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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근철 2

doll eye 2018. 10. 31. 17:23

한철연 철학사 
-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 -

1부 이성과 경험 

1강 근대란 무엇인가? 희극의 재탄생: 베이컨, 갈릴레이, 뉴턴 (11월 10일, 최종덕 상지대 교수) 
2강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의심하라 - 근대적 자아의 탄생: 데카르트 (11월 17일,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3강 자연과 자유의 화해는 가능한가? - 근대의 탈 근대적 사유: 스피노자 (11월 24일, 조현진 숭실대 외래교수) 
4강 이성의 꿈을 완성하다 - 논리와 컴퓨터의 유토피아: 라이프니츠 (12월 1일, 김성우상지대 겸임교수) 
5강 괴수 조종 매뉴얼 - 홉스의 리바이어던: 기계론의 정치학 (12월 8일, 한길석 군산대 외래교수) 
6강 시민정부와 재산권 - 자유주의 정치학: 로크(12월 15일, 박영균 건국대 HK교수)
7강 건전한 지성은 회의로 끝난다 - 개인주의 인식론: 흄(12월 22일, 남기호 연세대 외래교수) 

2부 계몽과 정신의 모험 

8강 자유로운 주인이 되는 이성국가를 꿈꾸다 - 사회계약론 넘어가기: 루소 (1월 5일, 김광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9강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 - 근대철학의 종합: 칸트 1(1월 12일, 강지은 건국대 외래교수) 
10강 세계시민은 가능하다? - 근대에서 현대로의 변화 이념: 칸트 2 (1월 19일, 박지용경희대 객원교수) 
11강 세계의 비밀을 밝히는 변증법을 제시하다. - 근대철학의 완성: 헤겔 1 (1월 26일, 이관형 서울과학기술대 외래교수) 
12강 새로운 시대를 여는가? - 세계시민사상에 대한 철학자의 고뇌: 헤겔 2 (2월 2일,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자유로운 주인이 되는 이상국가를 꿈꾸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8> 사회계약론 넘어가기 - 루소


자유로운 주인이 되는 이상국가를 꿈꾸다



자식 5명을 고아원에 보냈지만, 교육학의 명저 『에밀』을 쓴 루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한 주례강좌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의 제8강에서는 김광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의 강의로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사회계약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종교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에서 제노바 공화국으로 이주한 집안에서 태어난 루소는 어머니 없이 친척들의 손에서 주로 성장하며 어린 시절부터 방랑의 시간을 보냈다. 루소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탐독하며 독학으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켰는데,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학문예술론』, 『인간불평등기원론』은 디종 아카데미의 논문 현상공모의 응모작이었다. 두 저술 모두 당시 기준으로 급진적인 사상과 기성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담고 있었다.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도덕의 순화에 기여하는가'라는 논제에 대하여 루소는 오늘날의 우리들이나 당시 계몽주의자들의 상식과는 반대로, "학문과 예술의 발달은 인간의 도덕성을 타락시켜 왔다"고 논증하여 현상공모전에서 최고상을 차지했다. 루소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온갖 스캔들과 그의 솔직하고 파격적인 고백을 담아 그의 드라마틱한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도 두꺼운 분량의 책 한 권이 나올 것이다. 수십년 간 동거한 하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5명의 아이들을 루소는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 이후 이러한 행동에 대해 그가 자서전에서 변명을 했다지만 '아빠 루소'와 『에밀』을 쓴 '교육자 루소'를 동시에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편 루소는 홉스나 로크와 달리 필연성이 지배하는 '자연상태'를 부정적인 전쟁상태로 보지도 않고, 오히려 '사회상태'를 비판적으로 보기도 했다. 루소는 여러 곳에서 자연인의 삶을 아름답게 묘사하며 그들을 욕망에 사로잡힌 동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에게 자연인의 삶은 "집도 가족도 없이 자유롭게 혼자 살면서 자연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평화로운 삶"이다. 물론 이 자연상태는 역사성과는 상관없는 추론의 결과이지만, 루소의 이러한 성향은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 철학 내에서 루소가 가지는 독특한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에밀』에서처럼 교육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시스템을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보지 않는 루소식 공화주의의 단초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일반의지'에 근거한 주권을 통해 자유와 평등을 얻는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으나 모든 곳에서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사회계약론』에 담긴 루소의 근본 질문은 '이 타락한 인간사회에 어떠한 정치체제를 구성할 때 인간이 자연 상태의 선한 본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래서『사회계약론』에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법률을 있을 수 있는 형태로 파악할 경우에 사회질서 속에 어떤 정당하고도 확고한 정치의 원칙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담겨 있다. 결국 그 고민은 법률이 인정하는 집단의 정의와 개인의 이익이 어떻게 결합하고 조화될 수 있는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김광호 선생에 따르면 이 저작이 지나치게 짧고 압축적이어서 이것만으로는 루소의 사회철학적 구상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여기 담긴 그의 사상이 그의 대표작인 『에밀』에도 반복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그의 기본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저술의 비체계성으로 인해 루소에 대한 평가는 "계몽주의적 개인주의부터 극단적인 전체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루소가 이해하는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와 "모든 입법체계의 목표는 자유와 평등이다. 자유가 그 대상이 되는 이유는 개인의 예속이 국가라는 정치체의 힘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며, 평등이 그 대상이 되는 것은 평등 없이는 자유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루소는 정부를 민주정, 귀족정, 군주정 또는 왕정, 그리고 수많은 혼합정체로 나누었다. 루소는 민주정은 소국(小國)에 적합하고, 귀족정은 중간 정도의 크기를 가진 국가에, 군주정은 대국(大國)에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물론 루소에게 있어 민주정에서 귀족정으로, 다시 군주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정부가 타락한 것이다. 최악의 경우로서 정부가 주권을 찬탈할 경우, 국가는 무정부 상태로 변질되는데, 그때 민주정은 중우정치로, 귀족정치는 과두정치로, 왕정은 참주정치로 타락하게 된다고 루소는 보았다. 

양도될 수도 분할될 수도 없는 주권이 평등을 지향하는 인민 전체의 의지인 '일반의지'라면, 표명된 그 의지는 주권의 행위로서 '법률'을 제정한다. 반면 인민의 일부에 국한된 의지라면 그것은 특수한 이익을 반영하는 '특수의지'에 불과하며 행정기관의 행위로서 기껏해야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양자가 일치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일 뿐이다. 루소의 주권 개념을 설명하며 김광호 선생은 "법률의 구성과 법률의 적용을 혼동해서는 안되며, 주권은 항상 '최고의지'를 전제로 하여 그것의 집행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주권은 인민의 권리이자 동시에 자기통치(자치)의 원리이다. 

이러한 '일반의지(la volonté générale)'를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루소는 그것을 '전체의지(la volonté de tous)'와 대비시켰다. 한 마디로 일반의지가 공동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것이라면 전체의지는 개인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특수의지들의 합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루소는 인민은 부패하지 않지만 흔히 기만을 당하기 쉽기 때문에 일반의지와 인민의 결의에도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특수의지를 서로 상쇄시키면 그 차이의 합계로서 일반의지가 남게 된다. 

그런 면에서 다양한 집단들의 이익과 의지가 서로 갈등하는 상황에서 어느 하나의 의지가 다른 모든 집단들의 의지를 압도하게 되면, 일반의지는 사라지고 그 지배적인 의지는 순전히 특수의지가 된다. 따라서 "일반의지가 충분히 표명되기 위해서는 국가 내부에 부분적 사회가 없어야 하고, 각 시민이 오직 자기의 의지만을 따라 행위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후대에 루소는 홉스주의적 모델을 이어 받은 전체주의자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또한 루소의 정치사상을 민주정 모델이 아닌 군주정 모델의 한 형태로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의지에 근거한 이러한 사회계약설은 루소식 공화주의의 중요한 기초가 되기도 한다. 

선거 때만 자유로운 인민들에겐 투표보다 추첨이 차라리 낫다

루소는 이러한 계약의 근거를 '일반의지'에서 찾는데, 이것을 찾는 과정은 구성원 전체가 가진 공동의 힘으로 각자의 신체와 재산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각 개인은 전체에 결합되어 있지만 그것에게만 복종하지 않고 이전과 같이 개별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하나의 결합 형태를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루소에 따르면 시민의 집합체인 단체만이 주권자로 간주되며, 각 시민은 그것을 구성하는 하나의 개인이라는 단위로 간주된다.

