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여기, 나… 이것이 ‘존재’다
ㆍ하이데거 (1889 ~ 1976)
지식인의 정치참여는 온당한가?
굳이 안 될 이유야 없지만 나치 같은 범죄적 세력에 참가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그러면 지식인의 정치적 의사와 그의 이론적 견해 사이에 필연적 연관이 있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정치참여의 정당성 여부는 대개 분명한 연관이 있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 더 문제가 되곤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정치지향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견해가 반드시 나치 지지로 귀결되는지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분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마지못해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총장을 맡았고, 유대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임무가
성공하자 총장직을 그만두었고, 적어도 허위에 사로잡힌 열정 때문에 나치를 지지했지만 곧 그 환상에서 벗어났다고
믿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노년의 하이데거는 자신의 가르침을 거부한 나치 때문에 독일인이 자신들의 운명을 이끌 힘을 잃게 된 것이며 그 역시
나치의 희생자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방대한 독서량과 독특한 사유로 에른스트 카시러와의 논쟁에서 승리했고, 현대 서구사상에 놀랄 만큼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유독 정치와 정치적 사유의 영역에서만 순진했다는 것이 진실일까?
사실은 달랐다. 그는 총장이 되기 위해 로비를 했고, 대학개조에 적극적이었으며, 순회연설은 늘 히틀러 만세로 끝맺곤
했다.
총장을 그만두었을 때도 그의 옷깃에는 나치를 상징하는 핀이 꽂혀 있었고, 제자 칼 뢰비트에게는 <존재와 시간>에 등장
하는 개념과 자기의 정치개입의 관계를 설명해주기까지 했다.
나치 지지는 윤리적인 문제도 낳았다.
부자관계에 비할 만큼 유대가 깊었던 스승 에드문트 후설을 배신(1940년대 초 <존재와 시간>에 포함된 후설에 대한 헌사를 삭제했다가 나중에 슬쩍 끼워 넣었다)했고, 평생의 벗이었고 지적 동료였던 야스퍼스의 부인과 끝내 자신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던 제자이자 연인 한나 아렌트를 외면했으며, 동료교수 헤르만 슈타우딩거와 제자 에두아르트 바움가르텐을 정치적인 이유로 탄핵했다. 그들은 유대인이었다.
나치 지지는 용서받기 힘든 과거였다.
적어도 하이데거의 초기 사상에 대해서만은 지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야스퍼스조차 그가 대학 강단에 서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도덕적 평가만이 중요했다면 하이데거의 사유는 아무런 영향을 행사할 수 없었을 테지만, 그는 20세기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남았다.
놀랍게도 그의 지적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인정한 사람들 중에는 가장 좌익적이며 최근의 철학적 사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이데거의 지적 영향력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좌우익 모두에 대해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역사적인 면에서만 보면 하이데거 옹호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이데거와의 이론적 유사성에 대한 동의를 구했다가 거절까지 당했던) 사르트르는 누구보다 인상적인 언사로
하이데거의 사상을 변호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철학자의 사상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면, 만일 우리가 새로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기술과 방법들을 다른 철학자에게 요구하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가 그의 이론을 전부 신봉한다는 것을 의미하겠는가?
마르크스는 헤겔로부터 변증법을 빌려 왔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론>을 프로이센 공국의 저작이라 말하겠는가?”
사르트르의 변호는 설득력이 있다.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려 할 때 그의 모든 것, 예컨대 사생활이나 악행까지 모두 배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이데거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고 믿은 사람들은 그의 행위와 사유 사이의 연관성을 배제하거나, 적어도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
들뢰즈, 데리다, 푸코, 라캉 등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친나치 행적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으면서도 그의 영향을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재현하거나, 그의 사상에서 받은 영감을 자기의 이론 구성에 사용하는 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하이데거의 제자로 만들었을까?
그의 사유에 정말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는 존재(sein, be)와 존재자(존재하는 것, seiendes, is-ness)를 구별했다.
철학은 존재자만을 사유할 뿐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다며 존재자는 존재에 입각해서 사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존재(sein)란 어떤 것의 존재, ‘있음’을 의미했고, 존재자(seiendes)란 존재하는 ‘그 무엇’, ‘있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가 보기에 사람들이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어떤 것, 존재자였고, 존재자는 단지 주어져 있을 뿐, 뭐라 설명하든 결국은 우연한 것 이상으로 나갈 수 없었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면 사태가 달라질까?
그는 진리를 대상과 개념의 일치로서만이 아니라 실체의 본질이 드러나는 과정이라고 이해했다.
