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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doll eye 2017. 2. 20. 10:18



A. 위대한 작품으로서의 생애

레이 몽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과학사(2000)


칸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모른다고 해서 그의 『순수이성비판』 읽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작가와 작품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작가를 아는 것이 작품을 아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말한다면, 나는 거기에 가장 큰 오해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말하겠다. 작가와 작품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작가의 삶은 또 다른 작품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작가의 삶을 다루는 평전의 독립적인 영토가 어디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삶은 작품의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어야 한다. 따라서 훌륭한 평전의 주인공은 의미 있는 작품을 쓴 사람이기보다는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이다. 이 점에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와 철학을 연결시키려는 저자의 소박한(?) 야심과는 상관없이 훌륭한 평전의 조건을 갖추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배운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이 아니라 그의 삶인 '철학하기'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유럽의 최고 갑부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전반기 삶을 지배했던 것은 부정직한 여러 허식들과의 대결이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된 거짓말에 대한 결벽증적인 자기 검열, 화려한 장식이 없는 기능 중심의 가구들, 센티미터 수준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지어주었던 누이의 집, 그리고 아버지가 물려준 막대한 유산에 대한 거부(스스로 번 것이 아닌 어떤 돈도 받지 않기 위해 그는 온갖 치밀함을 동원한다!). 학위 논문으로 동과되기 위해서는 논문의 여러 형식적 요건들(주석을 다는 것 따위)을 갖추어야 한다는 무어의 편지에 그토록 분노했던 것도 그것들이 논문의 훌륭함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허식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만의 유혹과 부정직의 허식을 떨어내려는 투쟁이 철학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의 요구로 나타난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스승이었던 러셀은 잉크 세 방울 떨어뜨리며 세계에 최소한 세 개의 사물이 있어야 함을 인정하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세계 전체에 대한 어떤 주장도 무의미하다고 거절했다. 그가 인정한 것은 단지 '종이 위에 세 방울의 얼룩 무늬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부터인가 철학이 "움직이는 방향을 계속 바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사실 철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삶의 문제였다. 처음에 그는 명제를 세계에 대한 그림으로 생각하는 방식으로 논리학의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세계가 어떤 질서를 가지고 있고 언어가 그것을 표상한다면, 명제의 참/거짓은 언어와 그 대상인 실재의 일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이전 모델을 완전히 뒤엎기라도 하듯이, "언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언급하지 않고 그것에 대응하는 실체를 찾는 시도는 헛되다"고 말한다. 단어의 의미는 삶과 무관한 영역에 자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삶의 형식 자체로부터 얻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의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표현되는 그의 새로운 삶이다. 특히 러시아의 노동자로 살고 싶어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유럽의 낡은 삶과는 다른 새로운 삶이 혁명 후 러시아에서 시작되고 있음에 흥분했다. 불행히도 러시아는 그 '저명 인사'를 노동자보다는 대학 교수로 모시고 싶어했고,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나는 이 책에서 그의 철학적 전환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삶의 전환을 목격했다. "빈손으로 떠나느니 이 요새에서 피흘리며 죽겠다"는 절규도, 대화에서 친구들의 논리적 헛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전투적인 태도도 사라졌다. 대신 그는 삶의 행복을 위해 철학을 사용할 줄 아는 삶의 기술을 얻었다. 친구들은 유럽 최고 갑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빈털털이가 된 그를 즐겨 불렀고, 그는 기꺼이 그들에게 자신의 철학적 재능으로 얻은 보물들을 나누어주면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는 『논고』나 『탐구』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자신의 또 다른 위대한 작품을 이렇게 마감했다.

"친구들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고병권, 「위대한 작품으로서의 생애」, 『BOOK+ING 책과 만나다』, 그린비(2002)

이곳 여수에 온 뒤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지고 있는 책을 읽고 싶을 때 바로 읽지 못하고 참고하고 싶을 때 참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숙소로 사용하는 원룸에는 불과 10여 권의 책만이 있기에...

레이 뭉크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850쪽에 달하는, 제법 두꺼운 전기이지만 한 번 잡으면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로 흡인력 있게 다가오는 책이다. 이건 역시 고병권의 말대로 그의 삶이 주는, 인상적이고 강렬함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뭐, 그럼에도 아직 난 그의 <논고>나 <탐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각각 두세 번은 읽었을 거 같은데 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탐구>는 서광사 판본인데, 최근에 새로이 번역되어 나온 책세상 판본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2004/02/14






B. 비트겐슈타인, 한국 분석철학계의 새 화두
강진호 교수(철학과) 『논리-철학 논고』 에 대한 새로운 해석 제시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은 논리적 엄밀성을 강조하는 20세기 분석철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단 두 권의 철학서로 언어분석철학에 큰 획을 그었다.

최근 십여년간 미국 분석철학계에서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논고』)를 두고 ‘전통적 해석(Traditional Reading)’과 ‘단호한 해석(Resolute Reading)’ 사이에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마지막 부분에서 ‘『논고』의 명제들이 결국은 무의미(unsinning)하다’는 선언을 하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를 두고 입장이 갈렸다. ‘전통적 해석’은 그 선언을 아예 무시해야 한다고 제안하거나 또는 『논고』의 명제들이 무의미하긴 하지만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 세계, 언어, 논리 등에 대한 그의 이론을 전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미국 철학자 코라 다이아몬드(Cora Diamond)는 이러한 해석을 강하게 비판하며 “『논고』의 명제들은 글자 그대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우리가 이 점을 단호하게 받아들일 때만 ‘철학이 이론이 아니라 활동’이며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들이 아니라 명제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반(反)이론적 철학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논고』의 명제들이 정말 무의미하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왜 이 책을 썼을까? 그녀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의 궁극적 목적은 독자들이 그 명제들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데 있다. 또 이를 통해 그들은 세계와 인간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는 열망이 실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절대적 지식을 찾으려고 하는, 고귀하지만 충족될 수 없는 열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단호한 해석’이라 부른다. 이 해석의 문제점은 비트겐슈타인이 후기 저작 『철학적 탐구』에서 『논고』가 ‘중대한 오류들’을 범했다고 인정한 데 있다. 단호한 해석이 주장하듯 『논고』의 명제들이 진정 무의미하다면 무엇이 ‘중대한 오류들’이 될 수 있을까.


지난달 22일(목) 한국분석철학회 학술대회에서 강진호 교수(철학과)는 이러한 논쟁을 해결하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이는 강 교수가 하버드대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의 일부로 학술대회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이승종 교수(연세대ㆍ철학과)는 “강 교수의 발표는 비트겐슈타인 철학 해석 논쟁에 불을 당긴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학신문』은 강진호 교수의 논문 요약본과 이에 대한 박정일 교수의 논평을 함께 싣는 자리를 마련했다.


『논고』에 대한 기존 해석의 오류들
강진호 교수(철학과) 논문 요약
 
출처:대학신문 2007년 03월 04일 (일) 02:56:16대학신문 snupress@snu.ac.kr
 

나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논고』) 이전 초고들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박사학위 논문의 결론 부분을 발전시킨 본 논문 「『논리-철학 논고』의 ‘중대한 오류들’」은 이 연구를 통해 밝혀낸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독특한 논리 개념을 설명하고 이를 토대로 『논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본 논문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발전시킨 논리 개념은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프레게(Frege)나 러셀(Russell)의 논리 개념과 매우 다를 뿐 아니라 오늘날의 이른바 모형-이론적(model-theoretic) 논리 개념과도 매우 다르다고 논변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논리는 문장과 사태의 논리적 형식들을 다루며, 논리적 형식들은 언어와 세계의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구조를 이룬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논리적 형식들이 언어와 세계의 필연적이고 본질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형식들은 언어를 통해 묘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논리적 형식들로부터 파생된 이른바 ‘논리상항(logical constant)’들은 언어로 표시될 수 없다. 우리 일상 언어에서 논리상항들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들은 모두 사이비 표현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비 표현들로 ‘그리고’나 ‘또는’과 같은 진리함수적 문장 연결사들, ‘모든’과 ‘어떤’과 같은 양화사들, ‘대상’이나 ‘사태’와 같은 존재론적 범주들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 표현들이 『논고』에서 자신이 제시한 논리적 표기법에서 모두 제거될 수 있음을 보인다.


논리상항 표현들이 사이비 표현들이므로, 이들 표현들을 사용한 명제들 또한 모두 사이비 명제들이다. 아울러 지면 제약상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개념에 따르면 철학적 용어들 또한 논리상항 표현들과 마찬가지로 사이비 표현들이다. 이제 『논고』의 명제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들이 논리상항 표현들과 철학적 용어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논고』의 명제들은 모두 무의미한 사이비 명제들이다.

『논고』의 궁극적인 핵심은 이 사이비 명제들이 아니라, 이 명제들에 나타난 논리상항 표현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논고』의 논리적 표기법이다. 철학적 용어들과 관련해서는 비록 이 표기법이 이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지만, 이들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은 보여준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은 이론을 제시하는 학문이 아니라 『논고』식의 논리적 표기법을 사용하여 철학적 명제들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이 명제들의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활동이다.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논고』가 이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이제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말하고 있는 『논고』의 “중대한 오류들”이란 무엇인가? 나는 본 논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논고』의 “중대한 오류들”의 핵심이, 『논고』 명제들이 무의미하다는 바로 그 아이디어라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명제들을 무의미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논고』 명제들이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확정적인 답변은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논고』의 진술들이 구체적인 맥락 하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달려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이제 의미에 대한 총체적 맥락주의(global contextualism)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철학적 용어들과 명제들을 포함한 어떠한 언어적 표현들도 어떤 맥락 하에서는 의미가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맥락에서 무의미한 그런 언어적 표현은 없다.

(이렇듯-인용자) 의미에 대한 총체적 맥락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상항 표현들이 절대적으로 무의미한 사이비 표현이며 따라서 이 표현들을 논리적 표기법에서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들이 언어의 오용에 의한 환상임을 보여주려고 했던 전기 시절의 견해를 버리게 된다.


이러한 나의 해석이 옳다면, 『논고』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단호한 해석’은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전통적 해석은 『논고』의 명제들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으로 무의미한 명제들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단호한 해석’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의미의 맥락 의존성에 대한 성찰로 인해 전기 시절의 자신의 무의미 개념을 수정했다는 점을, 따라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논고』의 명제들이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는 논문에서 나의 이러한 『논고』 해석이 전통적 해석과 ‘단호한 해석’의 단점들을 모두 제거하고 장점들을 모두 살리고 있음을 논변하고 있다. 아울러 나의 『논고』 해석이 또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논변하고 있다.



논평-박정일 교수(숙명여대 의사소통센터)
엉성한 그물로는 대작 잡을 수 없어
 
출처:대학신문 2007년 03월 04일 (일) 02:58:01대학신문 snupress@snu.ac.kr
 

강진호 교수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조명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려고 한다. 그는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한 표기법에서는 논리상항, 논리 법칙, 대상, 참과 거짓, 함수, 철학적 용어 등이 모두 제거될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사이비 표현’이고 그리하여 『논리-철학 논고』(『논고』)에서 논리나 철학의 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진술들은 ‘진정으로 무의미한 진술들’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강 교수는 단호한 해석을 따르고 있다.