그래서 국가의 크기가 커질수록 시민의 자유는 감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가의 크기에 따라 다른 성질을 가진 많은 정부 형태가 존재하며, 그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정부형태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루소는 국가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만 정부는 주권자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정부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정부를 위해 인민을 희생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정부를 희생시킬 수 있느냐가 이제 루소에게 관건이 된다. 물론 일반의지를 그 정부를 통해 실현시키는 것은 무척 어렵고 복잡한 일이기도 하다. 

대의제에 반대하는 루소에게 주권은 어떻게 지속성을 가지고 유지되는 것일까? 루소의 주권자는 입법권 이외에는 어떠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직 법률에 따라서만 행동할 수 있다. 그는 인민의 정기적이거나 임시적인 집회에서는 주권자들인 그들이 정부의 재판권이나 집행권을 넘어 투표를 통해 최고의 권한을 가진 의사결정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인민이 합법적으로 집회를 하는 순간부터 "가장 비천한 시민이라도 최고행정관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신성불가침의 것이 된다." 김광호 선생은 루소에게 있어서 "주권은 양도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권은 일반의지에 속하므로 대표될 수도 없다."고 강조했다. 루소도 일찍이 "대의제를 시행하는 영국의 인민들이 자유로울 때는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기간일 때뿐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루소는 대표자나 행정관의 선출에 대해서도 민주정에서는 '투표'가 아니라 '추첨'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민주정치가 행해지는 곳에서 행정관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영광이나 이익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과 부담이기 때문이다. 권한은 막강하고 책임은 약한 국회의원이 아니라 시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실질적으로 막중한 업무를 소화하는 대표, 자신의 권력유지가 아니라 인민의 권력을 위해 봉사하는 대표자 말이다. 그렇기에 루소는 오늘날 주권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다시피 한 투표가 군주정에서나 적합한 것이라고 보았다. 

나는 국가 기관이 항상 전체 인민의 행복을 지향하는 그러한 목적을 향해 나가도록, 주권자와 인민이 오직 하나로 일치되는 이해(利害)를 갖는 나라에 태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현명하게 조화된 민주적인 정부 아래 태어나기를 바란다.(『제노바공화국에 부치는 글』) 

인민의 자유를 위해 대표자와 행정관의 수는 줄여야 한다

이처럼 루소에게 정부를 수립하는 행위는 홉스나 로크와 달리, 계약에 그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률의 구성에 핵심이 있다. 물론 그 법률을 논의하고 세우는 것은 주권자인 인민들이며, 그 법률에 효력을 부여하고 집행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대표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통치자는 위임받은 권리를 확장하는 경향이 있으며, 공공질서의 유지 차원에서 인민의 회합이나 집회를 방해할 수 있으므로 정부와 대표자의 월권을 방지할 수단이 필요하다."

루소는 정부의 행정관이 개인의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의지', 통치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단체의지', 인민의 의지 또는 주권자의 의지인 '일반의지'라는 세 의지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연의 질서에 따르면 일반의지가 가장 약하고, 단체의지가 다음으로 약하고, 개인의지가 가장 강하므로 정부의 구성원은 사회질서가 요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경향성의 의지를 갖고 있는 셈이 된다. 따라서 루소는 행정관의 수가 늘어나면 정부의 힘은 약해지고 인민을 통제하는 힘도 커진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루소는 "국가가 커질수록 정부는 축소되고 인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통치자의 수도 줄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루소는 '일반의지'라는 것에 근거한 국가와 정부의 구성 원리를 제시했다. 이 '일반의지'는 개별자들이 가진 의지의 총합인 전체의지와 구별되며, 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루소는 전체주의적인 정치체제를 구상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를 일반화된 진리로 여기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루소의 주장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형태에 상상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발전적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 심의 민주주의, 협의 민주주의, 작업장 민주주의, 소통 민주주의' 등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고 확장하는 여러 이론들의 다양한 사유실험 과정에서, 주권의 절대성에 기초한 루소의 주장은 어떤 방식이든 직접민주주의의 가치와 가능성을 사유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근대철학사 여행의 종착지, 칸트와 헤겔 

베이컨과 데카르트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근대철학사 수업을 함께 해온 수강생들은 조금 지쳐있거나 갈수록 더 아리송한 의문의 상태에 빠져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심호흡을 하고 강좌 후반부에 집중하기 위해 다시 힘을 낼 필요가 있다. 

경험론과 합리론으로 대비되는 인식론적 문제에서 출발한 근대 계몽주의 철학의 여러 조류들은 이제 칸트와 헤겔이라는 두 거대한 호수로 흘러들게 된다. 앞으로 남은 4번의 강의는 그 독일관념론의 두 호수 사이를 안내자의 도움으로 가볍게 걸어가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다음 강의는 1월 12일 강지은 건국대 외래교수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 - 근대철학의종합 : 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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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9> 근대철학의 종합: 칸트 1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



칸트의 기획, 세계의 명료화와 계몽된 인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한 주례강좌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사실 한 주에 2~3시간 맛보기 강좌만으로 다양하게 전개된 서양근대철학사를 한 눈에 포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되면 이제 핵심적인 내용으로 바로 육박하는 수강생들의 날카로운 질문공세를 보면서, 매 주 바뀌는 강사 선생님들도 적잖이 놀라는 눈치이다.

제9강에서는 강지은 건국대 외래교수의 강의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철학을 개관해보았다. 칸트는 근대철학 전반부에 첨예하게 개진된 여러 철학적 조류들을 종합하여 계몽주의 철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자, 인식론에서 윤리학에 이르는 독일관념론의 사상적 터를 닦았다. 그런 위대한 철학자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의 사상을 단 2회 만에 속성으로 살펴보고 함께 고민할 문제들에 관해 저마다의 생각들을 나누어보려고 한다. 그래서 첫 시간에는 칸트의 유명한 세 가지 '비판서'를 중심으로 칸트의 철학을 개관하고, 그가 어떤 방식을 통해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을 접목시키고 자신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하였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10강에서는 칸트가 후반부에 주력했던 실천철학에 관해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다 심도 깊은 문제제기와 논의가 이어질 것이다.

강지은 교수는 근대 시민사회를 "인간이 신에게서 벗어나는 시대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여는 시대"로 규정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기라고 설명했다. 그 과정 속에서 철학자들은 신을 배제하고 인간과 자연의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 '자연'은 크게 보자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세계이지만, 근대인들이 스스로에 대해 말했던 "계몽되지 못한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다." 그런 면에서 근대철학은 "계몽되지 않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쟁하고 계몽에 대해 논의하며 인간의 이념을 설정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런 배경 위에서 칸트를 "계몽과 의사소통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명백하게 예견한 철학자"로 본다면, 그의 철학적 기획만큼 근대인들이 가졌던 세계 이해의 욕망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자율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자연이라는 세계와 인간이라는 내면을 파악하고, 다시 그것을 서로 연결하고 조화시켜서 설명하려는 자유를 향한 꿈 말이다. 칸트의 일관성 있는 비판철학은 근대철학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며 근대 자연과학의 철학적 기초를 재정립했다. 또한 유럽의 사상계는 칸트를 기반으로 해서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는 독일관념론의 풍부한 유산을 낳았고, 이후 신칸트학파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칸트는 철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칸트는 '계몽'이 "인간의 보편적 이해의 가능성에 대한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길이며, 다른 사람과의 소통 속에서 사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세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해하고 사유하려는 자율성을 통해 세계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 성립될 수 있고, 그러한 자율적인 도덕성과 반성적 판단력을 통해 인간이 진정 참되고 평화롭게 타인(자연)과 어울려 살 수 있다는 원대한 기획. 그것은 베이컨의 우상타파론과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라는 세계에 대한 명료한 인식의 욕망이 도달했던 어느 근대인의 숭고한 꿈이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객관이 주관에 의해 구성된다 

칸트는 자신이 기획한 일련의 비판철학을 통해 그 계몽의 기획을 완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여기서의 '비판(Kritik)'이란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삐딱한 자세의 비난이 아니라, 기존의 사상이나 담론을 모두 철저한 사유 속에서 재검토해보려는 시도이다. 칸트는 자신에 앞서 대립되던 합리론과 경험론의 입장에 모두 만족하지 못하고, 두 사상적 경향들은 "자연과학적 진리의 일면만을 설명해 줄 뿐 과학적 지식이 갖는 실질적 진리성을 확고하게 만들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칸트가 생각하는 실질적 진리란, 뉴턴의 물리학이 그러하듯이 "보편적 필연성과 경험적 객관성의 양면"을 모두 갖추는 것이어야만 했다. 칸트에게 있어서는 귀납법과 연역법 중 어느 한 쪽에만 의존한 세계 이해 방식은 진리를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구현하기 위해서 불충분했던 것이다. 

