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씨뮬라시옹......가상실제 시뮤라크르에 미혹되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현대 소비사회의 특징을 수식하는 족집게 같은 문장이다. 소비하기 위해 살고 소비에 의해 살아지는 현대인의 삶은, 미디어와 광고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장식하려는 욕망에 눌려 있다.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시뮬라크르들, 시뮬라크르에 둘러싸인 현대사회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분석은 냉소와 허무를 안고 있지만, 부인하기 어려운 우리의 현실이다.
언젠가부터 웬만한 서평이나 문화비평, 미디어 비평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경제 분야의 비평에서까지 ‘시뮬라시옹’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하더군요. 시뮬레이션의 프랑스어려니 하는데(스펠링이 같다) 앞뒤 문맥으로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철학적 용어로 보입니다. ‘시뮬라시옹’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며 철학자, 포스트모던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보드리야르가 현대사회의 특징을 분석하기 위해 내놓은 개념이고 이론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시뮬라시옹》(1981년)에서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문화적 질서를 ‘시뮬라시옹’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이후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몇 가지 지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새로운 현상들에 압도돼 있는 복잡한 현대의 특징을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현대사회를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라고 설명합니다만, 이는 전통적인 사유의 틀로 본 규정이고요, 이러한 규정으로는 현대인들이 맞닥뜨린 일상적인 삶의 현상들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보드리야르의 주장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 소비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소비 이데올로기이며, 소비사회에서 사물은 기호와 이미지로 그 가치가 결정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실재와 동떨어진, 실재는 없고 기호와 이미지만이 넘치는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원본이 없는 이미지가 현실을 왜곡하는 이미지 과잉 시대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진단입니다.
시뮬라시옹이란 말도 낯선데 시뮬라크르, 포스트모던에 보드리야르까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꽤 어려워보입니다. 피하고 싶은 용어들이 넝쿨뿌리처럼 줄줄이 이어져 있으니까요. 그러나 조금 유의해서 보면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를 이해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학문적으로 제대로 파고들면야 난해하겠지만(실제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일반인이 읽기는 버겁습니다), 담론을 이해하기 위한 상식 수준에 국한하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소비-기호가치(이미지)-시뮬라시옹’, 이 세 키워드는 보드리야르 이론의 핵심인데요,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를 이해하기 위해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유시진 대위와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를 만나보겠습니다.
✔ 이미지 소비 시대에 살다
‘태양의 후예’(‘태후’) 관련 기사는 종방 후에도 일간지를 연일 장식했지요. 모 일간지 기사의 첫 문장을 볼까요? “자동차의 ‘차’ 자도 모르던 여자친구가 투싼을 알더라구요. ‘아라블루’색 투싼이 예쁘대요.”...자동차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마저 ‘유시진 대위가 타는 차'라며 주목을 했으니, 그야말로 ‘태후 신드롬’의 후과입니다. ‘태후 신드롬’은 문화콘텐츠 산업의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부수적인 경제효과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태후’의 경제효과가 ‘별에서 온 그대’를 넘어선다고 언론에서 떠들썩합니다.
2014년의 ‘별그대’ 열풍도 대단했지요. 천송이 냉장고, 천송이 트렌치 코트, 천송이 립스틱 등 ‘천송이’가 먹고 입고 바른 모든 상품들이 중국 대륙에서 불티나게 팔렸고, 언론에서는 ‘천송이’ 캐릭터가 소비 금맥을 캐고 있다며 ‘천송이노믹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였으니까요. ‘천송이노믹스’(천송이+이코노믹스)는 천송이 브랜드의 엄청난 경제파급력을 상징하는 말이지요.
당시 경제면에는 “‘천송이’가 탄산수 마시던 그 냉장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모 회사의 신제품 냉장고 옆에 ‘천송이’가 활짝 웃으며 서 있는 큼지막한 사진도 함께 게재되었지요. 예전 같으면 전지현이 광고하는 냉장고로 보였는데, 이제는 냉장고 옆에 서 있는 전지현이 ‘천송이’로 보입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별그대’의 천송이 역시 드라마 속 가상 실재이고, 이미 드라마가 종영되었으니 천송이는 어디에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천송이’는 여전히 ‘실재’하는 것 같습니다. 올해(2016년 3월) 중국 한 기업 임직원 4500명이 인천 월미도에서 치맥파티를 열었는데, 젊은 유커들은 마치 ‘천송이’가 된 것처럼 웃으며 중국에서도 친구들과 ‘천송이’처럼 치맥을 즐긴다며 즐거워했단 기사를 보았습니다. 종영된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천송이’는 사라지지 않고 있는 셈이죠. 유시진 대위 역시 드라마는 종영했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강력하게 살아남아 있고요. 나아가 실제 존재하는 인물처럼 우리 곁에서 활보하며 우리의 상품 소비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막강하게 행사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천송이, 유시진 대위(시뮬라크르)에 단단히 미혹돼 있습니다. 천송이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미혹’은 고스란히 상품 소비로 이어지는데, 이 현상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움직임이 작동합니다.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상품에는 고유한 사용가치가 있습니다.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해주는 것’이 냉장고의 사용가치죠. 물건이 귀하던 시절, 그러니까 대량 소비사회로 옮겨 오기 이전에는 이 사용가치가 대단히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에게 사용가치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듯,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냥 냉장고가 아니라 천송이가 과음 후 마시는 탄산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천송이 냉장고’인 것이죠. 천송이가 사용하던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천송이’스러워지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천송이처럼 ‘유니크’하고 ‘럭셔리’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지요. 유시진 대위가 몰고 다니던 아라블루색 투싼을 타면 민간인을 보호하고 정의로우며 유머러스하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멋진 사내가 된 기분이 듭니다.
이와 같이 현대의 모든 상품은 사회적으로 의미가 부여된 ‘기호가치’를 갖고 있어요. 옷, 신발, 가방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어떤 음료를 마시느냐에도 기호가치가 들어 있지요. ‘기호가치’는 다른 말로 하면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대 소비사회는 상품의 기호가치를 통해 개인과 개인, 계층을 구별 짓고 이미지와 감성을 드러내 보이며,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고, 사회적 코드를 밝힙니다. 이미지 소비는 현대 사회의 큰 특징으로 당연히 기호가치가 상품의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보다 훨씬 중요해졌지요.
“한국에서 페라리는 고속도로 200km 주행보다 길 막힌 강남역 사거리에서 빛을 발한다.”
안전과 속도라는 자동차 고유의 가치보다 페라리를 몰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더 중요한 이유는, 페라리 소비를 통해 드러나는 사회적 의미 때문입니다.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시뮬라크르’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전도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이런 경구로 시작합니다. 시뮬라크르란 개념도 낯선데다 전도서의 이름을 빌린 터라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시뮬라크르는 천송이나 유시진 대위처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모든 인공물을 말합니다. 《시뮬라시옹》의 번역자 하태완은, 시뮬라크르에 해당하는 우리 말 번역으로 ‘가장행렬’할 때의 ‘가장(假裝)’이 근접하다고 설명합니다. 흔히 흉내, 모방이라고도 하는데, 흉내나 모방은 원래의 어떤 대상을 그야말로 흉내내거나 모방하는 것인데, 천송이가 전지현의 모방이 아니듯, 시뮬라크르는 흉내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로, 이 원본 없는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고 설명합니다.
현대 전쟁에 등장하는 미사일 발사 현장을 떠올려보죠. 미사일 발사는, 시뮬레이션된 컴퓨터 화면을 통해 미사일을 발사합니다. 실제 미사일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보는 게 아니죠. “이때 시뮤라크르인 화면상의 미사일 궤도는 실제 탄의 궤도도일 것이며, 더 나아가 실제 탄이 목표에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는 이제는 중요하지도 않게 되어버렸다. 결국 시뮬라크르는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다.”(하태완) 비현실인 프로그래밍된 미사일 궤도가 실제를 대체하고, 실제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인 하나의 현실’이 된 것입니다. 한편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의 동사적 의미로, ‘시뮬라크르 하기’입니다.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가 <매트릭스>입니다. 처음 <매트릭스>(1999년)를 보았을 때에는 기계들이 인간을 인공수정해서 ‘매트릭스 프로그램’에 따라 가상현실에서 살게 한다는 설정을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기술의 진보가 가져다준 경험의 차이가 있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일반인들에게 가상현실이란 개념이 낯설었지요.) ‘매트릭스’는 실재를 능가하는 진짜 같은 가짜요, 인간의 오감을 모두 속일 수 있을 만큼의 완벽한 시뮬라크르였던 겁니다! 워쇼스키 형제(자매)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와 스태프 모두에게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읽게 했다고 해요.