반면에 그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논고』의 명제들이 무의미한가 하는 물음은 잘못 제기된 것이고, 맥락 또는 언어놀이에 따라 달리 대답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전통적 해석을 수용한다. 그렇게 해서 양자의 진정한 종합이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논고』 마지막 부분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의미’ 개념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뜻이 있는(sinnvoll)’, ‘뜻을 결여하는(sinnlos)’, ‘무의미한(unsinnig)’을 구분하였다. 뜻이 있는 명제는 자연과학의 명제이고, 뜻을 결여하는 명제는 동어반복과 모순이며, 무의미한 명제에는 예컨대 윤리학과 미학의 명제가 있다. 따라서 마지막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의미’와 관련하여 『논고』라는 텍스트를 정확하게 해석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의미(Bedeutung), 뜻(Sinn), 기호, 상징, 함수, 조작(연산), 명제, 요소명제, 사실, 사태, 그림이론, 진리함수이론 등에 대한 치밀하고 분명한 논의가 제기되고, 그 다음에 ‘뜻이 없는’과 ‘무의미한’에 대한 논의가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강 교수는 정작 필요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고 다른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요컨대 그는 ‘무의미한’을 두 가지 방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나는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한 표기법에서 제거 가능한’것이 무의미한 것이라는 암묵적인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논고』에서 필연적으로 참인 것으로 의도된 것’이 무의미한 것이라는 명시적인 (하지만 괴상한) 제안이다.


논평자가 보기에 강 교수의 이러한 두 가지 파악방식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충분한 근거도 없고 오히려 중대한 오류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한 표기법에서 ‘참’과 ‘거짓’이 제거될 수 있다는 주장은 명백한 오류이고, ‘논리의 적용’을 언급할 때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왜곡하고 있다. 또한 강 교수는 자신의 해석이 전통적 해석과 단호한 해석 양자를 진정으로 종합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막상 전통적 해석을 다룰 때면 명백하게 논점을 일탈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논평자는 강 교수의 주장에 전혀 공감할 수 없다. 논평자가 보기에는 이 논문에서 새롭게 주장된 것들은 대부분 근거가 취약하거나 ‘중대한 오류들’을 범하는 것이며, 오류를 범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대부분 한국분석철학계에서 이미 논의가 된 것으로서 새로울 것이 거의 없다.

『논고』의 ‘무의미’를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한 표기법에서의 제거가능성’으로서 규정하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고, ‘무의미’를 ‘필연적으로 참인 것’으로 파악하자는 제안은 억측에 불과하다. 『논고』의 ‘중대한 오류’가 ‘논고의 명제들이 결국은 무의미(unsinning)하다’는 언명이라는 지적은 『논고』라는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토대로 ‘무의미’의 개념이 규정되지 않는 한, 피상적이고 지엽적이다.



『논고』 해석의 근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박정일 교수의 논평에 답한다
1699호 『대학신문』에 실린 『논리-철학 논고』 해석 논란에 이어
출처:2007년 03월 10일 (토) 23:12:12대학신문 snupress@snu.ac.kr

나의 분석철학회 학술대회 발표 논문 「『논리-철학 논고』의 ‘중대한 오류들’」에 대해 『대학신문』에 실린 박정일 교수의 논평을 읽어보았다. 박 교수가 자신의 짧은 논평에서  아무런 이유나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엉성한’, ‘괴상한’, ‘왜곡’, ‘억측’, ‘명백한 오류’, ‘피상적’ 등과 같은 단어들을 남발하고 있어 유감이다. 이 글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겠다.

『논고』 명제들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하는『논고』 6.54의 당혹스러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논고』 해석의 근본 문제다. 첫째, 이 문제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논고』의 모든 명제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다. 둘째, 이 문제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논리의 본성과 철학의 본성에 대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다. 셋째, 이 문제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차이점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라진다.

나는 내 논문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상항’ 개념과 ‘논리적 표기법’ 개념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이를 근거로 『논고』 해석의 근본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말대로 『논고』는 진정으로 무의미한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총체적 맥락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논고』 명제들의 무의미성에 대한 질문은 그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논고』 해석의 근본 문제에 대해 박 교수는 과연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대학신문』에 실린 박 교수의 논평만 보아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저 『논고』라는 텍스트를 ‘치밀하고’ ‘정확하게’ 해석해야만 올바른 답이 나올 것이라는 하나 마나 한 주장만 하고 있을 뿐이다. 박 교수는 『논고』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 공감하고 있는데, 『논고』 해석의 근본 문제에 대해 ‘전통적 해석’에서는 지금까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1) 『논고』 명제가 무의미하다는 6.54의 비트겐슈타인의 선언이 명백한 모순을 야기하므로, 이 선언은 무시되어야 한다.
(2) 『논고』 명제들은 6.54의 선언대로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한다.

그러나 (1)과 (2) 어느 쪽도 『논고』 해석의 근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먼저 (1)을 주장한다는 것은, 6.54를 무시하지 않으면 『논고』 텍스트에 명백한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뻔히 알 수 있는 이런 초보적인 모순이 『논고』에 존재하다는 제안은 학술적으로 가치가 없다. 다음으로 (2)를 주장한다는 것은, 『논고』의 무의미한 명제들이 그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도대체 무의미한 명제들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며, 설령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다면 도대체 무의미한 명제들과 일반 명제들 간에는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무의미한 명제들이 또한 ‘말해질 수 없는’ 명제들이라고 하고 있으며, 『논고』 7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또 하나의 유명한 선언을 하는데, (2)의 제안이 함축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명제들이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구체적으로 어떤 식이 될지 나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해질 수’ 있다면 이것이 도대체 『논고』 7의 선언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겠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박 교수는 『대학신문』에 게재된 논평에는 빠졌지만 학술대회에서 읽은 논평에서 “『논고』 명제들이 『논고』 고유의 의미에서 무의미하긴 하지만 일상적 의미에서 무의미한 명제들은 아니다”라는 요지의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 역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박 교수의 제안대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무의미’가 단지 ‘『논고』 고유의 의미에서 무의미’인 것에 불과하다면,  “『논고』 명제들이 무의미하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선언은 철학적으로 놀랍고 중요한 선언이기는커녕 일종의 사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용어의 의미를 바꿔 써버리면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령 어떤 사람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지구는 수많은 위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겉보기에 놀랍고 중요한 천문학적 주장을 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사람은 사실 ‘위성’이라는 용어를 인공위성들까지 가리키는 ‘자기 고유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의 주장에서 놀랍거나 중요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놀랍고 중요하기는커녕, 그의 주장은 일종의 사기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나의 『논고』 해석과 관련하여 『대학신문』에 실린 박 교수의 논평에서 아무런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냥 나열만 해놓은 이른바 ‘문제점’들, 가령 『논고』에서 필연적 참으로 의도된 명제들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나의 제안이 억측이라거나, 나의 주장과 달리 ‘참’과 ‘거짓’은 『논고』의 논리적 표기법에서 결코 제거될 수 없다거나, 내가 ‘논리의 적용’을 언급할 때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왜곡하고 있다거나, 전통적 해석을 다룰 때 내가 논점을 일탈하고 있다거나 등등은, 이미 학술대회에서 배포한 나의 답변문을 통해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한 바 있다. 만약 이 문제들에 대해 아직도 논의할 게 남았다고 믿는다면, 『대학신문』이나 더욱 바람직하게는 철학 관련 학술지들을 통해 왜 그러한지 제대로 이유를 들어 문제를 제기해주기 바란다.

강진호 교수
(철학과) 


C.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은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라는 책으로 집약된다. 이 책은 새롭고 심오하고 영향력 있는 저서로 널리 인정받았다. 이 책은 비록 적은 분량이지만 광범위한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놀랍게 생각한 점은 사람들이 그 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문장들을 이해한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떠오른 해결책은, 무언가를 말하는 문장은 ‘실재의 그림’이어야 하고, 그 의미를 보여주며, 또한 세계의 어떤 상황을 보여 준다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은 종이 위에 씌어진 기호들과 외부세계의 어떤 상황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명제가 그림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명제를 완전히 분석된 형식으로 고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 속에서 명제는 단지 실재의 단순요소들과 상호 관련되는 단순 기호들을 배열한 것이다.
“논리철학 논고”가 지닌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생각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으로 실재의 단순 요소들의 필연적 존재, 사고하고 의지하는 자아의 존재, 절대적 가치의 존재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사고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언어의 한계가 사고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흄의 분기와 논리 실증주의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고안의 도움으로 ‘비엔나 학파’가 형성되었는데 그들은 특별히 형이상학의 비판에 초점을 두었다. 또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언어, 특히 기호로서의 언어의 연구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에 의하면 자연과학이 다루는 문제는 모두 일정한 대상에 관한 문제다. 반면 철학은 과학의 언어의 논리를 연구해야 한다. 과학의 언어는 대상과 직접 관계하는 대상언어이다. 그런데 한 차원 높게 이 대상언어에 관해 연구하는 언어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언어를 메타언어(meta-language)라고 한다. 여기서는 언어와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언어상호간의 관계가 연구된다. 구문론에서는 개념들이 결합하여 명제가 형성되고, 하나의 명제로부터 다른 명제가 도출되는 과정이 논리적인 규칙에 맞아야 의미 있는 명제가 된다.


언어를 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다루는 의미론에서 어떤 명제가 의미 있는 명제가 되기 위한 조건을 비트겐슈타인은 두 가지 제시하고 있는데, 이 두 조건은 논리실증주의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 조건은 첫째, 논리법칙에 일치해야 하고 둘째, 검증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실증주의는 무의미한 명제를 형이상학적이라고 한다. 검증가능성의 기준이란 분석명제이거나 모순명제가 아닌 한 어떤 명제가 의미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의 여부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의미 없는 명제의 집합으로서 학문적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논리실증주의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명제를 철학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편 논리실증주의는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지 않은 명제들을 모두 철학에서 배척함으로써 실천을 위한 가치판단으로서의 철학의 중요한 한 영역을 스스로 포기한 결과를 낳았다. 논리실증주의의 핵심은 모든 주장을 원자명제로 환원하는 데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아래 철학자들은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언어의 용법 혹은 단어의 의미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한 언어분석철학의 대세에 맞서서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존재하며,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지식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우주론적 문제라는 철학관을 지켜 온 철학자가 ‘칼 포퍼’ (Karl Popper)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철학의 목적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서 생기는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며, 그 방법은 언어의 분석을 통한 명료화에 있다. 반면에 포퍼는 철학의 관심사가 과학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이해에 기여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언어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우주 이해에 중요한 부분이지만, 우리의 문제를 단순히 언어의 수수께끼로 설명해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그러한 추구를 포기한다면 그 매력을 상실해 버릴 것이라고 포퍼는 경고한 바 있다.