먼저 칸트는 무모순성을 진리의 조건으로 여기는 합리론자들의 입장에 동의하여 수학이나 물리학의 기초에 관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의 존재를 믿었다. 그러나 그는 우주론과 신학 및 심리학을 포함하는 사변적인 형이상학은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칸트는 진리의 경험성과 객관성을 잘 설명할 수 있지만 진리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경험론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동의를 표했다. 인간은 경험하는 것만을 알 수 있으며 우리의 감각은 인식의 재료를 제공해주지만, 그것을 통해 성립하는 우리의 지식이나 인식은 특정한 상황에 한정된 것이지 사물 자체에 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이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에 대해 감각경험으로만 인식한다면 그것은 보편성이나 필연성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만약 인간이 경험을 통하지 않는 생득적인 관념을 통해서만 인식한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합리론과 경험론의 오래된 논쟁과 대립을 종합하여 칸트는 우리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사물 자체(the thing-in-itself, Ding an sich), '물(物)자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사물에 대한 개별적인 현상은 인식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 자유, 영혼불멸 등은 그것을 실체로서는 인식할 수 없지만 그것에 대해 개념화하여 생각은 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칸트는 인간은 경험을 수반하지 않는 "선천적인 인식의 틀"을 갖추고 있으며, "그 틀을 통해 대상을 인식-선천적 종합판단-한다는 획기적인 사유의 혁명을 이루어냈다." 칸트는 인식론에 대한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에 맞먹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표현했다. "종래에는 주관이 객관(대상)에 의거하여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반대로 객관이 주관의 선천적 형식에 의해 성립된다는 인식방법상의 전환"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를 통해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는 대상과 그렇지 못한 체 단지 사변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을 구분하여 기존의 형이상학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궁극적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 

당시 사람들은 칸트의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보고 고리타분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나름의 원칙과 신념을 치열하게 준수하는 생활 속에서 자율적인 삶을 구현하고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를 누리려고 했는지 모른다. 칸트가 철학자로 살면서 품었던 궁극적인 물음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 그런데 강지은 교수는 여기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자이다'라는 형식적 규정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인간이란 무엇인간'라는 질문은 "이성적인 인간을 좀 더 객관적으로 규정해보겠다는 시도이다." 즉,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누구나 동의 가능한 방식으로 설명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자신의 이러한 진지한 문제제기인 인간에 대한 규정을 다음의 세 가지 물음으로 구체화하고, 그것에 스스로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체계를 구축했다. (1)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순수이성비판』)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실천이성비판』),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판단력비판』) 

칸트는『순수이성비판』에서 앞서 말했듯이 자연의 세계가 인간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학문적인 지식으로 정립 가능한지에 대해 철저히 따져 물었다. 이렇게 '인식의 구성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이론이성의 체계를 구축한 칸트는 그것이 가진 한계와 고립성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말하듯이 이제 인간의 삶을 설명하려는 실천이성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의 세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 같은 이론이성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려고 했는지는 그의 다음 비판서, 『실천이성비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 법칙 

그는 여기에서 "자유와 도덕 법칙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론철학 후에 진행될 실천철학의 원리적 토대"를 닦았고, 자연과 인간의 정신을 함께 설명하려고 하다가 난관에 부딪힌 근대철학의 난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칸트는 윤리성의 원천을 서양의 전통철학처럼 "자연, 공동체의 질서, 행복에의 희구, 신의 의지 혹은 도덕적 감정" 등에서 찾지 않았다. 그는 타당성이 검증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윤리학을 다루며, 앞의 이론이성(대상의 객관성을 구성하는 주관성)과 마찬가지로 실천적 영역에서도 객관성은 주체 자신의 자율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논증하려했다. 

칸트는 도덕의 원천을 "자율(Autonomie), 즉 의지의 자기 입법성"에 두고, 스스로 규칙을 세워서 지켜나가는 자율적인 인간성을 긍정했다. 강지은 교수는 이러한 칸트의 도덕철학을 "모더니티 철학의 핵심 명제인 '주체의 확립'을 철학적으로 논증"했다고 평가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주체의 자율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Freiheit)와도 연관된다. 강지은 교수에 따르면, 근대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인 '자유'는 "칸트에 의해서 철학적 토대를 얻었으며, 그런 점에서 『실천이성비판』은 바로 근대 철학의 기초를 닦은 저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칸트는 인간의 자유 개념을 바탕으로 경험적으로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버릴 수 없는 이념들과 인간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들을 아우르려고 했다.

칸트에게 있어 자유의지를 가진 도덕적 인간은 선천적으로 가능한 존재이다. 윤리 교과서에 나왔던 칸트의 유명한 '정언명법'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 법칙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도덕성이 인간에게 의무로서 주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스스로 생각해낸 도덕적 준칙을 지키려는 행동을 통해서, 즉 유일하게 그 자체로 선한 것인 '선의지(善意志)'를 가진 인간의 자율적인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도덕적 실천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선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율성이다. 인간은 착하게 살아가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로봇이 아니며, 정해진 법칙과 경향성에 따라서만 행위하는 좀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강지은 교수는 칸트가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켰던 것처럼, 실천적으로도 세계 속에서 인간을 도덕 실천의 중심에 위치시켰다"고 평가했다. 칸트는 도덕감도 인식의 틀처럼 하나의 법칙으로 인간에게 주어져 있으며 내적 체계를 갖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칸트가 바라보는 세계는 보편적인 인과율에 따르는 순수하게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체계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기계적인 체계로만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행위하는 주체이다. 이러한 인간 내면의 체계를 통해 인간은 자연 속에 있지만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며, 자연세계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오직 인간의 이성과 실천만이 이 세계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칸트에게 있어서 내 머리 위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빛과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도덕 법칙은 완벽하고 필연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세계의 조화로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이성비판』의 작업은 결국 『순수이성비판』에서는 해결할 수 없었던 당위의 세계, 인간의 내면, 자유의 영역을 체계화시켜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보다 일관된 답변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주체는 세계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칸트는 이제 남은 과제로서 자연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감성적 영역과 인간의 자유와 도덕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초감성적 영역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심연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칸트에게 이 문제가 중요했던 것은 두 세계를 매개시켜 줄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에게 도덕이나 자유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실천하지도 못할 자유라면, 선택할 수 없는 도덕적 행위라면 그것은 인간에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어려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실천할 의지를 가진 인간은 난관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인간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자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은 어느 지점에서는 만나야" 하는 것이다. 

『판단력비판』에서 칸트가 말하는 '판단력'은 인간의 다른 인식 능력인 지성(자연의 영역)이나 이성(자유-도덕의 영역)과 달리, "고유의 입법영역"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판단력은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법칙을 탐구하기 위한 자기의 원리를 갖는다. 칸트는 그것이 "주관적 원리이면서 동시에 선천적 원리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추론해가며, 그 원리를 '규정적 판단력'에 대비되는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규정적 판단력은 이론 인식의 영역에서 "보편이 주어져 있는 경우, 특수를 이 보편 아래에 포섭하는 판단력"을 말하며, 반성적 판단력이란 실천 영역에서 "오직 특수만이 주어져 있고, 판단력이 이 특수에 대하여 보편을 찾아내야 할 경우"의 판단력을 말한다. 

법칙에 포섭되지 않는 우연성을 인정하지 않고 세계를 통합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칸트의 필사적인 노력은 이러한 반성적 판단력을 "체계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매개체로 사유하게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자연에 무규정적으로 남아 있는 다양한 것들에 법칙을 제공하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인데, 강지은 교수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판단력의 매개 작용을 통해 감성적인 자연의 세계는 지성적인 자유의 세계로 향하게 되고, 자유의 세계에 자연의 세계가 종속됨으로써 두 세계 사이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자연에 대한 자유의 우위, 이론이성에 대한 실천이성의 우위를 통해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이 사라지고 하나의 세계로 융합된다." 