물론 우리는 가상현실인 매트릭스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실재와 동떨어진 시뮬라크르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을 반박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텔레비전이라는 전통적인 매체 외에도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와 함께 수많은 이미지를 쏟아내고 있으며, 이미지와 실재를 구분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들었지요. 현재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마우스와 키보드, 혹은 가벼운 터치로 네트워크에 접속해 가상의 존재로 떠다니며 숱한 이미지를 복제하고 소비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현대사회에서 이미지가 오고 감으로써 실재에 대한 커다란 무관심이 형성되고 실재가 넘쳐나는 이미지 아래 실종되고 있다. 이처럼 실재가 없는 이미지만인 넘쳐나는 세계가 바로 우리의 시대, 즉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시대이다. 따라서 실재보다는 이미지가 범람하여 실재를 사라지게 하는 현대사회는 그 자체로 실재가 없는 미혹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끊임없이 증식하는 시뮬라크르의 이러한 지배는 더 이상 특수하고 신기한 현상이 아니라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리 삶의 현장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고 지배하는 현상, 그리고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하이퍼리얼리티(시뮬라크르)에 포위되어버린 현대사회의 존재론적인 조건에 직면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_<보들리야르: 현대사회와 이미지>, 배영달
✔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드리야르의 문제의식은 전방위적입니다. 그는 이미지를 지탱하고 있는 실체가 사실은 공허한 것이며, 따라서 미디어, 역사, 정치, 철학 모든 영역에 걸쳐서 많은 것들이 실체가 아닌, 만들어진 허구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보드리야르의 발언 가운데 많은 지식인들을 흥분시켰던 게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입니다. 걸프전은 1990년 8월 2일부터 1991년 2월 28일까지 벌어진, 이라크와 미국 중심의 다국적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에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하자 다국적군이 쿠웨이트의 독립을 위해 전쟁을 벌이지만 사실은 걸프 지역의 석유 패권과 깊은 연관이 있지요.
보드리야르의 저 문제적 발언은 실재의 걸프전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보드리야르는 이 도발적인 발언을 통해 실재의 걸프전이 미디어에 의해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그것이 어떻게 현실을 생산하고 규정하고 대신하는지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걸프전은 미국 주도의 34개국 다국적군이 상상을 초월하는 최첨단 정보기술을 총동원한, 철저한 과학전이요, 최신예 무기의 정밀타격으로 민간인과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한 ‘깨끗한’ 전쟁이었습니다. 미국과 다국적군은 최첨단 무기로 이라크를 제압했지요. 이라크 지상군은 전사자 15만명에 포로 10만명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다국적군의 사망자는 전쟁 기간을 통들어 125명에 불과했으니까요!

미국의 CNN은 사막의 폭풍 작전 기간에 미군 폭격기의 폭격장면을 실시간으로 보도해 ‘비디오게임 전쟁’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어요. 보드리야르식으로 말하자면, 걸프전은 CNN에 의해 전자오락화한 전쟁이요, 미국과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시뮬라크르)가 실제 전쟁을 압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시뮬라크르는 전쟁의 참혹함도, 전쟁을 일으킨 인간의 죄책감도, 석유 패권에 얽힌 탐욕을 지워버린 채 화려하고 월등한 군사력을 갖춘 미군을 ‘세계 경찰’로 옹립합니다. 실제의 걸프전을 미국과 미디어가 생산한 시뮬라크르가 압도해버린 것이지요.
이와 같은 보드리야르의 현실인식에 대해 일부에서는 테크놀로지 허무주의요, 극단적이고, 냉소와 허무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기술 발전에 힘입어 시뮬라크르가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상과 실재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는 현실을 부정하기는 어렵지요. 보드리야르은 《시뮬라시옹》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미지 시대의 맨얼굴을 보게 하고, 이 이미지 시대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사고하게 하며, 이 이미지 폭력에 과연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굳건하게 담론의 중심에 있는 이유입니다. (끝)

>> 플라톤의 이데아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실재와 실재에 대한 재현의 문제이다. 보드리야르가 시뮬라크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철학적 사유로 끌어왔지만, 이것은 플라톤이 정의한 개념으로 철학자마다 시뮬라크르에 대한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역시 현실 세계를 복제물로 보는 플라톤의 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그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공헌이다. 플라톤은 사물들의 이치를 파악하기 위해 정신은 우선 사물들이 움직이는 이유를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사물들의 세계 배후에 존재하는 세계를 발견했다. 바로 초시간적인 이데아들이었다. 예를 들면 두 개의 사과는 사라져도 ‘둘’이라는 이데아는 초시간적인 성질을 갖는다. 따라서 플라톤은 이데아는 변하지 않으며 영원하고 가장 실재적인 것이고, 우리가 보는 현실적, 시각적인 대상들은 이데아의 모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삼각형이라는 이데아가 먼저 있으며, 우리가 보는 모든 삼각형은 단지 이데아의 모사에 불과한 것으로, 이데아를 참된 실재로 보았다.
>>>장 보드리야르(1929~2007)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사회 이론가로 이름을 떨쳤던 보드리야르는 1929년 프랑스 서부 랭스에서 태어나 한때 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그후 파리 10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물의 체계》(1968)에서 《불가능한 교환》(1999)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20여 권의 저서를 발표했다.
그의 독창적인 ‘시뮬라시옹' 이론은 대중생산과 대중매체, 인터넷과 사이버 문화의 시대를 해석하는 탁월한 이론 틀로 받아들여져 19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문화이론과 철학, 미디어, 예술이론 등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마르크시즘에서 출발했으나 생산보다 소비에 중점을 둠으로써 마르크시즘의 교조성을 극복하고 현대사회의 새로운 틀을 제시한 그의 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소비사회로의 진입 등 시대 상황과 맞물려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전_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03. 근대
합리성이라는 덫에 걸리다
>> 모던, 모더니티, 모더니즘
근대라는 말이 다른 시대구분보다 더 헛갈렸던 이유는, 모던, 모더니티, 모더니즘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예술, 철학, 문학 분야에서 자주 거론되는데, 이를 분간해서 이해하기가 어려워서였다. 우선 모던(근대)과 모더니티(근대성)는 ‘새로움’이나 ‘과거와는 다름’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새로움에 대한 끝없는 추구를 통해 스스로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모던’ ‘모더니티’는 단순히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므로 현재에도 ‘모던’‘모더니트’는 여전히 ‘새로움’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모던’은 시대 구분으로, 말 그대로 근대를 의미할 때가 많다. 하지만 모더니티는 조금 다르다. 근대성이라고 번역되는 모더니티는 르네상스 시대에 중세적인 사고 체계를 벗어나면서 시작돼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발전돼온 시대정신을 의미한다. 근대성이란 과거와 전통을 중시하거나 이를 어떤 모델이나 규범으로 삼지 않고, 그것과 단절하면서 동시대와 함께 가는 시대정신인 셈이다.
정치, 경제, 철학, 예술 분야마다 근대의 시작을 잡고 있지만, 사상적으로 보면 근대의 시작은, 신이 아닌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개념을 부활시킨 르네상스 시대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경제사적으로는 18세기 중엽 산업 혁명부터, 정치사적으로는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과 19세기 초의 민족주의로부터, 문학사와 미술사에서는 미학적으로는 19세기 초부터, 양식사적으로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한편 모더니즘은 근대 시기에 시작돼 현대 초중반까지 이어진 사상적 흐름을 일컫는다. 이전 시기와 다른 것은, 이전의 정신이나 유산을 계승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 변혁하려는 사고를 말한다. 한편 문화사적으로 모더니즘은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 서구 문학사에 나타난 특정한 예술운동이나 경향을 가리키기도 한다. 특히 모더니즘은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 서구 문학사를 통해 나타난 특정 예술운동이나 경향을 가리킨다. 즉, 모더니즘은 특정한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되는 절대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었다.
04.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 Jun 28. 2016
하나의 흐름은 기존의 흐름을 비판하며 역행하는 반작용을 통해 또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중세의 신 중심, 귀족 중심의 반이성을 거부하며 새로움의 기치를 치켜올린 '모더니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무엇을 거부하고자 했을까?
우리는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포스트모던한’ 시대라니 어떤 시대를 말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말을 해체해보면, 모더니즘 앞에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습니다. 포스트는 라틴어로 ‘뒤’ 혹은 ‘후’라는 뜻이니, 풀이대로 보면 ‘모더니즘 후’라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모더니즘 이후의 시기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겠구나 싶지만, 그건 아닙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시대 구분을 위한 용어가 아니고, 모더니즘과는 상반된 특징을 갖는, ‘모더니즘 이후의 서양의 사회, 문화, 예술의 총체적 상황’을 이르는 말입니다. 물론 이 풀이는 아주 불친절합니다. 모더니즘에 대한 개념도 명확히 모르니 더 헛갈릴 뿐입니다. (잠깐 이에 대한 설명은 미뤄두겠습니다.)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문학과 예술, 광고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철학, 정치 사회 이론, 심지어는 자연과학 분야에서까지 전방위로 쓰이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알아볼 작정으로 자료를 읽기 시작했는데 분야마다 쓰이는 맥락이 조금씩 달라서 명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더군요. (문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연구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이겠지요.)
