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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 로버트 벤투리와 데니스 스콧 브라운(上)

doll eye 2020. 7. 3. 17:04

[효효아키텍트-42]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 1925~2018)와 데니스 스콧 브라운(Denise Scott Brown 1931~) 부부는 일생을 함께하면서 모든 것을 같이 일군 '파트너'이다.

벤투리는 프린스턴대 졸업 후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 1910~1961)과 루이스 칸(Louis Kahn 1901~1974) 사무실에서 일했다. 1954년 미국 문학 예술 분야 등의 엘리트들에게 제공되는 로마의 아메리칸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in rome) 펠로십으로 2년간 유럽의 건축을 배운다. 로마에서의 2년 과정이 천편일률적인 모더니즘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발단이었다. 1966년 발표한 '건축의 복잡성과 대립성' (C&C in architecture: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은 이때 많은 준비가 되었다고도 한다. 1960년에 스콧 브라운을 만났다. 둘은 펜실베이니아대, 예일과 하버드대에서도 교수를 지냈다.

▲ 어머니의 집(Vanna Venturi House) /사진=wikimedia

어머니의 집(Vanna Venturi House·필라델피아·1959~1964)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첫 대표작으로 꼽힌다. 모더니즘 건축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 주택의 안락함과 실용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정면 파사드는 미국의 보편적 주택에 적용되는 '∧' 모양의 박공 지붕을 적용하면서, 옆으로 길게 만들어 실제 보다 커보이는 건물의 정면 외벽에는 수평 몰딩을, 현관 입구 개구부 인방(引枋)에는 아치 몰딩의 아플리케를 부착했다.

벤투리는 형태를 기능에 가두는 걸 거부했고, 구조적 단순함 대신 복잡·복합적인 것을 추구했으며 단정한 대칭이 아닌 자유분방한 파격을 선호했다. 그에게는 재료 본연의 아름다움과 기능적 편리만을 추구하는 디자인은 게으른 디자인이었다.

▲ 어머니의 집(Vanna Venturi House) 1층 평면도 /사진=wikimedia

실제로 '어머니의 집'은 2층의 지붕 벽에서 갑자기 멈춰버린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계단, 또 다른 벽난로를 끼고 올라가는 계단은 중간에서 폭이 반으로 줄어들고, 구조와 상관없는 불필요한 사선 형태로 인한 공간의 협소, 너무 큰 화로 등 불필요한 공간이나 장식이 있지만 모더니즘의 범위를 넘어선 듯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말끔하며 기하학 조형미를 음미한 듯 장난스럽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2층 계단에 대해 "여기에 올라 페인트를 칠한다거나 높은 곳에 있는 창문을 닦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유용한 것이다"고 말했다.

벤투리가 저술한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 CCIA'은 근현대 건축 사상 가장 뛰어난 건축 책으로 꼽힌다. 유럽 건축 역사를 고찰하면서 정통파 근대 건축의 모순을 지적했다. 건축사학자 빈센트 스컬리는 르 코르뷔지에의 1923년 작 '건축을 향하여' 이후 최고의 건축이론서라고 평한다.

이 책에서 그는 근대 건축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로 무미건조한 형태를 지적했다. 벤투리는 단순한 형태는 하나의 의미,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대립, 복합, 애매함, 긴장, 이중성이다. 이 책에서 벤투리는 근대건축에서는 억압됐던 서양 건축의 복합, 다층적 의미 체계와 갈등 혹은 대립을 읽어냈다. 건축을 다양한 관점과 차원에서 이해할 때 지각과 인식은 보다 생생해진다는 것이다. 부분이 전체를 위해 양보하거나 절충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보았을 때 불완전한 것들도 전체적으로 보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벤투리의 복합성과 대립의 이론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 건축은 기본적 용도를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문은 집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경계 역할을 하며 집주인의 사회적 신분, 개성, 취향까지도 표현한다. 전자는 일차적 기능이고, 후자는 이차적 기능이다. 벤투리는 근대 건축이 일차적 기능은 지나치게 강조한 반면 이차적 기능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본다. 둘째, 이차적 기능은 대중이 쉽게 인식할 수 있는 형태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용된 대부분의 사례는 건축물의 입면도에 나타낼 수 있는 구체적 요소다. 아파트 저층의 기둥, 안테나, 창의 배열 등이다.