그런데 그 융합의 순간은 심미적 체험이 이루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자연의 세계와 자유의 세계라는 인간 정신의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연결되는 그 순간은 반성적 판단력이 작동하여 '미적 체험'을 하게 되는 때이다. '칸트 미학'은 그 사상이 내적 체계에서 자연 세계와 자유의 영역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한낱 사물에 지나지 않는 예술작품은 인간의 판단력을 통해 무한한 이념의 세계(신, 자유, 도덕, 최고선 등)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과 자연의 근원이 일치함을 느끼며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칸트의 말처럼 "자신과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것들에서는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칸트에게 있어 인간이란, 도덕과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하여 자신의 의지를 자연 세계에 펼쳐나가는 존재이다. 그런데 주체는 '공통감(sensus comunis, common sense)'이라는 선천적인 소통의 능력을 통해 자신이 느낀 이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칸트의 공통감이 계몽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며,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지, 결국 우리는 칸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지, 보다 흥미진진한 문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칸트는 아름다움과 선함을 사랑하는 것은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미적이며 도덕적인 인간은 "결코 홀로 노래를 부르려고 하지 않는다." 전혀 유사성이 없는 영역에 거주하는 대상들인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이 결국 하나의 세상을 이루고 있듯이 말이다. 

우리 눈으로 보는 서양근대철학사 제 10강 박지용 경희대 객원교수의 '세계시민은 가능하다 : 근대에서 현대로의 변화 이념 : 칸트2'는 1월 19일 저녁 7시 30분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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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민은 가능하다-정치와 진보, 냉정과 열정 사이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10> 칸트 철학 Ⅱ


세계시민은 가능하다-정치와 진보, 냉정과 열정 사이



다시 묻는다. '정치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한 주례강좌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열 번 째 강의의 주제는 칸트 철학에서 역사와 정치에 관한 문제였다. 달리 말하자면 칸트를 통해 "정치와 철학의 근대적인 만남"을 다시 검토해보는 것이었다. 박지용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는 칸트의 사상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물음을 제시했다. "역사와 정치에 관한 칸트의 견해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의 역사적ㆍ정치적 상황에 대해 어떤 유의미한 성찰을 제시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칸트가 그의 책에서 미주알고주알 말했던 것에 집착하는 것보다, 그의 생각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문제를 분석하고 극복 방안을 고민하는데 어떤 길잡이가 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더 긴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역사-사회-정치의 구조와 의미를 묻는 것은 단지 '거대한 이야기'일 뿐이며, 그러한 거대 담론은 "계몽적 근대성의 산물"일 것이다. 박지용 교수도 말하듯이, 미래의 역사와 사회에 대해 개념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지극히 근대적인 발상이며, 그러한 시도는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그런 구태의연한 이론을 들먹이느냐'라는 핀잔을 듣기 쉽다. 그렇지만 우리가 전근대-근대-탈근대가 중첩되는 시공간에 살고 있다면 그러한 근대성이 형성되던 시대의 정치철학적 성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시해줄 것이다. 

향후 한국사회의 방향성을 결정할 '정치의 해'라고 불리는 2012년에 민중들은 '87년 체제'의 빛과 어두움을 자양분으로 삼아 '2013년 체제'의 틀을 만들 수 있을까. 먼저 박지용 교수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정치'의 의미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그려나갔다. "80년대의 언저리에 대학생활을 보낸 한 사람으로서 사회변화의 열망과 진보에 대한 신념을 공유했던" 그들, 그 에너지는 지금 다 어디에 흩어져 있을까, 혹은 그것은 이제 거의 다 사라져 버린 옛 추억일까. 박 교수가 당시에 믿었던 정치라는 것도 '역사적 주체에 의한 이상적 가치의 실현 과정'을 염두에 두었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근대적인 발상"이었다. '사회의 민주화와 진보의 가치가 한 개인의 삶 속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공유되어야 하고 또 마땅히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전에 내가 생각하는 정치는, 한국사회의 낡은 보수정치 틀을 깨고 민중이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라는, 명확하면서도 뭔가 애매하기도 한 표현으로 대변되는 87년 체제의 정치 개념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지나왔을까.

박지용 교수는 40대 중반이 된 지금도 "만인이 자유로운 사회"를 꿈꾸던 그때의 생각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민중이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야 하지만, 자유롭지 못한 민중이 누구인지가 좀 더 복잡해지긴" 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와 중소기업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경제적인 위상 차이처럼 사회의 양극화는 점점 심화되고 있고, 재벌기업은 IMF 구제금융 시기 이전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서비스 업종의 '작은 밥그릇'까지 모두 잠식해가고 있다. 이러한 심화된 불평등-부자유의 사회가 "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 재편에 대항하여"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일어난 결과라면, 청년실업, 이주노동자 문제, 다문화사회를 거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유로워야 할 민중의 지형은 더 복잡해진다." 물론 복잡해졌다고 그 민중이 사라졌다거나 '다중'으로 전화되었다거나, 디지털 네트워크 사회에서 이제 그들은 무정형의 소비지향적 시민들로 중층적으로 편재되어 있다거나, 그 무엇도 아직 만족할만한 대답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오늘날의 '정치'가 여전히 민중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무엇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데 한나라당으로 상징되는 탐욕적인 수구 세력의 지배에 맞서서, '자유주의자든 진보주의자든 닥치고 통합-연대!'를 외치는 "급박한 현실정치의 논리"와 거리를 두려는 "철학자들의 견해는 어느 정파에도 끼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초정파를 이루려는 보편성의 성향"을 가진다. 박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현실에 기초한 정치가 아니라, 이념과 당위에 기초한 정치"이며,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치 상황 속에서 정치를 타락시키지 않는 "현실 정치에서의 철학적 원칙"을 도입하려 한다. 물론 그것이 너무 고리타분하거나 소수의 사람들만 공유할 수 있는 언어여서는 곤란할 것이다.

계몽의 기획, 아직도 현재진행형인가 

칸트는 '도덕적인 정치가'와 '정치적인 도덕가'라는 개념의 구분을 통해 정치와 철학의 관계를 설명했다. "정치적인 도덕가란 도덕을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과 동일시하고 수단으로 삼는 사람, 정치꾼이다." 반면에 "도덕적인 정치가란 자신이 가진 정치의 비전이 원칙적인 도덕에 기초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정책을 제시하는 정치인이다." 그런데 칸트가 말하는 이 참된 정치인의 모습은 '이성의 공적 사용'을 잘 수행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칸트는 '계몽'을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성숙한 상태로 규정했다. 앞 시간에서도 강조했듯이 칸트가 말하는 계몽된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서 자신의 직무와 직업적인 일로 인해 개별적인 이익과 사적인 조건에 관한 '이성의 사적 사용'과 자아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서 공동체의 이익과 협력에 관한 문제를 판단하는 '이성의 공적 사용'을 구분했다. 그래서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 공평무사한 이성의 소유자로서 사유하는" 것이며, "특정 지역, 직업, 인종, 성별을 떠나서 세계시민적 학자처럼 사유활동"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수강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 면에서 칸트의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지점은 이성의 공적이고 공개적인 사용, 합리성을 함께 도출해 내는 공적인 토론의 장이 된다. 이러한 측면은 하버마스에 의해 '공론장' 개념으로 계승되었으며, 아렌트의 '정치의 공적 영역' 개념에도 영향을 주었다. 근대 시민사회에서 형성된 공공 영역은 주로 언론과 출판이었는데 그것이 관계하는 대상은 Publikum(청중 혹은 독자대중)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었다. 반면 최근엔 SNS 등의 쌍방향 소통 매체를 통해 기존의 일방향적인 언론의 틀을 벗어나 역동적으로 공론장이 형성되고 있다. 물론 칸트가 예견했듯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때는 서로 다른 정치적인 의견들이 대립되고 충돌할 수 있는데, 토론 문화가 활성화되면 보다 자유로운 정치 영역이 확장될 수 있다. 또한 저마다의 의견이 충돌하는 공간이 확대되면 경직된 정당정치를 보완하고 대의제 정치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생산적인 조건이 많이 창출될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칸트가 희망한 "계몽된 인간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사회적 불합리에 대항해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깨어있는 세계시민"의 자세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위하는 인간이 된다. 여기서 박지용 교수는 "칸트가 말한 세계시민 개념은 국민국가의 공간적인 제한을 철폐하여 국경 없는 세계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유의 원대한 지평을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면, 당시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에 대해 각국의 지성들은 각자의 조국과 민족의 이해관계에 따라 제각각 다른 입장을 표명했다. 반면에 칸트는 "전체 인류에 대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세계시민적 견지에서 사유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러한 "칸트의 대담한 세계시민적 사유는 당시 자유로운 사유에 가장 관용적이었던 프로이센의 군주에게조차 다소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칸트는 정치적 혁명을 통해서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로 세계시민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자유와 그렇게 계몽된 인간들이 협력하는 공동체라는 원대하고도 급진적인 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칸트는 "자신의 시대를 계몽된 시대가 아니라 계몽의 시대라고 표명"했는데,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상에 대해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여러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에 대항하여 하버마스 같은 사상가는 "근대의 '계몽 프로젝트'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부의 극심한 불평등, 민족ㆍ종교 갈등, 환경생태 문제 등은 현재의 인류 사회가 여전히 극복해 나가야 할 공통의 문제이며,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과 번영을 위해 그 해결책을 모색해나가야 한다면, 계몽의 기획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몽 담론에 대한 반대자들의 핵심적인 비판은 '이성'이 항상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며, 합리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은 신비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인간을 계몽시키고 사회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해온 근대의 풍요로움과 번영은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약탈과 파괴, 학살과 전쟁, 획일화와 상품화, 파멸과 멸절, 거짓과 선동으로 점철된 역사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도덕적 진보로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가 