언어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인칭대명사처럼 포스트모더니즘도 어떠한 이론가가 어떠한 맥락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저마다 다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두고 C. 배리 체보트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텅 빈 기록관”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김욱동,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텅 빈 기록관’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포스트모더니즘은 이것이다, 라고 정의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 중에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하나의 철학이론이 아닌 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철학이론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파괴적일 수 있다. 그 대신 그것은 사물의 근대적 개념들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을 망라하는 하나의 우산운동(an umbrella movement)이다. _새뮤얼 스텀프, 제임스 피저,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해서 정의하는 대신, ‘근대적 개념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며,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다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평가에 주목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려면 모더니즘부터 이해해야겠지요? (모더니즘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이 글에서는, 근대는 시대구분의 의미로, 모더니즘은 근대에서 출발해 현대 초중반까지 이어진 사상적 흐름을 뜻하는 용어로 구분해서 사용하겠습니다.)

✔ 실용성과 보편성, 이성에 반기를 들다
근대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자료를 읽다보니 ‘작용과 반작용’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근대는 중세의 신(神) 중심의 사상에 ‘반발’합니다. 중세에는 모든 섭리가 신의 주관(主管) 아래 있었고, 신의 뜻으로 풀이될 수 있었지요. 그러나 17세기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이제 자연과 인간의 세계는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원리로 설명됩니다. 근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이란 자연과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설명 체계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모든 신념과 가치들은 이와 같은 통합적인 체계에 뿌리를 두게 되었고 사물에 대한 이 근대적인 개념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등장한 하나의 사상적 흐름인 모더니즘은 과학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세련된 도회적 감각을 앞세운, 19세기 사실주의에 반항하는 ‘새롭고 혁신적인’ 사상이었습니다.
근대에 접어들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간 이성의 발달은 자본주의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인류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행복조차 물질 소유의 크고 작음으로 평가하는 대대적인 물화 과정을 겪게 되지요. 이와 함께 정부와 기업 등 모든 사회는 효율성을 앞세우게 되고 이를 위해 관료적인 시스템이 정착하기에 이릅니다. 어느덧 근대라는 도도한 흐름은 자유분방한 개성을 존중하기보다는 획일적인 평균성과 보편성을 지키려는 성향으로 귀결됩니다. 자연의 섭리조차 신의 뜻 안에서 이해했던 중세의 무지몽매함을 극복한 근대의 합리적 이성주의는 명백한 진보였습니다. 하지만 근대의 이성중심주의가 견고해지면서 비판적 회의가 고개를 들게 됩니다.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근본적 회의, 탈중심적 사고, 효율성, 기능성, 표준화에 대한 비판 등이 그것입니다.
‘포스트모던’이란 말은 1947년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에 대한 연구>를 요약해서 출판하면서 처음 등장했지요. 물론 이는 '모던하게' 등장한 근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세계사적으로 노출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토인비는 근대가 시작된 이후 촉발된 사회 불안, 세계 대전과 혁명, 합리주의가 붕괴되면서 등장한 무정부주의 같은 서구 문명의 특징을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말하면서 그 한계를 비판합니다. 이와 더불어 예술 분야에서는 권위적 지위를 획득한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전위적인 운동이 시작되었지요.
중세에 대한 반작용이 근대였고, 근대에 시작한 새롭고 혁신적인 사상적 흐름이 모더니즘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또 하나의 반작용으로 등장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철학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모더니즘과 구조주의의 반발 작용이었다. 구조주의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그것이 포스트구조주의로 이어지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실제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당히 비슷한 개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률적인 것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성을 중시하며 등장한 모더니즘이 추구한 정치적 해방과 철학적 사변도 하나의 이야기(거대 서사 혹은 큰 이야기)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했다._위키백과, ‘포스트모더니즘’
✔ 건축, 포스트모더니즘을 꽃피우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새로운 사회․경제적 질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하나의 분수령이었지요. 인류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세기말적인 상황에서 절망적인 세계대전을 치릅니다. 전대미문의 살육이 벌어졌고, 경제는 초토화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움텄던 희망과 낙관이 절망과 비관으로 기울게 된 순간이지요. 자본주의가 팽창하고 물질적 풍요를 선물한 대량소비사회 안에서 반작용이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보편성을 내세운 획일화된 모더니즘의 울타리에 안주할 수 없었으며, 기존 전통과 권위에 반발하는 반문화 경향이 나타 시작합니다. 특히 텔레비전과 컴퓨터의 등장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촉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정보통신의 눈부신 발전은 지식이 유통되는 방식을 현격하게 바꾸었고, 정통성, 권위 아래 숨죽여 있던 자유분방하고 다양한 사고들이 새로운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철학적인 담론에 가장 민감했던 이들은 예술가들이었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질서와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근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사물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넘어선 ‘포스트모던적’인 것에 동조했습니다. 1950년 무렵 문학비평에서 쓰이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용과 미술, 연극 같은 전위적 예술분야로 확대해나갔고, 건축 분야에 이르러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근대 건축은 19세기 후반 유행하던, 부르주아의 과시욕을 드러내던 장식적인 건축의 역작용으로 합리성과 기능성을 중시합니다. 신재료 개발, 과학기술의 발전, 산업혁명을 통한 대량생산 사회가 오면서 합리성을 추구하는 근대적 시대상이 건축에 반영된 것이지요. 그 대표적인 예는,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천루입니다. 기능에 따라 동선을 계획하고, 좁은 대지면적으로도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층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한편 대부분의 건축 부품들도 표준화를 거쳐 일괄적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빠르게, 기능적으로, 효율적으로 건축물들이 지어졌습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제는 “집은 거주를 위한 기계”라며 기능성을 강조한 유토피아를 꿈꾸기도 했지요.
하지만 점차 사람들은 이 모던한 양식의 건축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합리적 기능주의를 내세운 건축물은 자본주의 대량소비사회가 빗어낸 비인간화의 양상을 그대로 담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런 건물에서, 천편일률적인 데서 생활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고,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적인 일관성과 보편성, 기능성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복잡다단한 인간의 삶, 그 복잡성을 기능과 실용성에 맞춘 단순한 형태의 건축물이 담아낼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파리에 있는 조르주 퐁피두센터는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1971년에서 1977년에 준공된 복합문화시설입니다. 거대한 공공정보 도서관, 국립 현대미술관과 박물관, 이밖에 영화관, 극장, 강의 홀, 서점, 레스토랑과 카페까지 갖추고 있는데요, 만일 근대적 관점을 고수한다면 이 개개의 기능들은 아마도 독립된 형태로 지어졌을 겁니다.

우선 퐁피두 센터는 건물의 뼈대인 거대한 철골이며,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수도관 등을 건물 외관 벽면에 배치했습니다. 과거에는 건물 내부와 천정에 설치돼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던 장치들을 모두 바깥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마치 짓다만 것 같은 이 건축물을 봐서는 도서관이나 미술관, 박물관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들은 관행적인 형태의 건축물을 해체하고 파괴해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단순히 형태의 해체만이 아닌, 근본적인 개념들도 해체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었지요.
미술의 경우는 어떤가요? 마르셀 뒤샹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뒤샹은 1917년 대량생산된 소변기에 ‘리처드 머트’라는 이름을 서명한 뒤 작품명을 ‘샘’(fountain)이라고 붙여 뉴욕 앙데팡당전에 출품합니다. 뒤샹은 대량생산된 상품에 서명함으로써 서명이 작품의 질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 사회를 조롱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미술이 추구했던 대상에 대한 고전적 재현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미적인 것과 미적이지 않은 것 사이의 구분도, 고급한 미술과 저급한 미술의 경계도, 장르와 장르 간의 벽을 무시로 넘나들며 모순된 요소들을 혼합해버립니다. 음악에서는 ‘랩’ 같은 장르가 발생하고, 문학에서는 강박적인 리얼리즘을 멀리하는가 하면 난해한 지성주의에 반지성주의로 맞섭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낮춰 보았던 대중문화가 새롭게 부상하는 한편, 예술 분야에서 거리를 두었던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문제도 예술 안으로 끌어들여 비판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 근대성에 관해 질문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관점
포스트모더니즘은 등장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일관성 있는 사상체계를 갖춘 것도 아니며, 용어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진 게 아니라 학자와 분야에 따라 쓰임새가 저마다 달라 일목요연하게 정의하고 설명하기는 곤란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네 가지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문화‧예술의 관점이 있고, 철학 이론의 관점, 사회 이론적 관점, 자연과학적 관점이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티는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을 비롯한 예술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티는 철학이나 사회 이론에서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이 글에서는 문화, 예술에 나타난 현상을 중심으로 다뤘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도 녹록치 않아요. 특히 사회이론과 과학 분야에서 신랄하게 비판받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사회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과학의 엄밀성을 침해하며 무책임한 몽매주의와 무의미함만 양산한다는 비판입니다. 노옴 촘스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실증적 지식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무의미한 학문이라고 일갈합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정치 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본화와 세계화 같은 거대담론과 엮이지 않으려고 한다며 이러한 태도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라고 공격했습니다.
