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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끄 라캉( Jacques Lacan )

doll eye 2017. 2. 4. 22:37



자끄 라캉 (Jacques Lacan)_1901-1981

철학자, 전 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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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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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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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정신의학자. 구조언어학을 정신분석에 적용하였다. 68혁명 이후 지식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와 언어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그러한 해석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 일종의 또 다른 정신분석학으로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1966년에 그의 에세이와 강의 내용이 담긴 논문집 『에크리』(Ecrits)가 출간되면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캉 [Jacques Lacan]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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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사르트르의 Kid라고 불린다. (구조주의자체가 처음 시작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 발생된 의미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존주의 철학인 사르트르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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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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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와P가 있다고 보자. 이 각각은 처음부터 고유의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P와 다른 B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인 의미도 처음부터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 즉 구조 속에서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도둑 맞은 편지(아래 내용 있음) 에서도, 편지의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 관계에서 편지의 의미가 달라진다. 예전에는 글에 대한 작가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그것이 아니다.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누가 언제 그 텍스트를 읽었느냐가 중요하다.

   

   

1. 해석학에서 벗어남

서양의 전통적인 인문학은 어떤 것을 보고 그거에 대한 신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즉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라깡은 거기서 벗어난다. (신학적인 해석학x)

   

2. 기표와 기의

1) 기표 : 시니피앙. 의미를 나타내다.

2) 기의 : 시니피에. 의미하는 바.

ex) 모짜르트의 음악자체는 기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기의.

스마트콘 네글자는 기표, 실제 스마트폰은 기의

빨간색 신호등은 기표, 빨간색 신호등을 켜면 멈춘다는 기의

   

-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언어'가 이루어진다. 두 가지의 결합이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어 낸 것이 언어이다. 필연적으로 의미가 부여될 이유는 없으며, 각 사회마다 관습에 의해서 합의하는 것이다. 즉 '본질적인 측면'이 무너진다.

- 소쉬르는 기표보다 '기의'를 더 중요시한다. 그러나 라깡은 기의가 아니라 '기표'가 중요하다. 전통적인 서양철학은 항상 기의를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즉, 피카소가 그린 그림(기표)를 보고 그 의미(기의)를 찾아내는 것이 과거에는 중요과제였다. 그러나 라깡은 기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기표가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다르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기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ex) 사람마다 책을 보면 의미가 다르고, 심지어 '나'라는 사람도 언제 그 책을 보냐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포착한다.

   

3. 바둑과 비교해보기

- 장기와 체스는 각각의 말이 기의(시니피에)가 정해져 있어서 나타낼 수 있는 경우의 수가 한정적이다. 반면 바둑알은 기표만 가질 뿐 '기의'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경우의 수가 무한대이다. 기표만 가지고 있는 '바둑알'은 바둑판이라는 '구조'아래에서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즉, 의미가 없는 기표가 구조(바둑판)으로 들어감으로 의미가 생긴다. 바둑돌은 언제,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지만, 동시에 주변 바둑알이 어떻게 놓여있느냐에 따라서도 의미가 달라진다. 따라서 도둑맞는 편지에서 편지는 기표이지만 그 주변 사람들은 또 다른 기표로서 작동한다. 편지는 어떤 의미도 없는 기표일 뿐이고, 누구의 손에 있느냐에 따라서 상황정체와 편지(기표)의 의미(기의)가 달라지는 것이다.

   

4. 프로이드와 비교

- 프로이드는 억압된 욕망이 있고, 그것의 실체를 찾고자 했다. 즉 프로이드는 기표에 담긴 기의를 고민한 것이다. 그러나 라깡은 욕망이라는 개념자체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결핍이라고 보았다. 과거에는 욕망(desir)라고 하면 실체, 즉 기의(시니피에)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라깡은 '요구-필요=욕망'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면, 아기가 운다. 그래서 엄마가 젖을 준다. (필요충족) 아기가 우는 것은 배고픔이라는 필요가 있었지만 아기가 우는 것과 배고픔은 등가가 아니다. 즉 요구-필요를 한다고 해서 '0'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렇듯 항상 결핍을 가지고, 그것이 '욕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프로이드가 했듯이 '인간은 항상 성적욕망이 있다' 처럼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깡의 이 결핍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은 무엇을 가져도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신학적인 관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라깡이 이 원초적인 트라우마를 설명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는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완벽한 상태로 존재하다가 태어나면서 엄마와 단절되는 순간 원초적인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고 설명한다. (본질적인 단절의 트라우마) 그래서 그 트라우마 이후에는 무엇을 가져도 결핍이 있다는 것이다.

