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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프롬.사랑의기술..데미지

doll eye 2017. 2. 11. 13:33
The capitalistic society and the principle of love are incompatible. - The Art of Loving


 에리히 셀리그만 프롬은 저서를 통해서 현대사회의 인간의 상실에 대해서 분석한다. [사랑의 기술]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자본가에 의해 소비를 당하는 주체로서 소비 충동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사랑에 대해서 완전히 그릇된 통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랑은 운에 의해서 발생하는 현상도, 학습할 수 없는 대상도 아닌, 보편적인 기술을 익히고, 그것을 실천하면 마스터할 수 있는 종류의 기술에 불과하다. 즉, 사랑에 관한 보편적 기술만 익히면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다. 단,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저에 놓인 원리 혹은 정신과 양립할 수 없을 뿐.


 에리히 프롬은 사랑에 대한 그릇된 통념이 자리잡은 원인 중에 하나로,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을 하는 상태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든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강렬하면, 강렬할 수록 나의 외로움의 깊이를 증명할 뿐, 정작 그 사랑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알리지 않는다. 나아가 그러한 사랑은 오랫동안 지속될 수도 없다. 처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강렬함이란 관계가 지속되면서 발생하는 타성에 젖고, 기적과도 같았던 그 순간의 아찔함은 시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에리히 프롬은 이성을 해제시키는 종류의 사랑은 인간의 행위를 수동적으로 전락시킬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부정한 관계에서 벗어나려해도, 매번 안나에게 돌아가는 스티븐처럼 말이다. 독일계 미국인인 이 철학자의 관점에 의하면 스티븐은 능동적으로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단순하게 충동에 끌려다닐 뿐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에 편승하여 자신의 정신이 오염되게 내버려두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정작 제가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결혼생활에 대한 댓가로 말이다. 미상불 스티븐의 장인이자 잉그리드의 아버지가 스쳐지나가듯 말한 것처럼, 스티븐은 스스로 선택한 적 없는 삶을 살았다. 언제나 통제하고, 수긍하고, 순응하는 게 스티븐의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에서 안나는 스티븐이 욕구한 적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러나 과연 스티븐의 사랑을 '非사랑'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두 가지 측면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 어쩌면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사랑을 하는 것과 분리해서 간주해야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현상에는, 심지어 사랑의 기술을 익히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할 때에도, 시발점이 존재한다. 요컨대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사랑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으며, 사랑을 고찰하는 데 그 시작을 배제해야 할 이유는 없다. 절대로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시작되는 사랑이 강렬한 애착을 낳고, 그것이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낳고, 죄책감과 고통을 수반하게 만드는 관계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낳게 되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로부터 빠져나와서, 사랑을 할 수 있는 기술을 익혀서 사랑을 하게 되는 게 아니라, 사랑을 하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 사랑이 나의 처음이라면 말이다.


 마치 내 인생의 경계를 구분짓는 벽이 깨지는 듯한 충격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눈 앞의 상대를 스티븐은 예측하려고 한다. 그러나 상대는 말없이 웃을 뿐이다. 원망과 증오, 사랑은 한 데 섞여서 그를 지한다. 지금껏 제게 존재하는 지 알 지 못했던 욕망이 탈출구를 만나자 자기 자신을 드러낸 것인 지, 탈출구 때문에 그의 욕구가 발현된 것인 지 알 수 없는 데, 마치 어머니의 젖을 찾아 이끌리듯 격정적으로,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욕구를 그는 안나에게 격정적으로 방사한다. 그러나 과연 안나에 대한 스티븐의 사랑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일견 수동적으로 보일만큼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한 결과로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그가 사랑의 기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계에 끌려다닐 뿐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사랑의 기술>에 드러난 에리히 프롬의 생각은 애매한 지점이 있다. 현대사회의 자본주의에 물든 인류는 사랑을 하는 상대마저 이성적(계산적)으로 선택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러한 행태에 대한 반성을 그는 촉구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삶의 습관이야말로 스티븐으로 하여금 안나에게 이끌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오히려 제 감정을 통제하고,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고찰하는 습관을 가졌던 스티븐은 열정과 감성을 거세당한 기형적인 삶을 살게 됐다. 그리고 그러한 습관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자기 자신을 고독하게 만들었던 스티븐은 안나를 통해서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의 영역을 배우게 된다. 스티븐은 사랑에 빠진다. 제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이었는 지, 결핍을 갖고 있는 사람인 지 그는 안나를 사랑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깨닫는다.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제 인생의 접힌 부분을 펼칠 수 있는 길임을 알게 된 스티븐이 자본주의에 물든 인류를 비판하면서 사랑에 대해 고찰했던 한 철학자보다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