   

C-c.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박 정 일

 

목차
서론 ············································································································· 1
제1부 ꡔ논고ꡕ의 저자와 구성 체계 ···························································· 8
Ⅰ.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와 저작 ···························································· 8
Ⅱ. ꡔ논고ꡕ의 구성과 내용 ···································································· 13
1. ꡔ논고ꡕ의 구성 ············································································ 13
2. ꡔ논고ꡕ의 구성에 따른 내용 ······················································· 14
제2부 ꡔ논고ꡕ의 개념 체계도 ··································································· 21
Ⅰ. ꡔ논고ꡕ의 주요 개념에 대한 정의와 규정 ······································ 21
Ⅱ. 개념 지도 ························································································ 23
제3부 ········································································································· 29
Ⅰ. ꡔ논고ꡕ의 존재론 ············································································· 29
1. 세계 ····························································································· 30
2. 사실 ····························································································· 34
3. 사태 ····························································································· 41
4. 대상 ····························································································· 45
1) 대상의 속성 ············································································ 46
2) 대상의 형식 ············································································ 50
5. 실체 ····························································································· 53
Ⅱ. ꡔ논고ꡕ의 언어 ················································································· 57
1. 명제 ····························································································· 59
1) 비트겐슈타인의 명제(Satz) ··················································· 59
2) 기호와 상징 ············································································ 61
3) 명제 기호(기호로서의 명제) ·················································· 67
4) 상징으로서의 명제 ································································· 71
2. 요소 명제 ···················································································· 77
3. 이름 ····························································································· 80
4. 분석 ····························································································· 83
1) 러셀의 기술 이론 ··································································· 84
2) ꡔ논고ꡕ의 분석의 개념 ···························································· 89
Ⅲ. 세계와 언어 ····················································································· 95
1. 그림 이론 ···················································································· 96
1) 그림 ························································································ 96
2) 논리적 형식 ········································································· 100
3) 논리적 그림 ········································································· 104
2. 진리함수 이론 ·········································································· 109
1) 진리표 ·················································································· 109
2) 동어반복과 모순 ·································································· 112
3) 조작과 함수 ········································································· 115
4) 진리 함수 ············································································· 120
5) 명제의 일반 형식 ································································ 123
Ⅳ. 여러 명제들 ·················································································· 128
1. 논리학의 명제 ·········································································· 131
1) 논리학의 명제와 논리학 ······················································ 131
2) 논리학의 명제와 증명 ························································· 135
2. 수학의 명제 ·············································································· 141
1) 수학의 명제와 수학 ····························································· 141
2) 수의 정의와 집합론 ····························································· 144
3) 논리주의 ··············································································· 149
3. 확률 명제 ················································································· 152
4. 일반 명제 ················································································· 156
5. 자연과학의 명제 ······································································· 161
6. 태도 명제 ················································································· 165
7. 윤리학의 명제 ·········································································· 170
Ⅴ. 세계와 나 ······················································································ 174
1. ꡔ논고ꡕ의 철학 개념 ································································· 175
2. 유아론 ······················································································· 179
3. 사실존재론 ················································································ 184
결론 ········································································································· 188
참고문헌 ································································································· 191

일러두기
이 글에서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ꡔ논리철학논고ꡕ의 독일어 판본/영
역본과 한국어 판본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다른 저서를
인용할 때에는 편의상 괄호 안에 있는 약칭을 사용하였다. 번역본을 인용
함에 있어서 역자와 이견이 있는 경우에는 대괄호가 삽입되었으며, 표기
된 쪽수는 한국어 번역본의 쪽수이다.


≪독일어 판본/영역본≫
Wittgenstein, L., (TLP),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German- English, English trans. by C. K. Ogden
and F. P. Ramsey,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22; corrected reprint, 1933; reprint (with index) by Max Black, 1955.
≪한국어 판본≫
비트겐슈타인, ꡔ논리-철학논고ꡕ, 이영철 옮김, 천지, 1991.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저서와 약칭≫
Wittgenstein, L., (TLP),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German- English, English trans. by C. K. Ogden and F. P. Ramsey, London: Routledge & KeganPaul, 1922; corrected reprint, 1933; reprint (with index) by Max Black, 1955.
___________, (NB), Notebooks 1914-1916, ed. by G. H. von Wright and G. E. M. Anscombe with an English trans. by G. E. M. Anscombe, Harper Torchbooks, New York and Evanston, 1961.

___________, (NL), “Notes on Logic: September 1913”, in NB, pp.93-106.

___________, (PI),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The Macmillan Company, New York, 1953.

___________, (RFM), Bemerkungen über die Grundlagen der Mathematik, Basil Blackwell, Oxford, 1956.

___________, (PG), Philosophical Grammar, ed. Rush Rhees, Basil Blackwell, 1974.

___________, (PR), Philosophical Remarks, ed. R. Rhees, trans., R. Hargreaves and R. White, Basil Blackwell, 1975.

___________, (LFM), Wittgenstein's Lectures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Cambridge, 1939, ed. by Cora Diamond, Cornell University Press, 1976.

___________, (WVC), Wittgenstein and the Vienna Circle, ed. by Brian McGuinness, Basil Blackwell, 1979.

___________, (RPP), Remarks on the Philosophy of Psychology, vol. Ⅰ, ed. G. E. M. Anscombe & G. H. von Wright, trans. G. E. M. Anscomb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비트겐슈타인, (ꡔ논고ꡕ), ꡔ논리-철학논고ꡕ, 이영철 옮김, 천지, 1991.
___________, (ꡔ탐구ꡕ), ꡔ철학적 탐구ꡕ, 이영철 옮김, 서광사, 1994.


서론
비트겐슈타인의 ꡔ논리철학논고ꡕ(이하, ꡔ논고ꡕ로 약칭함)는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저작이다. 수수께끼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짤막한 말들, 대리석 처럼 차갑고도 준엄한 선언들, 그리고 치밀하게 전개되는 논의들은 이 저작을 이해하려고 섣불리 덤벼드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초라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저작을 통하여 처절하게 철학하였던 한 사람의 철학자를 본다. 그가 비트겐슈타인이다. 이 저작에서 그는 세계, 언어, 그리고 논리에 대한 고찰로부터, 자연과학, 수학, 철학, 그
리고 윤리학의 본성으로 나아가며, 결국 철학적 자아와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저작인 ꡔ철학적 탐구ꡕ는 젊은 시절 자신이 쓴 ꡔ논고ꡕ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상, 하나의 철학적 사상을 체계적으로 주장한 이후에 스스로 이를 비판하고 포기하고서 또 다른 철학적 사상을 제시한 것은 철학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ꡔ철학적 탐구ꡕ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ꡔ철학적탐구ꡕ는 오직 ꡔ논고ꡕ라는 “옛 사고 방식의 배경 위에서 대조함에 의해서만” 올바로 조명될 수 있다. 따라서 ꡔ논고ꡕ를 이해하는 것은 비트겐슈타
인의 철학이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기 위한 베이스 캠프를 구축하는 것과 같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ꡔ논고ꡕ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발판으로서 ꡔ논고ꡕ의 핵심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자. ꡔ논고ꡕ의 목적은, 비트겐슈타인이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사고의 한계를 그으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말할 수 없는 것, 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ꡔ논고ꡕ의 최종 결론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 책의 전체적인 뜻은 대략 다음의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좌우간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이 책은 그러므로 생각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 또는 차라리, 생각이 아니라 사고의 표현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 왜냐하면 생각에 한계를 그으려면 우리는 이 한계의 양 측면을 다 생각할 수 있어야 ― 따라서 우리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 할 것이기 때문이다.(머리말, 33쪽)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을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그러므로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가 될 것이다.”(머리말, 33-34쪽) 즉,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탐구함으로써, 또는 언어 내에서 어떤 작업을 함으로써 그러한 한계를 그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속한다고 간주하는 명제란 어떤 것들인가?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여기에는 예컨대 윤리학의 명제와 미학의 명제가 있다. 따라서 혹자는 이 지점에서 당연하게도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 있다: “우리는 예컨대 ‘살인은 나쁘다’와 같은 윤리학적 명제를 말하지 않는가?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명제들을 말하며, 더구나 그러한 명제들을 아주 쉽게 말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대답은 이럴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아주 쉽게 그런 문장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발화한 그 문장은 “무의미한 것”(nonsense)에 불과하다.
요컨대,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어떤 경험상의 능력이나 사실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ꡔ논고ꡕ에 따르면, 우리는 “살인은 나쁘다”라는 윤리학적 명제를 말할 수 있지만 그 명제는 무의미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 명제를 “유의미한 것”으로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ꡔ논고ꡕ의기본적인 구조는 간략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이러한 것은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다.
저러저러한 것은 유의미하게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저러저러한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
따라서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것,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ꡔ논고ꡕ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결정되면 그럴 수 없는 것도 결정될 것이며, 비트겐슈타인의 결론과 같이 침묵해야 할 것도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ꡔ논고ꡕ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
이고 핵심적인 물음은 다음과 같다:
(Ⅰ) 말할 수 있는 것(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이 간주하는 바,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어떤 명제들인가?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는 “자연 과학의 명제들”(6.53)이다. 그 밖의 명제들은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다. 이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은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명제, 간단히 뜻있는 명제와 유의미하게 말할 수 없는 명제, 즉 뜻이 없거나 뜻을 결여하는 명제를 구분하고자 한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이 물음 (Ⅰ)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든지 간에, 그 대답의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즉 윤리학의 명제가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왜 그러한지, 또 왜 자연 과학의 명제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그 근거에 대한 해명이 요구된다. 이 해명 작업은 “명제”가 무엇이고, 또 “뜻”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요구한다. 이와 동시에 ꡔ논고ꡕ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제기되는 다음의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이 요구된다:
(Ⅱ) 어떻게 명제는 뜻을 지닐 수 있는가?
이 물음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하는 “명제”(Satz)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그 말이 현대의 논리학 교과서나 논리 철학, 언어 철학 교과서에서 말하는 “명제”와 일치하는 것인지, 아니면 “문장”이나 “진술”과 같은 것인지 논의되어야 한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뜻”(Sinn)이 무엇인지도 논의되어야 한다.
물음 (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첫 번째 대답은 명제는 사실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명제는 사실일 수 있는가? 이 점을 보이기 위해서 비트겐슈타인은 “기호”와 “상징”을 구분한다. 후자는 뜻을 지니는 표현들이며, 전자는 “상징에서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3.32)으로서, 말하자면 물리적이거나 현상론적인 존재들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명제는 일종의 기호로 파악될 수 있으며, 일종의명제 기호이다. “명제 기호”는 물리적이거나 현상론적인 것으로서 일종의사실이고, 또 “오직 사실들만이 뜻을 표현할 수 있기”(3.142) 때문에, 명제는 뜻을 지닐 수 있다.
물음 (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두 번째 대답은 명제는 그림일 수 있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또는 어떤 의미에서 명제는 그림일 수 있는가? 이 점을 보이기 위해서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ꡔ논고ꡕ의 존재론(형이상학)과 그림 이론(그림 의미 이론)이 그것이다. 사실상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ꡔ논고ꡕ의 그림은 사태, 사실, 세계, 현실의 그림이기 때문에, 세계의 존재론적 측면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고, 또 이를 기반으로 해서 명제가 어떻게 그림일 수 있으며 뜻을 지닐 수 있는지를 해명하는 작업(그림 이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ꡔ논고ꡕ의 존재론과 그림 이론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다. 여기에서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며, 또다시 “사태”는 “대상들의 결합”이다. 이와 평행하게, 언어는 명제들의 총체이다. 여기에서 명제는 요소 명제들로 이루어지며, 다시 요소 명제는 “이름들의 연쇄”이다. 이름은 대상을 가리키며, 요소 명제에는 사태가 대응한다. 대상은 그 이름의 의미이며, 요소 명제가 참일 경우 사태는 그 요소 명제의 뜻이다. 요소 명제는 사태를 그리며, 명제는 사실을 그린다.
명제는 사실을 그리는 한에서 뜻이 있다. 이 때 한 명제가 한 사실에 대한그림이기 위해서는 그 둘은 반드시 논리적 형식을 공유해야 한다. 우리가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림 관계(모사 관계)에 있는 명제들뿐 이다. 그 외에는 뜻을 결여하거나 무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ꡔ논고ꡕ의 대답은 다음의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ꡔ논고ꡕ의 존재론과 그림 의미 이론의 관계가 어떠하냐 하는 점이다. 가령 어느 쪽이 더 근원적인가? 또는 비트겐슈타인은 어떻게 ꡔ논고비트겐슈타인 ꡔ논리철학논고ꡕ 5ꡕ의 존재론에 도달했는가? 둘째, 비트겐슈타인은 세계가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고, 다시 사실은 사태들로, 그리고 사태는 대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고, 명제는 요소 명제들로, 그리고 요소 명제는 이름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파악은 “분석”의 개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렇다
면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하는 “분석”의 개념이란 무엇인가?