한편 객관적 진실을 추구하며 자기 이론에 책임을 져야 하는 과학자들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실재가 없으며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어떠한 유익한 점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과학에 대해 무지할 뿐 아니라 파괴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도킨스는 <발가벗겨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글을 <네이처>에 게재, 날카로운 독설을 날렸습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포스트모더니즘이 20세기 후반의 서구 사회를 지배하는 하나의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인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적실성에 대한 이진경의 설명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지 모더니즘의 스타일이나 특징에 대한 비판으로 제한한다면, 그것은 문학이나 예술에 한정된 타당성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의 폭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다양한 형태로 구현된 근대성에 관해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관점”(칼리니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으로 학장하여 정의할 수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것은 나름의 새로운 적실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_이진경,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05.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어떻게 20세기 사상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나 Jul 04. 2016
조주의의 가닥을 잡기란 어렵다. 학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분류를 위한 공통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이해를 위한 키워드는 사물의 관계를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인식하는, 인식의 대전환을 이룬 하나의 사상적 경향이라는 것!
‘구조언어학, 구조인류학, 포스트구조주의…’ ‘구조’혹은 ‘구조주의’가 붙어 있는 학문의 명칭이나 용어를 볼 때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구조언어학은 언어학의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인가? 아니면 어떤 ‘구조’로 언어학을 분석한다는 뜻일까?’ ‘구조주의’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조’란 말은 어떤 전체의 뼈대라는 뜻인데, 거기에 ‘주의’라는 말이 붙는다면 어떤 의미가 될까? 구조를 중시하는 하나의 사상인가? 그렇다면 대체 여기서 말하는 ‘구조’란 뭘까?… ‘구조’라는 말이 따라붙음으로써 파생된 의미들에 대해 추측이 어려웠고, 이런 궁금증들이 쌓여 ‘구조주의’에 대해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대략적으로 구조주의에 대해 알아보려고 백과사전을 뒤적였는데,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설명에 번호를 달아보겠습니다.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이라는 의미와 ‘총체적인 구조와 체계에 대한 탐구를 지향’이라는 설명을 잠시 새겨두도록 합시다.
➊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인식을 전제로, ➋개인의 행위나 인식 등을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총체적인 구조와 체계에 대한 탐구를 지향하는 현대 철학 사상의 한 경향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백과사전의 이 요약이, 나중에 책과 자료들을 읽고 나서야 정확한 설명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되더군요. 백과사전의 뒤이은 설명은, 구조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발전된 분석 양식이며, 이것이 인접한 학문으로 퍼져나가 현대에 와서는 인문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의 중요 개념이 되었고, 한 시대의 중요한 인식체계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살펴보겠지만, 소쉬르는 다양한 외국어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으려 했던 19세기의 언어 이론에 불만을 느꼈고, ‘하나의 단어는 옷감의 실과 같은 것으로 그 기능이 다른 주변의 실들과의 짜임과 관련’해서만 결정된다고 보았지요.
예를 들어 걸음마 단계의 아이는 배고프다는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어떻게 ‘맘마’라고 말하는지를 배울 뿐이다. 이 단어는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어른들도 그 단어의 의미를 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빈틈없는 부모라면 유아의 언어 능력과 행동을 큰 맥락에서 이해하고 유아가 ‘우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들을 것이다. 요컨대 언어는 자의적인 사회관습이며 이에 따라 한 언어의 모든 부분들은 커다란 사회 구조 체계로부터 그 의미를 획득한다. _《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그런 다음 프로이트를 비롯해 라캉, 레비스트로스, 바르트, 푸코의 구조주의를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텍스트를 모두 읽고 나도 여전히 ‘대체 구조주의가 뭐래는 거지?’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맴맴 돕니다.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라는 부제가 붙은,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를 읽고서야 어렴풋이 구조주의를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구조주의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적 구조주의라는 게 일정하게 조직돼 있지도 않고, 학파를 이룬 것도 아니고, 분류를 위한 공통 기준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의 백과사전의 요약 내용대로 그러한 경향성을 지닌 일군의 사상가들―소쉬르, 레비스트로스, 푸코, 라캉 등―의 사상 속에 깃들어 있는 구조주의를 이해해야 하는데, 이해 자체도 어렵거니와 이해를 토대로 그 경향성을 식별해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찌되었든 구조주의에 대한 이해의 실타래는 ‘인식 방법의 대전환’을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즉, 구조주의가 인식 방법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을 이뤘기 때문에 20세기 사상사를 뒤흔들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려 합니다.
√ 구조주의, 인간주체의 절대권을 흔들다
보통 하나의 사상은 이전 사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성됩니다. 그렇다면 구조주의는 무엇에 대한 극복의 과정이었으며, 구조주의를 통해 인식의 방법이 어떻게 변화했다는 것일까요?
구조주의라는 사상이 아무리 난해하다고 해도, 그것을 세운 사상가들이 ‘인간은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할까?’라는 물음에 답하려고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그 물음에 대한 접근 방법이 보통 사람들보다 강하고 깊었을 뿐이죠._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인식방법이란 말이 꽤 어려웠는데 우치다 타츠루가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군요. “인간은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할까?”라는 말로. 사물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 사람과의 관계 혹은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런 것이 아마도 철학에서 말하는 ‘인식’이라는 것일 겁니다.그렇다면 구조주의 이전의 근대에는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했을까요? 사전적 설명에 기대 단선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신의 대리인쯤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세계의 중심이요, 주인으로 보고 (마치 신처럼) 인간이 사물들 전체를 규정하고,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았던 것이죠. 또한 어떤 주관적이고 자기결정적인 주체가 세상을 인식하고, 의사를 결정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사물의 관계를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인식한다고 보았고, 주체가 자율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규정하는 ‘구조’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근대 비평에 대한 문제제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저자란(문학의 경우에 국한해서) 0에서 작품을 창조해낸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의 영역이니, 저자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조물주를 모방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이들 저자에게 작품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묻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평가는 하는 수 없이 “저자의 가정환경, 유아 때의 체험, 독서경험, 정치적 사상, 종교, 병과 질환, 성적 기호 등에서 작품의 ‘비밀’을 찾으려고 합니다.”(아치다 타츠루, 같은 책) 이것이 근대비평의 기본 형태인데요, 바르트는 이 원칙을 밀어냅니다.
바르트는 저자의 작품(텍스트)은 0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며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다양한 것들이 섞여 직조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에크리튀르)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고 말합니다. 나아가 이 “다양성이 집결되는 장소가 바로 독자”라고 말합니다. 텍스트는 독자에게 수용되면서 다르게 규정되고 받아들여지게 된다며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을 치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텍스트의 창작뿐 아니라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는 ‘구조’가 얽혀 있음을 알았고, 이를 비평의 기본원리로 제시합니다.
백과사전에서 구조주의를 설명한 요약 내용을 다시 한번 찬찬이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인식을 전제로, 개인의 행위나 인식 등을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총체적인 구조와 체계에 대한 탐구를 지향하는 현대 철학 사상의 한 경향이다.”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어떤 의미인지 가늠이 되는지요? 바르트의 핵심 사상을 개괄하지는 못했지만, 바르트가 제기한 비평의 원리를 통해 ‘구조주의’적인 인식방법이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신호가 오고 있는지요?
√ 소쉬르의 언어학과 구조주의
소쉬르의 언어학은 구조주의의, 혹은 구조라는 개념의 출발선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겉으로 드러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상’을 중심으로 볼지, 아니면 현상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구조’를 중시해서 볼지 폭넓게 논의되었습니다.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 같은 사상가들 역시 인간의 인식을 규정하는 ‘구조’에 대해 자신들의 사상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지금 우리가 거론하고 있는 구조의 개념은 20세기 초반 제네바 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소쉬르라는 언어학자가 강의한 이론에서 비롯되었고, 이 이론이 프라하학파에 계승돼 하나의 철학 분파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철학 분파는 점차 확장되어 20세기 사상 논쟁에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소쉬르의 언어학적 분석방법이 무엇인지, 왜 그 분석방법이 인문사회과학 전 분야로 확장되어 나갔는지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간단치 않습니다.
