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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자의 시선에서 보다

doll eye 2018. 6. 19. 14:48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아직도 영화관 내 분위기를 온전히 기억한다. 숨죽였던 101분의 시간. 물론, 이 감정은 나만의 것은 아닐테다. 영화관을 꽉 채울 만큼의 인기 작은 아니었지만, 이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찾은 관객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인물의 기운에 완전히 빨려 들어간 듯했다.

영화는 류이치가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은 피아노를 쓰다듬고 연주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연이 조율해준, 자연으로부터 살아남은 가장 자연적인 피아노'를 연주한 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쓰나미에도 살아남은 피아노 이야기를 들었고, 어떤 소리를 낼지 궁금하다. 피아노는 사람의 손과 기계를 거쳐 인공적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내버려 두면 피아노는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변해가는 소리를 애써 다시 인공적으로 조율하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이제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쓰나미 피아노에서는 인간적인 기준에서 자연스러운 소리는 아니었지만,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여기에서부터 류이치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렇다. 그는 자연과 환경 등에 관심이 높은 예술가다. 이어 보여지는 장면들에서는 반핵활동가로 목소리를 내는 그의 행보를 확인할 수 있다. 스티븐 노무라 쉬블 감독은 여기에서 류이치의 남다른 면을 발견한다. 민감한 정치적 이슈에 직접 발을 디디고,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 이 굳건하고 강인한 모습만큼, 류이치의 작품 세계관도 남다를 것임을 간파한 것이리라.

사실, 반핵활동가로서의 면모가 아닐지라도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인물은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작업으로 골든 글로브상과 그레미 어워드를 수상한 인물이자, 아시아 최초 아카데미 음악상을 석권한 그는 작곡뿐 아니라, 배우 활동도 겸한 다재다능한 예술가이다.

하지만 그는 2014년 인후암 판정을 받고, 당분간 치료에 전염하고자 음악 활동들을 중단한다. 암 판정을 받는 그 해, 새 앨범 작업을 준비하고자 했었지만 그것마저 접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음악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평소 존경해오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음악 작업 의뢰가 들어오면서부터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한 그는, 미뤄뒀던 앨범 작업에도 박차를 가한다. 이전에 생각해오던 것들을 모조리 폐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앨범을 제작하고자 다짐한다.

영화는 안간힘을 써도 하루 최대 8시간 정도밖에 곡 작업을 하지 못하는 류이치의 열정과 동시에, 그에 영감을 불어넣는 것들에 대한 것들을 보여준다. 류이치가 영감을 얻는 주요 요소들로는, 앞서 알 수 있었던 자연(환경)과 영화, 그리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리고 바흐가 있다.

대지진과 쓰나미에서도 살아남은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피아노의 음색과 더불어, 그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때는 1992년 무렵이라고 고백한다. 환경이 문제화된 것은 스스로 나빠진 게 아니라, 인간의 활동과 연관되어있다고 말하는 그는 '인간의 활동에 따라 개선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닐까.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면서, 환경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낸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류이치 역시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다고 한다. 빗소리, 폐허 소리, 인파 소리 등 우리는 온갖 소리들에 둘러싸여 살지만, 보통은 그런 소리들을 음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자연의 소리들을 수집하는 과정들을 보여준다. 실제로, 음악 작업에 사물의 소리들을 따낸 것들을 삽입함으로써 남다른 결과물을 선보이기도 한다.

한편 그는 영화 속에는 종종 바흐의 곡들을 연주한다. 바흐는 '코랄 전주곡'이라는 찬송가를 다수 작곡했는데, 여기에는 당대 상황인 전염병, 굶주림, 억압 등이 배어있다고 말한다.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영감들이 우울한 결과물로 이어졌고 거기에서 자신은 영감을 많이 얻는다고 고백했다.

류이치 사카모토를 언급하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자연의 다양한 소리들을 영화에 표현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들에 '타르코프스키 감독 작품 속엔 물소리도 있고 바람 소리, 발자국 소리도 들어있다. 다양한 소리가 풍요롭게 표현돼 있다.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사운드트랙 같은 걸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또한, 영화 음악을 만드는 것은 자유롭지는 않지만, 다른 관점에서 일하라는 주문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그다. 전에 없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이기도 하다면서 말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단순히 인물의 행보를 보여주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류이치가 음악적 영감을 얻는 요소들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주는 동시에, 그가 재능을 표출했던 작품들을 감상하게 만드는 미니 콘서트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자연과 환경 문제 인식에서부터, 어떠한 소리들도 허투루하지 않는 마음가짐은 인문학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다. 암 판정을 받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내는 면 또한, 관객들로 하여금 생에 대한 자극을 선사한다. 영화 ‘마지막 사랑’의 한 대사인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다 여긴다'라는 말을 통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그는 지금도 매일같이 짧은 시간이라도 피아노 연주를 해나가고 있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신이 깃들어있는 엔딩 신은 애잔한 동시에 씁쓸하기도 했다.

영화의 서두에는, 개인적으로 류이치의 곡들 중 가장 좋아하는 ‘전장의 크리스마스’ 사운드 트랙 중 하나인 'Merry Christmas Mr. Lawrence'의 연주 장면이 보여지는데, 그때부터 나는 울컥했다. 그 눈물은, 단순히 멜로디의 아름다움만은 아니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의 몸짓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음악에 대한 진중함과 열정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내비치는 류이치의 천진한 웃음은 그의 거장이라는 묵직한 수식어와는 다른 매력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영화를 통해,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더 빠져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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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공간의 장소화

지상 최대 갤러리가 탄생했다. 장 뤽 고다르와 함께 프랑스 누벨바그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 감독 아녜스 바르다와, 현 시대 가장 핫한 포토그래퍼들 중 한 명인 제이알(JR)의 협업이 이뤄낸 결과다.