필립 존슨(Philip Johnson 1906~2005)은 CCIA에 많은 동감을 표시하면서부터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또 다른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 건축가로 불리게 된다.

벤투리는 1967년 스콧 브라운과 결혼하는 것과 동시에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건축 사무실(Venturi Scott Brown Architects. VSBA)을 같이 열었다. 미국 내 반전 시위가 한창이던 1968년 가을, 벤투리와 스콧 브라운은 예일대 건축과 대학원생들을 이끌고 라스베이거스로 향한다. 1972년 스티븐 아이즈너(Steven Izenour)와 공저로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Learing from Las Vegas'을 출판해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될 새로운 디자인 명제를 제시한다. 디자인에 있어 일사불란한 통일성보다는 복잡다단한 모순이, 기하학적 순수성보다는 다혈질의 열정이,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보다는 역사성(history)과 지역성(vernacular)을 강조하는 건축의 문맥(contextualism)을 주장했다.

"그(고속도로의 간판들) 조각적 형태 혹은 도상적 실루엣, 공간상의 위치, 그 변형된 모양, 그래픽적 의미 등은 서로 공명한다. 그것들은 공간을 통해 구어적이고 상징적인 연결점을 만들며, 멀리서 다가오는 단지 몇 초의 시간 동안 복합적인 의미들을 커뮤니케이션한다. 상징은 공간을 지배한다. 건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공간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형태라기보다 상징이다. 그런 까닭에 이 경관에서 건축은 공간 내부의 형태라기보다 공간 내부의 기호가 된다. 거대한 간판과 작은 건물은 66번 도로의 법칙이다. 간판이 건축보다 중요하다."

멀리서 다가오는 단지 몇 초의 시간 동안'이란, 도시 경관과의 '순수하고 강렬한'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이고, 무엇보다 자동차에 의해 매개된 경험의 결과이다.

[프리랜서 효효]

※참고자료 : 건축과 언어: 1960년대 이후 서구건축의 이론과 실험(김성홍)


[효효아키텍트-43] 라스베이거스의 휘황찬란한 간판과 네온사인에서 벤투리는 미국만이 갖고 있는 지역성 건축의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 '라스베이거스의 교훈'은 '장식 헛간'(decorated shed)과 '오리'(duck)의 비유다. '오리'는 조각처럼 다듬은 하나의 형태다. 반면 '장식 헛간'은 실용적 건축에다 상업적 간판을 붙인 건축이다. '헛간'은 자동차도로의 시각적 풍부함에서 나온다. '오리'는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가 닮은꼴이므로 벤투리의 관점에서 '아이콘(icon)'이다. '헛간'은 기표와 기의가 관습과 문화로 연결된 것이므로 '상징(symbol)'이다. 벤투리에게 근대 건축은 상징성을 잃은 '오리'다. 벤투리가 그리는 도시와 건축은 근대건축의 엄격함을 탈피한 '기호의 건축'과 '기호의 도시'다.

미국 건축 현실에 대안을 제시한 '라스베이거스의 교훈'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라스베이거스의 상업 가로를 일종의 건축 전형과 사회적 현상으로 분석해 언론과 건축계의 수많은 갈채와 비평을 동시에 받았고, 그 이후 모더니즘의 논리에 갇혀 있던 건축이 틀을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뻗어나가는 기폭제가 됐다.

이후 서울에서도 수십 년간 목격됐지만 도시 경관의 인터페이스인 '욕망의 운반체'(vehicle of desire)인 자동차는 주요 건축물의 로비 등 주요 공간 내외부에서 상품으로 전시되는 대상이 된 것은 아이러니다.

▲ 알렌 기념 미술관(Allen Memorial Art Museum. AMAM. 1976) /사진=wikipedia

앨런 기념 미술관(Allen Memorial Art Museum. AMAM. 1976)은 오하이오주 오베를린 대학 내에 위치해있다. 1917년에 지어진 건물을 1973년 증축하면서 기존 구관의 건축 어휘를 존중했다. 구관 특성을 재해석하면서도 신관의 특성을 구분 짓기 위해 분홍색 화강암과 붉은색 사암을 사용해 바둑판 모양으로 디자인했다. 기존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너무 눈에 띄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 프리스턴 대학 고든우 홀(gordon wu hall. 뉴저지. 1983) /사진=wikimedia