소쉬르가 언어학에서 다룬 구조적 방법론을 강의하기 전, 즉 전통적인 사고로는 언어가 대상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보았고, 언어를 통해 실제 대상을 재현할 수 있으며, 이름이 있기 전에 사물이 있고, 사물 자체는 본래 가지고 태어난 어떤 성질이나 의미가 내재해 있다고 보았습니다. ‘개’라는 언어가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대상인 ‘개’를 가리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라는 용어로 언어가 대상을 가리킬 수 없으며, 언어가 사물의 이름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기의인 ‘개’는 꼭 ‘개’라는 기표를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쾌’나 ‘멍’이라고 표현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말의 ‘개’를 미국에서는 ‘dog’라고 부르고, 독일에서는 ‘Hund’라고 부르듯. 이처럼 같은 개념을 다른 기표로 나타내고 있으며, 따라서 ‘개’라는 기의와 ‘개’라는 기표 사이에는 꼭 그렇게 짝을 지어야 할 어떤 필연성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만약에 낱말이 미리 주어진 개념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면 각 언어마다 하나의 의미에 해당하는 정확한 대응어가”(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 있어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름이 있기 전부터 사물이 존재한 것이 아니며,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게 소쉬르의 생각입니다. 그는 마음이나 내면이나 의식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들도 언어에 의해 표현됨과 동시에 생긴 것으로 말을 하고 난 뒤에야 우리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다고 말합니다.

또한 소쉬르는 “언어를 ‘사회 문화적 맥락’이라는 외적 요인(파롤)과 ‘체계와 규칙과 관련된 것’(랑그)이라는 내적 요인으로 나누어 후자를 주된 연구 대상으로”(<구조주의와 그 이후>) 삼았습니다.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더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능력도 지면도 부족한 탓에 뭉뜽그려 말하자면, “구조주의 언어학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의 의미, 성질, 기능, 가치는 본래부터 있어온 게 아니라 이것들을 포함한 관계망 또는 시스템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는가에 따라 나중에 결정된다고 본 것입니다.” 랑그와 파롤, 기의와 기표, 언어의 자의성 등 소쉬르의 언어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따로 공부가 필요합니다. 언어학에 가한 그의 구조적 방법론은 획기적이었고, 기호 일반과 문화현상 전반을 새롭게 보는 관점으로 확대되어 ‘구조주의 혁명’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인문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죠.
예를 들어 결혼반지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내가 속한 문화의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해서 내 결혼반지의 의미를 캔다는 것은 내게 무익한 일이다. …나는 결혼반지를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지닌 신호처럼 결혼반지가 문화 구조의 거대 체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결혼반지를 끼는 것이 어떻게 해서 학교 반지를 끼는 것과 다른지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_《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구조주의,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이 불충분한 설명을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라는 책으로 해갈했으면 좋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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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그와 파롤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초인 소쉬르가 처음 사용한 낱말들로, 언어활동(불어: langage)에서 사회적이고 체계적 측면을 랑그라고 하였고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발화의 실행과 관련된 측면을 파롤이라고 불렀다. 랑그와 파롤은 서로 상반되지만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한다.
파롤은 같은 내용의 언어가 사람마다 달라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실제 발화 행위이며, 이러한 다양한 파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랑그이다.
언어는 다른 이와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서로 공통된 규칙이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개별적’ 으로 대화하는 것을 파롤,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것을 랑그라고 한다. 가령 사람들은 공통적인 '살다'라는 낱말을 인식할 수 있는데 이를 랑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실제 대화할 때 상황에 따라 '살다' 는 조금씩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는데, 그 각각의 용례들을 파롤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이나 억양에 따라 받아들이는 뜻이 달라지는 것도 이 파롤 때문이다.
랑그와 파롤을 처음 사용한 소쉬르는 언어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랑그’ 뿐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파롤은 상황에 따라 쓰이는 느낌, 또는 뉘앙스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랑그만을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관점은 후기 구조주의에 이르러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06. 아방가르드
길들여지길 거부하지만, 길들여지고 마는
아방가르드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 질서에 저항하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다. 하지만 이 새로움이 영원한 새로움으로 남을 수 있을까? 아방가르드했던 피카소의 그림은 현재 어마어마한 예술적 권위를 손에 넣었다. 미술관을 거부하지만 다시 미술관에 입성하는 것, 예술이란 개념을 부정한 반(反)예술이 다시 기성 예술이 돼버리는 것. 이것이 아방가르드의 숙명이요 태생적 한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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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나 잡지를 뒤적이다 패션쇼 기사를 볼 때 가끔 ‘저게 옷이야?’ ‘저걸 어떻게 입지?’ 하면서 들여다볼 때가 있지요. 그러다 ‘아방가르드한’ 패션이라는 평을 읽으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보통 ‘아방가르드’라고 하면 이처럼 아주 파격적인 패션이나 헤어스타일을 떠올리죠. 완전히 특이한, 우리들의 관념을 뒤엎는, 우리의 감성과는 동떨어진 난해한 예술, 혹은 특이한 시도를 한 예술가. 패션이든 예술이든 행위든 장르를 불문하고 아방가르드의 가장 큰 특징은, 길들여진 것을 거부하고, 나아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전복(顚覆)해버립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본래 척후병이란 뜻의 프랑스어인데요, 알다시피 척후병은 적과 싸울 때 본대 맨 앞에 있다가 적진 깊숙이 침투해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병사를 말합니다. 가장 위험천만한 임무를 맡는 셈이지요. 따라서 척후병은 용감해야 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예민하게 파악하고 예견할 수 있는 기민한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군대 용어인 ‘아방가르드’가 다른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일 때였습니다. 프랑스 혁명기, 일군의 지식인들이 선두에서 척후병(아방가르드) 역할을 자임하며 당시의 일반적인 관념을 뒤엎는, 진보적인 견해를 주장합니다. 이후 아방가르드는 정치․사회적으로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지요.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아방가르드가 예술 장르, 혹은 예술과 연관된 용어로 다가오지만, 19세기 사람들에게 아방가르드는 정치사상이나 사회사상에 나타난 급진주의로, 문학이나 예술과 관련된 개념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방가르드는 정치 사회적 의미에서 완전히 탈피해 예술적 급진주의만을 지칭하는, 예술 분야의 중요 개념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아방가르드에 대한 사전적 풀이는 이렇습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따위의, 기성 예술의 관념이나 형식을 부정한 혁신적인 예술운동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이 설명은 딱히 복잡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20세기 초의 미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만을 아방가르드라고 하는 건지, 아방가르드가 어떤 예술의 장르를 말하는 건지, 기존 예술의 권위에 저항해 새로운 걸 만들어내면 다 아방가르드인 건지, 현대에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없는 건지 모호합니다. 왜냐하면 현재에도 여전히 아방가르드 예술은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한편 아방가르드는 태생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아방가르드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 질서에 저항하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인데, 문제는 이 새로움이 영원한 새로움으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끊임없이 기성 예술의 권위에 도전하고, 도발하고, 저항해서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내지만, 이 새로움 역시 시간이 흐르면 권위의 옷을 입고 제도권 안에 정착하게 됨으로써 또다시 ‘새로운’ 도발에 직면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습니다.
전통 예술을 거부하고 새로운 예술을 시도한 대표적인 예술운동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아방가르드.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 아방가르드의 실체에 가까이 가보기 위해서는 왜 20세기 초 예술사에 새로운 예술을 지향하는 전위부대 아방가르드가 태동하게 됐는지, 그들의 목표는 무엇이고,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 새로운 예술을 지향하는 전위부대, 아방가르드가 태동하다
흔히 예술이라고 하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창조해낸, 아주 심미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술이 이처럼 그럴듯한 지위를 얻게 된 것은 19세기에 와서였습니다. 그전까지 예술은 주술적인 성격이 강했고, 종교적 요구에 복무해야 했지요. 예술의 기원을 더듬다보면 알타미라 벽화나 라스코 벽화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그려진 동물 그림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예술사가들은 변변한 무기도 없이 현실에서 맞닥뜨려야 하는 무서운 동물을 어두운 동굴에 그리는 행위가 동물을 가둬두는 주술적 효과가 있다고 믿었거나, 그 동물을 사냥할 힘을 축원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중세에 와서도 예술가 혹은 예술활동의 독자성은 존중받지 못합니다. 위대한 음악가, 화가들은 보통 귀족이나 궁중의 후원을 받으며 창작활동을 합니다. 언뜻 보면 그만큼 예술가가 대접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예술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독자성을 상실한 것의 반증이기도 하지요. 후원자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의 요구에 종속될 수밖에 구조인 겁니다. 미켈란젤로, 고야 등 위대한 화가들의 이력에 공통적으로 ‘궁정화가’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중세의 화가들은 경제적 토대가 충분치 않았고, 따라서 귀족들로부터 초상화를 비롯해 집안을 꾸밀 그림을 주문을 받아 그려주는 프리랜서 장인처럼 작업을 했습니다. 이들이 경제적 불안을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는 궁정화가가 되는 것이었지요. 궁중전속화가란 당연히 왕가에 충성을 다하며 그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직업’이었던 셈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노련한 장인과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지요.

