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인문

[스크랩] 이진경 (2) - 종속이론 세계체제론.아날학파.마르크스,구조주의.

doll eye 2018. 1. 29. 01:37

5.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 - 제국주의의 간판을 바꿨네!

자본의 힘으로 주변부 ‘종속적 발전’ 추구… 누구를 위한 자본주의 이식인가


‘선진국’의 자본이 ‘후진국’에 투자되면, 후진국의 경제는 발전할까 아니면 반대로 후퇴할까?

이 질문은 지금처럼 ‘후진국’이 선진국의 자본을 찾아 투자를 호소하고 다니는 요즘 시대엔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들린다.

더구나 한국처럼 빚을 내서 사업하는 나라에서라면, 이런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은 현실 경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선진국 투자의 이면에 감춰진 현실

 

하지만 이 질문에 진지하게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 질문에 대한 부정적 대답이 진지하게 검토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하나의 국적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하나의 이론을 공유하지도 않았기에 하나의 학파를 형성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종속이론’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이는 아마도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나 문제설정이 갖는 강력한 공통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

앞서서 나가니, 살고 싶은 자여 따르라”라는 슬로건 아래, 이른바 ‘선진국’ 자신들의 발전 경로가 후진국이 따라야 할

모델이라고 주장하던 이른바 ‘발전이론’에 대한 비판, 후진국에 대한 선진국의 투자가 후진국의 경제를 발전시킬 것이

라면서 착취를 위한 자신들의 활동을 무슨 자선사업이라도 되는 양 주장하던 경제이론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선진국이란 이름 뒤편에서 제국주의를 보고, 투자라는 개념 안쪽에서 착취를 보며, 그것을 통해 선진-후진을 잇는

단선적인 경제발전의 끈을 끊어버린다.

따라서 그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부정적 비판일 뿐만 아니라 나름의 새로운 경로를 모색하자는 긍정적 제안이기도 했고,

제국주의 중심의 시야에 대비되는 제3세계적 시야의 독립선언이기도 했으며, 단일한 역사적 발전 개념에 대한 전복이

기도 했다.

따라서 그것은 그 결과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경제와 발전,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중요한 지적 유산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종속이론의 역사는 대략 세개의 문턱을 통과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첫째 문턱은, 선진국 중심의 발전모델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가령 대표적인 발전이론가였던 로스토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여러분은 땅바닥을 기고 있지만, 이왕 기는 거 열심히 기라. 기는 데 익숙해지면 점차 속도가 붙을 거고, 속도가

빨라지면, 저기 비행기 보이지? 비행기가 이륙하듯이 여러분도 땅바닥에서 둥실 떠올라 이륙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우리 선진국의 대열에 함께 서서, 그동안 참고 참으며 부풀린 빵을 나누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로스토의 ‘이륙이론’이라고 부른다.

물론 여기서 몇몇 솔직한 단어들을 경제학 용어들로 바꾸면, 생각처럼 자존심 상하는 얘기로 들리진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발전된(developed) 나라와 발전중인(developing) 나라, 그리고 혹시 있다면 아직 발전하지 않은 나라만이 있을

뿐이다.

종속이론의 문제설정을 가장 명확하게, 그리고 가장 먼저 이론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라틴아메리카 경제학자 앙드레 군더

프랑크였다.

그는 발전된-발전될 나라만이 있다는 생각을 반박하면서, 제3세계에 대한 선진국, 아니 제국주의 나라들의 투자는 발전을 가져온 게 아니라 반대로 ‘저발전의 발전’만을 가져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저발전(underdevelopment)이란 아직 발전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발전할 어떤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고, 발전과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저발전의 발전이란 발전과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쉽게 말해 땅바닥을 아무리 빨리 긴들, 혹은 자동차를 타고 아무리 빨리 달린들 그게 비행기처럼 ‘뜰 수는’ 없다는 것이다.

프랑크의 문제제기 이후 발전의 환상과 반대되는 여러 가지 상이한 양상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가령 엠마뉴엘은, 선진국과 후진국간의 무역이란 부등가 교환이기 때문에, 무역과 거래가 늘면 늘수록 국제적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발전된-발전할’의 단선적인 경로에 대한 프랑크의 비판은 이후 여러 사람들에 의해 ‘중심부’인 선진국과 상이한 발전경로를 갖는 ‘주변부’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주변부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중심부에서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입증하려는 이론적이고 실증적인 노력들이 행해

졌다.

