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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 겁주고 옥죄는 봉쇄 전략...‘중화민족’은 누구인가

doll eye 2022. 2. 9. 16:56

소수민족 겁주고 옥죄는 봉쇄 전략...‘중화민족’은 누구인가

기사입력 2021.07.24. 오전 9:01 최종수정 2021.07.26. 오후 6:27 기사원문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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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인민들은 열렬히 화궈펑(華國鋒, 1921-2008) 주석을 옹호합니다!”1976년 문혁이 막을 내린 후, 화궈펑을 지지하는 네이멍구 몽고족의 모습/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67회>

1996년 여름 네이멍구(內蒙古, 내몽골)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교외의 한 라마교 사원을 방문했을 때, 필자는 법전(法殿) 앞에 진열된 오백 나한상(羅漢像)의 코들이 하나 같이 모두 깨져 있는 참혹한 장면을 목격했다. 1967년 베이징에서 몰려 온 홍위병들의 만행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중국 정부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문혁 시절 네이멍구에선 346000명의 몽고족이 구속됐고, 그 중에서 2만7900명이 처형됐다. 1981년, 네이멍구의 당서기 저우후이(周惠)는 문혁 당시 79만 명의 몽고족이 구속되거나 밀실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1989년 발표된 네이멍구 공산당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희생자의 총수가 48만 명에 달했다. 서구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50만 이상이 구속되어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마도 피해자의 총수는 영원히 안 밝혀질지도 모른다.

대약진운동(1958-1962)과 문화혁명(1966-1976)은 네이멍구 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든 소수민족들에겐 끔찍한 악몽의 시간이었다. 마오쩌둥이 계급투쟁을 강조할수록 소수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는 설 자리가 좁아졌다. “계급투쟁”은 소수민족의 전통적 생활양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런 점에서 문화혁명은 전국 각지에 산재하는 소수민족들을 겁주고 억누르고 옥죄고 아우르는 중국공산당의 “봉쇄 전략(containment strategy)”일 수도 있었다.

<티벳의 수도 라싸로 몰려간 홍위병들은 “파사구(罷四舊)”의 구호를 외치며 라마교 고찰(古刹)의 유물들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https://tibetmuseum.org/revisiting-the-cultural-revolution-in-tibet/>

중국 현대사의 최대 난제 “통일된 다민족 국가”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강력한 중국공산당 정부가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는 극히 예외적인 ‘대륙 국가’(continental state)로 남아 있다. 2010년 통계에 따르면, 중국인의 91.51% (대략 12억 정도)이 한족(漢族)으로 집계되고 나머지 8% (1억 5백 만 정도) 이상이 55개 소수민족으로 분류된다.

기원전 221년 최초의 통일을 이룬 후, 역대의 중화제국은 적어도 “중국 본토(China proper)” 내에서는 통일 정부의 성립을 지향했고, 장시간에 걸쳐 단일한 행정체제를 유지해 왔다. 1790년 청 제국은 지속적인 팽창 및 병합의 과정을 거쳐 만주, 몽고, 신장, 티베트를 포함하는 1470만 평방킬로미터의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다. 최후의 유목제국을 세운 준가르족(族)처럼 청나라 군대에 도륙당해 소멸된 민족도 있지만, 다수의 소수민족은 청 제국의 마지막까지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식민지 민중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28대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널리 퍼져나갔다. 1911년 공화혁명으로 청 제국이 해체된 직후였다. 민족자결주의에 따르면,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고족, 만주족은 스스로 단일민족에 의한 독립적 민족국가를 세울 수 있는 천부(天賦)의 권리를 갖는다. 공화혁명을 통해 등장한 신생의 민국(民國)은 통일정부 근처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군벌들이 출현해 대규모 전쟁을 벌이던 때였다. 만약 전국의 소수민족들이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립국을 세운다면, 한족 중심의 중국 영토는 전성기 청 제국 영토의 절반 이하로 축소될 판국이었다.

돌이켜 보면 현대 중국사의 최대 난제(難題)는 청(淸)제국으로부터 물려받은 다민족의 방대한 영토를 “통일된 민족국가(民族國家, nation-state)”로 재편하는 일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내걸고 계급투쟁을 고취한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도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이 더 긴박하고 절실한 문제였을 수 있었다.

민족 모순 문제...소수민족 결속하려 ‘중화민족' 내걸어

1950년대 중공 정부는 스탈린의 ‘민족’ 기준에 따라 여러 소수민족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1964년 중공정부는 중국에 존재하는 53개 소수민족의 실체를 인정했고, 이후 두 개의 소수민족이 추가됐다. 또한 중공 정부는 지속적으로 소수민족의 자치구를 늘려갔다.

