간에까지 확장하면 안 된다.

그렇지만 이런 데카르트의 경고까지 무시한 채 진행된 어떤 경향을 모두 데카르트의 것으로 돌린다.

따라서 이 모든 책임은 데카르트가 져야 한다.


<오늘날 현실을 의식과 물질로 엄격하게 이분하는 이 패러다임이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뀐 것이 사실이다.

현대 물리학은 이른바 물질적 대상을 동적 유동성으로 받아들여, 마음과 물질을 서로 침투하지 않으려 하는 두 개의

완전히 독립된 영역으로 더 이상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 아무튼 이 낡은 사고방식, 즉 기계론적 견해는 인간의 상식

적인 세계상과 완전히 맞아 떨어지며,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에 공업화 세계의 균일화된 생활 구조의 기반 자체를

여전히 강력하게 지탱하고 있다.>


이 강력하게 지탱하고 있는 패러다임을 폐기해 버리는 것이 부담이라면 약한 전략을 택하면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 기계론적 패러다임과 그것에 이질적 패러다임을 통합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전략을 선택하는 경우 이것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서양 근대의 정신과 동양의 정신을 통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즈쓰 도시히코가 주장하는 인간 존재의 현대적 상황에서 동양철학이 해야 하고 또한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는가? 한 가지 가능한 지침이 바로 가다머가 말하는 지평 융합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가다머가 이야기하는 지평 융합이 동양철학적 사유와 서양철학적 사유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즈쓰 도시히코가 제안하는 방안은 다음처럼 요약될 수 있다.

 

(i) 현대는 자기소외, 자기 상실의 시대이다.

(ii) 그런데 동양철학적 사유의 핵심이 바로 자기의 탐구이다.

(iii) 동양철학에서 시도된 자기 탐구는 <순수 주체적 탐구>였다.

즉 <자기를 이념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런 지적 조작을 거치기 전에 먼저 철학자인 인간이 참된 자기를

자신의 실존의 저 깊은 곳까지 주체적으로 추구해 스스로 자기로서 사는 것이다.

이른바 동양적인 것, 곧 동양적 주체성의 현성(現成)이다.>

(iv) 동양철학적 사유는 현상학에서 말하는 일상적 판단중지를 취하고 있다.

즉 <자기 자신의 내면 저 깊은 곳까지 한없이 파고듦으로써 존재의 심층을 밑바닥까지 구명하려는 것>이었다.

(v) 이러한 탐구의 방법이 바로 도(道)이다.

이것은 <의식의 형이상학적 차원에 있는 특이한 인식 능력을 활성화하기 위한 체계적 방법>이다.

 (vi) 이러한 방법에 따라 <인간 실존의 근원적 변모, 즉 표층적 자아에서 심층적 자기로의 전환>이다.

 

과연 이즈쓰 도시히코가 묘사한 동양철학적 사유가 설득력이 있는가?

예전에 시인 구상은 우리의 시들을 평가하면서 치열한 자기 의식이 부재한다고 지적하였다.

우리의 시는 혹은 우리의 사유는 너무나 쉽게 자연과 일치되어 시적 자아가 나무가 되고, 호수도 되고, 산이 되고, 강이

된다. 자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내 자아 안에 자리 잡은 천사적 요소와 악마적 요소의 힘겨운 갈등과 투쟁이 우리

시에는 없다.

나는 구상이 우리 시에 대해 지적한 것과 유사한 측면이 동양철학적 사유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동양철학적 사유는 혹은 우리 한국철학적 사유는 너무나 쉽게 만물과 일체를, 자연과의 융합을, 이질적인 것들의

조화를 이야기하고, 너무나 쉽게 마치 도사의 경지에 오른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는가?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사유를 문화적으로 비교할 때 늘 나오는 비유, 그것은 서양적 사유는 주관과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혹은 투쟁적으로 본데 반하여 동양적 사유는 그것을 포섭과 화해의 모형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적 인간은 마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통합이듯이 치열한 분석의 모난 부분이 없다.

따라서 그것의 이상적 상징이 바로 원형이다. 분명히 우리가 동양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신선들이나 도사들은 둥글납작하다. 반면에 서양적 지식인의 영상은 깡마르고 신경질적이며 언제나 자신을 학대하고 고민하는 자의식 과잉의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즈쓰 도시히코가 묘사하는 동양철학적 사유는 이러한 영상과 다르다.