가령 중심부와 달리 주변부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나 근대화가 몇몇 국지적인 영역이나 ‘잘 나가는’ 영역에서만 진행되고,

그것을 위해 빈민들이나 농민들처럼 근대화의 그늘에 가려진 영역을 착취하면서 진행되기 때문에, 계급적 분화도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으로 분해되는 과정을 겪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도시빈민과 같은 소부르주아층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변부 사회에서는 산업 노동자계급 못지 않게 도시빈민 등과 같은 ‘주변적’ 계급들이 변혁운동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에 선다고 한다.

여기서 보듯이 이제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개념은 국제적인 차원은 물론, 주변부 사회 내부에서 경제적 파행성을 표시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주변부가 아무리 잘 나가도 한계는 분명



둘째 문턱은 ‘종속적 발전’이라는, 앞서의 맥락에서 보면 기묘한 개념으로 표시된다.

지금은 브라질에서 대통령을 하고 있는 카르도수가 이런 논리를 펴던 사람이다.

그것은 ‘저발전의 발전’이라는 말로 포괄하기 힘든 사례 때문에 생겨났다.

즉 브라질이나 한국, 대만, 싱가포르처럼 당시 ‘용났다’ 소리 들으면서 잘 나가던 나라들의 경제적 발전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나라들은 모두 자본과 시장에서 대외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종속이나 주변부라는 상황이 모든 경제발전을 원천봉쇄하며 오직 저발전만을 발전시킨다는 주장과 달리, 종속적인 상황에서도 일정한 발전이 가능한 게 아닌가?

반면 ‘한번 주변이면 영원히 주변’이라면 거기서 빠져나갈 전략도 꿈꿀 수 없다는 말인가?

이러한 반론을 통해서 ‘종속적 발전’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고, 그런 나라를 중심부나 주변부와 구별하기 위해 ‘반주변부’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제 종속이론은 새로운 논쟁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끼치는 경제적 영향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면서, 좌파 이론의 중요한 논제를 형성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와 자본수출의 효과에 관한 것이다. 일찍이 레닌은 제국주의의 특징으로 ‘자본수출’을 들면서, 이전의 자본주의와 달리 제국주의는 상품수출이 아니라 자본수출로 식민지를 착취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자본수출은 자본관계의 수출이다. 수출된 자본은 공장을 만들고 노동자들을 고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식민지에 자본주의를 이식하고 ‘발전’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착취를 위한 것이기에, 당연히 식민지에서 생산된 잉여가치를 제국주의 본국으로 이전시킨다.

여기서 앞의 입론을 강조하는 논리는 제국주의나 중심부 자본주의가 식민지 내지 주변부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킨다고 하는 주장으로 이어진다면, 후자를 강조하는 논리는 저발전과 종속을 강조하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사실 이러한 논란과 난점은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 혹은 발전과 종속 사이에 ‘반주변부’나 ‘종속적 발전’과 같은 어떤 ‘중간’을 끼워넣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런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발전법칙의 차이라는 질적이고 근본적인 차이가 대립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변부에서 나타나는 발전의 불균등함을 개념화하기 위해, 가령 사미르 아민 같은 사람은 자본의 축적이란 세계적 규모에서 진행된다고 보고, 그러한 불균등함이란 특정 지역과 연관된 축적 전략의 차이로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로써 드러난 것은 발전이란 개념과 마찬가지로 ‘종속’이라는 개념 역시 종속적인 나라들 사이에 결코 단일하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 새로이 부각되었다.

셋째 문턱은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이 연결되는 곳에 있다. 사실 종속이론은 명시적으로 개념화하지는 않았지만, 중심부

나라와 주변부 나라의 관계를 전제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론 자체가 국제적인 스케일로 펼쳐진다. 그렇지만 주된 관심은

주변부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스케일에서 중심부 자본주의를 보면 어떨까? 중심부 자본주의의 발전, 혹은 제국주의의 발전이란 식민지나

주변부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 아닌가?

요컨대 이른바 선진국의 ‘선진됨’(developed)이란 주변부의 착취, ‘후진됨’을 전제조건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것

이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자본주의란 본래 일국적인 게 아니라 세계체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70년대에도 있었다.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을 쓴 페르낭 브로델과 <세계체제론>을 쓴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그렇다.

그래서 이들의 이론은 흔히 ‘세계체제론’이라고 불리는데, 이 지점에서 종속이론의 문제설정과 연결되게 되고, 그럼으

로써 종속이론은 자본주의에 대한 거대한 이론과 더불어 새로운 ‘일반성’을 얻게 된다.