귀족, 왕족 중심의 중세가 무너지고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지금과 같은 예술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게 됩니다. 드디어 예술가들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들의 의지로 어떤 작품을 창작할지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이란 천재적인 예술가가 창조해낸 독창적인 산물이라는 지위를 비로소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술품은 미적 가치를 지닌, 독창적이고 유일한 것으로, 그 작품이 어디에 놓이든, 누가 소유하고, 어떻게 유통되든 영원히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지요.
예술이 이렇게 독자적인 지위를 점하게 되자 새로운 시스템이 생겨납니다. 무엇이 예술인지를 결정하는 비평가가 출현하고, 예술품과 예술품이 아닌 것을 결정하는 시스템이 갖춰지는 한편, 미술관, 박물관 등 예술품을 전시하는 독자 공간이 생겨나게 됩니다.
자, 여기서 잠시 한 가지만 따져봅시다. 전시를 위한 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누군가가 이 공간에 작품을 걸 만큼 예술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인정받는’예술과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이 구분되는가 하면, 전시됐다는 사실 자체가 예술가와 예술품의 품격을 결정짓는다는 걸 함축합니다. 더불어 예술의 고유성이 강조되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지상주의적인 흐름을 갖게 되고 점점 예술이 실제 생활로부터 격리되는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방가르드는 19세기의 이러한 예술적 흐름에 반기를 듭니다. 예술을 규정하는 기성의 논리를 반박하고, 예술에 권위를 입히는 시스템에 반대하고, 현실과 유리된 예술을 비판하면서, 전혀 새로운 예술을 시도합니다. 즉, 아방가르드는 새로운 예술에 붙인 명칭이거나 수사가 아니고, 이러한 기존 질서에 붙박인 예술을 파괴하고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내려 했던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미학적 예술운동이었던 것입니다.
✔ 뒤샹의 <분수(Fountain)>, 기존 예술을 엿 먹이다
아방가르드라는 전위부대의 빼어난 척후병은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설적인 거장 마르셀 뒤샹입니다. 그가 작품으로 출시한 <분수(Fountain)>는, 비록 전시장에 입성하지는 못했지만 어마어마한 파란을 일으킵니다. 뒤샹의 발랄한 소동을 살펴보죠.
1917년, 뒤샹은 진보적인 색채를 지닌 그룹 ‘독립미술가협회’의 첫 전시회에 작품 하나를 출품합니다. 뉴욕의 J.L.머트의 판매장에서 구입한 남자용 소변기에 리처드 머트(R.Mutt)라는 가명으로 서명한 다음(리처드 머트는 변기를 생산한 머트사(J.L.Mott Iron Works)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작품 제목을 ‘분수’(샘이라고도 번역한다)라고 달아서 내놓았지요. 그의 작품은 당연히 거부돼 미술관에 전시되지 못합니다. 자신이 제작한 작품이 아닌, 그냥 상업용 변기에 서명 하나 달랑 써놓은 것을 대체 어떻게 예술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뒤샹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시장에서 판매되는 기성 소변기에 서명만 해서 작품이라고 제출했던 걸까요? 그는 변기라는 본래의 실용적 기능을 없애버린 후 변기가 놓여 있는 환경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버린 이 행위가 변기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으며, 이것 또한 예술 활동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나아가 기성 화단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죠. ‘전시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술적이어야 할까?’ 무엇이 예술인지에 대한 파격적인 질문인 셈입니다.
뒤샹의 <분수>는 우리 눈에 꽤 익습니다. 그럼 이 ‘변기’는 지금 어디에 전시돼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뒤샹이 최초에 출품한 이 소변기, 혹은 작품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작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공식적으로 기록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작품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은 그저 사진뿐이지요. 뒤샹은 미술가협회에서 작품 전시를 거부하자 당시 최고의 사진작가였던 스티글리츠에게 작품 사진을 의뢰합니다. 스티글리츠는 작품에 리처드 머트라는 서명을 보고, 뒤샹의 작품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사진을 찍습니다. 한편 이 사진을 보고 평론가 루이즈 노튼은 <분수>에서 명상하는 부처를 연상했다며 작품성을 인정했지요. 그러자 뒤샹은 ‘리처드 머트 씨 사건’이란 기사를 발표했는데, 이 기사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노튼의 에세이와 스티글리츠의 사진을 나란히 게재했습니다.
뒤샹은 자신이 직접 작업한 창작품이 아닌 기성의 변기에 가명이지만 서명을 해 브랜드네임을 부여하고, 나아가 사진, 기사 등 창작 이외의 활동을 통해 <분수>를 현대미술의 강력한 상징으로 창작해내고야 맙니다.(이후 오리지널은 없지만 뒤샹은 <분수>의 복제품을 다양하게 만들었고, 우리가 사진으로 혹은 전시장에서 보는 것들은 원본이 아닌, 복제품이다.)
이처럼 아방가르드는 기존의 부르주아적 예술 양식을 거부한 예술운동이었습니다. 아방가르드의 특성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학자인 페터 뷔르거는, 그래서 뒤샹을 아방가르드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미래파는 정치적으로도 민감했다. 미래파는 예술지상주의적 이상향을 꿈꿨던 19세기의 미학 원리를 존경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무장되어 있었고, 예술만의 개혁이 아니라 예술과 함께 그리고 예술을 통한 사회 변화를 지향했다. 미래파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수신자는 예술계로 국한되지 않았다. 미래파는 사회를 향해 자신들의 ‘선언’을 전하고자 했다.”_《아방가르드》, 노명우
아방가르드 예술로 분류되는 미래파에 대한 설명인데, 아방가르드의 핵심 목표가 예술과 삶의 거리를 좁히거나 없애는 데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 피카소도 전위예술가였다!
아방가르드는 예술사와 미학이론에서 심도 있게 논의가 이뤄지는 개념입니다. 특히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두고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모더니즘은 근대 시기에 시작돼 현대 초중반까지 이어진 사상적 흐름으로, 이전의 정신이나 유산을 계승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 변혁하려는 사고를 말합니다. 문화사적으로는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에 서구 문학사에 나타난 특정한 예술운동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아방가르드를 모더니즘의 하부 개념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뷔르거의 주장은 다릅니다. 오히려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예술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더니즘의 모체가 되는 유미주의는 예술의 자율성과 심미성을 강조하고, 예술이 도구적이고 실용적인 기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방가르드는 삶과 격리된 유미주의에 대한 파격적 도발로부터 새로운 예술을 이끌어낸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급진적, 파격적 도발로 기존 체제를 흔들어 새롭게 만들어낸 예술 역시 시간이 지나면 예술의 권위에 복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술에 대해 거칠게 분류하자면, 전통적인 예술과 상업적인 예술,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모더니즘 예술이 있는데, 아방가르드는 이 모든 예술을 비판하고, 도발하지요. 그렇다면 아방가드르는 이 분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피카소의 경우를 봅시다. 1904년 파리에 정착한 피카소는 아방가르드 미술가, 작가들의 핵심인물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점에서 봤을 때 분명 피카소의 그림은 ‘아방가르드’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그의 작품을 카피한 다양한 상품들이 팔리고 있을 만큼 보편성을 획득했고, 미술시장에서 어마어마한 호가에 팔리는가 하면, 매우 ‘위압적인’ 예술적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하지만 대중의 호응을 받게 되면서 다시 체제 내로 진입하여 길들여지게 되는 딜레마. 뷔르거는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이 이런 도전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우려를 표합니다. 뒤샹의 서명이 담긴 단순한 사물인 변기가 미술관에 입성하고 나면, 저항의 힘을 잃고 제도권 안에 안락하게 편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제도화하는 현대미술에 대한 뷔르거의 진단과 예측은 대부분 들어맞았다. 1950년대 말부터 등장한 팝아트에서는 대중문화의 상업적 이미지들이 미술의 틀 속으로 침범하고, 60년대 미니멀리즘에 이르러 미술가의 주문에 의해 기계적으로 생산된 사물들이 미술관을 차지하게 되면서 오리지낼리티와 저자의 존재에 대한 의미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야 했다._<기계적 복제 시대의 저자:마르셀 뒤샹의 <분수>와 복제품의 오리지낼리티>, 우정아
미술관을 거부하지만 다시 미술관에 입성하는 것, 예술이란 개념을 부정한 반(反)예술이 다시 기성 예술이 돼버리는 것. 이것이 아방가르드의 숙명이요 태생적 한계인 셈입니다.