이제 앞서 말한 세계시민사회의 가능성에 대해 좀 더 따져보자. 칸트가 해명하려고 했던 이성은 본질적으로 보편적인 관점을 취한다는 점에서 세계시민적인 것이다. 그것은 교양을 갖추고 교육 받은 인간이 활용하는 이성 능력 자체가 이미 세계시민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 인류의 역사가 칸트의 말처럼 모두가 세계시민이 되는 방향으로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쉽게 말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었는가. 그리고 "우리가 세계시민이 되면 대한민국은 사라지는 것인가." 칸트가 바라는 더 좋은 세상, 더 좋은 미래는 어떤 곳인가? 

박지용 교수를 따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시민의 세상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는 국가들이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고, 각 국가들의 차원에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목적'으로 대우될 수 있는 사회적인 여건이 제도적으로 실현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그런 사회는 공화적인 법적 제도가 구비되고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현실이 극복된 곳이다. 물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칸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에 비해 한참 미성숙한 시민사회를 목도했던 칸트가 남겨 놓은 것들에서 우리가 "원리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칸트는 인류의 역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인간의 이성적인 기획이나 의도가 아니라, '자연의 계획'이라고 보았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앞 시간에 공부했던 칸트 철학의 개요를 다시 상기해보자. "인식의 대상으로서 자연 현상은 기계론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과학의 탐구 대상인데 반해, 물자체(예지계)에 속하는 목적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자유로운 원인을 갖는다."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이 각각의 뚜렷한 자립성을 가지고 칸트 철학에서 두 영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에게 있어 역사란 이 두 영역의 세계, 자연과 자유가 이미 결합된 것이다. 즉, "인간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자연의 역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과 자유가 결합된 형식으로서의 인류사 개념을 박지용 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칸트가 생각하는 "자연은 인류의 근원적인 도덕적 소질(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이 실현될 수 있는 방향으로 (역사 속에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보다 넓은 차원에서 말하면, 자연은 인간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세계시민 사회의 구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작용한다는 것이다. "마치 한 개인의 삶이 탄생과 성장, 쇠퇴와 죽음의 과정이듯이 인류 전체의 역사도 단순한 시간의 전개가 아니라, 인류가 소질적으로 가진 도덕적 능력(목적)이 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입장에서는 근대 계약론의 전통을 따라 "자연상태를 벗어나 사회상태로 전환되는 것 자체가 세계시민의 가능성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연은 어떤 방식으로 인류로 하여금 목적을 실현하게 하는가?" 칸트는 자연이 인류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계발시키기 위해 "인간 상호간의 항쟁"을 활용한다고 보았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가진 사회성과 반사회성 중에서, 이기심, 경쟁심, 소유욕, 지배욕 같은 반사회성이 모든 개인의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칸트가 보기에 경쟁심은 그 자체로 자연의 선한 책략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반사회적 성향이 오히려 문화와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회질서를 확립시켰다는 입장은 칸트의 놀라운 통찰인데, 이것은 헤겔 철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어디서나 목적으로 대우 받는 인간, 어디서나 환대 받는 인간을 위하여

칸트가 생각한 세계시민은 첫인상과 달리 철저하게 주권국가의 경계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에게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다른 나라의 정책에 논의할 수 있는 권리, 계몽된 인간으로서 세계시민의 권리는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모든 국가에서 법률적으로 강제되는 의무는 아니지만, 도덕적인 차원에서 보장되어야 할 권리였다. 그리고 칸트는 인류의 영구평화를 위해서는 국가의 법적 질서는 독재 정치가 아니라, 구성원의 일반의지에 기초하여 통치되는 루소식의 공화주의적 정치체제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칸트는 세계시민적 상태를 구현할 세계시민법에 한 가지 조건을 더 요구했다. "세계시민법은 보편적인 환대(Hospitalität)의 조건에 제한되어야 한다." 여기서 환대란, "외국인이 특정 국가에서 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를 말한다. 계몽된 시민이라면, 당시 서구열강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자행하던 수탈과 인간에 대한 잔혹성에 대해 비판하고 함께 연대하여 그것을 바로잡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해외여행을 가서 그곳의 자연과 사람들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는 그곳의 사람들에게도 상호 호혜적으로 똑같이 허용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곳에 살든 지구인으로서 함께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과 자유는 아직 우리에게 요원하다. 아직도 무한히 확장될 필요가 있는 공통의 권리, 상호교제의 권리는 인류의 역사가 더 없이 발전하고 진보되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칸트가 살았던 "제국주의 시대의 총칼 대신에" 오늘날 신자유주의 말기의 시대에서는 자본의 힘으로 "약소국의 자원과 인간을 수탈한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제국은 전쟁을 통해 권력을 강화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또한 칸트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은 제국에 반대하여 인권의 권리를 지키는" 행위이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목적'으로 대우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칸트는 "폭력적인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자유에 기초한 인권의 연대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런 칸트가 오늘을 산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까?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우리에게 강요되는 부자유의 삶, 열심히 일해도 빈곤 상태를 면하기 어려운 불평등의 삶, 진짜 폭력적인 것은 외면당하고 자본의 자유를 방해하는 행위가 위험한 폭력으로 규정되는 세계에 대해, 그는 아마도 아파하고, 고민하며 함께 저항하자고 하지 않았을까. 또 우리에게는 그렇게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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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비밀을 밝히는 변증법을 제시하다



유럽의 후진국가에서 탄생한 독일관념론의 아이러니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한 대중강좌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에서 살펴볼 마지막 철학자는 헤겔이다. 2회로 나누어 진행될 헤겔 철학 강의에서 전반부를 맡은 이관형 서울과학기술대 외래교수는 지나친 도식화의 위험을 상기하면서 독일관념론의 배경과 헤겔 사상의 큰 그림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이 교수는 헤겔의 사상이 좁게는 칸트철학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보다 큰 관점에서는 근대 시민계급의 융성과 유럽 제국주의의 팽창 속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독일 지식인들의 사변적 계몽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독일은 오랫동안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후진성을 피할 수 없는 유럽의 변방이었으며 수십 수백 개로 쪼개진 작은 국가들의 연합이었다. 카이사르의 원정 이후 로마는 라인강 동쪽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야만인들, 즉 '바바리안'이 사는 땅으로 규정했다. 이는 로마문명이 독일의 대부분 지방에 전파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독일이 발전하지 못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800년 넘게 지속되었던 "허울뿐인 신성로마제국" 체제는 "소위 '독일적 보수기질'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독일의 낙후성과 미성숙으로 인해 독일 시민계급은 16세기를 경과하면서 경제적ㆍ정치적ㆍ문화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토지귀족인 융커가 득세하는 독일에서는 중앙권력이 부재하고 "군대와 관료의 충성심에 바탕을 둔 새로운 봉건주의"가 팽배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신ㆍ구교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으로 독일 도시들은 파괴되었다. 결국 독일에서는 시민혁명을 주도할 부르주아 계급이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독일에서 "'세계정신'이라 불릴 만한 사상운동인 '독일관념론 운동'이 일어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통일국가가 아니라 여러 개의 소공국들을 통칭하던 이름에 불과했던 '독일'에서 "'세계시민(칸트)'이나 '시대정신(헤겔)'이 운위되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근대의 경제적 기초를 세웠으며, 프랑스가 혁명을 통해 근대의 정치적 기초를 세웠다면, 독일은 근대의 철학적 기초를 머리 속에서만 세웠던 것일까? 