어쨌든,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예컨대 “비가 온다”라는 명제는 한편으로는 일종의 명제 기호로서 물리적이거나 현상론적 존재로서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태나 사실과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는 그림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음 (Ⅱ)에 대한 이러한 대답은 중요한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즉 어떤 명제는 일종의 명제 기호일지라도 뜻을 지니지 않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명제는 “비가 온다”라는 뜻을 지닌 표현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뜻을 지니지 않을 수가 있다. 예컨대, “비가 오거나 오지 않거나이다” 가 그것이다(참조: 4.461).
따라서 다음의 물음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Ⅲ) 왜 어떤 명제는 뜻 있는 명제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뜻을 지니지않는가?

비록 물음 (Ⅲ)이 다소 모호하게 표현되었을지라도, 이 물음에서 의도된 명제는 분명하다. 즉 동어반복과 모순이 그것이다. 전자는 “비가 오거나 오지 않거나이다”와 같은 명제이고, 후자는 “비가 오고 오지 않는다”와 같은 명제이다. 물음 (Ⅲ)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대답은 진리 함수 이론을 통해 주어진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뜻 있는 명제들은 모두 요소 명제들에 대해서 어떤 조작을 가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뜻있는 명제들은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마찬가지로, 동어반복이나 모순도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즉 동어반복과 모순은 둘 다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라는 점에서(또는 명제의 일반 형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뜻 있는 명제와 유사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사실에 대한 그림이 아니다.
왜 동어반복과 모순이 사실에 대한 그림일 수 없느냐 하는 점은 그 명제들의 성격과 본질을 해명하는 데서 밝혀진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동어반복과 같은 논리학의 명제들은 세계에 속하는 사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세계의 골격을 묘사한다.”(6.124) 그리하여 이러한 명제들은 무의미한(unsinnig, nonsense) 명제가 아니라, 뜻을 결여하는(sinnlos) 명제이다.
이와 함께 ꡔ논고ꡕ에서 물음 (Ⅲ)에 대한 대답은 명제의 일반 형식을 제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동어반복과 뜻 있는 명제, 그리고 모순은 명제의 일반 형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동어반복과 모순은 뜻 있는 명제와는 달리 뜻을 결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최종적으
로 다음의 중요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Ⅳ) 왜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가 아닌 명제들은 뜻을 지니지 않는가? 또한 이 명제들의 성격이 상이할 수 있다면 어떻게 상이한가?

이 물음에서 중요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명제를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가 아닌 명제들”로 간주했느냐 하는 점이다. 몇 가지 분명한 경우가 있다. 즉, 윤리학의 명제와 미학의 명제가 그러한 명제인데, 이것들은 세계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또는 윤리학과 미학은 초월적이기 때문에 무의미하다(참조: 6.41, 6.42, 6.421).
반면에 나머지 다른 종류의 명제들은 그 점이 불분명하다. 대표적인 것으로, 수학의 명제, 확률 명제, 일반 명제, 명제적 태도를 나타내는 명제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각각 물음 (Ⅳ)과 관련하여 미묘하고 중요한 문제들을 불러일으키며, 이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ꡔ논고ꡕ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물음 (Ⅰ)-(Ⅳ)에 대한 대답이 고찰되면, 우리는 ꡔ논고ꡕ의 주요한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ꡔ논고ꡕ의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는 아마도 “반전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예술성에 있다.
처음에 제시되었던 여러 핵심적인 주장들과 주요 개념들은 끝 부분으로 가면서 여지없이 뒤집혀 버린다. 그 대표적인 것은 “세계”의 개념이다. 처 비트겐슈타인 ꡔ논리철학논고ꡕ 7음에는 “일어나는 일, 사실들의 총체로서의 세계”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세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그것은 주관적이며 유아론적인 세계라는 것이 판명된다. 또한 ꡔ논고ꡕ의 “사다리 비유”는 매우 유명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하듯” ꡔ논고ꡕ에서 자신이 제시한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경고한다(참조: 6.54).

제1부 ꡔ논고ꡕ의 저자와 구성 체계


Ⅰ.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와 저작1)
1929년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즈가 보낸 한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이 도착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또 누가 도착했기에 케인즈는 “신”이라는 말을 했을까? 비트겐슈타인이었다. 젊은 시절 ꡔ논리철학논고ꡕ라는 불후의 저작을 완성하고, 모든 철학의 문제를 해결했노라고 선언한 그가 10여 년의 수많은 방황을 접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던 것이다.
무엇을 위해? 다시 철학을 하기 위해. 동성애자라고 밝혀져 한때 영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20세기가 낳은 그 위대한 철학자가 다시 철학적 문제와 싸우기 위하여 돌아온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 Wittgenstein)은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비트겐슈타인의 집안은 매우 특별했다. 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카네기”라고 알려질 만큼 오스트리아 철강 산업의 대부호였다. 말하자면 루트비히는 그의 네 형과 세 누나와 함께 “재벌 2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정 환경은 천박한 “졸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칼 비트겐슈타인은 유태인의 후손이지만 부친을 따라 개신교를 믿었으며, 탁월한 경제 평론가이자 음

1)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에 대해 간략하게 또는 상세하게 소개한 다음의 저작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김여수, 「비트겐슈타인의 이해를 위한 소묘」, 분석철학연구회 편, 비트겐슈타인의 이해 , 서광사,1983, 7-34쪽; 김여수 지음, 언어와 문화 , 127-152쪽; 레이 몽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천재의 의무 1, 2 , 남기창 옮김, 문화과학사, 1998; 박영식, 「비트겐슈타인, 그 사람과 언어」, 한국분석철학회 편,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전개 , 철학과 현실사, 1991, 11-23쪽; 이명현, 「비트겐슈타인: 그의 삶과 사상」, 이명현 지음, 이성과 언어 , 문학과지성사, 73-88쪽;존 히튼․주디 그로브스, 비트겐슈타인 , 이두 글방 옮김, 이두아이콘 총서 4; 쿠르트 부흐테를․아돌프 휘프너, 비트겐슈타인 , 최경은 옮김, 한길사; 폰 리히트,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적 소묘」, 엄정식 편역,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 , 서광사, 1983, 33-56쪽.


악 애호가였다. 그의 어머니 레폴딘 칼무스는 카톨릭 신자였고 음악을 남달리 사랑했으며 음악적 재능도 매우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음악에 대한 이러한 극진한 애호 아래, 브람스, 말러, 피아니스트 요하임, 지휘자 발터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호화스러운 비트겐슈타인 궁에 모여들어 많은 연주회가 열렸다. 이러한 예술적 분위기는 비트겐슈타인 형제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나중에 모두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큰 형 한스는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었고, 셋째 형 쿠르트는 첼로를, 그리고 넷째 형 파울은 피아노를 연주하였다. 특히 파울은 1차 대전에서 오른 손을 잃고 왼 손만으로도 피아노를 연주했던 천재적 피아니스트라고 알려져 있다. 형제 중에서 가장 음악적 재능이 떨어진다는 루트비히도 클라리넷 연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웬만한 소나타 정도는 휘파람으로 불 수 있었는데, 나중에 주위 사람들과 제자들이 이런 휘파람 연주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부유하고 행복한 가정에 불행이 닥치기 시작한다. 아버지 칼 비트겐슈타인은 청교도적 윤리를 지닌 자본가로서 그의 아들들이 가업을 잇기를 희망했다. 반면에 그의 아들들은 모두 예술적 감수성이 남달리 깊었고, 그러한 산업사회의 기업가의 의무를 다하며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결국 큰아들 한스의 자살로 이어진다. 루트비히 나이 13세 때였다. 2년 후 둘째 형 루돌프가 자살한다. 그리고 1차 대전 중 셋째 형 쿠르트가 자살한다. 루트비히는 낙원에서 쫓겨나듯, 행복과 환희가 사라진 이러한 실존적 상황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가 죽음과 삶, 자살, 그리고 세계와 신에 대해서 수많은 실존적인 물음을 던졌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부유한 집안이 그랬듯이 다른 형제나 누이들과 같이 14세까지는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음악뿐만 아니라 기계에 남달리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그는 스스로 모형 비행기와 재봉틀을 만들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만년에도 이러한 관심은 지속되었는데, 몇 시간씩 박물관에 전시된 증기 기관을 관찰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재질과 관심에 따라15세부터 3년간 린츠에 있는 실업 고등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고(우연하게도, 이 학교에는 히틀러가 다니고 있었다), 1906년 독일에서 가장 유명했던, 베를린에 있는 공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어서 비트겐슈타인은 1908년에서 1911년까지 영국 맨체스터 공과대학에서 항공공학 연구에 매달린다. 그는 대기 상태를 연구하기 위하여 연으로 실험하기도 했고, 특히 제트 엔지 설계에 몰두했으며 프로펠러 설계로 특허를 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이후에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항공공학에 대한 연구가 깊어질수록 관련된 이론에 대한 연구가 불가피했던 까닭이다. 그의 관심은 항공공학에서 유체 역학 이론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응용 수학과 순수 수학에 관심을 지니게 되
었고, 급기야는 수학 기초론과 수학 철학, 그리고 논리학에로 관심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던 중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일생에 결정적인 사건을 맞게 된다. 즉비트겐슈타인이 우연히 러셀의 ꡔ수학 원리ꡕ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논리학과 철학을 하겠다는 결심을 했을 것이다. 보고하는 바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을 만나 논리학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11년 가을이었다. 당시 러셀은 무어와 함께 영국 철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ꡔ수학 원리ꡕ의 출판과 더불어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러셀과 무어는 비트겐슈타인의 비범한 능력과 열정에 깊이 매료되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이 알고 있던 천재의 가장 완벽한 전형이라는 말까지 한다. 보고하는 바에 따르면, 1년 후 러셀은 더 이상 비트겐슈타인에게 가르칠 것이 없고 더구나 그가 자신을 앞서 가고 있다고 느꼈다.
1913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문제와 싸우기 위해서 노르웨이의 바닷가에 스스로 오두막집을 지은 후 혼자 지낸다. 그런데 이러한 은둔도 잠시,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한다. 그는 탈장으로 병역 면제 판정을받은 상태였지만, 자원 입대하여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육군의 사병으로, 그리고 2년 후에는 장교 훈련을 받고서 장교로 참전했다. 그러나 1918년 8월 그는 이탈리아 군의 포로가 되어 1년 동안 포로 수용소에 수감된다.
그런데 그가 포로로 수감되었을 때 그의 배낭에는 전쟁 중에 틈틈이 계속적어놓았던 ꡔ논리철학논고ꡕ의 원고가 들어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의 실존적 고뇌와 철학적 문제는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참혹한 전쟁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 구체화되고 해결되었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원고를 포로 수용소에서 최종적으로 완성한다. 이 후 1921년에 러셀의 주선을 받아 ꡔ논고ꡕ는 출판되었다.
그런데 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가 별세했다. 비트겐슈타인이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어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은 상속받은 막대한 유산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유산을 릴케, 핵커와 같은 가난한 문인들을 위한 기금으로, 또 형제 자매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그 이후로 그는 극도로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보고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넥타이에 정장 차림을 한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고, 그의 방에는 침대, 책상, 의자 등 기본적인 몇 개의 가구만 있었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ꡔ논고ꡕ에서 철학적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해결했다”고 선언했고 또 그렇게 믿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저 사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그는 쓸모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1919에서 1920년까지 일종의 교육대학(교사연수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시골에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한다. 교사 생활은 약 6년간 이어졌는데, 마을 사람들과의 알력과 같은 이런 저런 문제로 결국 교사 생활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에 그는 수도원의 정원사 조수로 일하다가 잠시 조각을 하기도 하고 그 다음에 그의 누나의 부탁으로 누나의 저택 건축 작업에 착수한다. 이 건물은 설계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비트겐슈타인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세심하게 지어진 건물인데, 장식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신에 엄격성, 정확성, 그리고 경제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 건물의 건축 양식이 ꡔ논고ꡕ와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이렇듯 정처 없는 방황은 1929년에 막을 내린다. 그가 ꡔ논고ꡕ가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이 당시 램지와 케인즈가 그를 계속 찾아와서 토론을 벌이고 또 철학에 복귀할 것을 간절히 권유한다. 비엔나 학파의 슐리크와 바이즈만과의 토론도 그가 철학에 복귀해야겠다는 결심을 재촉하였다. 특히 수학 기초론과 관련된 브라우어의 강연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9년에 그는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연구생으로 다시 등록했다. 그러나 이미 그는 ꡔ논고ꡕ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있었으므로, ꡔ논고ꡕ를 박사학위논문으로 삼아 학위를 취득하였고, 곧바로 강의를 하게 된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후,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중요한 전환을 맞는다.