오히려 동양철학적 사유는 자아의 추구에 있어서 더욱 치열하고 근원적이다.

 

진정한 자아, 자기에 대한 깊은 탐구가 동양철학적 사유의 주요한 특성이라는 그의 주장이 맞는다고 해도, 내가 의문시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이다.

즉 <의식을 표층뿐만 아니라 심층을 가진 구조 모델화함에 따라 존재 세계, 이른바 실재도 표층에서 심층으로 단계적

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단층 구조로 파악된다.

여기에 자기 탐구의 도가 지니는 형이상학적인 또는 존재론적 의의가 있다.>

과연 그의 주장처럼 실재의 세계도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논거가 과연 믿을 만 한 것인가?

 

(i) 의식의 표층 수준에서, 즉 우리의 일상적 심리현상에서 실재는 분절된 세계로 나타난다.

(ii) 이 분절된 세계에서 나타나는 사물은 조대(粗大)한 사물 영상이다. 그것은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매듭으로 이루어진 천 조각 같다.

(iii) 이 매듭을 푸는 것이 관상이며, 수행(修行)의 도(道)이다.

(iv) 이것을 통해 우리 의식은 확장된다.

(v) 확장된 의식 속에서 사물은 더 이상 분절된 존재로 나타나지 않는다.

매듭을 푼 상태에서 그것은 유동성을 띠며, 아마 장자가 말하는 혼돈 상태가 된다.

(vi) 여기에서 사물은 이상한 형태를 띤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 충족적이었던 물체가 상호 무저항의 존재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데비드 봄(David Bohm)이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이 전체를 포함하고, 모든 것이 전체에 포함되는 것>

이다.

이 상호 관계의 그물망 구조는 하나의 통일체가 된다.

(vii) 그러나 이 혼돈보다 더욱 깊은 단계가 있다. 그것이 무(無)이다.

여기에서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의식 그 자체이다.

<무분절태(無分節態)인 형이상학적 실재가 순수 주체성의 의식으로 드러난 경지로서, 이 양자의 상즉성(相卽性) 자체가

절대 무분절자(無分節者)이다.> 즉 한 마디로 의식이 곧 존재이다.

 

동양철학적 사유가 심리학적 자아(ego)가 아닌 자기(self)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할 때, 그가 정작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엄청난 진리를 그는 어떻게 알았는가?

그는 유식철학, 13세기 유대철학자 아브라함 아불라피아, 장자, 화엄철학, 노자 등을 거론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요소들은 이 엄청한 진리를 어떻게 알았는가?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과연 신빙성이 있는 것인가?

이 이야기들은 철학적 설득력을 갖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인식의 차원과 존재의 차원을 구분하는 셀라스와 다르게 오히려 인식, 의식의 차원으로부터 존재의 차원이

추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의식과 존재의 일치, 즉 무(無)라고 표현된 그것이 최고의 이상적 경지이다.

 

이미 이야기하였듯이 나는 이런 철학적 주장을 믿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과학적 세계관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옹호하는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상투적 비판이 바로 데카르트적이라는 것이다.

<이제 서양에서도 물질과 의식을 본질적으로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힘을 잃었다. 원래 물질과 의식은 모순적 대립 관계로

보는 것은 뉴턴 역학의 패러다임이나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따른 견해이다.

이런 견해를 취한다면 사물의 본원적 투명성이나 사물과 사물의 상호침투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뉴턴 역학의 패러다임이나 인과적 패러다임을 취하는 경우 진짜 사물이나 사건들의 상호 작용을 해명할 수 없는가? 없다.

왜 없는가? 그것을 바로 <현대의 자연 과학적 패러다임>이 이야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패러다임인가? 바로 현대 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양사상이 필요하다는 몇몇 자연과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가? 만약 그들의 주장이 큰 설득력이 없다면, 이즈쓰 도시히코가 제시하는 지평 융합은 단지

동양철학적 사유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제 모든 것은 끊임없이 유통하고 융합해 연관을 맺는 혼돈의 영역이 아니라, 단적으로 말해 무(無)의 영역으로 들어

선다.

여기서는 사물과 사물 간의 질료적, 형상적 구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전 단계의 관상에서 의식한 존재의 혼돈화,

무차별화 자체가 의식에서 사라진다.

장자(莊子)의 혼돈은 이 단계에 이르러 노자(老子)의 무(無)로 바뀐다.