그럼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을까. 영화의 서두에서 보여지듯, 둘은 서로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을 이어준 것은 예술성에 있다. 제이알은 바르다의 영화를 봤었고, 바르다는 제이알의 외벽에 붙여진 흑백 눈동자 사진 작품을 봤었다. 그리고 바르다는 제이알을 친구인 장 뤽 고다르와 닮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예술이라는 매개체로, 88세 바르다와 33세 제이알의 세대를 초월한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영화를 살펴보기에 앞서, 각 인물들에 대해 간단히 알고 가면 더 좋을 것 같아 소개해본다. 아녜스 바르다는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이자 사진 작가이다. 또한 이번 작품처럼 자신의 작품에도 출연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녀는 '파리에서 만들어진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를 연출해 많은 이들로부터 주목 받았으며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와 같이 다양한 여성상을 그려, 여성 영화인들의 롤모델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고다르와 함께 진보적인 주제로 누벨바그 운동을 이끌며, 여러 예술 분야의 콜라보를 통해 새로운 연출 기법을 구사해왔다.

프랑스 태생의 포토그래퍼 제이알은 그래피티 아티스트, 멀티미디어(컨버저스) 아티스트 등 다양한 별칭을 지닌 인물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인물들’의 주요 작업 방식인 대형 인물 사진을 찍어, 대규모 콜라주 작품을 선보인 것으로 유명한 그는 '비계를 오르내리는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의 경우, 2017년 국내에서 진행됐던 그래피티 전시 '위대한 낙서展'을 통해 그의 작품들을 감상한 경험이 있다. 여느 그래피티 작품들도 그러하지만, 특히 제이알의 작품이 지닌 세계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혁신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멀리에서 봐도 훌륭한 그의 작품은, 근접에서 '관찰'해도 우수한 디테일을 자랑한다.

이렇게 두 명의 '혁신적인 예술가'가 만나 완성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예술적이고도 인간적인 로드 무비다. 두 예술가는 프랑스 전역을 누비며 흑백의 대형 인물 사진을 인쇄해, 그들의 집이나 직장 등에 붙인다. 그로 인해, 단순한 공간에 그칠 수 있었던 곳은 '장소'가 된다. 그렇다고 이들이 아무 곳에 작품 활동을 했을 리가 없다. 눈치 빠른 이들은 잘 알겠지만, 이들의 발길이 닿은 곳들은 두 감독의 추억이 깃들어있다. 바르다가 촬영지로, 제이알이 작업 활동을 진행했던 곳들이다. 동시에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장소'이기도 하다. 허물어져가는 광부촌, 낡디 낡아 외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부락 등이 그렇다. 낡고 사라져가는, 그래서 인적마저 드물어가는 공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되살리겠다는 예술가들의 노력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하나의 큰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두 감독의 인본주의 정신을 밑바탕에 둔다. 남성의 그늘 아래에서 떳떳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그들의 아내 사진을 붙임으로써 여성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했고, 카페 외벽에 직원 사진을 붙여 관광 명소로 탈바꿈시킨 바르다. 이렇듯 영화는, 장소뿐 아니라, 사회적 약층에 속하는 여성의 가치를 신장시키는 역할도 해낸다. 여기에는 바르다 자신의 과거도 깃들어 있다. 남편 자크 데미의 명성에 가려져 자신의 작품이 (상대적으로)빛을 발휘하지 못했던 그녀의 자위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따듯하다.

이 '프로젝트'는, 두 예술가만의 협업이 아니다. 프랑스 전역의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완성됐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 결과물에서 바르다의 '내공'이 드러난다. 영화 속에도 등장하지만, 그녀는 '우연은 위대한 작품의 조력자'라며, 우연이 선사하는 위력을 표출한다. 공장 촬영 당시 만난, 오늘 조기 퇴직을 앞둔 직원과의 만남 같은 상황 말이다.

영화에는 우연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과는 반대로, 계획이 허망으로 돌변하는 상황 또한 보여진다. 바르다와 고다르의 약속이 그것이다. 아마, 고다르의 등장 예고를 들은 시네필들은 기대했을 것이다. 바르다는 5년 만에 고다르와의 재회를 희망하고, 그와 약속을 잡는다. 하지만 고다르는 '역시나' 등장하지 않는다. 바르다를 향한 암호를 남겼을 뿐이다. '자크', 그리고 '해변'. 자크는 앞서 언급했듯, 바르다의 남편을 뜻한다. 해변은, 자크의 사망 후 바르다의 작품들 중 가장 총애 받았던 작품이다. 고다르는 이 두 암호를 통해, 남편의 그늘에 갇혀 살았던 바르다의 가치를 내비치고 그녀를 위로한다(물론, 얼굴을 내비쳤다면 최고의 기쁨이자 위로였겠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바르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를 의미화한 것과 동시에, 바르다 자신을 위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에는 바르다의 굵직한 행보가 배어있는 동시에, 그녀의 인간미가 스며있다. 그리고 그런 그녀는 한없이 사랑스럽다. 제이알과의 농담과 색을 사랑하는 그녀만의 개성이 반영된 옷, 머리카락 색들이 선사하는 즐거움도 엿볼 수 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는, 작품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추억이 밴 장소가 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들보다 가장 사랑했고 사랑 중이며 사랑할 대상인 자신 스스로가 있다.

이토록 감각적인 다큐멘터리영화는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존재 자체가 예술인 이 작품, 신선하고 예술적인 영화를 기다려왔다면, 놓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