비로소 그의 독창적인 철학이 싹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독창적인 사유는 ꡔ논고ꡕ(TLP)의 오류를 정확하게 비판하는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ꡔ철학적 고찰ꡕ(PR), ꡔ철학적 문법ꡕ(PG), ꡔ비트겐슈타인과 빈 학파ꡕ(WVC)는 ꡔ논고ꡕ에 대한 바로 그러한 철저한 반성과 비판을 읽을 수 있는 저작이다. 이러한 반성과 비판을 거친 후에 그의 독자적인 사상은 1933-4년에 구술되어 완성된 ꡔ청갈색책ꡕ(BBB), ꡔ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ꡕ(RFM), ꡔ심리 철학에 관한 고찰ꡕ(RPP)에서 서서히 윤곽이 제시된다. 이러한 노력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사후에야 출판된 ꡔ철학적 탐구ꡕ(PI)에서 집약된다.
비트겐슈타인은 1929년에서 1947년까지 대부분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지냈다. 그 사이에 2차 대전이 발발한다. 그는 1차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참전했으며, 이번에는 병원에서 조수로 복무했다고 한다. ꡔ철학적 탐구ꡕ를 완성하려는 그의 노력은 참으로 처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 그는 1937년 한 해를 노르웨이 오두막집에서 은거하기도 했다.
1947년에 그는 ꡔ탐구ꡕ를 완성하기 위하여 교수직을 사임하고, 아일랜드의 서해안 오두막집에서 은둔한다.
비트겐슈타인은 1951년 4월 29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철학을 향한 그의 집념은 놀라운 것이었다. ꡔ확실성에 관하여ꡕ는 그가 죽기 며칠 전까지 하루하루 쓴 철학일기이다. 이 작은 저작은 그의 철학의 깊이와 집념이 어떠했는지를 그대로 말해주는 걸작이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저작만큼 깊은 감동과 당혹스러움을 안겨주는 말이 있다. 주치의로부터 이제 살날이 며칠밖에 안 남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좋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해주세요, 나는 훌륭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입니다(Good, Tell them I've had a wonderful life).”

Ⅱ. ꡔ논고ꡕ의 구성과 내용
1. ꡔ논고ꡕ의 구성
ꡔ논고ꡕ는 아주 짧은 함축적인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ꡔ논고ꡕ에 특이한 것은 각각의 명제들에 일련의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명제는 1-7인데, 이는 다음과 같다:
1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의 총체이다.
2 일어나는 일,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다.
4 사고는 뜻을 지닌 명제이다.
5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요소 명제는 자기 자신의 진리 함수이다.)
6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은 [ p, ξ , N( ξ ) ]이다. 이것이 명제의 일반적 형식이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ꡔ논고ꡕ의 마지막 명제 7을 제외해서, 각각의 명제에 대해 더 상세한 논의가 제시된다. 가령 1 다음에 이어지는 명제는 1.1, 1.11, 1.12, 1.13,1.2, 1.21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일련의 번호 매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십진법 수[소수]들은 개별 명제들의 번호로서, 그 명제들의 논리적 무게, 즉 나의 서술 속에서 그 명제들이 지니는 힘을 암시한다. n.1, n.2, n.3 등의 명제들은 n번 명제에 대한 진술들이다; n.m1, n.m2 등의 명제들은 n.m번 명제들에 대한 진술들이다; 그리고 나머지도 같은 식으로 계속된다.(35쪽)
그러나 위의 비트겐슈타인의 언급과 같이 ꡔ논고ꡕ 전체에서 소수들이 “논리적 무게[중요성]”에 따라 부여되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먼저 위의 7개의 명제와 같이 소수점이 없는 명제를 간단히 (ꡔ논고ꡕ의) “상위명제”라고 부르고, 그 밑에 놓이는 소수점이 있는 명제를 간단히 “하위명제”라고 부르기로 하자. ꡔ논고ꡕ를 통틀어 볼 때, 어떤 경우에는 하위 명제가 상위 명제만큼 논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눈에 띈다(예컨대, 4.1212). 어쨌든, 우리는 위의 인용으로부터 ꡔ논고ꡕ의 체계가 어떤 형식 체계나 수학 체계와 같이 공리들로부터 정리들을 도출해내는 그러한 체계가 아니라는 점과, 특히 위의 상위 명제들이 “공리”들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2. ꡔ논고ꡕ의 구성에 따른 내용
서론에서 우리는 ꡔ논고ꡕ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핵심적 물음 4가지를 살펴보았다. 이제 이 각각의 물음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대답에 맞추어 ꡔ논고ꡕ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아마도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기위해서 먼저 위의 4가지 물음을 정리해 보자.
(Ⅰ) 말할 수 있는 것(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Ⅱ) 어떻게 명제는 뜻을 지닐 수 있는가?
(Ⅲ) 왜 어떤 명제는 뜻 있는 명제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뜻을 지니지 않는가?
(Ⅳ) 왜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가 아닌 명제들은 뜻을 지니지 않는가? 또한 이 명제들의 성격이 상이할 수 있다면 어떻게 상이한가?
물음 (Ⅰ)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물음 (Ⅱ)에 대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물음 (Ⅱ)에 대해 제시한 대답은 (ⅰ) “명제가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와 (ⅱ) “명제가 그림일 수 있기 때문에”이다. 대답 (ⅰ)과 (ⅱ) 가 체계적으로 제시되기 위해서는, “존재론”에 관한 해명이 먼저 주어져야 한다. ꡔ논고ꡕ의 1번대 명제는 “존재론”에 대한 매우 간략하고 개괄적인 해명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존재론에 대한 서술은 2번대 명제에서, 비트겐슈타인 ꡔ논리철학논고ꡕ 152.063번 명제까지 더 상세하게 개진되고 있다.
1-1.21
1번 명제는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의 총체이다”이다. 이에 따라 여기에서는 ꡔ논고ꡕ의 존재론에 대해서 매우 간략하게 서술된다. 특히, “세계”와 “사실”들에 대해서 논의된다.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의 총체이며(1), 세계
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1.1). 세계는 사실들로 나뉜다(1.2).
2-2.063
2번 명제는 “일어나는 일,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이다. 이에 따라 여기에서는 ꡔ논고ꡕ의 존재론이 좀더 상세하게 서술되고, 그림 이론에 대해서 그 개요가 처음으로 제시된다. 존재론 부분에서는 한편으로는 “대상”이 다루어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태”와 “사실”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림이론에서는 어떻게 해서 명제가 그림일 수 있느냐 하는 점과 명제의 뜻과 진리치에 대해서 논의되고 있다.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ⅰ) 2.01-2.0141: 여기에서는 먼저 “대상”과 “사태”의 관계(더 넓게는 “대상”과 “사실”이나 “상황”과의 관계)가 논의되고 있다. 일어나는 일,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2). 사태는 대상들(존재물들, 사물들)의 결합이다(2.01). 사물에 본질적인 것은, 한 사태의 구성 성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2.011). 모든 사물 각각은 말하자면 가능한 사태들의 공간 속에 있다. 이 공간을 나는 텅 비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사물을 그 공간 없이 생각할 수는 없다(2.013). 대상들은 모든 상황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
다(2.014).
(ⅱ) 2.02-2.0272: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ꡔ논고ꡕ의 존재론이 서술되고 있다. 대상은 단순하다(2.02). 대상들은 세계의 실체를 형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들은 합성적일 수 없다(2.021). 덧붙여 말하자면: 대상들은 색깔이 없다(2.0232). 실체는 무슨 일들이 일어나느냐와 독립해서 존립하는 것이다(2.024). 그것은 형식이며 내용이다(2.025). 공간과 시간과 색깔(채색성)은 대상들의 형식들이다(2.0251). 오직 대상들이 존재할 때에만 세계의 확고한 형식이 존재할 수 있다(2.026). 확고한 것과 존립하는 것과 대상은 하나이다(2.027). 대상은 확고한 것, 존립하는 것이다; 배열은 변하는 것, 비영속적인 것이다(2.0271). 대상들의 배열이 사태를 형성한다(2.0272). 그러면서 2.0211-2.0212에서 세계와 왜 어떤 실체를 지녀야만 하는지 그 근거가 제시되고 있다.
(ⅲ) 2.03-2.063: ꡔ논고ꡕ의 존재론이 간략하게 마무리된다.
다음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의미에서 명제가 사실에 대한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다시 말해서 “그림 이론”을 개괄적으로 제시하고있다. 이를 통해서 물음 (Ⅱ)에 대한 대답 (ⅱ)가 모색된다.
2.1-2.225
2.1번 명제는 “우리는 사실들의 그림들을 만들어 낸다”이다. 이에 따라 여기에서는 ꡔ논고ꡕ의 그림 이론이 제시된다.
(ⅰ) 2.1-2.19: ꡔ논고ꡕ의 그림 이론이 논의된다. 여기에서는 그림의 역할, 그림의 성격, 현실의 그림이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논의된다.
(ⅱ) 2.2-2.225: 여기에서는 ꡔ논고ꡕ의 그림 이론이 논의되는데, 특히 명제의 뜻, 참-거짓에 관해서 논의된다.
3번대 명제들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물음 (Ⅱ)의 대답 (ⅰ)을 제시한다.명제가 하나의 사실인 까닭은 명제는 일종의 기호, 즉 명제 기호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기호”와 “상징(표현)”을 구분한다. 명제는 한편으로는 물리적이거나 현상론적 존재자인 명제 기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징으로서의 명제”이다. 뿐만 아니라 3번대 명제들에서는 “완전한 분석”의 개념에 대한 논의가 제시된다.
3-3.5
3번 명제는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다”이다. 여기에서는 먼저 “논리적으로 사고하기”에 대해 서술되고 나서(3.001-3.05), 명제 기호
(3.1- 3.144), 단순 기호, 이름, 원초 기호, 복합체, 완전한 분석
(3.2-3.263), 기호와 상징, 명제 변항, 오캄의 격률, 러셀의 유형 이론, 정
의(3.3-3.3442)가 다루어지고, 명제와 논리적 공간의 관계, 그리고 사고에 대한 간략한 정리가 제시된다(3.4-3.5).
4번대 명제들은 1-3번대 명제들을 심층적으로 재조명하고 이를 더욱 확장함과 동시에, 물음 (Ⅲ)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언어에 대한 정의가 제시된 후에 “언어 비판”으로서의 철학 개념이 최초로 제기된다.
뿐만 아니라 “논리적 형식”에 대해서 보다 더 자세하게 논의하면서, 그림 이론에 대해 보다 상세한 논의가 제시되고, “말할 수 없는 것(보여질 수 있는 것)”의 개념이 처음으로 선보인다. 이러한 작업은 “내적 속성”과 “형식적 속성”, 그리고 “형식적 개념”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면서 “단순 상징”, “요소 명제”, “등식”에 대한 표기법에서 일단락 된다. 그 다음에 진리표가 도입되고, 이와 함께 “진리 함수 이론”이 제시되고 “일반적인 명제 형식”이 제시됨으로써, 물음 (Ⅲ)에 대한 대답이 모색된다.
4-4.53
4번 명제는 “사고는 뜻을 지닌 명제이다”이다. 여기에서는 그림 이론이심층적으로 재조명되고 확장된다. 그 다음에 진리 함수 이론이 제시된다.
(ⅰ) 4-4.0641: 먼저 간략하게 일상언어와 철학에 대한 소견이 제시된다(4.001-4.0031). 그 다음에 명제는 현실의 그림이며, 이는 현실과 명제가 동일한 논리적 구조나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비유적으로 설명된다(4.01-4.016). 그 다음에 명제가 현실의 그림인 두 번째 이유가제시된다. 이와 함께 명제의 뜻에 대해서 논의되며, 한 명제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논의된다(4.02-4.027). 그 다음에는 기호들, 특히 이름은 대상들을 대표하지만, 논리적 상항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장된다(4.03-4.032). 또한 명제가 현실의 그림이기 위해서는 양자가 동일한논리적 다수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주장된다(4.04-4.0412). 그 다음에 명제의 참-거짓에 대해서 논의된다(4.05-4.0641).
(ⅱ) 4.1-4.128: 명제는 사태의 존립과 비존립을 묘사한다(4.1). 참된 명제들의 총체가 전체 자연 과학(또는 자연 과학들의 총체)이다(4.11).
(ⅲ) 4.111-4.116: 철학과 자연과학의 관계, 철학의 목적, 인식론에 대해서 논의된다.
(ⅳ) 4.12-4.128: 논리적 형식은 보여질 수 있을 뿐 말할 수 없다는 것
이 주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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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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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2