자본주의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시스템들

 

이러한 반복적인 일련의 논쟁과 이론에서 부닥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좀더 근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즉 ‘주변부를 착취한다는 것’과 ‘주변부를 발전시킨다는 것’이 대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논쟁은 언제나 그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고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만약 <세계체제론>에서 주장하듯이 중심부의 발전과 ‘진보’가 주변부의 착취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면, 반대로

주변부에서의 착취는 주변부의 ‘발전’을, 다시 말해 주변부의 자본주의화 내지 근대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식민지 노동력을 자본주의적으로 착취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노동, 자본주의적 규율, 자본주의적 사고, 자본주의적 생활을 만들어내야 했다는 것이다.

가령 일본 총독부가 학교를 세우고, 애들을 학교 보내라고 종용하고 다닌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러한 근대화 내지 자본주의 발전을, 역사 발전이요 역사적 진보며, 따라서 ‘좋은 것’이라고 간주하는

평가방식은 아닐까?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주의가 왜 좋은지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겐 문제가 차라리 쉬워 보이는 것일까?




6. 아날학파 - 역사의 시간을 짜맞춘다

시간을 벗어난 전체사 만들기 위해 출발… 다양한 계열사 일구며 역사학의 지평 확대


지리학은 어떤 장소, 어떤 공간이 어떠한 기후와 환경을 갖는지, 그러한 공간들간에 어떠한 관계가 만들어지는지, 나아가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며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를 연구한다.

반면 역사학자들은 어떤 사회를 대상으로 시간에 따라 어떻게 그 사회가 변해왔는지, 그 상이한 시간대에 사람들은 어떤

조건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을 연구한다.

약간 추상적인 표현을 써서 말한다면, 지리학자는 공간에 대해 연구하고, 역사학은 시간에 대해 연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학은 그 모든 사건, 그 모든 사실들을 하나의 전체로 연결하고 하나의 역사로 묶어주는 ‘역사적 시간’ 개념 안

에서 사유한다.

그렇다면 역사학이 이 ‘역사적 시간’ 개념을 부정하고, 그것의 외부에서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모든 사실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주는 그런 단일한 시간적 좌표없이 역사학이, 아니 역사 자체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시간이 사라진

이후 역사 내지 역사학은 대체 어떤 것일 수 있을까?


역사학의 경계 넘으며 근본적 질문 던져


최소한 브로델로 대표되는 이른바 ‘2세대’ 이후의 아날학파는 이런 문제와 대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역사학을, 아니 역사 자체를 하나의 극한으로 밀고 간다.

역사 내지 역사적 시간 자체가 소멸하는 지대가 거기서 출현한다.

역사적 시간의 외부. 그들은 역사의 외부로 나간 것이다.

아니, 그들은 역사 내부에 그 외부를 끌어들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이 20세기에 출현했던 다양한 역사학 중 하나라는 위상을 훌쩍 넘어서게 만든 요인이고, 역사학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는 이유며, 역사학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되는 지점이다.

역사적 시간의 외부에서 역사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령 우리는 17세기에 만들어진 가문과 족보를 상기시키는 제사에 참여하고, 그러한 관념의 법적 유산인 호적제도에 묶여 살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사이여도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결혼할 수 없는 세계에 산다.

이는 아직도 법조문에 명시된 현재적 사실들이다. 동시에 우리는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그래서 항상 미래적인

세계로 표상되는 그런 세계 속에서 산다.

이 두 가지 세계는 분명히 다른 시간성을 갖는다. 언어도 그렇다. 17세기의 유교적 관념과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는 극도로

세분화된 경어의 체계와, 반은 속어, 나머지 반은 외래어가 뒤섞인 채 축약되고 생략되어 나이로 표시되는 시간의 차이가

소통의 벽이 되는 그런 언어가 공존한다.

군사부일체의 유교적 관념과 모든 사람은 다같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관념이 공존한다.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상이한 사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종종 원시공산제 사회로 찬양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미개사회, 야만인으로 간주되는 아프리카나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의 삶과, 계몽의 전깃불이 밤마저 쫓아내버린 문명화된 사회가 동시에 존재하며, 척박한

땅에 아직도 호미를 들이대고 있는 전근대적 공간과 거대한 빌딩의 숲이 햇빛마저 가리는 근대적 공간이 하나의 시간대에 공존한다.

역사적 시간은 이토록 상이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의 시간 개념을 통해 ‘통일시킨다’. 어떻게?

그것은 그것들을 하나의 단일한 시간(역사적 시간)을 척도로 하여 앞선 것과 뒤처진 것, 미개한 것과 문명화된 것 등을 하나의 직선 위에 배열하는 것이다.