전자는 우연히 얻어질 수도 있지만 후자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존재자의 진리가 존재에 있는 한 존재자는 존재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은 필연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경험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존재자란 존재의 실현이었기 때문이다.
존재는 자신을 드러낼 특정한 장소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실현되어 특정한 형태를 갖는 존재자가 된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 sein에 관사 da를 붙여 dasein, 현존재라고 불렀다.
현존재는 항상 ‘거기(da)’, 즉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현실적인 존재이며, 장소(공간)를 내포하는데,
장소의 본질은 시간이다. 현존은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세계는 공간과 시간에 의해 그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현존재는 세계 내에 존재하는 ‘세계-내-존재’로서 관계를 통해 실현된다.
세계는 상대적이다. 공간조차도 멀면서 동시에 가까울 수 있다.
타인과 관계하는 이상 자아는 자신과 더불어 있는 타인의 요구에 종속되어 존재한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있는 나이며, 타인과 공통적인 존재양식을 갖지만 그것은 나 자신의 고유한 현존재를 망각하는 비본래적인 존재양식이다.
타인은 몰개성적이고 익명성을 갖는 집단으로서의 대중이며, 그것이 바로 타인의 힘이다. (대중성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
하는)
인간은 평균화를 벗어나지 못하며, 잡담, 낙서, 호기심에 빠져 고유의 현존재성이 퇴락한 결과가 자기소외다.
타인에게 지배된 세계에 몰입함으로써 자기와 세계의 사멸을 망각하고 비본래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기의 실존과 실존의 근본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사회, 산업사회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된다.
타인에게 지배되는 현존재는 죽어야 할 운명이다.
죽음은 현존재의 특성, 거기에 있음을 포기하게 하는 절대적 지평, 현존재의 끝이지만 하이데거는 죽음조차 존재의 한 방식으로 이해했고, 존재 가능한 방식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가 부활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죽음을-향한-진의적 있음’을 마주하라는 그의 요청은 존재가 부여한 현존재의 진의성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타인에게 지배당한 상태로부터 자신을 회복하라는 의미다.
이 요청은 결단을 요구한다.
하이데거는 독일의 현존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마도 서구의 위기(죽음)에서 부활은 진의성의 회복, 즉 존재문제로의 회귀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지리적 중심, 유럽 언어의 시원적 언어인 독일어, 이러한 요소들에서 하이데거는 독일의 운명, 서구의 몰락 속에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독일의 사명을 발견했다.
하지만 나치는 하이데거의 제안을 거부했고, 자신을 희생자로 생각한 하이데거는 나치가 자신의 해법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독일인이 자신의 운명과 만나게 될 길을 막아버렸다고 믿었다.
존재는 사라졌고 구원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노년으로 갈수록 하이데거는 더욱 신비주의에 빠져들었다.
이것이 그에게서 독일 보수혁명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이유다.
하이데거가 통합유럽이라는 동시대의 유토피아에 현혹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들은 하이데거의 실천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그 철학도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진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이 거꾸로 서있고, 따라서 그대로 쓸 수는 없다고 했다.
그 말은 하이데거에게도 해당된다.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 대한 해설서로는 <존재와 시간 강의>(소광희, 문예출판사), <쉽게 풀어쓴 하이데거의
<김동수 | 대안연구공동체 연구위원>
- 하고 싶은대로, 네 욕망에 따라 행동하라
ㆍ자크 라캉 (1901 ~ 1981)
총선이 막 끝났으니 선거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겠다.
간과되고 있지만 선거권은 아무에게나 부여되지 않는다.
나이, 국적, 범죄 경력, 심신 장애 등을 이유로 선거권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선거의 주인, 유권자가 될 권리는 법이 정해놓은 테두리를 넘지 않은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이제 말하려는 라캉의 ‘주체’는 선거권과 무관하지 않다.
주체는 무엇보다 법·질서에 복종하겠다고 맹세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영어 사전에서 주체(subject)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주인과 하인 그리고 환자라는 의미가 나온다.
하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다는 모순. 라캉에게 주체는 그런 것이다.
주체 : 라캉의 이론은 난해하다기보다는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나의 <에크리>(ecrits는 글 모음집이라는 뜻)는 읽히지 않기 위해서 쓰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글(언어)이라는 상징을 통해서는 그것을 넘어서는 상상(이미지)과 실재(물자체)를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을 집중해서 <에크리>를 읽을수록 그것이 말하는 진실로부터 그만큼 멀어지는지도 모른다.
라캉은 수수께끼의 탑을 쌓았다.