   

5. 롤랑 바르트

- 롤랑 바르트는 문학비평가였다. 그는 '저자를 죽이는' 작업을 하였다. 저자가 텍스트를 내어 놓는 것은 '기표'를 생산하는 것이다. 기표가 세상에 던져지면 '기의'를 생산하는 것은 독자이다. 그는 진정한 문학 비평은 저자를 죽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저자는 auteur가 아니라 scripteur가 된다. 저자가 대단한 영감을 받아서 작품을 창작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필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e를 말한다. 모든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텍스트들을 다시 조합해서 다시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모든 작품은 텍스트들끼리 영향을 주고 받아서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논의에 따르면 저작권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작품(oeuvre)가 아니라 texte이다.

이러한 롤랑 바르트의 관점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일단 해석이 자유롭고 무한해진다는 점, 그리고 민주적이라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중심을 해체하고 작가를 죽이는 것은 자칫하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사실 롤랑 바르트도 결국엔 auteur가 되길 원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여전히 저작권이 있다)

   

6. 데카르트, 플라톤 사상과의 반대. 그러나 신학적인 도식의 존재.

작가가 작품을 창작한다. 독자들에게 준다. 독자들이 작가의 죽음을 선포한다. 작품을 독자들의 것으로 만든다. (엉망이 된다)

= 신이 세상을 창조한다. 인간에게 준다. 인간이 신의 죽음을 선포한다. 세상을 인간의 것으로 선포한다. (엉망이 된다) !!

   

7. 구조주의, 그 이후

절대성이 사라지는 세상,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편해 보이지만 정말 그러한가? 뒤샹의 작품 중에 유명한 변기통을 가져다 놓은 작품이 있다. 그는 어느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작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뒤샹'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따르면 그것은 저작권이 없어야 하고, 저자는 작품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하는데, 결국 작가가 다시 살아난다.

분명, 해체는 필요하다. 과도한 권위는 깨져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해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해체할 영역과 해체하지 않을 영역을 구분할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e.g. 교수님은 건강한 해체의 예시로 무한도전을 말했다. 유재석이라는 인물은 개인이 무한도전의 의미를 다 만들지 않는다. 각각의 멤버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하고, 각각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도록 돕는다. 프로그램에서 '유재석만'드러난 적이 있었던가? 거의 없다. 하지만 유재석이 그 프로그램에서 빠지면 어떨 것 같은가? 바로 그거다. 잔잔한 중심을 유지하면서 각각의 의미도 소중히 여기는 것.

   

+) 라깡과 페미니즘 : 라깡이 아버지의 권위를 해체했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기여했다는 말이 있다. (아버지라는 전통적으로 강한 권위를 해체)

   

+2) 성경해석의 변화 : 과거(종교개혁 전)에는 성경에 대해서 강론할 때 교황청에서 내려오는 강론을 그대로 읽어야 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원작(canon)의 근원적인 의미를 해체하지 않는 한에서 다양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시니피에를 강요하지 않는다.

   

+3) 서양 사회는 오랜 시간 동안 데카르트와 플라톤의 사상에 눌려있었다. 그래서 과격하게 나온 경향이 없잖아 있다.

   

   

정리.

On pourrait résumer le structuralisme en disant que nous ne parlons pas, mais que nous sommes parlés. Nous sommes parlés par nos désirs et notre corps. Nous sommes parlés par les jeux de relations sociales dans lesquelles nous somees inscrits. Nous somme parlés par les savoirs et les représentations exprimant les pratiques dans l'<air du temps>

(해석) 우리는 구조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몸에 의해서 말해진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 속에 가입되어 있는 사회적 관계들의 유희에 의해 말해진다. 우리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실천들을 표현하는 지식과 표상들에 의해서 말해진다.

   

   

   

해체주의, ‘융합현실’설명 못해 … 지금 요청되는 철학은?