‘발전’이란 뒤처진 것이 사라지고 앞선 것에 동화되는 것이며, ‘진보’란 미개한 것이 개명되고 문명화되는 것이며, 전근대적인 것이 근대화되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코르테스와 선교사들이 화약과 성경을 들고 간 것이 그것이며, 아마존의 숲에 위대한 개척농장을 만들어 낡은 노동이 아니라 새로운 노동을 하게 만든 것이 그것이며,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면서” 박정희가 이룩한 ‘조국 근대화’ 역시 그것이다. 식민지 사관 분쇄를 외치며 ‘경영형 부농’에서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고, 실학에서 근대 사상의 맹아를 찾던 우리의 역사가들이 한 것 또한 바로 그것이다.


제도 중심의 역사에서 인류학적 관심사로



아날학파의 역사는 이런 역사적 시간 개념의 역설적인, 또한 극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페브르와 블로크로 대표되는 아날학파 1세대는 왕이나 국가, 민족에 집중되어 있던 역사가의 눈을 민중의 삶이나 무의식적인 심성이 표현되는 세계로 돌리게 만들었고, 제도에 몰두했던 역사로 하여금 인류학적인 상호관계를 다양한 양상으로 연구하도록 촉구했다.

그런데 동시에 그들은 ‘전체사’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즉 그들의 꿈은 하나의 역사적 시간이 작동하는 ‘전체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실증적 자료들에 매몰되어 전체를 상실한 역사에 대한 비판가였다.

그들이 지리학과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등에 관심을 갖고 학제적인 연구를 누구보다 적극 수용했던 것은, 어쩌면 그토록 다양한 세계를 ‘역사’라는 하나의 전체로 포섭하고 포괄하려는 학적인 ‘야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브로델로 대표되는 아날 2세대는 전혀 다른 상대자를 갖고 있었다.

역사학에 대한 비판을 전면에 내세웠던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아마존에서 문명의 전횡에 파괴된 ‘슬픈 열대’를 발견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미개와 문명 사이에 거대한 거리를 만들어두고, 그것을 하나의 직선화된 시간의 끈으로 연결하고는, 진보와 발전이라는 개념으로 전자를 후자에 ‘통일시키는’ 문명의 폭력이 바로 대문자로 쓰여지는 ‘역사’라는 개념을 통해 행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반대로 문명화된 사유의 모태를 ‘야생적 사유’에서 찾아내려 했고, 미개와 문명으로 불리는 상이한 삶의 방식

사이에서 시간적 차이를 지워버리려 했다.

그러면서 시간과 무관하게 어디나 항존하는 ‘구조’를 양자 모두에서 공통으로 발견했다.

브로델은 구조주의의 이러한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어쩌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새로운 역사 개념을 제안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처럼 아주 오랜 시간 변함없이 지속되는 역사의 층위를 포함하고 있었다.

‘장기지속’이라 불렀던 이 역사의 층위는 지질학적 내지 지리학적인 변수들과 관련된 것으로, 모든 사회의 기층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를 보지 못하고 그저 사건에만 매달리는 것을 그는 ‘사건사’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비판했다.

그러나 ‘사건’이라는 순간적이고 항상 변하는 요소를 역사의 영역에서 배제할 수는 없었기에, 그것을 굳이 말하면 단기지속적인 또 하나의 다른 층위로 설정했다. 그리고 장기지속과 사건사의 두 층위 사이에 ‘국면’(콩종튀르)이라는 중기지속적인 층위를 설정했다. 역사란 결국 이처럼 세 가지 상이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복합체라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페브르와 블로크의 전체사 개념을 갖고 있던 브로델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장기지속적인 역사,

그 거대한 역사적 시간의 포괄성과 전체성이었다는 것은 물론이다.

반면 가족생활이나 어린이에 대한 태도, 죽음에 대한 태도, 공포의 양상, 혹은 연옥과 같은 상상적 세계의 변모 등을 통해

사람들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심성(망탈리테)의 변화를 새로운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아날의 3세대 학자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변화를 하나의 ‘장기지속적’ 역사나 ‘전체사’로 묶는 것을 거부하거나 포기하게 된다.

그것은 각각 상이한 시간성을 갖고 진행되는 각각의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개념을 그들은 종종 ‘계열사’라고 부른다. 즉 전체사로 되돌아가지 않는 각각의 계열들에 고유한 역사가

있으며, 그러한 계열로 포착되는 상이한 시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체사나 총체성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사람들이 ‘조각난 역사’라고 비난하는 이러한 새로운 역사 개념을 통해서, 이제

그들은 아날의 선배들이 갖고 있던 ‘전체사’의 꿈에 냉정하게 종지부를 찍는다.