뉴저지 프리스턴 대학 고든 우 홀(gordon wu hall. 1983)은 버틀러대 기숙사다. 파사드의 화강 무늬와 대리석 사용, 벽돌, 석재 인방 띠, 연창 등 고딕풍의 느낌이다. 벤투리 특유의 아치형 창문도 적용됐다. 대학 전체가 대리석과 회색 화강암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역사성과 지역성을 강조하는 벤투리 건축 문맥을 적용했다. 파사드에는 기본적 도형이 어우러져 거대한 성 모양을 하고 있다. 1층은 500여 명을 수용하는 식당과 홀이 있으며 2층은 휴게실, 관리실, 도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벤투리는 1984년 발간한 에세이 집 'A View from the Campidoglio:Selected Essays, 1953~1984'에서 알바알토(Alvar Aalto)의 작품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고백했다. 알바 알토의 작품이 가장 크게 동기부여가 되었으며 자신에게 가장 적절했으며 가장 풍부한 원천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됐다고 말했다.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을 대변하는 '적을수록 좋다'(Less is more)라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철학에 '단순한 것은 지루하다'(Less is bore)는 말로 화답했다. 의미의 명료성보다는 풍부함을, 양자택일적인 사고보다는 공존의 태도를 더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식과 상징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벤투리가 1970~1980년대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1991년에는 두 개의 미술관 프로젝트를 동시에 완성한다. 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신관(Sainsbury Wing)과 시애틀 미술관(Seattle Art Museum)이다.

▲ 시애틀 미술관(Seattle Art Museum. 1993) /사진=wikimedia

시애틀 미술관은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 있다. 시애틀 중심가에 있는 5층 본관(Main Museum)을 벤투리팀이 설계했다. 미술관 입구에 1992년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대형 조각상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이 설치됐다.

벤투리는 시민이나 어린이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대중적이며 친근한 느낌의 미술관을 기본 설계 콘셉트로 잡았다. 건물 내외부에 연회석 재료 사용, 여러 가지 밝은 색 적용, 장식적 세부 등에서 풍기는 전체적인 분위기로 그의 독특한 건축 어휘가 돋보인다. 미술관 내부는 1층에 강당, 회의실, 실기실, 서적판매부 등이 있고 2층(기획), 3·4층(상설)은 전시실로, 5층은 사무실과 도서실로 사용되고 있다.

벤투리 부부는 건축계의 고질적인 '성차별'의 상징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거의 평생을 같이 작업하고 책을 썼지만, 1991년 프리츠커상은 벤투리만 수상했다. 2013년 3월 프리츠커상 심사위원회에 1991년의 수상자가 벤투리 한 사람이 아닌 스콧 브라운과의 공동 수상이 돼야 한다는 내용이 청원됐다. "브라운은 건축사무소 벤투리 스콧 브라운 앤드 어소시에이츠의 공동 파트너로서 22년 이상 활동했고, 건축 이론 및 디자인 분야에서 벤투리와 함께 30년 넘게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1972년작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역시 벤투리와 그녀의 공저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역할을 '아내'로만 바라봄으로써, 프리츠커 심사위원단은 오직 그녀의 남편만을 수상자로 선택했다." 프리츠커 위원회는 이전의 심사위원들이 결정한 결과를 이후의 심사위원이 재심할 수는 없다는 이유를 들어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2016년 미국건축가협회(AIA) 골드 메달을 받았다.

1996년 벤투리 부부는 샌디에이고 현대 미술관(MCASD·Museum of Contemporary Art San Diego) 개조 작업에 참여했다. MCASD는 이들 부부의 건축 철학이 가장 잘 녹아 있는 건축물 중 하나다. 건축은 사색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라고 했다. 풍부한 장식, 친근감, 복합성을 지니되 통일감이 있어야 훌륭한 건축물로 꼽았다.

개인 주택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은 재즈와 네온사인 등 팝아트적인 요소를 도입했다. 전통적인 미술관이라는 딱딱한 상징성보다는 도시와 주변이 갖고 있는 유연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야자수가 들어선 주변 경관과 가장 잘 어울리는 미술관으로 꼽힌다. 샌프란시스코가 히피로 상징되는 자유의 도시라는 점을 감안한 셈이다.

2005년 '기호화 시스템으로 읽는 건축, 매너리즘 시대를 위하여'(Architecture as Signs and Systems:For a Mannerist Time)를 출간했다.

[프리랜서 효효]

※참고자료=건축과 언어:1960년대 이후 서구건축의 이론과 실험(김성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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