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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L 라이트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doll eye 2019. 11. 1. 17:47

건축가 프랭크 L 라이트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 효효
  • 입력 : 2019.11.01 06:01

       

낙수장(Fallingwater) /사진=wikipedia
▲ 낙수장(Fallingwater) /사진=wikipedia
[효효 아키텍트-8]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발표한 세계문화유산에는 '한국의 서원'이 선정되었다. 이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의 미국 내 작품 8점도 등재되었다. 선정된 작품은 대표작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폭포 위에 올라앉은 집 '낙수장(Fallingwater)', 시카고에서 300㎞ 떨어진 위스콘신 스프링그린의 언덕에 저택 겸 작업장으로 고대 웨일스의 음유시인 이름을 딴 '탈리에신(Taliesin)'과 자신의 겨울철 작업장이었던 '탤리에신 웨스트', 그 외 주택 3곳과 유니티 교회가 포함됐다. 안토니 가우디, 르코르뷔지에에 이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자신의 작품을 올린 건축가가 됐다.

라이트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명제를 남긴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과 구조공학자 댄크마 애들러(Dankmar Adler)가 시카고에 세운 건축회사를 다녔다. 이들은 시카고파(Chicago school)의 핵심 인물이다. '시카고파'는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한 1871년부터 1910년까지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약한 건축가들을 부르는 말이다. 100여 년 전 이들의 건축적 특징으로는 마천루, 철골 구조, 엘리베이터 등을 들 수 있다.

라이트는 설리번 밑에서 몰래 자기 이름으로 6채의 주택을 설계한 것이 발각돼 해고되자 1894년 자신의 건축회사를 차렸고 도시 주변 개인 주택을 설계했다. 이때의 건축물들은 초원 주택, 즉 프레리 하우스(prairie houses)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1902년 시카고 근교 하일랜드파크에 지은 윌리츠 하우스(Willits House)는 위에서 보면 열십자 모양이고 대형 화덕이 중심에 있다. 방은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다.

라이트는 1906년 일본을 방문한 이후, 도쿄 제국호텔과 자유학원을 설계했다. 호텔이 완공된 다음해인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도쿄의 많은 건물들이 붕괴되거나 화재에 휩싸였으나 제국호텔은 멀쩡했다. 이것은 건축가 라이트의 명성을 또 한 번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설계는 설리번 사무실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시카고는 무른 토양에 고층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 '떠 있는 기초(floating foundation)'를 설계에 적용했다. 호텔 설계 비용은 화재가 난 탤리에신 복구 비용으로 쓰였다.

라이트는 중산층을 위한 집도 설계했다. 1930년대에 등장한 이러한 건축물들은 유소니아 하우스(Usonia Houses)로 불렸다. 지하가 없이 평평한 콘크리트 바닥에 지어 비용이 적게 들었다. 이러한 저비용 주택 건축은 1950년대 미국에서 인기가 높았다.

라이트는 젊은 건축가들을 양성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1932년 탤리에신 펠로십(Taliesin Fellowship)이라는 장학 제도를 설립하였다. 라이트는 본사가 있는 위스콘신주에 탤리에신 하우스, 겨울에는 날씨가 따뜻한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소노라(Sonoran) 사막에 탤리에신 웨스트라는 프로젝트를 건설했다. 건축물은 그 기반으로부터 주변으로 자연적으로 순하게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과장된 장식보다는 간결한 형태를 추구하면서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꾀한 라이트의 작품 세계는 흔히 '유기적 건축'으로 표현된다.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부근에 있는 낙수장(1939)은 이런 건축관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꼽힌다. 강가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세워진 것으로, 집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바로 폭포에 닿게 되고,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집 아래를 통과해 흐르는 디자인으로 건축을 자연의 일부로 만들었다. 널찍한 콘크리트 발코니를 기둥 없이 건물 앞으로 내민 캔틸레버(cantilever, 외팔보) 구조도 당시로선 혁신적이었다.

구겐하임 미술관 /사진=pixabay
▲ 구겐하임 미술관 /사진=pixabay
솔로몬 구겐하임(Solomon R. Guggenheim, 1861~1949)은 1937년 구겐하임재단을 설립하고 힐라 리베이(Hilla Rebay, 1890~1967)를 관장으로 '비구상 회화 미술관'을 열었다. 힐라 리베이는 1943년 라이트를 뉴욕으로 초대해 미술관 설계를 의뢰했다. 라이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ziggurat, 계단식 피라미드)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외형에 자연의 빛을 그대로 품고, 방들로 나눠진 기존 미술관과 달리 움직임의 단절이 없이 예술에 둘러싸일 수 있는 미술관을 구상했다. 1943년 설계를 시작한 미술관은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과 1949년 솔로몬의 사망, 뉴욕시와의 실랑이 등으로 16년을 보냈다.

라이트는 구겐하임 설계를 시작한 다음해인 1944년 구겐하임의 라이벌이 된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계획안도 제출했다. 미술관 설립은 보류되었다가 1966년 독일 바우하우스 출신인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1902~1981)의 설계로 지어진다.

구겐하임 미술관 /사진=pixabay
▲ 구겐하임 미술관 /사진=pixabay
1959년, 라이트 사후 6개월 뒤에 완공된 구겐하임 미술관은 그의 창조성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보여준다. 나선이 돌돌 말려 올라간 듯한 파격적 원통 형태 때문에 '조각적 건축'으로도 불린다. 라이트는 캔틸레버 방식으로 만든 (나선형) 램프의 무게를 바깥벽으로 전달하기 위해, 2층부터 돔 바로 밑까지 올라가는 30도 간격의 수직 벽돌을 만들었다. 이 벽돌은 기둥 역할을 하면서 각각 독립된 공간도 만들었다.

관람객이 꼭대기부터 나선 통로를 돌아 내려오든가 반대로 맨 아래층에서 맨 위까지 걸어 올라가면서 작품을 감상하도록 했다. 2009년 가을, 필자가 구겐하임을 방문했을 때는 미술관 주요 소장 작가인 바실리 칸딘스키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중앙 천창에서 쏟아지는 자연 채광만으로는 채도가 어두운 작품 감상에는 많이 불편했다.

라이트는 여성 편력으로,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이자 미국 현대미술을 탄생시킨 위대한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Marguerite Peggy Guggenheim, 1898~1979)은 남성 편력으로 비난과 관심의 대상이었다. 컬렉터를 넘어 스스로 예술가가 된 페기 구겐하임이나 라이트는 그들이 이룬 예술적 성취와 개인적 삶을 구분해야 한다. 페기 구겐하임은 미술관의 잡부였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을 발굴 및 후원하여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세계 미술사에 편입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뉴욕 외에도 이태리 베니스에 'Peggy Guggenheim Collection', 스페인 빌바오에 프랑크 개리(Frank Gehry, 1928~)의 설계로 유명한 'Guggenheim Museum Bilbao', 중동 아부다비에 'Guggenheim Abu Dhabi' 분관을 운영하고 있다. 한 때 한국의 여수에도 구겐하임 분관 설치가 추진된 적이 있다.

2017년 뉴욕의 MoMA에서는 라이트 탄생 150돌 아카이브 회고전이 열렸다. 1956년 설계 의뢰인도 없이, 스스로 1마일(1.6㎞) 높이의 마천루를 계획했음을 보여주는 드로잉 자료도 전시되었다.

[프래랜서 효효]

※참고자료 : 구겐하임 미술관 웹사이트(www.guggenheim.org), 현대건축을 바꾼 두 거장(천장환), 영화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Peggy Guggenheim: Art Addict,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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