가장 아래에 괴어 놓은 돌이 무의식이라면 그 정점에 실재라는 (이해) 불가능의 돌을 올렸다.
따라서 그의 글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해가 끼어든다.
이 글도 어쩌면 오해와 이해의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글이란 라캉의 말대로 오해되기 위해 쓰이는 것이거늘.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의 안개가 걷히고 나니 눈앞에 세 개의 섬이 보인다.
그러나 썰물이 빠져나가고 나면 분리된 것으로 보였던 섬들이 사실은 하나의 섬에서 솟은 세 봉우리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캉은 주체의 이론가다.
그가 말하는 주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로 대변되는 철학적 주체(근대 이성의 주체로 라캉은 이것을 자아로 파악한다)와는 사뭇 다르다.
무의식을 강조했던 초기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창하며 라캉은 무엇보다 주체 개념을 세공해서 발전시켜 왔다.
자아를 강조했던 영미권의 자아심리학과 끝없이 투쟁해 온 라캉이 자아와 대비되는 주체를 강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이다.
그는 주체/무의식을 분석하는 도구로 구조주의 언어학을 사용했지만 언제나 구조가 포섭하지 못하는 잔여물에 주목했고,
언어 사슬에서 벗어나 실재로 도약하려는 주체의 욕동에 주목했다.
이제 라캉이 들려주는 주체 탄생의 비화를 통해서 상상, 상징, 실재가 무엇인가를 짚어보도록 하자.
상상계 : 주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자아가 선행되어야 한다.
거울 단계로 알려진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시기에 자아가 탄생한다. 거울 속의 이미지를 보고서 “아! 저게 나로구나!” 하고 자기애에 빠져드는 유아.
그러나 라캉이 보기에 그것은 허상에 불과한 이미지를 자기로 오인하는 소외에 불과하다.
불행히도 인간에게 이러한 소외와 착각은 운명이다.
게다가 자기애의 이면에는 자기 파괴가 존재한다. 신화에서 나르시스가 이미지와 자신 사이에 놓인 심연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물속에 몸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라캉이 좋아하는 말장난을 해보자면 상상계의 거울(miroir)은 사랑(amour)이면서 동시에 죽음(mourir)이다.
발달 단계를 뜻하는 불어 stade는 무엇보다 투기장(stadium)이다.
엄마-아이의 2자 관계로 표상되는 상상적 층위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결코 평안한 관계가 아니다.
물론 엄마와 아이 모두 이것을 모른다. 언제나 아이 뒤에서 보호·감시하는 어머니의 존재는 아이에게 해롭다.
엄마의 치마폭은 아이를 바람으로부터 막아주기는커녕 질식시킨다.
상상적 2자 관계(dual)는 다름 아닌 사투의 관계(duel)이다.
이처럼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는 자아의 세계에 고착되면 자폐증(정신병)이 발생하는 것이다.
상징계 : 아버지가 개입해 엄마와의 위험한 2자 관계는 붕괴되고 3자 관계가 형성된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는 이름/금지(nom/non은 불어에서 동음이의어)로 존재하는 사법적 권위의 상징이다.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자 동시에 어머니가 욕망하는 대상, 곧 자신)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금지에 동일시하고 상징적 질서로 들어가 주체로 거듭난다.
이것이 상징적 거세이며 이 과정에서 중요한 상실/결여가 발생한다.
상징적 질서에 입장하는 대가로 자기 존재의 일부(어머니의 욕망)를 지불해야 하는데 이것이 잃어버린 대상이며 욕망을
야기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주체는 자신의 존재-결여를 메우기 위해 무언가를 욕망한다.
이 무언가가 통상 대상a/환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밑 빠진 독’이다.
오디오 파일들의 기기 바꿈질을 생각해보자. 그들이 욕망하는 소리, 소위 원음이란 기기의 재생음이 결코 아니며 그렇다고 공연장에서 듣는 생음악도 아니다.
그것은 뱃속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목소리일 것이기 때문에 바꿈질은 끝이 없고 지름신은 매일 강림한다.
그렇다고 대상의 끝없는 바꿈질(욕망의 환유)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사는 힘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 결여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
상징적 질서에서는 비어 있는 공간(결여)이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라캉이 보기에 단어(기표)와 의미(기의) 사이에는 분단선이 그어져 있어 서로 만날 수 없고 따라서 단어는 내용이 없는 결여 그 자체이다.
이처럼 공허한 기표들의 사슬로 구성된 상징적 질서는 완전한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균열의 구멍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구조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을 수 없고 언제나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라캉이 통상적인 구조주의와 갈라서는 지점이 이곳이다.