여기서의 의식은 더 이상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순수한 의식 그 자체이다.

무릇 어떠한 사물에 대한 의식도 아니고, 무의 의식조차 아니다.

오히려 의식과 완전히 하나가 된 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무분절태(無分節態)인 형이상학적 실재가 순수 주체성의 의식으로 드러난 경지로서, 이 양자의 상즉성

(相卽性) 자체가 절대 무분절자(無分節者)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무, 곧 선(禪)의 무심(無心), 대승불교의 공(空), 베단타철학의 무상(無常) 브라만, 카발라의 엔 소프

(en soph), 노자의 무명(無名), 이슬람 철학의 절대적 하나 등, 그 이름은 실로 다양하지만, 모두 의식과 존재의 궁극적

영점인 유수(幽邃)한 경지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런 주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이런 주장을 통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우리 자신, 혹은 진정한 것을 알기 위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생각들의 근원으로 내려가자.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은 사실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언어와 개념을 통해 왜곡되고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 개념, 사유, 마음, 의식,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삭제해야 한다.

후설이 이야기하듯이 괄호 안에 넣어서 그것들의 근거 없음을 하나하나 밝히고 내 의식 속에서 제거시켜야 한다.


아마 이런 주장에 대한 반발은 저기에 존재하는 사물들이나 대상들이 왜곡되고 변형된 환상이 아니라 실재라는 주장일

것이다.

저기 존재하는 책상은 내가 만들고 구성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 마음, 의식, 언어, 사유로부터 독립적이다.

네 마음, 의식, 언어,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책상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너무나도 소박한 생각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소박한 생각이 바로 우리에게 위기를 갖고 오는 현상의 근원적 원인이다.

이미 대상이나 사물과 우리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진정한 자아의 기능을 축소하거나 은폐시키고 있다.

그런데 진짜 그런가?


개념이나 언어가 없다면 그 어떠한 인식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개념이나 언어는 분별의 체계이고, 차별의 체계이다. 그러나 진정한 실재는 이러한 분별과 차별을 넘어서 있는

어떤 것, 즉 분절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분절되어 있지 않고,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혼돈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혼돈이라는 개념은 기껏해야 소극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알려주는 바가 없다.

이것 때문에 등장하는 생각이 바로 직접 체험, 수행, 실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개념과 언어를 통한 인지적 인식을 의도하지 말고, 개념과 언어를 버린 상태에서 자연적 체험에 너를 맡겨라.

그럼으로써 우리는 혼돈을 체험할 수 있다.

런가? 그것이 혼돈에 대한 진정한 체험인지, 아니면 체험했다고 착각하는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는 그 자체가 이미 여전히 개념, 언어, 인식의 분별심 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버려라. 그렇지만 이렇게 주장한다면 더 이상 철학적 논의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체험한다는 그것이 중요할 뿐, 그런 체험의 정당화는 더 이상 불필요하다.


그렇지만 혼돈에 대한 체험이나 의식도 여전히 불완전하다. 더 깊이 내려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무에 대한 체험이다.

어떤 의미에서 <무에 대한 체험>이라는 표현도 잘못되었다.

무(無)는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무에 대한 체험은 지향성의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것을 체험이나 의식이라고 부를 근거가 없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순수 주체성, 순수한 의식, 그 심층적 의식은 전혀 의식이 아니게 된다.

이것을 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존재 그 자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존재 사건이나 존재 과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나아가 존재와 의식의 일치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상상에 의한 주장인가? 아니면 추론에 의한 주장인가?

체험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마치 이러한 주장이 나쁜 의미에서 <소설쓰기>처럼 느껴진다.

만약 그것이 추론에 의한 것이라면 바로 칸트가 이야기하는 사변적 추론의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 평가가 함축하는 바가 무엇인가?

나는 한 순간에 선의 무심, 대승불교의 공, 노자의 무명 등을 <헛소리>라고 보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이런 것을 주장할 정도로 담대한가? 너는 선의 무심, 대승불교의 공, 노자의 무명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지 않은가?

그렇다.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이즈쓰 도시히코가 소개해 준 제안에 따르면 그것들은 헛소리이다.

적어도 그의 설명에 따른다면, 그것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소설쓰기>를 하고 있다.