>>깊이읽기 _ 『해체주의와 그 이후』 이광래 지음 | 열린책들 | 2007
2007년 11월 19일 (월) 13:19:35교수신문 editor@kyosu.net

1980년대 후반, 필자의 석사과정 시절, 마르크시즘만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적 변혁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이론이라고 늘 주장해 오던 선배가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서 마르크시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정립하고 주창한 미시권력이론에 빠져 있었다. 이는 필자만의 개인적 경험은 아닐 듯싶다. 그것은 어쩌면 1980년대 후반 민주화를 거쳐, 1990년대 초반 새로운 정치사회적 지형으로의 중심이동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많은 연구자들이 겪어야 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마르크시즘과 사회주의 변혁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빠져나와 포스트모더니즘, 구조주의, 해체주의 등의 신조어로 채워진 자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거대체계와 하부구조가 아니라 일상과 상부구조의 움직임과 그 속에서의 세력관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프랑스 구조주의와 해체주의 사상가들에 대한 입문서들은 그러한 새로운 지적 흐름의 일단으로 이해된다. 『해체주의와 그 이후』의 저자 이광래 교수 역시 새로운 철학적 흐름을 주도한 연구자들에 속해 있었다. 당시 그는 매우 열정적인 목소리로 프랑스 현대철학의 물결이 우리에게도 도래하고 있다고 외치면서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1980년대를 마감하는 해의 봄에 출간된 두 권의 책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에서 성의 역사까지』(민음사)와 『해체주의란 무엇인가』(교보문고)는 그러한 의지의 소산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1980년대적 치기와 객기로부터
그런데 그로부터 근 20년이 흐르고 있는 지금, 저자는 『해체주의와 그 이후』를 통해 지난 시절 자신이 쏟아냈던 프랑스 현대철학에 대한 학문적 정열과 소명의식을 수치스러워하고 후회스러워 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육이오 전쟁 이후 남대문 시장에서 꿀꿀이죽 한 그릇을 얻으면 그 맛에 반하고 그 기분에 우쭐대던 기억을 부끄러워한다. 꿀꿀이죽이 가져다 준 기분처럼 서양의 명품(푸코)에 우쭐해하고 유행(데리다)에 들떠 있던 그 허심한 객기가 나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그 때문에 나는 반철학과 해체주의로 둘러쳐 놓은 울타리 안에 있는 다양한 철학적 언설들에 매달리며 지내왔던 지난날의 흔적들을 이제라도 청산하고 싶다.”


1980년대 중반과 후반의 이론과 실천을 이끌었던 마르크시즘도 그러했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어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구조주의와 해체주의 같은 프랑스 현대철학 역시 학문의 세계를 향해 걸음걸이를 시작한 필자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하고 어려운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필자에게 이광래 교수의 저서들은 매우 중요한 학문적 디딤돌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 디딤돌이 철학적 진지함과 시대적 소명의식의 소산이 아니라 치기와 객기의 부산물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라고 자아비판하고 있다. 필자로서는 무척이나 당황스럽다. 그렇긴 하지만 저자의 자기고백과 그에 따른 필자의 당황스러움에 대해서는 각각 개인적인 일로 넘겨버리기로 하자. 문제는 어떤 연유로 저자가 그러한 학문적 전환을 하게 됐는가를 찾아야 한다는 데 있다. 머리말이 강렬한 메시지로 채워져 있는 만큼, 『해체주의와 그 이후』의 본문 속에는 위 문제에 대한 답이 명쾌하고 인상적인 모습으로 제시돼 있을 것임을 추측케 한다.


저자는 자신의 작업을 ‘재고 정리 작업’으로 표현했다. 재고 정리란 잘 안 팔려 처치 곤란한 물건들을 헐값이나 공짜로 처분하는 일이 아닌가. 적어도 저자가 해체주의의 기원과 해체주의자들을 소개하고 있는 제1부와 2부는 정말 재고 정리 작업인 것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미셸 푸코』의 제2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과 비교할 때 주목할 만한 차이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하나로 엮이기에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이질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을 그들이 별반 좋아하지 않는 개념인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묶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학문적 전환의 자기고백
아울러 새로운 주체를 모색하는 푸코를 과연 해체주의자로 부를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그는 별반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저자의 학문적 변신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있을 것이란 필자의 기대는 일단 만족스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제14장 ‘포스트-해체주의와 미래의 철학’으로부터는 필자의 궁금증에 대한 해답의 윤곽이 나타나고 있다.


