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인문

헤체주의

doll eye 2017. 3. 20. 17:18

***개념;솔롱고

해체주의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모든 중심적이었던 것들을 전복하고 권위화된 것들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허위와 억압의 근원을 드러내고자

하는 해체주의는 20세기 철학의 가장 도전적이고 야심찬 기획으로 평가됨 직하다.

해체의 주요한 기획은 무수한 의미들을 생산해내는 ‘힘’을 붙잡으려는 데 있는 것이지, 기존의 의미를 전적으로

파괴하려는 데 있지 않다.

해체란 의미를 무너뜨리기보다는 ‘보충’하고 ‘대리’하면서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해체는 텍스트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이미 해체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서,

그 텍스트의 틈새에서 즐거운 유희를 벌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고정된 의미 체계를 역동적인 의미 체계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이 야심 찬 해체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주체에

의해 배제되었던 타자가 복위되고 주체와 타자는 ‘관계들의 조직망’으로 상호작용을 하기도 한다.


개념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데, 소쉬르 언어 기호학을 사례로 들고와서 논의를 보강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기표와 기의 얘기를 꺼냈는데 뭔가 서양과 동양, 그리고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결국 해체주의라는 것이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극복하는 개념이라는 것, 거기에 새로운 숨결

을 불어넣어서 개념의 생동감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변화의 장으로 만들어놓고 객체를 고정시켜놓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틈새에 즐거운 유희가 벌어지는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고, 여기서 언뜻 김정운의 에디톨로지의

개념도 접목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나만의 메타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고정된 의미 체계들을 부수고 역동적인 의미 체계로 전환시키

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은 해체주의를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설명들..


《그라마톨로지》의 서두에서 데리다는 소쉬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삼는 그의 탈구조주의적 기획은 보다 원대하다.

데리다는 우선 플라톤 이래 전개되어온 서구 철학의 이성 중심주의를 해체한다.

이때 이성과 주체 중심적인 모든 태도들은 의문시된다.


그에 따르면 서구의 모든 문화는 로고스(이법, 논리) 중심적으로 발전해왔는데, 그것은 문자언어보다는 음성

언어에, 기표보다는 기의에 중심을 두고서 절대적 근원을 찾았기 때문에 오히려 본질적인 것과는 멀어지고

말았다고 말한다.

그는 기의의 초월적 현존(presence)을 믿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이성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방법들을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그러한 것들은 모두 음성언어를 문자언어보다 우위에 두었을 때부터 일어났는데, 그로

인해 음성언어/문자언어, 기의/기표, 선/악, 이성/감성, 주체/타자 등의 이항 대립이 생겨나고, 전자를 우위에

두는 로고스 중심주의가 후자의 요소들을 억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분법을 해체하고, 전자 못지않게 후자의 측면에서 펼쳐질 수 있는 다양한 논의들을 계발해낸다. 


그는 원문자(archi-ecriture)를 전제하여 음성언어가 문자언어의 파생물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기의가

기표에 우선한다는 소쉬르의 견해를 넘어서 그 관계들이 역전될 수도 있다는 견해로 ‘기호들의 놀이’를 강조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기의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때로는 기표가 될 수도 있는 순환적인 것이 된다.

즉 기의와 기표는 ‘관계의 조직망’에 놓여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거나 후자가 전자

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음성언어라는 것도 원문자의 기표가 될 수 있고, 문자언어라는 것도 영상 언어의 기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렇게 해서 기의가 고정되지 못하면 어떤 확정된 ‘의미’는 존재할 수 없게 되고 ‘차이’만이 존재하게 된다.

차이의 ‘흔적(trace)’만이 텍스트에 남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차연(differance)의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텍스트의 기호들은 확정적으로 현존하는 의미를 지시하지 못하고, 거기에는 의미에 대한 효과만이

남게 된다.


‘차연’은 차이(differance)와 발음이 같은 프랑스어로서 ‘차이’와 ‘지연’을 합한 개념이다.

데리다의 개념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개념은 같은 음성언어일지라도 문자의 차이에 의해 얼마

든지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르마콘(pharmakon)’은 ‘치료약’과 ‘독약’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쓰이고 ‘이멘(I’hymen)’은 ‘처녀막’과 ‘결혼

(성교)’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쓰인다.

그렇다면 그 의미들은 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지 발화 자체만으로는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기표 사이에는 부재의 공간이 있어, 그 공간에서 차연의 힘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것을 언뜻 볼 때 구조가 해체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실제로 구조에서 힘을 발생시킨다.