그래, 역사에는 브로델 말대로 상이한 시간의 흐름들, 상이한 시간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브로델 말과는 반대로 그것을 하나로 묶어주고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하는 그런 시간성은 따로 없는 것이다.

이제 대문자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복수의 어미를 항상 달고 다니는 소문자로 시작하는 ‘역사들’이 있을 뿐이다.


장기지속적인 역사는 포기했을지라도…


따라서 모든 역사를 하나의 척도화된 시간, 하나의 보편 법칙으로 귀착시키려는 그런 태도는, 이질적인 계열들이 분기하면서 때로는 수렴하기도 하고, 때로는 교차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발산하면서 공존하기도 하는 그런 위상학적 공간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렇다면 역사란 이제 ‘과거’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땅덩어리를, 나름의 기울기와 각도를 갖고 절단함으로써 나름의 고유한 단면을 갖는 지층을 발견하고 탐사하는 작업이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푸코가 훌륭하게 보여준 것처럼, 새로운 사유의 선을 찾아내고 새로운 삶의 흐름을 발견하는 것이란 점에서, 그저 과거 시제에 머물지 않는 역사, 차라리 미래의 시제를 갖는 역사가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문턱의 이름은 아닐까?

역사적 시간의 외부에서 작동하는 역사학이 있다면, 그건 혹시 이런 게 아닐까?




7.마르크스주의 - 생각을 뒤집고 일상을 바꿔봐!

불변의 진리 거부하는 전복적 사유… 현실 사회주의 퇴조 뒤에도 영향력 유지


20세기 최대의 사건을 꼽는다면 어떨까? 어디서 묻든 간에 선두에 등장할 사건 가운데 하나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일 것이다. 더불어 1990년대의 사회주의 붕괴 역시 상위권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것이면 그 탄생을 통해서나 그 붕괴를 통해서나 사회주의 체제는 20세기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온갖 영역에 파고든 강력한 파급력

 

사상사를 쓴다면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유사한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레닌, 룩셈부르크, 크로포트킨, 루카치, 그람시, 블로흐, 벤야민, 라이히, 르페브르, 알튀세르, 들뢰즈와 가타리, 네그리….

일부에 불과한 이들 이름만으로도 20세기 사상의 풍요함에 마르크스주의가 행사한 영향력의 폭과 깊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어느 분야에서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연구하든 간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혹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학문이 있을까?

대체 무엇이 마르크스주의로 하여금 이토록 광범위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이 마르크스의 이름을 이처럼 반복하여 등장하게 하는 것일까?

마르크스주의는 우리 인류의 삶에 대체 무엇을 남긴 것일까?

가장 먼저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은, 적어도 국가적 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사무실(office)에 앉아 지키던 ‘공식적

(official)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더불어 그들과 함께 공식적 입장의 수호를 직업으로 삼던 ‘당’ 주변의 이론가

들을 제외한다면, 한마디로 근본적―비판적 사유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근본적(radical)이라는 말뜻 그대로 뿌리로 캐 들어가 그것을 뒤집어버리는 그런 비판적 사유.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이는 어떠한 불변적인 것, 항상적인 것, 영원한 것도 거부한다.

가령 플라톤의 이데아나 신학적 실체인 신은 물론, 헤겔의 절대정신에 이르기까지 영원성의 이름으로 서구의 사유를 지배

해온 모든 것들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확고하고 불변적인 듯이 보이던 모든 것이 그 전복적 사유를 통과하면서 뒤집히고 깨지며, 그 깨진 자리에 혁명의 꿈이 인도하는 새로운 길들이 나타난다. 흔히 ‘공산주의’라는 경제주의적 단어로 번역되는 코뮨주의(communism)는 그 자리에 다시

들어서는 새로운 영원성의 표상이 아니라,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는, 인류가 생존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꿈들의 이름이요 희망들의 이름이다.


둘째, 마르크스주의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요소는 모든 것을 ‘관계’로서 사유한다는 점이다.

빈번히 인용되는 것이지만,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이러한 사고방법을 간명하게 알려준다.

가령 가치란 상품과 화폐, 혹은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의 관계(가치관계)이고, 자본은 특정한 관계 속에 들어간 화폐이며,

특정한 사람들과 맺는 관계(자본관계)이다.

나아가 그는 그 이전에 누구도 의심한 적 없는 ‘인간’이라는 말에 대해서조차 비판적 사유의 칼을 들이댄다. 즉 인간이라는 어떤 불변적인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방금 말했듯이 ‘특정한 관계 속에서’ ‘노예’ 나 ‘농노’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집합이,

혹은 ‘자본가’ 내지 ‘임노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집합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란 사회적 관계의 집합”일 뿐이다. 어디 생산관계 뿐일까? 가령 르네상스 시절 거리를 활보하던 광인들은

19세기에는 치료받아야 할 정신병자로 간주되어 감금당한다.