결여가 없는 완전한 존재라고 믿었던 대타자 역시 결여에 시달리는 욕망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주체의 분리가 시작
된다.
분리(se+parer)의 어원을 분석해보면 ‘자신을 생산한다’는 의미가 드러난다.
이제 주체는 환상 대상이나 대타자의 종속된 욕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며 상징적 질서에 구멍으로 간헐적으로 틈입하는 실재와 조우하게 된다.
실재계 : 1960년대 이후 라캉은 실재(real)에 연구를 집중하게 되는데, 실재는 간단히 ‘불가능’으로 정의된다.
“실재, 그것은 불가능이다.” 이것은 프로이트적 사물(혹은 칸트의 물자체)로 결코 알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한 정의보다는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해 떼어두고 온 존재의 일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주체는 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사양하고 상실한 대상을 직접 찾아나서는 위험한 시도를 감행한다.
그것은 쾌락원칙(가장 낮은 수준으로 흥분을 유지하려는 목표를 갖는다)이 제시하는 금지선을 넘어 상징계의 매개 없이
사물(실재)과 직접 통교하려는 것이다.
실재는 결여가 없는 충만함이며 따라서 완벽한 만족을 주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궁극의 만족(이것은 긴장이 전혀 없는 죽음일 것이다)과 적정한 거리를 두려는 ‘쾌락’과 대조되는 ‘향유(jouissance)’는 극도의 흥분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고통/쾌락, 주체/대상 사이 아무런 구분 없는 ‘물아일체’를 지향한다.
그것은 엄마와 구분 없이 하나가 되려는 것이기에 위험하고 죽음(태아)을 환기한다.
이제 주체는 상징적 질서에 포박당해 부름에 응답하는 수동적 존재이기를 그치고 절대적 만족을 향해 목숨을 거는 영웅을 닮았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윤리학이다. “실재가 추동하는 네 욕망에 따라 행동하라.”
마지막으로 상상, 상징, 실재는 상호 연결된 고리의 형태로 존재하며 우열 관계는 없다는 것을 말해두어야 하겠다.
일정 시기가 지나면 각 단계가 완료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매순간 각 계들이 상호 침투하며 하나만 빠져도 모두 붕괴되는 삼위일체의 구조다.
지금 이 순간도 ‘자뻑증’은 수시로 찾아와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고통/쾌락을 즐기기 위해 온갖 해로운 것들(술, 담배, 커피)을 음용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라캉을 심화해서 공부하고 싶다면 당연히 원전을 읽어야 할 것이다.
<유충현 | 대안연구공동체 연구위원>
ㆍ미셸 푸코 (1926 ~ 1984)
지금 제시한 이 분류법에서 빠진 동물이 있는가? 없다.
위의 분류법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의 것이 정상이라는 그 거만함이야말로 진정으로 야만스러운 사고다.
우리는 한민족인가? 우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들어온 수많은 다른 타자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하나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해온 역사, 아니 본질이든 그 무엇이 됐든, 어떤 특정 하나의 개념을 중심으로 놓기 위해 그 외의 다른 것들을 애써 무시해온 역사가 바로 지식의 역사이고, 더 넓게
우리가 믿고 있는 인간의 본질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는 것을 우리는 일탈이라고 한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돈키호테 이후 “반세기도 안 되어 (고전주의 탄생과 함께, 합리주의의 탄생과 함께) 광기는 갇히고
여기서 우리는 ‘표준’ 인간이 합리의 이름으로 자신도 모르게 ‘타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의 야만성을 발견한 푸코의 혜안에
다시 푸코의 광기로 돌아가 보자. 푸코에 따르면 ‘미친 사람’이 분류되어 가는 과정에 따라 그 분류자도 변해간다.
의학은 이제 표준화된 사회를 위한 홍위병 역할을 한다. 인간의 바람직한 몸을 제시한다.
20세기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모든 저작과 강의, 사회참여를 통해서 하고자 했던 것은 지식권력들이 사회의 마이너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격리가 얼마나 암암리에 사회 안에 깊이 침투해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푸코의 주저는 대부분 번역되어 있다. 초기의 대작 <광기의 역사>(이규현 역, 나남, 2003)는 푸코 입문자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말과 사물>(이광래 역, 민음사, 1997)은 말할 나위 없는 푸코의 주저다.
그 외에도 <임상의학의 탄생>(홍성민, 인간사랑, 1996), <감시와 처벌>(오생근 역, 나남, 2003), <성의 역사1>(이규현 역
<임상훈 | 대안연구공동체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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