근대 예술사에서 척후병 노릇을 톡톡히 한 아방가르드는 상업과 예술의 경계 자체가 모호해진 현대에 오면서 정체성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방가르드가 없어졌다거나 의미 없다고 볼 수는 없어요. 지금도 아방가르드는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계승하면서, 특유의 자기 색으로 도발적인 저항을 끊임없이 표현하며 진격 중입니다. (끝)

>>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 1968)
프랑스 화가. 다다이즘의 중심적 인물. 인상주의, 포비즘, 큐비즘의 영향을 받은 뒤, 1912년에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처녀에서 신부로의 이행> <빠른 나체들에게 들러싸인 왕과 왕비> 등 기계와 육체가 결합한 듯한 작품명을 가진 작품을 그렸다. 그후 “자기 자신을 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대부분의 회화를 파기하였다.
1915년 미국으로 건너가 주로 뉴욕에서 살았다. 변기를 작품화한 <분수>(1917)를 비롯, ‘레디 메이드(기성품)’ 오브제를 선보였다. 성을 형이상학적 기계로 표현한 대형 글라스 작품 <추종자들에 의하여 발가벗겨진 신부(新婦)>는 1915년~1923년에 제작되어 미완으로 방치되었으나 브르통을 위시한 많은 예술가가 그 수수께끼 풀기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예술’을 방치하고 체스에 전념하는 생활 방식도 매력있는 수수께끼였으나, 사후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기증된 <1 물의 낙하>, <2 조명용 가스>라는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작품이 1946~1966년에 비밀리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자 뒤샹의 전설은 더욱 분분해졌다._<미술대사전(인명편)> 참조
> 박스
페터 뷔르거((Peter Burger: 1936~ )
함부르크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독문학과 프랑스문학 및 철학을 수학했고, 1960∼1964년에 프랑스에서 독일어 강사로 재직했다. 1970년 에를랑겐 뉘른베르크대학교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한 뒤 1971년부터 1998년에 은퇴할 때까지 브레멘대학교에서 문예학 및 미학이론 전공 교수로 재직했다. 뷔르거는 은퇴한 뒤에도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최근에 사르트르에 관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중심 연구 분야는 미학, 예술철학, 문예학이다. 구체적으로 아방가르드 운동 및 미적 현대, 프랑스 초현실주의, 관념론 미학 비판,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사 방법론 등 다양한 주제에 쏠려 있다. _<해외저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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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0~1801, 캔버스에 유채, 프란시스코 고야
07. 키치
고급문화를 조롱하다. Jul 27. 2016
키치는 단순히 싸고 저속하고 무언가 베낀 것 같은 예술품을 말하는 걸까? 보통 키치는 진부하고, 어디서 본 듯한 것을 모방하고 복제하고 장식하고 과시하는, 통속적인 대중문화의 속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새로운 미적 가치를 창조하는 것을 예술의 근간으로 보는 엘리트 비평가들은 키치는 문화의 저급화를 이끄는 장본인이요, 예술의 옷을 입은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과연 그럴까? 예술에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일까? 무엇이 고급문화이고, 무엇이 통속적인 대중문화일까? 키치의 항변은 근거 있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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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패션의 대세는 그때그때 다르지만 언젠가부터 ‘키치패션’이 도드라져 보이더군요. 액세서리 소품부터 신발까지, 어른들 눈에는 영 마뜩치가 않아요. 알록달록한데다가 싸구려 티도 제법 나는구먼 뭐가 좋다고 저렇게 입고 텔레비전에 떼 지어 나오는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새침하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잃지 않던 ‘소녀시대’도 ‘i got a boy’라는 곡의 뮤직비디오에서는 과감히 키치패션으로 단장했더군요. 식상함에 대한 반전, 혹은 약간의 파격, 이미지 변신을 위해서였겠지요?
키치 마케팅, 키치 효과를 증명해보인 압권은 단연 싸이(PSY)입니다. 그의 ‘강남스타일’은 전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열풍을 일으켰는데요, 미국 아이튠즈 톱100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가 하면, CNN, ABC 등 유명 방송에 싸이가 출연, 특유의 쇼맨십을 발휘하며 상상할 수 없는 인기를 얻었지요. 이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일등공신은 ‘강남스타일’의 뮤직비디오였습니다. 전혀 ‘강남스럽지 않은’ 장소에서 촌스럽고 유치한 퍼포먼스와 춤을 선보인 뮤비는 화려함,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싼티 나는 것’이었지요. 그러고 보면 요즘들어 이와 같은 키치적인 감수성이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최근 부쩍 ‘키치’라는 용어가 붙은 말들이 많이 쓰입니다. ‘키치’ 광고, ‘키치’ 패션, ‘키치’ 영화, ‘키치’ 미술….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서 많이 쓰이는데,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키치’라는 말이 붙으면 ‘자유분방함’‘젊음’‘촌티와 유치함이 멋들어지게 승화된 어떤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키치’가 뭐냐고 묻는다면 쉽게 입이 열리지 않습니다.
보통 모르는 낱말이 있으면 사전을 찾고, 대개의 경우 사전 설명으로 의미를 짐작합니다. ‘키치’라고 Daum 국어사전에 쳐보니 이렇게 설명하고 있군요.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이르는 말”. 어떤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키치’에 가까운가요? 이 설명대로라면 소녀시대는 싸구려 모조품, 혹은 싸구려 옷을 입고 뮤비를 찍은 셈이 되는데요, 여기에는 우리가 ‘키치’라는 용어로부터 얻는 ‘젊음’ ‘멋스러움’ ‘자유로움’‘최신’ 같은 이미지는 전혀 들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키치에 대해 짧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렇게 몇 개의 문장으로 본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기가 태어나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모습이 변하듯이, ‘키치’라는 말은 맨 처음 등장했을 때와 현재의 쓰임이 많이 달라져서 정의내리기가 더 어렵게 된 것입니다. 자, 이제 찬찬이 키치라는 말의 뿌리를 더듬어 볼까 합니다.
✔ 키치, 네 뿌리를 보여줘~
‘키치’라는 말의 뿌리를 더듬어 보면, 까마득히 오래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인 1860년대 무렵 뮌헨 일대의 화가들과 화상(畵商)들을 만나게 됩니다. ‘키치(kitsch)’는 이들이 싸고 저속하고 변변찮은 예술품을 일컬을 때 쓰던 속어였습니다.(처음 국어사전의 설명과 비슷해보이네요) 키치는 ‘ 저속한 작품’ ‘싸게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 동사 ‘verkischen’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인기는 있지만 질이 낮고 가치도 없는 예술품이나 물건 같은 것을‘키치’라고 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보티첼리나 다빈치풍의 무명화가의 작품 같은 것을 대중들이 소비하는 것을 보면서, 화가들과 화상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키치!”를 연발했을 겁니다. 이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세요, 재미있지 않나요?
과거에는 안 쓰던 용어가 별안간 튀어나왔다면, 그 이유는 대개 그 용어가 지칭하는 물건, 혹은 현상이 많아져서일 겁니다. 즉, 19세기 중엽에 갑자기 이런 ‘질 낮은(?)’ 예술품들이 많아졌던 것이죠. 그런데 말이죠, 왜 하필이면 이때, 이런 ‘저속한(?)’ 작품들이 늘어난 것일까요? 이 실마리를 좇다보면 키치라는 말의 사회적 배경이 드러나게 됩니다.
19세기 중반이라?… 19세기 중반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던 왕족과 귀족들의 권좌를 흔들며 신흥 부르주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즉, 자본주의의 싹이 굳은 대지를 뚫고 막 움터 나오게 된 것인데요, 이러한 산업화 과정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사회․경제의 중심축이 움직이니 당연히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중세 귀족 중심의 문화가 흔들리고, 대중문화의 전파속도가 빨라지게 됩니다.
미술의 역사를 보면, 중세까지 미술은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이들은 초상화나 궁정이나 저택에 걸 풍속화와 정물화를 화가들에게 주문했습니다. 마치 현재의 부유층 귀부인들이 고가의, 명품을 소비하듯 당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소유하는 것을 내세우고 자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가들의 이력에 ‘궁정화가’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도 다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왕실과 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작품활동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들이 독점하던 미술품, 예술품을 신흥 부르주아라고 할 수 있는 중산층들도 감상하고, 소비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습니다. 즉, 문화소비의 독점 구조에 중산층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한편 기존의 고급문화, 상층문화를 독점해왔던 귀족들은 보다 광범위해진 중산층의 소비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이 예술품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을까요? 당연히 저급하고, 저속하고, 통속적이라고 비꼬지 않았을까요? 키치라는 말이 생겨난 초기에는 바로 이와 같은 의미로 쓰였던 것입니다. 어떤가요? 키치라는 말이 처음 생겨났을 때는 국어사전의 정의와 비슷하게 쓰였던 것 같죠?
✔ 비싼 것, 고급스러운 것이 멋진 걸까?
19세기 중엽의, 아주 단순해 보이는 키치에 대한 정의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변화합니다.