즉 구조는 해체를 통해서 살아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시된 의미들은 절대적 현존에 이르지 못하고, ‘관계들의 조직망’ 속에서 지연되며, 또한 어떤 의미가

죽을 때만이 진정한 의미들이 생산되기도 한다.

차연의 끊임없는 유희는 의미가 흩뿌려진다는 뜻의 ‘산종(dissemination)’으로 나아가고,

그것은 의미의 영역을 무한히 확대시키게 된다.



***해체주의와 그 이후 - 이광래

NO WAVE 2009.12.15 11:14


해체주의와이후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이광래 (열린책들, 2007년)
상세보기


이광래 교수는 프랑스 철학의 포스트 구조주의에 대한 탈피하고 해체에 대한 화해로 융합과 무구조의 융합에 대한 책의 서술의 고민을 밝힌다. 이러한 저자의 고민은 개인적인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의 이해와 이 후의 철학의 방향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해주기에 충분했다.

 

포스트구조주의(해체주의)는 니체의 반이성 철학을 계승했다. 독일 철학자인 니체가 100년 이후 프랑스의 포스트 구조주의자에 의해서 재조명 된 것이다. 최초의 반이성 철학자인 니체의 반이성주의는 학문의 역사, 인식의 역사는 단순히 이성의 진보라는 일반적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 회의의 자유를 지향하는 니체의 철학은 이성을 통해 역사를 분석하는 게 아닌 광기를 통해 역사를 분석하여 회의주의를 재창조하려 했다. 이는 대표적인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로 이어졌다. 소위 데카르트의 이성적 자아, 칸트의 선험적 주관성, 후설의 초월적 주관성, 사르트르의 탈자적 존재, 레비스트로의 보편적 정신구도라는 이성적 철학에 대해서 해체주의 철학자들은 니체의 반이성을 계승하여 반이성적 철학을 내세운다. 푸코의 권력/지식 계보학, 데리다의 해체 이론, 들뢰즈의 욕망이론, 리오타르의 표류의 사상이 반이성 철학으로 귀결되었다. 이들은 68혁명을 기점으로 기존의 철학에 대한 해체적 요구와 문화에 대한 반문화적 욕구가 반철학, 반문화적 해방운동으로 반이성주의를 관철해나갔다.

 

니체의 계보학과 미시적 관점으로 권력과 지식 체계를 규명한 미셸 푸코, 철학을 단두대로 올려 해체를 위한 해체를 시도하며 철학과 문학의 해체를 실험한 자크 데리다, 욕망하는 기계와 탈코드화를 통해 노마드적 유목민의 욕망을 구현한 질 들뢰즈, 표류하는 리비도로 개방화된 상상력의 대안을 제시한 리오타르, 기호의 해체와 반페니미즘의 크리스테바, 해체주의를 기호학적 과잉으로 해석한 움베르트 에코.

해체주의와 마르크스주의, 해체주의에서 비롯된 포스트 모더니즘, 예술의 종말에 대한 해체의 미학, 해체 이후의 미래의 철학을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는 흥미진진한 주제이다.

 

포스트 해체주의?

저자는 포스트 구조주의(해체주의) 이후를 무구조의 시간적인 동시성과 공간적인 편재성이 결합한 통합의 세계가 구축된다고 예견한다. 이는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가 융합되어 자유롭게 이동 가능한 노마드의 세계이고도 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각종 휴대 기기들의 융합 도구들이 전 지구적인 유비쿼터스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포스트 해체주의는 실제 공간에서 파편화, 미분화, 탈 중심화된 해체가 가상 공간까지 확장되어 경계는 사라지고 융합과 무구조의 세계이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해체를 위한 해체주의가 철학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렸다면 이제 그 경계를 넘어서는 포스트 해체주의가 도래해야 한다. 거대한 이성의 세계가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고 일반적으로 확장해왔다면 해체주의는 거대한 덩어리의 구조 체계를 분석하고 미분화하며 경계의 테두리에 세계를 올려 놓은 역할을 했다. 그 경계의 양 끝 단의 한쪽에 이성과 자본의 전체화가 자리 잡고 그 한편에는 융합과 무구조의 자유로운 다중이 존재한다. 16세기 유럽이 대서양의 경계를 넘어 신대륙을 발견하고 근대 정신을 꽃 피우며 전세계에 퍼드렸다. 그러나 유럽 중심의 이성주의는 결코 경계를 넘어서지 않았고 보편적인 세계화는 광기라는 구조적인 전체화의 파편일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철학은 그 경계 위에 서있다. 해체 이후 모든 객체가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는, 자본의 과학을 넘어설 수 있는, 가상과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텍스트와 시그니파잉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출처: http://viva9.tistory.com/413 [NO W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