마르크스의 어법을 빌리자면, “광인은 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들은 정신병자가 된다.”

모든 것을 관계적인 것으로 보는 이러한 사유는, 모든 종류의 불변적인 것을 비판하는 반형이상학적 사유와 결부된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모든 것을 그 역사적 변환 속에서 사유하고 연구하는 역사적 사유와 결부된 것이기도 하다. 보통 ‘역사유물론’이라고 불리는 이런 태도는, 불변의 본질을 묻는 ‘무엇인가’(what)라고 질문하는 대신, ‘어떻게’(how)라고 질문한다.

예컨대 하나의 물건이 어떻게 생산되는가가 바로 그 물건의 ‘본질’에 대해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산되는 방식―어떻게 생산되는가―이 달라지면 그 ‘본질’ 역시 달라진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방식’이나 ‘양식’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생산양식, 노동방식 등등). 또한 역사적으로 사유하려는 사람들―그들이 역사가든 철학자든―이 마르크스주의를 우회하기 힘든 것도,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와 가까워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관계'로 사유하기…새로운 사회의 생산



셋째, 마르크스주의는 ‘생산’에 관한 사유를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 한다.

사물을 생산하는 능력, 상품을 생산하는 방식, 사람들이 생산하는 방식, 그리고 그러한 생산이 유통이나 소비와 같은 다른 활동을 생산하는 양상 등이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관심사다. 하지만 여기서 ‘생산’이라는 말은 단지 경제적 생산에 한정되지 않는다. 철학은 개념을 ‘생산’하는 문제를 연구한다.

조직은 운동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종류의 활동을 ‘생산’하는 방식의 문제다. 혁명이란 새로운 종류의 관계, 새로운 사회를 ‘생산’하는 문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란 모든 종류의 생산, 혹은 생산적 능력에 관한 사유다.

이는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구성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사유다.

물론 이는 불행히도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효율성을 뜻하는 ‘생산력’으로 대체되곤 했지만 말이다.

생산적 능력에 대한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산적인 능력을 억압하고 무력화하는 체제로서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자본주의는 생산자들에게서 생산수단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의 생산능력을 무력화하면서 시작한다(이른바 ‘본원적 축적’).

이제 사람들은 일정한 임금을 대가로 자본에게 자신의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팖으로써만 생산할 수 있다.

이처럼 자본에 팔린 생산능력을 ‘노동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생산에 관한 자신의 의지를 자본의 의지로 대체함을

뜻하고, 그것을 만족시키는 한에서만 생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본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생산활동을 ‘노동’이라고 한다.

이제 생산자는 노동자가 된다.

노동자는 자본의 의지가 자신을 더욱더 옭아맬 수단을 생산하려는 것인 경우에도 그 의지에 따라 생산해야 한다.

이 경우 생산과정에서 생산적 능력이 증가하리란 것은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생산물은 생산한 자의 능력을 증식시키는 게 아니라, 그들을 무력화시키는 자본의 능력을, 그 착취능력을 증식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생산력’은 발전시킬 지 모르지만, 생산적 능력을 축소시키는 체제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에서 생산적 활동이 해방된 사회, 노동 아닌 방식으로 생산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생산적 능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있다면 바로 그것일 거다.

마지막으로 추가할 것은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실천을 축으로 사유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모든 종류의 사상에 공통된 것이다. 어느 사상도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자 하며, 그것을 제한하는 조건들을 변혁하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마르크스주의에 고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것을 생산하는 자 자신이 스스로 실천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또한 기존의 낡은 습속을 전복하는 혁명적 방식으로 수행해야 할 문제로 제기한다는 점이다. 어떤 강력한 권위나 초월적인 권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산적인 능력에 의해, 그리고 스스로를 하나의 집합적 신체로 만들어내는 강렬함과 스스로 정하고 스스로 바꾸어가는 규칙들에 의해, 요컨대 내재적인 힘과 능력, 그리고 자율주의적 원칙에 의해 스스로의 낡은 습속부터 외부의 낡은 제도와 권력에 이르기까지 혁명적 변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변혁의 꿈은 오래 지속된다

 

이러한 특징은 삶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다루는 데서 마르크스주의에 고유한 사유방식을 형성한다.

물론 그 각각은 오직 마르크스주의만의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사상과 이론들이 그 각각의 특성들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와 교차하고 겹쳐진다.