논리철학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세기의 기인, 비트겐슈타인

'정신과학클럽 모임에서 발표가 끝나고 토론이 시작되었을 때 누군가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

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굽니까?" 그는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놀랐다. 《논리철학논고》(앞으로는 《논고》)의 그 유명한 저자가 ... 생각

보다 훨씬 젊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은 마르고 갈색이었으며, 독수리형의 뛰어나게 아름다운 옆모습과 숱이 많은 갈색 고수머리를 하고 있었다. ... 서두가 잘 안 풀리자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으나 무언가 골똘이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시선을 한

곳에 모으고, 마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이 갑작스런 손짓을 하기도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진지하고 기대에 찬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이러한 진풍경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았으며, 나중엔 거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끔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제자 말콤이 그를 처음 만난 광경을 기술한 이 말은 생애와 철학 둘 다에서 보여준 그의 비범함이 어디서 비롯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6일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 거대 강철 회사의 주인의 5남 3녀의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있어 정교한 기계를 잘 만들었는데 그가 만든 모형 비행기나 재봉틀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7살 때 그는 볼츠만 밑에서 물리학 공부를 하려고 그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가 자살하는 바람에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헤르츠

에게서 물리학을 배웠다. 그 다음에 그는 영국의 맨체스트 공과대학에서 항공역학에 관한 연구를 했는데, 그때 그가 만든

정교한 제트 엔진 모형은 현재 제트 헬리콥터의 선구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관심은 기계엔진에서 유체역학으로 그리고 순수

수학으로, 점차 근본적인 문제로 옮아갔다.


제가 백치라면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아니면 철학자가 되겠습니다.

1910년경 수학의 기초에 관한 책으로 러셀의 《수학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찬양

하고 있는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독일의 프레게를 먼저 찾아가 공부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러셀을 찾아가 그에게 배우라고 권했다. 러셀은 프레게 철학의 기본 개념인 집합 개념에 치명적인 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 프레게를 엄청난 충격에 빠트린 사람이었다. 러셀이 동료 교수인 무어에게 이 새로 들어온 학생이 천재냐 바보냐고 물었다. 그러자 무어는 천재라고 답했다.

그 이유를 무어는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내 강의를 들으면서 의문에 찬 표정을 나타내는 친구는 그 뿐이니까."

1912년 첫 학기가 끝나갈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을 찾아가 물었다. "제가 완전히 백치입니까 아닙니까? 만일 백치라면 저는

비행기 조종사나 되어야 되겠습니다. 백치가 아니면 철학자가 되겠습니다." 이에 러셀은 철학적 문제에 대해 논문을 하나 써

오라고 했다. 그리고 러셀은 그 논문의 첫 구절을 읽고 큰소리고 말했다고 한다. "안돼. 자네는 절대로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서는 안되네."

케임브리지에서 다섯 학기를 수강한 후 그는 노르웨이의 시골에 자기 손으로 오막살이를 하나 짓고 혼자 은거하는 동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탈장으로 병역이 면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병장교가 되어 군에 참여했다가 이탈리아 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가 포로가 되었을 때 그의 배낭 속에는 《논고》의 원고가 들어있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논고》의 핵심 사상,

즉 '한 문장은 하나의 그림이다'란 생각이 이 때 군에 있으면서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신문에서 어디선가 어떤 자동차 사건이

발생한 것을 도형인가 지도인가로 묘사해 놓은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이때 그에게 이 지도는 문장이고, 그 안에 문장의 본질,

즉 실재를 그려 보이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전쟁 포로에서 풀려 돌아온 그에게는 전쟁 직전 돌아가신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유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릴케

등에게 익명으로 돈을 희사하는 등, 가진 재산을 다 처분하고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지극히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을 했다. 그의 옷차림은 극히 소박하여 넥타이나 모자를 쓴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그의 가구란 고작해야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리고 몇 개의 딱딱한 나무의자가 전부였다.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고...

그에게 《논고》의 완성은 모든 철학적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논고》는 적어도 그에게는 2,500년에 걸친 서양

철학의 미로로부터 탈출이었다. 이제 더 골치를 썩혀야 할 철학적 문제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그저 단순하게 사는 일 뿐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선생의 길을 택했다. 교사 양성교육을 받고 1920년 그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

지만 그 삶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교육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영받는 교사가 되지 못했다. 사람을 다루는

일은 그에게 맞지 않았던 것 같다. 6년만에 교사직을 포기하고 다음으로 택한 일은 손발을 움직여 삶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도원의 정원사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건축설계사가 되어 비엔나에 있는 그의 누나 집을 2년여에 걸쳐 설계했다. 비엔나에 있는 동안 그는 비엔나 대학의

슐리크를 만나게 된다. 슐리크는 20세기초 영미철학을 풍미한 논리실증주의를 제창한 비엔나 서클의 영도자였는데, 1921년

출판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읽고 감동되어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들의 접촉으로 《논고》의 사상은 논리실증주의의

뼈대를 형성하게 된다.


계속된 철학적 사유의 투쟁

1929년 초 그는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온다. 풍문에 의하면 그가 다시 철학을 시작하도록 자극을 받게 된 것은 1928년 3월에

직관주의 수학자인 브라우어의 강연을 듣고 난 후라고 한다. 이후 그는 자기의 《논고》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후기

철학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출판을 극히 꺼려 그 사색의 결과는 다만 그가 써 놓은 노트로만 남아있다. 이 노트는 나중에

그의 사후 정리되어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철학적 고찰》, 《철학적 문법》, 《청색본》, 《갈색본》,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등의 책이 그것이다.

1936년 그는 노르웨이의 오막살이로 가 약 1년간 그의 후기 철학의 대표작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의 집필에 몰두했다. 이 책은 그가 심각하게 출판을 고려했던 또 다른 유일한 책인데, 1949년에야 집필이 완료되어 결국 이 책도 사후에나 출판되었다. 1939년 그는 마침내 무어 후임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된다. 그의 강의는 독특했다. 강의는 그의 방이나 친구 방에서 했고, 청중은 엄격히 제한되어, 몇 년 동안 계속 듣는 사람에 한 했고, 시간은 엄수해야 했다. 강의는

노트도 원고도 없이 온 정신을 집중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다시 새로운 질문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진행

되었다. 그렇지만 대학사회 역시 그에겐 맞지가 않았다. 넥타이를 매고 높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식당 분위기를 못 참아

자기 방에서만 식사를 했다. 마침내 1947년 사직서를 내고 아일랜드의 시골 농촌과 해안 가에서 은거하며 철학적 사유의 투쟁을 계속했다. 1951년 그는 2년여의 암과의 투쟁 끝에 삶을 마감했다. 그가 의식을 잃기 전 의사가 2-3일 밖에 더 못 살겠다고 하자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의 말을 남겼다. "좋습니다. 나는 멋진 한 세상을 살고 간다고 내 친구들에게 전해주십시오."


참고 : 비트겐슈타인 연보

▣《논리철학논고》의 핵심적 의미

《논고》는 약 2만여 자로 이루어진 짧은 책이다. 이 책 서두에 비트겐슈타인은 많은 철학적 문제들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면서 스스로 이 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혀 놓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 의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생각에, 아니 생각에가 아니라 생각들의 표현에 한계를 긋고자

한다. 왜냐하면 생각에 한계를 긋기 위해서 우리는 이 한계의 양쪽을 다 생각할 수 있어야 (다시 말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

조차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 되는데 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한계는 언어 속에만 그어질 수

있으며 그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보다시피 《논고》의 목적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 줄 어떤 한계선을 그어주겠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바로 언어비판이다. 그 선을 그어줌으로써 우리는 그 선 안에 있는 언어적 표현들은 의미 있는 것으로, 그 선 너머에 있는 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분명히 구별할 수 있다. 이렇게 분명히 구분이 된 후에는 의미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의미 없는 것, 즉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선을 긋는 기준이 무엇이냐?'이다. 그 대답이 바로 그의 언어의 '그림이론'(picture theory)이다.

언어는 실재의 논리적 그림이다. 사진이 실재의 모습을 색깔의 조합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언어도 실재의 모습을 논리적으로

그려낸다는 것, 이것이 그의 그림이론의 핵심이다. 《논고》는 바로 그러한 그림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해명이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언어는 바로 이렇게 실재의 모습을 그려 보여주는 언어, 즉 자연과학의 언어이다. 그렇지 않은 언어, 예컨대 신, 옳고 그름, 가치 등을 다루는 언어는 경계 너머의 말들 즉 의미 없는 말들이다. 그것들은 '신비스러운 것들'이다. 이 신비

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들이다.



▣ 본문 내용 요약

《논고》의 내용은 화려한 문구나 친절한 설명이 없이 마치 수학적 증명처럼 엄격하게 설정된 단계들 속에서 표현되어 있다.