저자가 그리고 있는 미래 사회, 또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새로운 사회는 ‘플러스 울트라’(plus ultra)로 명명되고 있다. 이 사회는 그 이전의 어떤 사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더 얼개화, 다층구조화, 편재화, 거시화를 거쳐 마침내 융합화, 무구조화를 지향”하고 있다. 이렇게 규정되는 플러스 울트라 사회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 사회는 유비쿼터스 사회다. 저자에 따르면, 신의 편재성이라는 라틴어 기원을 갖는 유비쿼터스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면서 모든 것을 보편적 시공간화하는 다양한 정보기술들에 의해 이미 실현돼가고 있다. 둘째, 그 사회는 디지털 사회다. 아날로그적 특성들을 갖는 이질적 요소들을 모든 거대한 동일성의 원리로 통합해 낼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은 중심과 주변, 수직적 위계로 구성돼 있는 구조를 거부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끊임없는 운동 속에서 서로 섞이게 한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디지털 기술은 폐쇄돼 있는 전통적 구조를 거부하는 이른바 ‘무구조’(structurelessness)를 구축해낸다. 셋째, 그 사회는 융합의 사회다. 인간이 개발한 다양한 기술들이 단일의 융합체로 만들어져 제3의 현실, 즉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이 결합된 ‘융합현실’이 탄생한다.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할 정도로 기술이 발전하고 있고 그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사회가 등장하고 있는 대격변의 시대 속에서 철학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철학은 여전히 세 맷돌의 손잡이(어처구니)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낡은 맷돌질만 반복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을 향하고 있다. 융합이라는 미래사회의 원리를 규명해야 할 철학의 임무 앞에서 해체주의는 언제까지나 해체만을 얘기하고 있다. 해체주의는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뛰어넘는 융합현실과 양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폐쇄적이고 단절적인 실제현실의 한계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해체주의는 과거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미래의 지향이라는 철학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포스트-해체주의’를 선언하고 있다.

미래학으로서의 ‘반해체주의’ 선언
그렇다면 해체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미래의 철학을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저자는 제15장 ‘미래학으로서 반해체주의’를 통해 그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답은 직접적이지 않다. 우선 사회생물학자 윌슨의 ‘통섭’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유력한 미래의 철학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섭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긍정적이지 않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통섭은 전혀 새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콩트의 실증철학이나 헤겔의 정신철학 역시 통섭이론의 전범일 수 있다-궁극적으로 테크노크라트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윌슨의 통섭이 진정한 의미의 미래의 철학이 될 수 없다면 저자는 어디에서 미래의 철학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직 명확한 답이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 저자의 용어를 빌려, ‘화해’와 ‘재구축’을 지향하는 진정한 미래의 철학은 아마도 동서양 사상의 아우르기를 통해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상복 / 목포대·정치학

더 읽어볼 만한 책

□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에서 성의 역사까지』, 이광래 지음, 민음사
프랑스 현대철학의 형성과 전개를 둘러싼 다양한 흐름들을 인식하게 하는 저자의 대표 저술이다. 『해체주의와 그 이후』에서 다루고 있는 해체주의 철학자들, 특히 저자가 ‘문화적 체르노빌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는 푸코 사상에 대한 포괄적 지식을 담고 있다.

□ 『해체론 시대의 철학』, 김상환 지음, 문학과 지성사, 1996
논의의 중심이 되는 해체주의 철학을 포괄적이고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논문들을 엮은 철학서다. 논의는 해체주의 철학의 입구(제1부)에서 시작해 핵심적인 쟁점들(제2부)을 거쳐 현대사회에서 해체론이 갖는 의미(제3부)로 나아가고 있다.

□ 『유비쿼터스 혁명』, 이홍주·이장욱 지음, 이코북, 2004
저자가 깊은 관심 속에서 사유하고 있는 유비쿼터스 기술과 사회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다양한 사례와 도표 및 사진들을 이용하는 등 평이한 접근법을 통해 유비쿼터스 기술과 사회에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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