그래서 독일관념론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기 일쑤다. "독일정신을 세계정신에 이르게 한 위대한 운동"으로 볼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 좌절한 독일 시민계급의 사변적 소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시민사회를 건설한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관념 속에서 시민사회를 실현"했다는 평가에는 얼마간의 조롱이 담겨 있다. 그런데 시민계급의 힘에 의해 아래에서 위로의 혁명 가능성이 애초부터 거세된 독일이 "위로부터 아래로의 계몽에 주력"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관형 교수는 그 이전의 서양철학사를 모두 포괄하려고 하는 헤겔의 거대한 사상체계도 이러한 관념적 계몽정신이 세계를 경영하려고 하는 근대 유럽 부르주아지의 팽만한 자신감과 맞물려 전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는 공감하지만 여건상 프랑스와 혁명을 이룰 수 없는 독일의 지성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신' 속에서 '혁명'을 이룩하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H. 마르쿠제는 『이성과 혁명』에서 칸트 철학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으로서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는 독일관념론은 프랑스 혁명의 이론이라고 불리어 왔지만, 이 말은 그들의 철학이 "프랑스 혁명에 이론적 해석을 제공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고 말했다. 독일관념론은 "프랑스로부터의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국가와 사회를 합리적 기초 위에 재구성하여 사회적, 정치적 제도들을 개인의 자유 및 이익과 조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쓰"인 것이다.

독일관념론 속에서 헤겔 철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저명한 헤겔 연구자인 H. F. 풀다는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 혹은 비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헤겔 철학은 '프로이센 국가를 신격화했으며, 인간 인식의 한계에 대한 칸트의 현명한 제안을 수정하려고 했으며, 세계라는 총체성이 이미 '그의 철학 체계' 안에 인식되어 있다고 믿게 만들려고 하며, 모든 것을 이성적이라고 설명했으며, 모순을 우리의 언어와 사물들 자체에 귀속시켜 그것을 존재론화하려는 경악할 만한 시도를 했으며, 정신과 대립해 있는 자연의 발전을 부정하고 정신적 발전이 종점에 이르렀다고 믿음으로써 미래를 부정한 것이 아닌가?'

이번 강좌에서 이 의문들 모두에 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관형 교수는 이론철학적 문제를 중심으로 칸트가 제기한 문제를 헤겔이 어떻게 풀어가려고 했는지를 설명했다. 중세 이전 철학에서는 '진리나 존재가 무엇인가'하는 존재론적 물음(이른바 'What'의 문제)이 중심을 이루었다면,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은 '진리나 존재를 어떻게 아는가'라는 인식론적 물음(이른바 'How'의 문제)을 주로 고민했다. 진리와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대상적 실체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 혹은 방법'에서 탐구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 인식론은 그 원리와 방법의 토대를 선험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에서 찾으려고 한 '이성론'과, 감각경험에서 찾으려고 한 '경험론'의 흐름으로 양분되었다는 것은 그동안의 강좌에서 계속 살펴봤던 것들이다. 

칸트는 이런 대립적인 인식론의 흐름에 대해 '지성의 틀'과 '경험의 틀'을 모두 인정하여 이원론적으로 종합하려고 했던 철학자이다. 또한 그는 우리의 지성적 인식이 현상세계에서만 가능하며 그 사물의 '물자체(Ding an sich)'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칸트는 '주관과 객관의 분리'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후학들에게 넘겨주었는데, 피히테와 셸링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즉, 자연은 자아가 정립한 것으로서 객관 세계는 나의 생산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피히테의 극단적인 주관주의 철학은 '주관적 관념론'으로 불릴 수 있다. 이에 반해 셸링은 자연은 보다 독자적이고 자립적이며, 자연은 눈에 보이는 정신이며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이라고 생각했다. 자연과 정신을 하나로 보는 셸링의 이러한 입장은 '객관적 관념론'으로 불릴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대립과 결별은 헤겔 철학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이 대립각 위에서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과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이 지니는 모순을 지양하여 하나의 철학체계를 완성시킨 사람이 바로 헤겔인 것이다. 헤겔의 철학에서 "절대자는 자기 자신을 현실의 차별상으로 분열시키고 발전시키는 자기활동의 주체이며, 스스로 활동하는 정신이다. 이 정신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자기 규정 안에서 발전하며 모든 대립을 자기 안에서 (변증법적으로) 해소시킨다." 헤겔 철학에 대한 이 아리송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지만, 더 쉬운 말로 표현한다고 해서 헤겔의 의도를 잘 반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그 세계사의 전개 속에서 우리가 그 과정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헤겔이 말한 절대적인 앎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아는 것이었다. 이관형 교수는 헤겔 철학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근대와 근대화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문화적ㆍ사상적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서양 근대 정신을 재검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괴물 같은 사상적 포괄성을 가진 이 '근대의 입안자'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도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18~19세기 독일관념론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중국문명을 능가하는 당시 유럽문명의 번영과 거칠 것이 없는 세계지배를 목도하며 근대 유럽인들이 가졌던 자신감의 철학적 표현이었다. 한편 그것은 철학적 언어의 성찬으로 포장된 부르주아지의 야심찬 제국주의적 논리도 갖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 포스트모던 사상의 기획 중 하나는 헤겔 철학의 절대적인 체계를 훼손하는 것에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어쩌면 헤겔은 가장 심각한 오류를 가진 오만한 제국주의자일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관형 교수가 강조한 것은 "그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의 처참한 근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우리의 근대화를 성찰하고 미래를 기획하는 문제와 더불어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질문이다. 

헤겔 사상 맛보기 

이관형 교수는 헤겔의 대표적인 저서들인 『정신현상학(1807)』, 『논리학(1812~1816)』, 『철학강요(1817)』에서 헤겔 사상의 특이점을 도출하여 수강생들에게 보다 쉽게 설명하려고 했다. 먼저 『정신현상학』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답변으로서 여기서 헤겔은 인간의 인식능력으로서의 정신이 감성, 지성, 이성으로 발전하여 절대적인 앎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의식-자기의식-이성-정신-종교-절대지의 순서로 서술되는 '정신의 발전사'는 칸트가 감성-지성-이성을 등치하는 것과는 대비된다. 헤겔은 철학사를 통해 정신의 자기 발전사에 대한 인식을 얻었는데, 정신이 결국 절대지(知)에 다다를 때 "깨닫는 것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자연과 역사 속에서 상이한 단계를 거쳐 전개된 운동이 곧 자기 자신의 완성과정이자 실현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칸트가 분리된 것으로 전제한 주관과 객관, 지성과 감성, 범주와 감각경험, 즉 사유와 존재가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논리학은 인간의 사유형식만을 다루는 학문으로 간주되었지만, 칸트는 사유가 대상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를 다루는 '초월 논리학'을 전개했다. 그런데 헤겔은 이 모두를 비판하는데, 헤겔의 『논리학』은『정신현상학』에서 다다른 곳, 즉 사유와 존재가 일치되는 것을 깨달은 그 토대 위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그 '사유와 존재의 종합'은 개념의 차원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헤겔 논리학은 '개념의 운동에 대한 서술'이 된다. 반면에 이 논리학은 사유의 측면에서는 사유의 운동에 대한 서술이기 때문에 '인식론'이 되고, 존재의 운동에 대한 서술이기도 하기 때문에 '존재론'이 되며, 절대자에 대한 서술을 담고 있기 때문에 '형이상학'이 되기도 한다. 이관형 교수는 헤겔 논리학의 이러한 총체적인 면 때문에 그의 논리학은 "세계 창조 이전 신의 서술"이며, "창조 이전의 신의 비기(秘記) 혹은 천기누설"의 측면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엔치클로페디라고 불리는 『철학강요』는 그의 철학체계가 완성된 저작이며, 그 체계의 대강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헤겔은 여기에서 자신의 사상체계를 논리학(위의 『논리학』과 구분되는 '소논리학'으로 불림),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절대이념이 세계와 우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헤겔의 이러한 변증법적 사유 방식은 정신과 자연, 현상과 본질, 가상과 진리, 개인과 공동체, 주관과 객관의 차이와 동일성을 함께 인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관형 교수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불교 담론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한 그 세계 이해 방식이 그의 모든 저작에 걸쳐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서양근대철학의 종착역, 헤겔? 