<낡은 유물들을 모두 모아놓고 불을 지르는 문혁 시기 홍위병의 모습/ 공공부문>
1947년 5월 네이멍구자치구가 처음 만들어진 후, 1990년까지 157개의 크고 작은 자치 단위가 들어섰다. 현재 중국엔 네이멍구자치구, 신장위구르자치구(1955), 광시(廣西)장족(壯族)자치구(1958), 닝샤(寧夏)회족자치구(1958), 티베트 자치구(1965) 등 다섯 개의 성(省) 단위 자치구가 만들어졌다.

건국 당시부터 소수민족 문제는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존폐를 결정하는 중대사였다. 과연 56개 민족들을 결속해서 14억 인구의 통일 국가를 유지하는 가장 효율적 방법은 무엇일까? 마침내 중공정부가 찾은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해답은 “중화민족(中華民族)”의 재건이었다.

<“중국의 소수민족 분포도”/
https://blog.richmond.edu/livesofmaps/2017/03/03/the-map-of-chinas-ethnic-groups/>

시진핑, 중국공산당 100주년 연설서 “중화민족” 44회 밝혀

2021년 7월 1일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1953- ) 주석은 “중국공산당 성립 100주년 대회”에서 200자 원고지 40장을 넘는 장문의 강화문(講話文)를 낭송했다. 전문에 걸쳐 시 주석은 “중화민족”을 44회, “중국인민”을 32차례, “전국 각족(各族, 각각의 민족) 인민”을 네 차례 사용했다. 비슷해 보이지만, 이 세 단어는 엄격히 다른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중국 헌법 서언(序言, 전문)엔 “중화인민공화국은 ‘전국 각족 인민’이 공동으로 창조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 명기돼 있다. “전국 각족 인민”이란 중국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56개 민족의 구성원들을 지칭한다. 반면 “중국인민”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국가 권력을 장악한” 주권자를 의미한다. “전국 각족 인민”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의 구성원을 지칭하는 종족적(ethnic) 개념인 반면, 중국인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을 가리키는 정치적 개념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양자는 중국인의 두 가지 정체성을 보여준다.

문제는 “중화민족”의 모호한 의미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일적 다민족 국가 “인데, “중화민족”은 대체 무슨 뜻일까? 중화대륙에 살고 있는 한족, 장족(壯族, 1692만), 회족(回族, 1058만), 만주족(1038만), 위구르족(1007만), 묘족(苗族, 942만)은 공히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다. 한국인 모두가 “우리 민족”이라 굳게 믿고 있는 조선족(233만) 역시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다. 중국밖에 거주하는 해외 다양한 중국계 화교도 모두 “중화민족”의 핏줄이다. 요컨대 중화민족이란 초민족적인 “중국인”의 집합체 정도를 의미한다.

2018년 헌법 수정안에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삽입

그런 논리대로라면, 유럽인 모두를 지칭해 “유럽민족”이라 부르고, 다인종의 미국이 미국인 모두를 지칭해 “아메리카 민족”이라 부를 수도 있다. 물론 오늘날 중국에선 그 누구도 유럽인 전체를 “유럽민족”이라 부르거나 미국인 전체를 “아메리카민족”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중국의 영도자들은 거리낌 없이 초민족적 “중화민족”의 개념을 주야장천 상용한다.

급기야 2018년 3월 11일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수정안”은 헌법 전문에 분명하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한다!”는 구절이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전엔 단지 “부강하고 민주적인 문명의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만을 목표로 내세웠는데, 이제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국가의 최고 목표가 됐다. 중국인민이 아니라 중화민족이 민족중흥의 주체로 우뚝 선 셈이다. 이제 중화인민공화국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보단 “중화민족의 국가”로 재정립됐다.

<2021넌 7월 1일,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포스터: “중국공산당이 없으면, 새로운 중국도 없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도 없다!”>
“중국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중화민족”

“중화민족”의 연원을 파고 들면 1920년대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가 쓰기 시작한 “국족(國族)”이란 개념을 만나게 된다. 량치차오는 인종, 문화, 언어, 관습을 불문하고 중국 영토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중화민족”으로 묶는 “국족”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량치차오의 “국족”은 본래 이질적인 습속의 상이한 민족도 장시간 한 나라에 살며 유전자를 섞으면 결국 하나의 “민족”이 될 수밖에 없다는 궤변이었다.