그곳은 다른 사상이 마르크스주의로 침투하는 장소이고, 또한 마르크스주의가 다른 사상 속으로 침투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거기서 서로가 섞이면서 새로운 유착물을 만든다.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에도,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유하려는 사람들이 거꾸로 마르크스주의에 손을 내미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또 한번의 붕괴가 우리의 역사를 휩쓸고 간다고 해도 마르크스주의가 인류의 삶과 사유에서 반복해서 되살아나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8. <구조주의> - 관계를 떠난 주체는 없잖아!

언어학에 기대어 역사로 귀결되는 사유방법 극복… 서구적 사유의 확대라는 비판받아


20세기 후반기에 사상사 흐름의 주도권을 잡은 나라는 단연 프랑스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영향력은 지금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사상가들 가운데 누가 가장 영향력이 컸다고 생각할까?

푸코? 아니면 알튀세르? 데리다? 아마도 예상 밖일 텐데, 1위를 차지한 사람은 레비-스트로스였다.

알다시피 그는 ‘구조주의’의 창시자다.

우리는 그것의 영향력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한다. 그것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그것을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1949년에 <친족관계의 기초구조>라는 책을 내면서 구조주의라는 전혀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그는, 이듬해인 1950년

브라질의 아마존 지역을 탐사한 인류학적 여행기 <슬픈 열대>로 출판계에 일대 열풍을 일으켰으며, 1962년 출판된 <야생의 사유>로 당시 지도적 사상가였던 사르트르의 역사 개념 자체, 나아가 인간이나 주체라는 개념까지 근본적으로 비판함으로써 희대의 지적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로써 10여년을 준비한 하나의 거대한 혁명이 전면에 등장한다.

1965년, 알튀세르는 구조주의의 영향 아래 마르크스를 해석한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읽기>를 출판하여 구조주의

혁명이 다른 지적 영역으로 ‘수출’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구조주의의 해’였던 1966년은 푸코의 <말과 사물>과 라캉의 <에크리>가 출판되어 ‘모닝빵처럼 팔림’으로써 구조주의의

물결이 거대한 해일처럼 자신의 시대를 만들어간 시기였다.

이러한 물결은 급속하게 다른 나라들로 확산되었으며, 좋든 싫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인간 개념 비판한 레비-스트로스의 지적 스캔들



그러나 호사다마라! 1968년 5월 혁명을 거치면서 구조주의는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데리다는 <문자학>에서 레비-스트로스를 주타격대상으로 삼았고, 그를 비판하는 논문으로 미국에서 새로운 스타로 떠올

랐다.

푸코 역시 일종의 ‘자기비판적’ 서문을 포함한 <지식의 고고학>의 결론을, 자신을 구조주의자라고 간주하는 발언들을 반박하는 것으로 채움으로써 싸늘한 배신의 길을 갔다.

라캉 역시 사위인 밀레르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신이 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명시함으로써 “구조는 거리에 내려오지 않았다”는 비난조의 슬로건을 모면하고자 했다.

몇년 만에 조류는 급속히 바뀌어 레비-스트로스는 새로운 고독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의 시대’가, 즉 구조주의에서 벗어나거나 구조주의를 해체하는 그런 시대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 자체가 역으로 구조주의의 영향력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을 간단하게 대답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성공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무모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정된 실패를 감행해야 한다.

라캉처럼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이용해보자. 라캉은 포의 소설 <도둑맞은 편지>의 시작과 끝에서 두개의 동형적 관계를 찾아낸다.

먼저, 왕에게 보여선 안 될 편지를 읽고 있는 왕비의 방에 갑자기 왕이 들어온다.

똑똑한 왕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편지를 슬며시 테이블에 내려놓고 왕을 맞이한다. 왕은 다행히 사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거기에 왕을 찾던 모 장관이 들어온다.

눈치 빠른 그는 사태를 직감하고 두 사람의 면전에서 구겨진 종이를 이리저리 흔들다 편지와 바꿔치기 한다.

물론 왕비는 그것을 보았지만 제지할 수 없었다.

장관은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키워간다.

다음, 왕비의 부탁으로 파리 경찰청장은 엄청난 경찰들을 동원해서 장관의 집을 샅샅이 뒤지지만 편지를 찾지 못했다.

그의 부탁을 받은 탐정 뒤팽은 쉽사리 그의 집에서 그 편지를 찾아다 준다.

경찰이 뒤질 것을 안 장관은 약간의 변형을 가해서 눈에 띄기 쉬운 곳에 별 것 아닌 편지처럼 꽂아두었던 것이고,

뒤팽은 이를 알아채고 비슷하게 생긴 다른 편지로 바꿔놓고는 편지를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장관이 있는 자리에서.