<남해의 임금을 숙(儵)이라고 하고 북해의 임금을 홀(忽)이라고 하고, 중앙의 임금을 혼돈(混沌)이라고 한다.

숙과 홀이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융성하게 그들을 대접해 주었다.

숙과 홀은 그 은혜에 어찌 보답할 것인지 의논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이 혼돈에게만 그것이 없다.

그에게 구멍을 뚫어주자.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7일이 지나자 그만 혼돈이 죽고 말았다.>


이 장자의 우화가 실재는 혼돈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해주는가?

이 우화가 보여준 것의 하나가 우리 인간 모두에게 당연하게 성립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관점이 어떤 인간이나

다른 존재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너희들의 관점을 다른 인간에게 무리하게 적용하지 말라.

너희 인간의 관점만이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다른 존재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지 말라.

그런데 이 우화는 모든 구분과 질서가 비생명적이며 비실재적이라는 것을 함축하는가?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쓸데없는 논의들이 나타난다.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 구멍도 없는 혼돈은 어찌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가?

숙과 홀이 구멍을 뚫어주겠다고 했을 때 혼돈도 동의했는가? 아니면 강제로 했는가? 일곱 개의 구멍은 자연적인 것

인가? 아니면 그것은 어떤 인위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인가? 내 생각에 바로 이러한 논의들이 쓸데없는 논의들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보여준 철학적 공헌의 하나가 언어가, 언어의 의미가 실재나 마음으로부터 해명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가 실재로부터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은 명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가 가능하기

위해서 이미 언어적 문맥을 선제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언어가 심성으로부터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 유명한 사적 언어의 논증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실재나 심성이 더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우리 인간에게 더 근원적이다.

즉 우리는 언어의 세계, 의미의 세계, 혹은 언어적 지향성의 세계 속에서 태어나고 거기에서 성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혹시 우리가 실재나 우리 마음에 대해서 직접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언어의 감옥에 갇혀서 저 밖에 있는 진정한 실재로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언어의 감옥에 갇혀서 내가 이렇게 실감 있는 느끼는 내 진정한 마음 상태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은 아닌가?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이 의문들에 대해서 직접 해명해 주고 있지 않지만, 맥도웰은 이러한 질문들이 보여주는 그

불안이 바로 철학적 질병, 혹은 해소해야 할 생각이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언어체계, 우리의 개념체계 바깥에 어떤 진정한 실재가 있다는 생각, 혹은 우리의 개념체계가 진정한 실재

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한 실재, 따라서 결국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폐기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생각이다.

오히려 우리의 언어체계, 혹은 우리의 개념체계는 충분히 실재를 보여주고 있다.


비트겐슈타인 - 맥도웰의 사유 경향에 따르면, 이쯔히 도시히코의 생각은 이런 불안의 산물이다.

우리의 언어, 우리의 개념체계가 진정한 실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고 변형하여 환상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버리고 개념을 버리고 더 깊은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

거기에서 존재와 의식이 하나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몇 가지 변형적 양태로서 나타난다.

개념적이고 언어적 사유는 추상적이기에 구체적 실재, 그 유동하는 실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개념적이며 직관

적이고 생동적인 사유에 의존해야 한다.

개념적이며 언어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는 개념적으로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 실제로 나타나는 우리의 구체적

현실이나 실상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유 방식, 가령 변증법적 사유나 은유적 사유 방식이 필요

하다. 나아가 이러한 사유 방식이 우리 인간에게 더 근원적이다.


그래험(A.C. Graham)의 <음양과 상관적 사유>(이창일 번역, 청계, 2001)는 이 근원적 사유 방식을 <상관적 사유>

(correlative thinking)이라고 부른다.

이 사유는 <모든 종류의 사유의 배경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 상관적 사유는 비교와 대조를 드러내는 사유이며, 유사와 차이의 상관 관계를 보여주는 사유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관적 사유를 <유비적 사유>라고 부를 수도 있다.

나아가 <언어 습득은 상관적 사유가 완벽하게 적격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활동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래험이 <분석적 사유>와 대조시키고 있는 이 상관적 사유는 노자(老子)에게 잘 드러난다.

<노자는 높은/낮음, 강함/약함, 남성적/여성적과 같은 표준적 대립항에 있어서도 기존의 순서를 전복시켜서 이미

전통적인 가정을 붕괴시키고 있다.> 또한 이와 유사한 것이 데리다의 그것이다.