근대 민족국가의 기본 전제를 부정하는 억지 주장이지만, 그 정치적 효용은 매우 크다. 가령 시진핑의 강화문을 보면, “중화민족”의 정치적 함의가 그대로 드러난다.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영도가 지속되고, ‘전국 각족 인민’의 긴밀한 단결이 이어진다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의 전면 건설 목표는 필히 실현될 것이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필히 실현될 것입니다. 위대하고 영광되고 올바른 중국공산당 만세! 위대하고 영광되고 영웅적인 중국인민 만세!”

결국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 “전국 각족 인민”은 단결하라는 강력한 요구다. 14억 인구의 비대한 대륙국가을 유지하기에 “중화민족”만큼 편리한 개념은 없다. 문화, 언어, 습속이 다 다른 상이한 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편의적 개념이 바로 “중화민족”이기 때문이다.

한족 91.5%..소수민족에겐 침략과 식민화 과정

1920년 9월 3일 공산당 입당 이전 마오쩌둥은 후난성의 “대공보(大公報)”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들이 모두 독립국을 세워야 하며, 나아가 중국의 27개 지방들이 독자적으로 27의 국가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30년대 초반까지도 마오쩌둥은 소수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1931년 마오쩌둥이 장시(江西) 루이진(瑞金)에 건립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헌법대강(憲法大綱)>> 14조는 중국 내 소수민족들의 자결권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국을 건립할 수 있는 소수민족의 권리까지 승인한다. 1944년부터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태도가 달라진다.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은 티베트를 포함해 중국 지배 하 소수민족 지역을 모두 중국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 레닌은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한 3단계 전략을 제시했다. 1) 집권 이전엔 소수민족에게 자결권, 특히 분리(分離)의 권리를 약속한다. 2) 집권 후엔 소수민족의 분리주의는 금지하고 자치권만을 보장한 후, 동화정책 펼친다. 이후 3) 중앙집권이 강화되면, 소수민족의 전통적·종교적·문화적 활동들을 모두 금지시킨다. 크게 보면, 중공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 역시 레닌의 3단계 전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소수민족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중국공산당이 선전하듯 봉건계급의 착취와 제국주의 침탈이 소멸된 “인민 해방”의 실현이었을까?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관에 따르면, 그 과정은 지속적인 문명화(文明化, civilization)의 장정(長征)이었다. 반면 주변부 소수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그 파란만장한 역사는 침략과 복속의 연속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과 사회주의 혁명의 추진은 소수민족에겐 식민화(colonization)의 과정으로 인식될 수 있다.

공산주의 이념, 소수민족 전통과 습속은 박멸 대상

사회주의자들은 집산화(collectivization)를 통한 재분배를 추구한다. 쉽게 말해, 가진 자의 재산을 몰수한 후 모두에게 균등하게 나눠준다는 이념이다. 그러한 과격한 사회 재편의 논리를 가진 자라면, 똘똘 뭉쳐 자기들만의 전통과 습속에 따라 살아가는 소수민족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정권 아래선 소수민족의 지배구조, 문화전통, 종교관념, 생활습속까지 박멸의 대상이 된다. 억압과 착취에서 인류를 해방시킨다는 공산주의 이념이 또 다른 제국주의의 논리가 된 소이가 거기에 있다.

근대 서구 열강이 문명화의 이름으로”백인의 책무”를 주장하며 아시아-아프리카의 “비문명 사회”를 식민화했듯 중국공산당은 공산화의 명분으로 “한족(漢族)의 책무”를 떠안고 55개 소수민족의 영토를 차례차례 접수하고, 복속시켰다.

<절대 다수의 한족(漢族)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의 단체 사진. 오늘날 중국에서 중화민족 혹은 중국민족은 이 모든 소수민족들을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https://www.ifreesite.com/population/ethnic-group-in-china.htm>
원론으로 돌아가서 묻지 않을 수 없다. 56개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가 어떻게 “중화민족”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나? 이 질문에 답하려면, 중국 전체인구의 91.51% 정도가 한족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열 명 중 아홉 명이 “중화민족”에 동의한다면, 나머지 한 명의 민족적 정체성 따위는 쉬이 무시될 수 있다. 결국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중화민족”이란 개념이 널리 상용되고 있음은 중국공산당의 통치가 “한족 중심”의 “다수 지배(majority rule)”임을 여실히 보여준다.<계속>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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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파괴 금지” 중국 헌법 1조가 부리는 무소불위 마법