이 책은 장, 절로 나뉘어져 있지도 않고 단지 일련 번호가 붙여진 문단이나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번호는 아래 요약에서

보듯이 1, 1.1, 1.11, 1.12 ...의 형태로 되어있는데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1.1은 1의 부연 설명이고, 1.11, 1.12는 1.1의

부연 설명이다. 따라서 소수점이 붙지 않은 자연수를 번호로 가진 문장이 가장 중요한 문장이다. 그런 문장은 1에서 7번까지

일곱 개가 있다.

《논고》의 철학은 크게 언어의 그림 이론(picture theory of langauge)과 진리함수 이론(truth-function theory) 두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우선 그림 이론은 언어가 언어로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이다. 즉 언어는 그림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의 그림? 바로 세계의 그림이다. 언어는 세계를 그려 보일 때 언어로서 제대로 기능한다. 세계를 그려 보이지 못하는 언어는 의미 없는 언어이다. 그렇지만 '그림'이란 말은 비유적 표현이다. 그림은 여러 가지 색깔의 물감을 사용하여 세계의 모습을 붓으로 형상화해 내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언어는 물감도 붓도 없다. 그렇다면 언어는 무엇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내는가? 그것은 바로 이름과 논리이다. 이 둘이 바로 언어가 사용하는 물감과 붓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이름은 물감처럼 독자적

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름은 항상 문장 속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름을 물감으로 논리의 붓을 사용하여 세계를

그리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언어는 그러므로 세계의 '논리적 그림'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들은 이러한 그림 관계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제대로 살펴서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 그렇게 풀면 얼핏 간단해 보이는 것도 보다 더 단순한 문장

들이 복합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렇게 복합적인 문장들을 구성하는 가장 단순한 문장을 '요소문장'

이라고 한다. 세계를 그리는 문장은 바로 이 요소 문장이다. 그리고 이 요소문장들이 진리함수적으로 연결되어 모든 복합문장

들이 만들어진다. 즉 모든 복합문장은 요소문장들의 진리함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요소문장의 안을 파고드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요소문장으로부터 복합문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피는 일이다.

 

첫째 요소문장의 안을 파고드는 일은 마치 살아있는 몸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몸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죽은 몸을 해부해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살아있게 만드는 기본 요소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마찬가지로 요소문장의 경우에도 문장의 의미를 그대로 살려둔 채 그 의미가 가능하기 위한 기본 단위인 이름을 찾아

내어야 한다. 이름을 찾아내는 일은 곧 이름이 가리키는 세계의 대상을 찾아내는 일이며, 이는 곧 세계의 본 모습을 밝히는

일이다.이것이 바로 자연과학자가 해야 할이다.

 

둘째 복합문장을 분석하는 일은 애매한 우리 일상언어의 구조를 명백히 밝히는 일이다. 그렇게 명백히 밝히다 보면 어떤 복합

문장들은 요소문장들의 진리함수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한 문장들은 언어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문장들, 즉 병든 언어들이다. 철학자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병든 언어를 찾아내어 치료하는 일이다. 이는 언어를 논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행해진다.

그의 글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모든 군더더기를 뺀 채 그 알맹이만을 간결하게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단 한

줄의 문장으로도 우리의 폐부를 관통하는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기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접근을 손쉽게 허용하지

않는 함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 깊이를 맛보려면 그 내용을 반복해 읽고 반추하는 끈기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럼 그의 글을 살펴보자.




1. 세계는 경우인 것들 전부이다

세계는 사물(Ding)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Tatsache)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을 180도 뒤집는 생각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세계는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안을 살펴보더라도 집안은 텔레비젼, 냉장고, 전화기, 책상, 장롱, 의자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생각을 거부하고 예컨대 텔레비젼이 켜져 있다는 사실,

전화기가 울린다는 사실, 책상 위에 책이 있다는 사실, 등이 세계를 이루는 기본 요소임을 천명한다.


1. 세계는 경우인 것들 전부이다.

1.1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이다.



2. 경우인 것, 즉 사실은 원자사실들의 현존이다.

사실(Tatsache)과 원자사실(Sachverhalt), 대상(Gegendstand)간의 관계를 우선 해명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하나의 사실은 분해해 보면 여러 원자사실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예를들면 '배식한은

잘생겼다.' --> '배의 얼굴 모양은 xx한 형태의 타원이다.' '배의 두 눈 간격은 xxcm이다.' '배의 코 넓이는 xxcm이다.' '배의 코 높이는 xxcm이다.')

 

그리고 하나의 원자사실은 대상들이 결합된 것이다. 나의 눈, 코, 귀, 입 등을 대상이라고 해보자. 이들 대상들이 모여

나의 얼굴 모양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똑같은 나의 눈, 코, 귀, 입이라 하더라도 이것들 서로가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 즉 눈과 코 사이, 코와 입 사이 등의 간격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무수히 많은 얼굴 모양이 만들어 질 수 있다.

 

이러한 무수한 가능성이 바로 원자사실들이다. 즉 무수히 많은 얼굴 모양의 원자사실들을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 내 얼굴은 딱 하나이다. 내 얼굴과 꼭 맞아 들어가는 눈, 코, 귀, 입 등의 배열을 말하는 원자사실은 현존하는 원자사실

이고 그렇지 못한 원자사실은 현존하지 않은 원자사실이다.

원자사실이 대상들의 결합이지만, 대상은 또한 원자사실의 구성 요소로서만 대상일 수 있다. 즉 원자사실과 대상은

부분과 전체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코가 우리 몸을 위해서 어떤 기능을 함으로서만 그것이 코의 자격을 가지는 것이지 만약 그것이 우리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다만 두 개의 구멍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몸과 코가 유기적으로 서로 뗄 수 없는 것처럼 사태와 대상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2.0)

이 장에서는 또한 세계에 대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세계와 그림이 공통의 어떤 것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그림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계를 그리는 언어의 형식은 바로 논리적 형식이다.(2.1) 이제 우리는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어떤 형식을 통해 그려진 그림이 현실과 일치하면 참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다.(2.2)




2.     경우인 것, 즉 사실은 원자사실들의 현존이다.

2.01  원자사실은 대상들(사물들)의 결합이다.

2.02  대상은 단순하다.

2.03  원자사실속에서 대상들은 사슬의 고리들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2.1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사실의 그림을 그린다.

2.11  그림은 논리적 공간 속의 상황, 즉 원자사실들의 현존과 비현존을 표상한다.

2.16  사실이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그려지는 것과 공통된 어떤 것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2.21  그림은 현실과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는다. 그림은 바르거나 바르지 않거나, 즉 참되거나 거짓되거나 이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생각이다

앞에서 우리는 사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림에 무엇인지를 말했다. 이사실과 그림을 가지고 이제 우리는 생각(Gedanke)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생각은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다. 사실을 붓과 물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가지고 그리는 그림이다. 가능한 생각들 중에서 사실과 맞아 들어가는 생각을 참이라고 한다.(3.0)

그리고 이 생각이 기호로 표현된 것이 문장(Satz)이다.

생각은 머리 속에 있는 것이고 문장은 종이 위에 쓰거나 입으로 발언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생각은 보이지 않지만 문장은 눈에 보인다.(3.1)

생각을 매개로 세계와 문장이 서로 대응한다. 그렇다면 세계와 문장이 대응하듯이 세계의 구성 요소인 대상은 문장의

구성 요소인 이름과 대응한다.

이름과 대응하는 그 대상을 우리는 이름의 지시체(Bedeutung)라고 한다.(3.2)

세계를 그려 보이는 것이 문장이므로,

이 문장을 구성하는데 쓰이는 기호들의 용법, 기호법 즉 논리적 구문론을 정확하고 엄밀하게 규정하는 것이 언어의

잘못된 사용에서 비롯되는 오해를 줄일 수 있는 지름길이다.(3.3)



이상에서 나타난 그림 이론을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

언 어 세계

문장1 ..... 문장 n 사실1 ..... 사실n

요소문장1 ..... 요소문장n <-- 대응 --> 원자사실1 ..... 원자사실n

이름1 ..... 이름n <---- 대응 ----> 대상1 ..... 대상n

============================================================

그림에서 보듯이 언어와 세계의 직접적인 대응은 '요소문장-원자사실' 그리고 '이름-대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생각이다.

3.1    문장에서 생각은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도록 표현된다.

3.12   우리가 생각을 표현하는데 쓰는 기호를 문장기호라 부른다.

3.14   문장기호는 그것의 요소들, 즉 낱말들이 그 속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하는데서 성립한다.


3.201 이러한 요소들을 나는 '단순기호들'이라고 부른다.

3.202 이 단순기호들은 이름이라 불린다.

3.203 이름은 대상을 지시한다(bedeuten). 대상이 이름의 지시체이다.

3.21  상황 속에서의 대상들의 배열은, 문장기호 속에서의 단순기호들의 배열에 대응한다.

3.26  이름은 어떠한 정의에 의해서도 더 이상 해부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원초기호이다.


3.3  오직 문장만이 의미를 갖는다. 문장의 문맥 속에서만 이름은 지시체를 갖는다.

4.  생각은 의미 있는 문장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은 눈에 보이는 문장을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이 문장의 모임이 언어이다. 그렇다면 생각이

사실의 그림인 것처럼 문장도 사실의 그림이어야 한다. 그런데 문장은 문장 자체의 구문론적 구성 원리 때문에 생각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즉 생각이 문장이라는 옷을 입으면서 생각의 본래 모습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철학이 해야 할 작업이 무엇인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철학은 언어비판이다. 우리의 언어 구성 능력은

잘못된 말들, 즉 낱말들이 지시체를 가지지 못하는 말들, 세계의 그림이 되지 못하는 말들, 참이나 거짓일 수 없는

말들을 만들어 낸다.(4.0) 이제 철학이 할 일과 자연과학이 할 일이 분명하게 구분된다. 철학은 자연과학 옆에 나란히

있지 않다. 철학은 자연과학의 위에 있다. 철학은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철학의 목표는 생각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철학은 주장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문장들'이 아니라, 문장들이 명료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은 이를테면 혼탁하고 흐릿한 생각을 명료하게 분명하게 경계짓는 것이다. 그러한 철학적 작업의 대상으로 논리적 형식이 있다. 논리적 형식은 문장을 통해 보여질(zeigen) 뿐, 문장을 통해 말해질 수 없다.(4.1) 논리적 형식은 다음과

같다. 가장 단순한 문장은 요소문장이다. 원자사실의 현존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 요소문장이다. 따라서 참인 요소

문장들이 모두 주어지면 세계는 완전히 기술된다. 그런데 이 요소문장은 이름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이름들의 연쇄이다. 또 반면에 모든 문장들은 요소문장들로 분해 가능하다. 즉 모든 문장들의 참, 거짓은 요소문장들의 참, 거짓에 의해

결정된다. 특별히 요소문장의 참, 거짓에 상관없이 항상 참이거나 항상 거짓인 문장들이 있는데 이런 문장들은

동어반복, 모순이라고 한다.(4.2-4.5)



4. 생각은 의미 있는 문장이다.

4.001 문장들의 총체가 언어이다.