강의의 후반부에서 헤겔 철학 대한 여러 가지 비판과 옹호에 대해 이 교수가 덧붙이며 강조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목적론적인 헤겔 철학에서 '신'에 대한 사유는 다소간 변신론(辯神論)의 성격을 갖추고 기독교를 옹호하고 있지만, 헤겔의 신은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세계 내재적인 신이다. 그렇기에 헤겔은 관념론자이지만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역사와 현실을 철학 안으로 끌어들여, 당시의 유물론자보다 더 뛰어난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러한 거대 담론을 구성한 헤겔의 철학이 보편타당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의 저작은 아직도 대단한 영감을 주는 '준비된' 사상적 거인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독일관념론을 영국경험론과 비교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독일의 사변적인 철학이 추구하는 이론적ㆍ논리적 완결성은 독일의 당시 현실적 조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주로 학자이면서 동시에 실천가들이었던 영국경험론의 철학자들이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인 진리가 없다고 본 것은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이 그러했다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독일관념론은 사실상 현실에서 배제된 이론가와 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에서 현실 문제에 대해 관념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우리의 주체적이지 못했던 근대화, 뼛속까지 서구화된 역사로 갖고 와보면,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의 글에서 무엇을 읽어내는가"라는 이관형 교수의 문제제기가 설득력을 가진다. "독일관념론에서 엿보이는 주체적 자신감과 낙관주의는 사실 동시대 우리나라 인민의 객체화와 좌절"이지 않았던가. "(사상의) 원산지가 독일이든 프랑스든 미국이든 그들에게서 수입한 사상은 우선은 그들의 문제에 대한 그들 나름의 해결 노력이다. 소위 '학적 보편성'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자신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우리는 그들이 남긴 이야기에 대하 내 이해가 옳은지, 네 이해가 옳은지나 따지고 있다. 물론 정확한 이해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철학이 될 수 없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는데, '수입된 진리는 수입자를 자승자박케 하리라." 그런 면에서 우리의 근대철학사는 이제부터라도 우리 손으로 다시 써야 하리라.

이제 12회에 걸쳐 진행된 '서양근대철학사' 강좌의 끝이 보인다. 마지막 시간은 헤겔 철학의 성과와 한계를 통해 근대의 지적 운동이 가진 특성을 점검하고, 근대인으로 교육 받아 살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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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민 사상에 대한 철학자의 고뇌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12> 새로운 시대를 여는가? - 헤겔 Ⅱ


세계시민 사상에 대한 철학자의 고뇌



시대와 싸우는 철학자, 헤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한 대중강좌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의 열 두 강좌가 모두 끝이 났다. 이 철학사 강좌는 다음 달 <마르크스주의사상사> ㅏㅇ좌로 이어져 현대철학의 지형도를 보다 조밀하게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근대철학사의 대미는 역시 헤겔이 장식해야만 했다. 강의를 맡은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는 결론적으로 "칸트, 헤겔 모두 시대와의 싸움을 하고 있었고, 그 싸움은 종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종교와의 대면을 직접적으로 전개하지 않고, 그들의 극복 과정은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철학자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로 반전되어 진행"되었다. 물론 플라톤 이래로 위대한 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늘 시대가 던진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철학과 철학자의 사명에 대해 고민해왔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지적한 대로 칸트와 헤겔이라는 독일관념론의 두 거장이 당시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분열된 지역이던 작은 국가에 살면서 '세계시민 사상'을 구상했다는 점은 자못 비장하고 역설적이다. 

이정은 교수는 강좌의 마지막 강사답게 근대철학의 특성과 그 흐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고, 헤겔의 생애와 그의 사회정치철학을 함께 풀어 나갔다. 헤겔의 생애에서 중요한 점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어려운 논리를 펼친 헤겔"이 '왜 신학교에 들어가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는가'일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애초에 그는 역사발전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역사철학과 법철학을 쓰기 위한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말년에 가서야 자신의 철학적 체계 속에서 그것을 다룰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헤겔이 신학직을 거부했던 것은 "종교적 규제와 정치적 규제"를 모두 거부하는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기인했다.

피히테, 셸링, 횔더린과 더불어 튀빙겐 신학교에서 칸트의 "이성적 신학, 도덕 신학에 매료"된 헤겔은 당시 독일에 만연하던 종교적 입장을 비판했다. 더불어 그것은 "국가-교회 주도적인 민족 교육, 그것을 야기한 독일식 계몽주의"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민계급의 자기해방을 선언한 프랑스식 계몽주의와 그것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혁명은 이들에게 축하와 부러움을 모두 포함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칸트와 헤겔 모두에게 사회와의 싸움은 종교와의 싸움이었고, 철학적 견지에서 시대와 벌이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또한 칸트 못지않게 루소의 영향을 많이 받은 헤겔은 그의 저작을 통해 "사회 비판과 그 대안 모델을 만드는 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루소는 문화와 역사 발전이 지닌 이중성, 즉 선한 질서가 발전하면 악한 질서도 동시에 심화된다는 '문명사의 우울'을 내비친다." 역사의 발전을 설명하고 싶은 헤겔은 "이런 우울을 극복하기 위해, 칸트의 이성 비판과 역사적 통찰을 활용한다." 칸트에게서 '세계사적 관점의 보편사'라는 관점과 역사발전의 가능성을 확인한 헤겔은 점차 자신만의 체계를 구상해가며 "칸트도 아닌 루소도 아닌 헤겔 고유의 관점"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칸트와 헤겔은 모두 "독일의 후진성이 동반하는 문제점을 시대 변화에 비추어 고민하고, 통치자를 향해 철학(자)의 역할을 말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독일 계몽주의가 만들어냈던 폐해와 상명하달식의 민족 교육, 그 구조의 근간인 보수적인 종교적 입장을 거부했던 "튀빙겐 신학도의 철저한 비판 정신"은 헤겔을 철학자로 만들었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안고 갔던 문제의식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정신'을 공유한 두 철학도의 사상은 어떤 지점에서 서로 다른가. 국가 간의 경계가 해체되는 오늘날, 칸트와 헤겔의 세계시민사회 논의는 담론 층위에 한정되어 있더라도 여러 사회철학적 문제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래서 아래에서는 칸트와 헤겔의 대립 지점에 대해 주로 살펴본다.

철학과 철학자의 역할 

앞서 말했듯이 철학과 철학자의 역할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던 헤겔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의 발전을 목도하며, 독일 신학교의 특정한 종교적 입장이 정치 개혁과 역사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비판할 근거와 대안적인 사회 발전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정치 문제에 고민하게 되었고, 철학과 철학자는 주어진 시대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성찰했다. 그런데 앞선 칸트는 철학자가 유력한 정치적 주체는 아니지만, 미래를 전망하고, 개혁의 목표를 세우며, 세계시민사회를 위한 기획을 구상하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통치자는 철학자에게 귀를 기울일 때 정치와 역사 발전에서 제 궤도를 찾게 되며, (이를 통해) 세계 평화를 지속시키는 힘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칸트에게 철학의 역할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중세 시대에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고 근대 철학자들은 그 관계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전복은 곧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에 칸트는 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사람들은 시녀로서의 철학이 횃불을 들고 귀부인들 앞에서 가고 있는지, 아니면 귀부인들의 긴 옷자락을 들고 뒤에서 따라가고 있는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칸트는 여전히 철학자의 역할을 시녀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시녀는 '횃불을 든 시녀'로서, "횃불을 들고 귀부인의 앞길을 밝히는 시녀이다." 이정은 교수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철학자가 횃불을 잘못 들어 길을 잘못 밝히면, 통치자와 그를 따르는 사회 전체가 어떻게 될지는 명약관화하다."