<“빈과일보”가 폐간된 2021년 6월 26일 최종판을 들고 시위하는 홍콩의 청년들/
https://therisingyouth.info/hong-kong-bids-farewell-to-apple-daily/ >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64회>

지난 6월 24일 홍콩의 자유언론 <<빈과일보>>가 중국공산당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됐다. 전 세계가 이구동성으로 중공 정부를 규탄하자 중공 기관지 <<환구시보>>(영문판, The Global Times)는 “<<빈과일보>>는 폐간됐지만, 홍콩의 언론자유는 건재하다”며, 내정간섭을 멈추라 부르짖었다. 언론사를 문 닫게 하고 언론인들을 줄줄이 잡아가면서 대체 무슨 근거로 홍콩의 언론 자유가 건재하다 주장을 하고 있나? 그 주장의 논리적 근거는 놀랍게도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이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총강 제1조는 “그 어떤 조직이나 개인의 사회주의 제도 파괴도 금지된다”고 명기하고 있다. 중공 정부는 <<빈과일보>>가 중국 헌법이 허용하는 언론의 자유를 넘어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활동을 일삼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빈과일보>>는 최근 10년 간 홍콩의 반중 시위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기사를 집중적으로 게재해 왔다. 중공 정부는 중국 헌법 총강 제1조에 따라 사회주의 제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빈과일보>>를 합법적으로 폐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 헌법에 근거해 ‘빈과일보’ 폐간 당연”

서구의 비판자들은 “미니헌법”이라 불리는 홍콩 <<기본법(基本法)>>을 근거로 홍콩의 자유를 옹호하지만, 그 역시 간단하지 않다. 홍콩은 기본법을 통해서 외무(外務)와 군사안보를 제외한 모든 방면에서 자율권을 보장받지만, 특별행정자치구로서의 홍콩의 지위는 중국헌법 제31조에 근거하고 있다. 홍콩 기본법 제22조는 중앙인민정부가 홍콩의 내치에 개입할 수 없도록 명시하지만, 제158조에 따르면 전국인민대표회의 상임위는 홍콩기본권에 대한 유권해석을 내릴 수 있다. 교묘하게 감춰져 있었지만, 1997년 반환 이후 홍콩의 자치 근거는 언제나 중국의 헌법이었다.

<“경찰은 폭력을 중단하라! 언론 자유를 사수하자!” 2019년 홍콩 시위대의 모습/
https://niemanreports.org/articles/18-weeks-and-counting-how-hong-kong-media-is-covering-the-mammoth-protests-and-fighting-for-its-own-survival/>

덩샤오핑은 “일국양제”의 원칙을 내세워 국제 사회에 적어도 2047년까지 홍콩의 자율권을 보장했건만, 시진핑은 19세기적 “자강의 중국몽”을 내세워 그 약속을 깨는 조치를 이어가고 있다. 이미 중공 정부는 “일국양제”의 외피를 벗어던졌다. 국제 사회의 비판에 더욱 강경하게 맞서며 홍콩의 탈자유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 헌법이며, 전체주의적 대민지배와 전일적 일당독재를 정당화하는 중국공산당의 레닌주의적 당헌(黨憲)이다. 세계인의 상식이지만, 중국은 공산혁명의 최종 목적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고 박탈할 수 있는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그럼에도 지난 반세기 미국은 중국의 정치체제는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묻지 마!” 경제 공생을 추구해 왔다. 닉슨의 외교노선은 경제적 자유화가 정치적 민주화로 이어진다는 나이브한 낙관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인류는 현재 “중국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닉슨, 중 경제 자유화가 민주화로 이어진다고 낙관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1890-1969) 행정부(1953-1961)에서 8년 간 부통령을 역임했던 닉슨(Richard Nixon, 1913-1994)은 당시 강경한 반공 투사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닉슨과는 달리 아이젠하워는 상업이 경제적 번영을 보장하며 공산독재 권력에 대한 인민의 저항을 추동한다는 개방적 사고 하에 한국전쟁 직후부터 중국과의 무역 및 국과 정상화를 추진하려 했다. 다만 당시의 완강한 반공 분위기를 뚫을 수 없어 그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1959년 미국 상원의 외교위원회는 이른바 “콘론 보고서(The Conlon Report)”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었다. 이후 1966년 미 상원은 “고립 없는 봉쇄(containment without isolation)” 전략에 따라 보다 적극적으로 대중국 포용정책의 가능성을 검토했다. 물론 냉전의 정점에선 중국과의 대화가 요지부동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닉슨은 대통령 취임 2년 전인 1967 10월 월남전의 절정에서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지에 “베트남 이후의 아시아(Asia After Viet Nam)”란 중요한 기고문을 실었다. 닉슨은 대중 봉쇄정책은 미국에 막대한 군사비용을 초래할뿐더러 핵전쟁의 위험을 고조시킨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그는 “고립 없는 봉쇄”보다 더 적극적인 “압박과 설득”(pressure and persuasion)의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아시아의 비(非)공산 국가들이 미국의 지원 아래서 경제 번영과 군사 안보를 확립할 때, 중국이 침략 야욕을 버리고 이념적 고립 상태를 벗어나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논지를 전개했다. 이후 닉슨의 외교전략이 그대로 담긴 적극적인 데탕트의 청사진이었다. (Richard M. Nixon, “Asia After Vietnam,” Foreign Affairs, Vol. 46, [Oct. 1967]).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닉슨은 헨리 키신저에 밀명을 내려 적극적으로 중국과의 대화를 추진토록 했다. 닉슨은 37대 대통령에 오른 직후,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은밀히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혁의 광풍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중국이 소련과의 군사충돌로 외교적으로 고립됐던 바로 그 위기의 모멘트를 파고들었다. 빈곤의 트랩에 빠진 비대한 대륙국가 중국을 슬그머니 당겨서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유인하려는 외교 작전이었다.