편지 둘러싼 반복 관계… 선험적 주체는 신화

 

첫째 장면에서 왕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고, 왕비는 그것을 알고 편지를 눈에 보이게 두지만,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알아보리라는 것을 생각지 못해서 편지를 빼앗긴다.

장관은 그런 사태를 알고 편지를 유유히 가져가는 자다. 둘째 장면에서도 이런 관계는 반복되어 나타난다.

경찰은 눈이 있어도 눈앞의 편지를 보지 못하는 자다.

장관은 그런 사태를 예견하고 편지를 눈에 보이게 두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알아보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해서 결국 편지를 빼앗긴다. 뒤팽은 그러한 사태를 잘 알고 눈앞에서 편지를 유유히 가져가는 자다.



서로 다른 두 장면에서 우리는 세 사람의 관계가 동일한 삼각형으로 표시될 수 있는 양상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라캉은 이를 ‘반복강박’이라는 정신분석 개념의 은유로 이해한다. 전혀 다른 종류의 장면들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다른 사건임에도 이처럼 반복하여 나타나는 동일한 관계를 일종의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건에만 주목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란 점에서 심층의 구조다.

이러한 관계는 편지(letter)를 둘러싸고 만들어지며, 편지에 대한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반복이다.

그렇다면 편지(letter는 문자라는 뜻도 있다)가 바로 이런 반복적인 관계를 만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 언어, 혹은 상징적 기호들이 바로 이처럼 반복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구조란 언어와 결부된 것이고, 상징적인 것이다(물론 여기서 구조주의가 언어학에 기대고 있는 것은 이런 문학적 은유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한 것이

었다).

한편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가령 장관은 동일한 사람이지만 두 경우에 다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관계 속의 다른 자리에 있으며, 다른 구실을 한다.

다른 사람이 다시 등장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는 그의 몸이 갖는 생물학적 동일성이 아니라, 어느 자리에 있는가, 다시 말해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선결정된 어떤 주체란 없으며, 다만 관계 속에서 그가 선 자리에 의해 어떤 주체가 될 뿐이다.

즉 주체는 구조의 효과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더불어 어떤 항도 그가 다른 것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가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관계고, 관계가 개별적인 항의 의미를 결정한다.

주체철학에 대한 비판, 인간주의에 대한 비판이 여기서 시작된다.

이는 사물을 보는 구조주의적 방법의 결정적 특징을 보여준다.

가령 남성성을 띠게 마련인 전사가 소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고 하자. 그건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구조주의자는 소녀와 전사를 직접 연결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설명하다.

남자와 전쟁의 관계는 여성과 결혼의 관계와 같다. 소녀는 전쟁에 반한다.

따라서 소녀의 모습을 한 전사는 결혼에 반하는 여성과 동일하다. 여기서도 다시 관계의 동형성과 반복이 등장한다.

문제는 미개한 종족과 문명화된 종족 사이의, 역사가 메워줄 시간적 격차가 아니라, 아주 다른 것 사이에도 존재하는 구조적 동형성이다. 여기서 역사주의 비판이 시작한다.


“문화적 차이 무시하고 보편적 틀에 묶는다”


구조주의는 이런 식으로 사고한다. 이로써 레비-스트로스는 친족관계의 구조를 찾아냈고, 미개와 야만의 이분법을 깨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동형성을 보여주었으며, 그것을 야생적 사유라는 이름으로 인류의 정신 깊숙이 위치지웠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각각의 사건이 갖는 차이, 각각의 문화가 갖는 고유함을 구조라는 이름의 어떤 보편성과 불변성으로

환원하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니었을까?

그건 차이가 숨쉬고 변화와 변이가 움틀 수 있는 가변성의 공간을 폐쇄된 동형성으로 메워버리는 것은 아니었을까?

과학을 앞세운 서구중심주의를 과학성을 통해서만 깰 수 있다면, 그것은 또다시 다른 문명, 다른 사유를 과학이란 서구적

사유 안에 가두는 것이 되지는 않을까?

그러면서도 루소처럼 문명이라는 타락 이전의 낙원으로 되돌아가려는 회귀의 심성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것이 구조주의에 가해진 비판이었다.

구조주의는 이런 비판을 과연 넘어설 수 있을까? 그럼에도 구조주의가, 대문자 주체에서 시작해 대문자 역사로 귀결되는

낡은 사유방법을 전복하여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유방법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출처 : 한국 문화의 원류
글쓴이 : 솔롱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