4.002 인간은 각 낱말들이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지시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도 모든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 이는 사람들이 목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르면서도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언어는 생각을 변장시킨다. 이는 옷의 겉모양으로부터 옷 아래 있는 생각의 형태를 추론하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그러

하다. 왜냐하면 옷의 겉모양은 신체의 형태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4.003 철학적 문제들에 관해 쓰여졌던 대부분의 문장들이나 물음들은 거짓된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unsinnig)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물음들에 대해서는 결코 대답할 수 없고, 단지 그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확실히 해줄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의 문장들이나 물음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우리의 언어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생겨난다.(예컨대 선(善)은 미(美)와 같은가, 같으면 얼마나 같은가? 와 같은 물음들)
그리고 가장 깊은 문제들이 실제로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4.004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이다.

4.024 한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문장이 참일 때 원자시실이 어떠한지를 안다는 말이다.

4.03  문장은 그것이 하나의 그림인 한에서만 무엇인가를 말한다.

4.06  문장은 현실의 그림임으로 해서만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4.11 참된 문장들의 총체가 전 자연과학(또는 자연과학들의 총체)이다.

4.111 철학은 자연과학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철학'이라는 낱말은 자연과학보다 위나 아래에 있는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이지 옆에 있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4.112 철학의 목표는 생각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철학은 교설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적 저작은 본질적으로 해명들로

이루어진다.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문장들'이 아니라, 문장들이 명료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은 이를테면 혼탁하고

흐릿한 생각을 명료하게 분명하게 경계짓는 것이다.

4.113 철학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자연과학의 영역을 한계 짓는다.

4.1212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

4.2 문장의 의미는 사태의 현존과 비현존 가능성과 그 문장의 일치와 불일치이다.

4.21 가장 단순한 문장인 요소문장은 한 사태의 현존을 주장한다.

4.22 요소문장은 이름들로 이루어진다. 요소문장은 이름들의 한 연계, 한 연쇄이다.

4.25 요소 문장이 참이면 사태는 현존한다. 거짓이면 사태는 현존하지 않는다.

5. 문장은 요소문장들의 진리함수이다

모든 문장들은 요소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자기 자신이 요소문장이거나 또는 여러 요소문장들이 진리함수적으로

연결되어서 만들어진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문장은 의미 없는 문장들이다. 의미 있는 문장과 의미 없는 문장을

구별해 내기 위해 여기서 요소문장과 이것으로 이루어진 여타의 복합문장 간의 진리함수적 관계에 대한 논리학의

전문적이고 세부적인 논의가 상세히 이루어진다. 이 부분의 이해를 위해서는 논리학에 대한 사전 이해가 있어야 하니,

부담 없이 훑고 넘어가시길...

간단하게 진리함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과는 크고 맛있다'(A)란 문장을 보자. 이 문장은 '이 사과는 크다'(B)와 '이 사과는 맛있다'(C)란 두 문장으로 분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과는 크고 맛있다'는 '이 사과는 크다. 그리고 이 사과는 맛있다.'와 같은 말이다. 다시 말해 'A'는 'B 그리고 C'와 같다. 그런데 A가 참이기 위해서는 B도 참이고 C도 참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B 그리고 C'에서의 '그리고'를 ''그리고' 양쪽의 문장이 모두 참이면 전체를 참으로 만드는 함수'로 볼 수 있다. 이를 함수 형태로 표현하면, '그리고(B,C)=A'가 된다. 이 식에서 B와 C 자리에 참을 집어넣으면 A도 참이

되고, B와 C 어느 쪽이든 거짓이 하나라도 있으면 A는 거짓이 된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A를 'B와 C가 '그리고'라는 진리

함수에 의해 연결된 것'이라고 부른다. (5.0-5.5)

이제 세계의 한계가 어디인지가 분명해진다. 논리는 세계에 대한 경험에 앞서 있는 것이므로 논리의 한계가 곧 생각의

한계이며, 생각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이다. 그런데 생각하는 나 자신은 나의 생각 너머에 있다. 이는 마치 각자의

눈으로 자기 자신의 눈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의 한계가 된다.(5.6)






5. 문장은 요소문장들의 진리함수이다.

5.3 모든 문장은 요소문장들에 대한 진리조작의 결과이다. 진리조작은 요소문장들로부터 진리함수가 생겨나는 방식이다.

5.4711 문장의 본질을 말하는 것은, 곧 모든 기술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세계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5.6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뜻한다.

5.63 나는 나의 세계이다.(소우주)

5.631 생각하고 표상하는 주체라는 것은 없다.

5.632 주체는 세계 속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 한계이다.



6. 진리함수의 일반형식은 [p-, -, N( -)]이다

이제 세계의 그림인 언어의 엄밀한 논리적인 구조가 충분히 밝혀졌으므로 무엇이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무엇이 말할 수

없는 것인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논리학의 언어, 수학의 언어는 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윤리와 가치의

문제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책에서 쓰여진 모든 글들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은 올라가고 난 다음에는 던져버려야 할 사다리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학의 문장들뿐이다. 지시하는 바가 없는 공허한 말들에 대해

우리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6. 진리함수의 일반형식은 [p-, Վ-, N(Վ-)]이다. 이것은 문장의 일반형식이다.

6.1 논리학의 문장들은 동어반복들이다.

6.11 그러므로 논리학의 문장들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그것들은 분석문장들이다).

6.12 논리학의 문장들이 동어반복이라는 것, 이것은 언어의, 세계의 형식적-논리적-속성들을 보여준다.

6.13 논리학은 교설이 아니라 세계가 반영된 상이다. 논리학은 초월적이다.

6.2 수학은 하나의 논리적 방법이다. 수학의 문장들은 등식이며, 따라서 가짜 문장이다.

6.32 인과법칙은 법칙이 아니라 법칙의 형식이다.

6.34 근거율, 자연의 연속성, 자연에 있어 최소노력의 법칙 등 이 모든 문장들은 과학의 문장들이 가질 수 있는 형식에

대한 선천적인 통찰이다.

6.35 근거율과 같은 법칙들은 그물을 다루지, 그물이 기술하는 것을 다루지 않는다.

6.41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바깥에 놓여 있어야 한다.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고,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세계 속에 가치는 없다.

6.42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의 문장도 있을 수 없다.

6.44 신비한 것은 세계가 어떠한가가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6.5 대답이 언표될 수 없으면, 그 물음 역시 언표될 수 없다. 수수께끼는 없다. 물음은 그것이 제기될 수 있으면, 대답

될 수도 있어야 한다.

6.53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본래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말할 수 있는 것, 즉 자연과학의 문장들 - 즉 철학과는 무관한

것 -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그리고 나서는 어떤 다른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그가 그의 문장들 속의 어떤 기호들에 아무런 지시체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해 주기. 이 방법이 그 사람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하겠지만 - 그는 우리가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엄밀

하게 올바른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6.54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는 던져버려야 한다. 나를 이해한 사람은 이 문장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보게 된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이 한 줄의 문장이 7번의 유일한 문장이다. 그리고 이 문장이 비트겐슈타인의 책 《논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

이다. 이 말을 끝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침묵 속으로 침잠한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논리철학논고》의 의의 ================================================

사람은 말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인간의 말은 동물들의 말과도 다르다. 동물들은 단지 위험한 적이 출몰했음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거나, 먹이를 찾고 획득하는 등 본능적,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신호를 교환한다.

그에 반해 인간은 생존에 긴급하지 않은 용도로도 언어를 사용한다. 이와 같이 생존과 비교적 관련이 없는 다양한 의사

소통의 방식(말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을 구사한다는 것, 다시 말해 문화적 활동을 한다는 것이 어쩌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주는 척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해주는 긍정적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굴레가 되기도 하는 부정적 측면도 가지고 있다. 단 한마디의 말이 한 사람의 일생을 뒤바꾸어 놓을 수도 있고, 한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 학교에서 도둑의 누명을 썼다고 한 여학생이 자살하기도 했다. 도둑이란 한마디에, 또 순결을 읽었다는 이유로, 또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동물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경우는 없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준다는 그 문화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의 엄청난 굴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그처럼 큰 영향력을 지닌 그 문화가 만약 생산적인 쪽으로 쓰이지 못하고 오히려 소비적, 퇴폐적 허영과 과시, 기만, 그리고 스스로를 묶는 굴레로 쓰인다면 어떻게 될까?

"밥 먹자", "자자" "애는?"으로만 살수도 없지만 삶의 진실에 정직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우회적이고, 애매한 자칭 귀족적인 품격이 구역질나기만 한다. 갑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유럽 귀족들의 그와

같은 문화 나락 속에서 성장하고 또 그것에 염증을 느낀 사람이었다. 그의 철학은 《논고》의 전기와 《철학적 탐구》

의 후기 사이에 커다란 사고의 전환이 있었지만, 철학의 역할에 대해서는 끝까지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언어의 질병"을 치료하는 치료사가 바로 철학자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킬 수 있도록,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나누어주자. 우리가 지금

일상적으로 쓰는 말은 너무도 애매한 구석이 많아서 악용될 소지가 너무도 많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 그러니

우리의 언어를 개혁하자. 사악하거나 허황된 이들이 오용할 여지가 없도록 오해나 애매한 구석이 없는 분명한 언어를

만들어내자. 이걸 만들어낼 수 있다면 철학자로서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 더 이상 철학은 필요 없다.


이러한 야심에서 만들어진 《논고》는 전통 철학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새로운 철학의 방향을 열어주는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의 시발점이 된다.

당시의 철학을 지배하던 사조는 헤겔류의 관념론이었다. 이들의 형이상학적 주장은 세계 전체의 일반적 특성을 기술

하는 도도하고 과장된 언어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또한 의미의 막연함과 애매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참, 거짓이 분명치 않았으며 그것을 확인할 방법도 주어지지 않았다. 우선 급한 것은 그것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이들의 이러한 주장들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것들은 철학적 분석을 거치면 결국 거품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논고》는 이러한 비판적 작업과 더불어 새로운 철학 사조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전통 철학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근대 이후 발전해 온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논고》는 철학이 자연과학의 옆이

아니라 자연과학 위에 있는 학문이며, 자연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것의 논리적 구조를 분석하는 언어 비판의 메타적 작업이라고 함으로써 새로이 철학의 위상을 정립한다. 이러한 정신을 비엔나 서클이 물려받으면서 《논고》는 20세기

초 영미 철학계를 풍미한 논리실증주의의 시조로 추앙 받게 되었던 것이다.


▣ 참고도서 및 웹사이트 ==================================================


비트겐슈타인, 박영식,최세만 옮김, 《논리철학논고》, 정음사,
이영철 옮김, 《논리철학논고》, 천지사, 1991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철학적 탐구》, 서광사, 1994
비트겐슈타인, 박정일 옮김,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서광사, 1997
K.T.Fann, 황경식, 이운형 옮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삼일당, 1983
서광선, 정대현, 《비트겐슈타인》, 이화여대출판부, 1980
레이 몽크, 남기창(역),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 - 천재의 의무, 문화과학, 2001
쿠르트 부흐테를 외, 《비트겐슈타인》, 한길사, 1999
데이비드 피어스, 《비트겐슈타인》 , 시공사, 2000

비트겐슈타인 http://myhome.netsgo.com/nalm/
법과 언어 http://my.netian.com/~shannie/law01/law0107.htm
Welcome to way2u http://myhome.thrunet.com/~way2u/lud.htm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hypertext edition,
http://www.kfs.org/~jonathan/witt/tlph.html
Wittgenstein the Philosopher
http://philo-sophia.uhome.net/wittgenstein.htm
Ludwig Wittgenstein http://www.knuten.liu.se/~bjoch509/philosophers/wit.html
Ludwig Wittgenstein http://www.ags.uci.edu/~bcarver/ludwig.html

(김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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