1971년 4월 10일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 차 일본 나고야에 있던 미국의 선수단이 특별 초빙을 받아 베이징을 방문하는 이른바 핑퐁외교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이어지는 미·중 물밑대화 끝에 닉슨은 1971년 7월 15일 텔레비전 생방송으로 이듬해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라 발표했다.

< 1972년 2월 21일 베이징에서 1시간가량 진행된 마오쩌둥과 닉슨의 회담. 왼편부터 저우언라이, 통역 탕원성(唐聞生, 1943- ), 마오쩌둥, 닉슨, 키신저/공공부문>
1972년 2월 21-28일 중국을 직접 방문한 닉슨은 베이징, 항저우, 상하이를 돌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2월 21일 닉슨은 중국공산당 총서기 마오쩌둥과 1시간 동안 회담을 했다. 그 짧고도 강렬한 만남으로 닉슨은 한국전쟁 이래 적대적인 미·중 관계를 청산했다. 미국 외교사 최고의 반전(反轉)이자 냉전의 빙하를 녹이는 세계사적 대전환이었다.

1972년 2월 21일,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난 미국의 37대 대통령 리차드 닉슨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긴다.

“오랜 세월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나의 입장은 마오 주석 및 저우 총리와는 완전히 달랐소. 이제 세계의 상황이 바뀌었음을 인정했기에, 한 국가 내부의 정치철학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을 이제 우리가 인정하기에 오늘 이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소. 중요한 것은 [한 국가의 정치철학이 아니라] 세계에 향한, 또 우리 미국에 대한 그 나라의 정책입니다.” (<<닉슨회고록 The Memoirs of Richard Nixon>>에서)

“정치철학”의 차이 따윈 일단 덮어두고 대외 정책의 유·불리만을 근거로 국가 관계를 재정립하자는 발상이었다. 냉전 시기 이데올로기 대립을 종식하고 실용적인 윈윈의 경제 공존을 모색하는 데탕트 외교 전략의 시작이었다. 닉슨의 이 한 마디가 이후 반세기 미국의 대중 정책을 결정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닉슨의 방중을 성사시킨 반대급부로 마오쩌둥은 미국의 승인을 얻어 유엔 안보위원회에 가입하는 외교적 쾌거를 거머쥐었다.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타이완 공화국으로 국명이 바뀌어 구석으로 밀려났다. 닉슨의 적극적 구애 끝에도 마오는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및 경제적 협력 관계의 체결까지 나아갈 순 없었다.

결국 마오 사후 2년이 지난 1978 12월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시대를 개창했다. 대기근의 참상과 문화혁명의 광기를 겪은 후였지만 중공정부는 공산주의 이념 자체를 비판하거나 폐기하지는 않았다. 대신 레닌주의 정치체제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적당히 뒤섞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 명명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가 없지만, 덩샤오핑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외치며 “맨발로 미끄러운 강바닥을 조심조심 건너자!” 했다.