상관적 사유가 모든 사유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상관적 사유는 분석적 사유, 분석적 이성의 뿌리에

해당된다.

<분석적 이성의 뿌리를 캐들어 간다면 어디든 사유가 상관적인 하나의 기체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그래험은 길버트 라일의 <마음의 개념>에서 나온 ‘범주 오류’,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사용된 ‘패러다임’을 오히려 상관적 사유의 한 모형으로서 사용하고 있다.


<“마음: 머리, 손, 발=통치: 피지배”의 상관 관계가 기계론적 과학의 출현으로 “마음 : 머리, 손, 발 = 주엔진 : 보조

엔진”의 상관 관계로 전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대신에 새로운 상관 관계를 다음처럼 시험해 보라고 권유한다.

“마음: 머리, 손, 발 = 종합대학: 단과대학, 도서관, 운동장” 또는 “마음: 머리, 손, 발 = 영국의 내각: 의회, 사법부,

성공회” 이러한 접근 방식에서 습관에 의해 물들거나 새로운 통찰에 의해 도입된 상관 관계는 논리적 입증의

가능성보다 앞선다.>


라일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기계 속의 유령>이라고 공박하면서 그것은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했

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실체로서 마음의 존재를 마치 특정 종합대학의 존재처럼 가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것은 한 종합 대학을 방문하여 그 단과대학 건물들, 도서관, 운동장, 학생들을 다 바라보고 나서 그 종합대학이

어디에 있는가 묻는 경우와 유사하다.

단과대학 건물들은 저기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러나 종합대학 자체는 단과대학 건물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합대학이라는 개념의 논리적 유형이 단과대학이라는 개념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험은 라일의 이러한 해명을 상관적 사유의 한 예라고 파악한다.

이 경우 상관적 사유는 아마 유비적 사유, 비례적 사유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미 플라톤이 보여준 것처럼 국가의 정의는 개인의 정의로부터 유비, 비례될 수 있다.

그런데 라일은 이 상관적, 비유적 사유를 범주 오류, 논리적 유형의 오류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그래험이 상관적 사유라고 부른 것이 분석적 사유 혹은 논리적 사유의 밑바탕에 해당된다고 쉽게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라일에게 그것은 논리적 유형의 오류를 보여주는 논리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쿤은 과학철학에 유사한 접근 방식을 취한다.

쿤은 어떤 과학자의 조작은 정식화된 개념, 규칙, 법칙 등의 적용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과학자는 단지 실제로 응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도중에 그것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문제 해결의 구체적인 사례들과 상호 관련시킴으로써 (이것을 행함: 이 문제 = 저것을 행함: 저 문제)

그것들을 다룰 때 그의 기술을 획득한다.

과학 공동체의 작업은 자연에 대한 모든 정식화된 법칙들의 배후에 놓인 협의의 패러다임인 구체적인 사례들에

집중된 신념, 가치, 기술의 고유한 배열인 하나의 공유된 패러다임을 가정한다.

쿤에게 과학은 라일에게는 마음의 철학처럼 이러저러한 상관 관계에 의해 포획되지 않으면 타당함을 입증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관 관계에서 시작한다.>  


그래험에 의하면 쿤의 과학철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상관적 사유이다.

왜 그것이 상관적 사유인가?

그것은 <과학자는 단지 실제로 응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도중에 그것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주장이 그가 해명하듯이 <그는 문제 해결의 구체적인 사례들과 상호 관련시킴으로써 (이것을 행함: 이

문제 = 저것을 행함: 저 문제) 그것들을 다룰 때 그의 기술을 획득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는가?


첫째, 쿤의 주장은 명시적(explicit) 지식과 암묵적(implicit) 지식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듯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명시적 지식과 해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상관적 사유라고 불렀을 때, 분명히 그 개념은 너무 넓다.

둘째, 쿤의 주장은 공유된 패러다임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험은 이것을 상호 연관의 체계라고 부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상호 연관적 체계가 그가 주장하는 상관적 사유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아마 그 상호 연관의 체계에는 은유나 비유를 의미하는 상관적 사유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조되는 분석적, 논리적

사유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라일과 쿤을 통해 보아고자 하는 <상관적 사유>의 정체, 그것과 분석적, 논리적 사유의

관계가 아직 분명하지 못하다.


(sellars)

















출처 : 한국 문화의 원류
글쓴이 : 솔롱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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