“키치는 간접경험이며 모방된 감각이다. 키치는 양식에 따라 변화하지만 본질은 똑같다. 키치는 이 시대의 삶에 나타난 모든 가짜의 요약이다.”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1939년 <아방가르드와 키치>라는 논문에서 키치에 대해 이런 견해를 밝힙니다. 더불어 그는 재즈, 할리우드 영화, 광고 일러스트레이션도 일종의 키치라고 보았습니다. 단순히 싸고, 저속하고, 무언가 베낀 것 같은 예술품을 뜻하는 말이 아닌 것이죠. ‘이 시대의 모든 가짜의 요약’이란 표현이 눈에 뜨입니다. 예술에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일까요? 무엇이 고급문화이고, 무엇이 통속적인 대중문화인 걸까요?
20세기 초반까지도 키치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저변에 이런 구분에 대한 문제제기가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20세기 중반 팝아트가 등장하면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과 경계가 무너지게 되고, 키치문화가 제기하는 화두가 전면적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팝아트의 대명사격인 앤디 워홀의 작품도 그렇지만, 로이 릭턴스타인(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볼까요? <피아노 앞의 소녀>를 보면, 그냥 만화의 한 장면을 캔버스에 옮겨놓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팝아트의 등장은, 참으로 발랄합니다. 예술의 엄숙성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매스미디어와 광고 같은 대중적인 시각이미지가 어느 틈엔가 미술의 영역 속으로 들어와 버리게 된 것이죠. 싸구려, 저속한 것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건 왜 예술이 아닌데?’하며 얄궂은 조롱을 날립니다.

한편 키치라는 용어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사회 문화적인 계층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애초에 이 용어가 나올 당시를 떠올려 보세요. 귀족과 왕실이 소비하는 것이 고급문화이고, 이를 저속하게 흉내내고 모방하려는 가짜 문화, 저급문화를 ‘키치’라고 불렀습니다. 문화 역시 이 계층적 위화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위화감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구실을 하는 것이죠.
현대에 오면서 수많은 대중들은 문화소비에서의 계층적 위화감을 감추려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급문화나 고급 소비에 대한 동경과 욕구를 분출할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위화감과 동경을 비틀어 보는 것입니다. 주류의 고급문화를 공격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드러내놓고 모방하고 비꼬고 조롱하면서 쌓여 있던 욕망을 해소하게 된 것이죠. 예를 들면, 천 가방에 매직으로 크게 뤼이뷔통이라고 써서 들고 다니는 식입니다. 즉, 진짜 같은 짝퉁을 소비하면서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라 짝퉁임을 드러내놓고 조롱하는 것이죠. 하지만 한편에서는 키치 문화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키치가 예술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사실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진정한 미적 가치를 갖는 대신 소비자, 혹은 구매자의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급급하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시민사회의 등장과 더불어 대중의 구미에 맞추느라 예술이 저급화되었다고 보는 엘리트 비평가들은 가짜 예술로서의 키치와 아방가르드를 비교하고 구분하면서 키치는 가짜 예술이요, 상품에 종속된 마케팅에 불과하다고 일갈합니다.
✔ 키치, 문화적 담론의 중심에 서다
물론 키치는 흔하고 진부하고, 어디서 본 듯한 것을 모방하고 복제하고 장식하고 과시하는, 통속적인 대중문화의 속성과 거의 일치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미적 가치를 창조하는 것을 예술의 근간으로 보는 엘리트 비평가들이 보기에 키치는 문화의 저급화를 이끄는 장본인이요, 예술의 옷을 입은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키치의 독창성, 새로움을 하위예술, 저급예술로 몰아붙일 수는 없습니다. 키치는 현재 21세기 문화산업의 어엿한 주역으로서 대중적 정서와 상호작용하면서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소비사회에서 대중문화를 벗어날 살 수 없듯 키치는 부르주아 문명이 만들어낸 보편적인 산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고급예술로 불리는 허위와 권위를 전복하는, 대중 속에 뿌리박은 하나의 예술장르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그리하여 키치는 21세기에 진입하면서 하나의 예술품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 철학과 태도의 문제로 확대되기에 이릅니다.
“실제 삶에서 대상의 본래적 가치 이외에 다른 덧붙여진 가치들을 소비하려는 존재를 헤르만 브로흐는 ‘키치인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키치인간이란 ‘키치가 아닌 작품들, 또는 상황들조차 키치로 경험하려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백만장자의 가정용 엘리베이터 안에 걸린 진짜 렘브란트 그림은 틀림없는 키치다’라는 M. 칼리쿠니스쿠의 말은 렘브란트 그림을 키치적으로 소비하는 키치인간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_오창섭, 《디자인과 키치》
‘백만장자의 가정용 엘리베이터에 진짜 렘브란트 그림을 거는 행위’라? 키치적 태도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나요? 《디자인과 키치》라는 책에서 오창섭은 한발 더 나아가“오늘날 키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데요, 이쯤되면 고급문화를 비웃던 ‘키치’가 문화적 담론의 주인공 자리를 제대로 꿰찬 것으로 보입니다. (키치 문화에 대한 비판과 문화적 담론으로서의 키치 문화는 꽤 전문적인 영역이라 이 정도에서 마치겠습니다.)
문화적 담론의 내용까지 전문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고급스러움이라는 포장 아래 문화 예술을 전유한 귀족 계급에 대한 반발’이라는 키치의 태도는 대중으로부터 충분한 공감을 얻었으며, 저속하고 통속적인 것을 당당하게 드러냄으로서, 절대적인 권위와 견고한 이성에 저항하는 키치 문화, 키치적 태도가 갖고 있는 예술성은 건재해보입니다. (끝)

>> 차브족(Chav Tribe)
고급 명품브랜드와 주류문화를 일부러 조악하게 즐기는 청년을 일컫는 말. 2004년부터 영국에서 퍼지기 시작한 차브족은 운동복, 번쩍이는 금장신구, 야구 모자 등 건달 패션을 즐기며 문법에 어긋난 영어를 쓰고 종종 패싸움 같은 시비에도 얽힌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개념 없는 서브컬처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까닭에 차브족이 선호하는 브랜드들이 이미지 타격을 입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차브족의 상징인 버버리 체크무늬 야구 모자는 버버리에 큰 타격을 입혀 체크 무늬 모자 생산을 중단하기도 했다. 또 영국 맨체스터 지방의 한 나이트클럽에서는 차브족들이 프라다 운동화를 유행시키자 이 신발을 신은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일도 있었다.
차브(chav)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는데 ‘어린이’를 의미하는 19세기 집시 언어 ‘chavi’라는 설, 영국 북동부의 반항적인 젊은 광부들을 일컫던 사투리 ‘Charva’라는 설, ‘council-housed(임대주택에 살며) and violent(폭력적)'의 앞글자를 딴 것이라는 설도 있다. 2005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 신조어로 올랐다.
>> 키치와 팝아트
팝 아트는 파퓰러 아트(Popular Art, 대중예술)의 줄임말로, 신문 만화, 상업디자인, 영화의 스틸, TV 등, 현대 대중문화에 등장한 이미지를 미술로 수용한 사조를 말한다. 팝아트는 1950년 초 리처드 해밀튼 등의 작가를 필두로 영국에서 시작했지만, 앤디 워홀, 키스 해링, 로이 릭턴스타인(리히텐슈타인), 클래스 올덴버그 등 뉴욕의 팝아티스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팝아트가 태동한 50년대 후반, 60년대 초반은 서구 산업사회의 물질주의 문명이 황금기를 맞이했던 시기로, 산업사회에 대한 낙관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
팝아트는 대표적인 키치 문화(예술)로 손꼽히는데, 겉보기에는 키치와 비슷한 이미지와 모습을 갖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키치와는 다른 맥락을 갖고 있다고도 말한다. 키치가 고급문화에 대한 조롱과 저항으로서 이를 모방한 것이라면, 팝아트(특히 미국의 팝아트)는 1950년대 미국 화단을 휩쓴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과 지극히 평범하고 대중적이고 세속적인 것조차도 미적인 가치가 있다는 전위작곡가 존 케이지의 사상에 고무되었고, 현대 기술문명에 대한 낙관적 기조를 바탕에 두고 있다. 따라서 “팝아트는 당시 예술이 보여준 고답적인 태도에 대한 자체 반성적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키치가 갖는 심리적 절실함과는 달리 상대적 여유가 존재했다.”(오창섭, 《디자인과 키치》)
팝아트는 텔레비전이나 매스 미디어, 광고전단, 쇼윈도, 거리의 교통표지판 등 일상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코카콜라, 수프깡통, 만화 주인공 등 평범한 소재들을 미술로 끌어들임으로써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라는 이분법적인 구조, 위계적인 구조를 뒤흔든다. 또한 현대 산업사회의 현실을 예술화하는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소비문화에 끌려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br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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