<1972년 2월 방중 당시 만리장성에 간 닉슨과 그의 부인/ 공공부문>
1979년 1월 29-2월 5일 덩샤오핑은 미국을 방문해 본격적으로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그해 3월 1일 워싱턴과 베이징에 양국의 대사관이 설치됐다. 일사천리로 전개된 미·중 관계의 정상화는 좋든 싫든 닉슨 패러다임의 실현이었다. 덩샤오핑은 닉슨의 대중 외교 전략을 붉은 카펫처럼 밟고서 개혁개방의 물꼬를 텄기 때문이다.

“미국, 중국의 도광양회 전략에 말려들었다”

2020년 7월 23일 미국 국무부 장관 폼페이오(Mike Pompeo, 1963- )는 캘리포니아 요르바 린다(Yorba Linda)의 닉슨 대통령 도서관/박물관을 찾아 미국 대중정책의 일대 전환을 알리는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지난 반세기 미·중 관계를 지배해 온 미국 외교의 기본 노선을 부정하고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폼페이오의 연설에 앞서 미국 정부의 중요 인물 3인이 나서서 중국을 먼저 때린 바 있다. 중국을 타격하는 1번 타자는 국가안보고문 오브라이언(Robert O’Brien, 1966- )이었다. 그는 2020년 6월 24일 아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와 글로벌 야심”을 고발했다. 그는 미국의 정가, 학계 및 언론계는 암묵적으로 중국의 경제적 자유화는 중국의 정치적 민주화를 추인한다는 근거 없는 낙관 위에서 2001년 중국을 WTO에 가입시키고, 중국 내 인권유린과 지적 재산권 침해에 눈을 감아왔다며 포문을 열었다.

제2번 타자는 FBI국장 레이(Chris Wray, 1966- )였다. 그는 2020년 7월 7일 중국공산당의 첩보행위가 미국에 대한 경제적·안보적 위협”을 경고하면서 놀랍게도 중국이 1억 5천만 미국인의 신상정보를 해킹했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법무부장관 바(William Barr, 1950- )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7월 16일 미시간의 포드(Gerald R. Ford) 대통령 기념관에서 세계 경제와 정치질서를 위협하는 중국정부의 전체주의적 야욕을 비판했다. 그는 덩샤오핑의 영악한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에 순진한 미국의 전략가들이 말려든 결과, 미국이 전체주의 국가 중국의 경제적·기술적 웅비에 복무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 4번 타석에 들어선 폼페이오는 앞선 3인의 연설이 “지난 수십 년간 쌓인 미·중 사이의 심대한 불균형”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치밀하게 기획된 이념전의 포탄이라 정의했다. 이어서 그는 미국의 경제, 미국의 자유, 나아가 세계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위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중국공산당의 행동방식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잠재적 동맹국들을 소외시키고, 국내외의 신뢰 기반을 무너뜨리며, 지적 재산권과 예측 가능한 법의 지배를 거부하는” 등 구소련이 범했던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이 구소련을 붕괴시켰듯 중국공산당의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대중(對中) 이념전쟁의 선전포고가 아닐 수 없었다.

<2021년 7월 1일 호주 멜번에서 개최되는 반중국 시위의 포스터. 호주에 체류하는 반중 아티스트 “Badiucao” 트윗/
https://twitter.com/badiucao/status/1410090858607628289/photo/1>

이어서 등장한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 전략 역시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최근 미국 언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일본, 인도, 호주와 함께 쿼드(Quad) 협의체를 발족시키고, 타이완과의 경제협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한 중국 기업에 대한 트럼프 정권의 블랙리스트를 더 확장하고, 틱톡(TikTok)을 포함한 중국 앱(app)에 대한 금수 조치를 이미 강화했다.

반세기전 닉슨은 중·소 분쟁의 틈을 파고드는 기민한 쐐기전략으로 냉전의 수렁에서 극빈의 나락에 떨어진 중국을 바깥세계로 끌어당겼다. 자유무역과 경제적 연대가 냉전의 빙하를 녹이고 독재의 발톱을 뭉갠다는 닉슨의 확신은 탈냉전을 종식하는 세계사적 변화를 추인했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그러나 중국 정치의 자유화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닉슨 방식의 외교 전략은 실효성을 잃었나?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이어지는 대중 강경노선은 닉슨 패러다임의 종언을 상징한다. 돌이켜보면, “정치철학”은 묻지 않고 “정책”의 유·불리만을 따지는 실용주의 외교노선 역시 냉전 시기의 로맨티시즘이 아닐까. <계속>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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