"진리 탐구와 정치적 실천을 동시에" 고민하는 플라톤적 입장과, "진리 탐구를 정치적 실천과 분리하고 정치에서 한 발 물러나 시대를 성찰하는" 다른 입장은 서양철학사에서 양분되는 지점이었다. 칸트와 헤겔은 모두 전자의 문제의식을 견지했던 사람들인데, 칸트가 '도덕성의 개선'에 역사 발전의 포커스를 맞추었다면, 헤겔은 "국가의 보편적 모델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는 "세계사에서 보편사가 가능한지와 세계사 발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칸트의 역사철학적 착상을 '이성의 전개'로 전환하여 밀고 나갔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가 개개인 내면의 '주관적 종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공동체의 삶과 관습에서 나오는 '인륜적 요소'를 논할 여지가 부족하다고 보았다. "공적 종교를 추구하며 헤겔은 종교와 인륜성의 관계, 종교와 공동체의 관계,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마련하기 위해 칸트를 넘어서야 했다."

이정은 교수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진리의 현상과 철학자의 의식을 『법철학』에 나오는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통해 보다 단순화해서 설명했다. 철학자는 낮에는 잠들어 있다가 밤이 되면 깨어나서 활동하는 올빼미에 비유된다. 그는 모두가 잠든 사이에 낮 동안의 일을 정리하고 성찰하고 개념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에게 있어 철학자는 플라톤과 달리 철인왕도, 칸트와 달리 횃불을 든 시녀도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철학자는 "철인왕과 시녀가 잠든 사이에 노역을 강행하는 밤의 황제이다." 지나 간 모든 것을 사후에 정리하지만 그는 동터오는 신새벽을 뜬 눈으로 맞이하며 새 시대를 가장 먼저 바라보며 예감하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밤의 황제, 철학자는 "자기 시대를 앞서 가지는 않지만, 다음 시대를 앞서 가며, 다음 시대를 밝히는 자이다." 

밝은 낮 동안 철학자의 의식은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따라가면서 지켜보며 결정적 순간에 부상"할 순간을 기다린다. 그는 자연적 의식과 현상적 의식이 교차하는 시간을 견뎌내며, 본질적 변화와 본질적인 결과를 관찰하고, 시대정신의 발현을 반성하고 체계화한다. "주어진 현상 가운데서 참된 것을 파악하고 진리를 도출하는 철학자의 의식은 (현상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의식과 현상적 의식의 대립을 거치는 가운데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정은 교수는 철학자의 진지하고 성실한 역할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관찰과 성찰의 과정이 "소홀하거나 철저하지 못하면, 체계화가 불가능하다. (결국) 헤겔에게 철학자는 낮이나 밤이나 지속되는 긴장과 노역을 견뎌내는 자이다." 

세계시민 사상의 거부와 새로운 시대 

칸트는 인간은 누구나 이성과 양심을 지니고 그것으로부터 보편적 도덕 법칙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천이성을 가진 존재는 모두 이성적인 도덕적 존재로 살아갈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 실천이성을 따르면 이성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한 칸트는 "윤리학의 도덕 법칙과 의무론을 정치학에도 동일하게 적용"했다. 이러한 이성적 사회가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국내법을 요청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시민사회가 구성되며, 그것을 전 세계로까지 확장하면 '세계시민사회', '세계시민법'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법 제도화의 힘과 법적 장치에 대한 기획은 헤겔에게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런데 칸트의 생각처럼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자유'가 사회의 폐단과 학문 권력의 오류를 비판하고 교정하려는 철학자의 역할이라면, 오늘날에는 과연 그런 학자나 철학도가 부족해서 세계시민 사회라는 꿈은 아직 요원한 것인가? 우리 사회가 나날이 이기적이고 흉흉하고 단절된 사회로 심화되는 원인이 단지 진정한 철학자가 부족한 것에 있지 않다면, 왜 사람들은 경쟁과 돈을 맹신하며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자유'에만 골몰하고 있을까? 자기 자신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철학자는 대중을 불신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결국 아무리 고매한 철학이라도 그것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그들의 고민 속으로 침투하지 못하는 것일까? "도대체 인간의 이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 칸트가 믿었던 도덕성의 발휘와 세계시민사회의 실현에 대한 열망은 어디로 숨어 든 것인가? 

헤겔은 프랑스 혁명을 처음에는 열광하며 찬사를 보내다가 공포정치가 이어지자 나중에는 실망감으로 사태를 관조하며,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루소의 계몽주의적 입장을 비판하게 되었다. 그래서 헤겔은 민주정치와 권력 집행의 매개성을 중시하며 삼권분립에 기초한 대의제 정치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매개성은 권력의 수직성이 아니라 수평성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헤겔이 칸트의 세계시민사회론을 거부하는 이유가 된다. 물론 헤겔이 칸트의 세계시민사회나 세계국가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은 그 실현의 어려움과 당위성 때문이 아니다. 헤겔은 국가의 본질을 일종의 '인격(인륜성)'으로 간주하며, "국가 간에는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인격'은 그 사람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보편적 전제이면서 그 사람을 인간답게 만들며, 타인과 구별되도록 만드는 개성이다. 또한 나 자신이 나로 살 수 있는 자기동일성에 근거하는 이 인격은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체성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국가 간에 있어서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헤겔의 입장이다. 나의 동일성, 나다움도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나와 타자의 차이에 대한 인식 속에서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하나의 원리로 "통폐합되지 않는 것을 통폐합시키려는 폭력"의 문제 때문에 인간사회를 특정한 기준으로 환원하고, 나아가 국가와 세계사를 환원하는 것은 더욱 요원하다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역사 발전은 세계정신의 지난한 실현 과정이기 때문에 그 인식 속에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가 자유를 추구하는 시민사회를 국가와 세계사 발전의 궁극적인 모델로 제시했다면, 헤겔은 '인륜적 국가', '국가의 자유 실현'을 제시했다. 칸트가 시민사회를 곧 국가로 간주하는 데 반해, 헤겔은 시민사회와 국가를 구별하여 가족이나 시민사회를 국가의 한 계기로만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칸트가 실천이성을 보다 넓은 분야에도 적용하여 도덕학의 원리를 정치학의 원리에 적용하려고 했다면, 헤겔은 추상과 현실의 역사적 간극을 인식하며 사회 인식을 초역사적인 도덕학으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했다. 역사발전을 관조하려면 변증법적인 시각 속에서 철학자의 사후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근대철학사 강좌를 마치며 

강좌의 마지막 시간은 '간단한 뒤풀이'를 위해 수강생들이 서로 둘러 앉아 진행됐다. 석 달 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된 근대철학사 여행은 '헤겔역'에서 끝이 났다. 함께 도착한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자기소개를 나누고 강좌에 대한 소감과 평가를 기탄없이 교환했다. 또한 매번 바뀌었던 몇몇 강사 선생님들의 얼굴도 다시 볼 수 있었고, 강좌를 준비한 프레시안 대표님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생님도 참석하여 그간의 강좌를 되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직장인들이 많아서 평일 늦은 저녁에 진행될 될 수밖에 없다는 핑계가 있었지만, 이 열림의 마음과 소통의 시간이 왜 진작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아쉽기도 했다. 

그래서 "매번 뒤통수만 보던 수강생들의 얼굴을 비로소 마지막 시간에야 보게 되니 아쉽다"는 어느 수강생의 아픈 지적은 다음 강좌의 방향성을 가늠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인문학 공부에 대한 갈증, 근본 문제를 고민하고 역사와 사회를 보다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철학에 대한 열망"이 분명히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 또한 이 강좌를 통해 '철학이 대중과 어떻게 만날 수 있으며, 철학자들은 어떻게 그들만의 언어와 논리 속에 갇히지 않을 것인가'를 보다 실제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하나의 끝은 늘 새로운 시작을 예비하는 것이듯이, 다음 달부터는 근대철학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대철학의 다양한 조류들을 살펴보는 강좌가 이어진다. 나아가 동양철학사와 서양고대철학사까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 공동기획 '철학사 강좌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어느 수강생분의 의견처럼 "철학사에 대한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시간보다는, 저마다의 관점과 고민을 바탕으로 그날의 주제를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기를 기대해본다. 한편 오늘 살펴본 독일관념론의 세계시민 사상도 결국 '인류가 어떻게 서로 화합하여 잘 살 것인가'를 고민했던 죽은 철학자들의 유산이라면, 루소를 강의했던 김광호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저는 기회가 된다면 이 강의실에서 강사와 수강생들의 자리를 뒤바꾸어서 서로의 지식과 생각을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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