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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위험한 직업, 로마 황제…누군가는 왕관의 무게에 짓눌렸다

doll eye 2021. 2. 9. 17:58

허연의 인문학이 필요한 시간

"고대 역사는 로마로 흘렀다"
로마의 발전과 쇠퇴가 인류사 흥망 결정한 열쇠

무소불위 권력자 로마 황제, 사실은 늘 불안에 시달려
황제 62%가 자살하거나 전투 중 사망·암살당해

전략가 티베리우스 황제, 한편으론 인간 혐오 심해

아우구스투스는 실용주의자
트라야누스는 다문화주의

포퓰리스트 베스파시아누스
사람 소변에도 세금 매겨

  • 허연 기자
  • 입력 : 2021.02.09 16:55:48 수정 : 2021.02.09 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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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K포커스 ◆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객관주의 역사 서술로 유명한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트 폰 랑케는 "고대의 모든 역사는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는 로마라는 호수에서 흘러나왔다"는 말을 남겼다. 로마제국을 이해하는 일은 고대에서 근대까지 인류사의 전모를 확인하는 일과 동일하다. 유럽은 물론 아시아, 북아프리카의 모든 문명과 언어와 종교와 정치가 로마에서 융합됐으며 그것들이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면서 세계사의 틀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의 시작과 성장, 발전과 쇠퇴와 소멸은 단순한 지역의 역사를 넘어 인류사의 전모를 보여주는 하나의 축약본이다. 로마의 흥망성쇠를 결정한 중요한 요인은 황제였다. 황제가 누구냐에 따라, 어떤 정책을 펼치고 어떤 판단력을 보여주었냐에 따라 로마의 운명은 결정됐다. 대제국 로마를 다스리는 황제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이기도 했다. 그들은 어느 순간 권좌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혈통 세습을 원칙으로 하지 않았기에 후계자 문제를 놓고 평지풍파에 시달려야 했다.

 


제국의 특성상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속주들과 이민족의 반란을 관리해야 했고, 원로원과의 껄끄러운 관계도 이어나가야 했다. 그래서일까. 역대 로마 황제 69명 중 43명(62%)이 암살이나 자살 혹은 전투 중에 사망했다.

로마 황제는 로마라는 드라마의 완성자였다. 그들의 명멸이 곧 로마를 세웠고, 또 무너뜨렸다. 로마의 철인(哲人) 황제라고 불리는 아우렐리우스는 왕위를 아들 콤모두스가 아닌 총애하는 장군 막시무스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인품과 능력이 천박한 콤모두스에게 보위를 물려줄 경우 로마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콤모두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 다음 막시무스를 노예로 팔아넘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 도입부 줄거리다.

 

로마제국을 통치했던 황제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 중에는 별의별 인물이 다 있었다. 아우렐리우스처럼 철학자 스타일의 황제가 있었는가 하면, 네로나 콤모두스 같은 폭군도 있었고, 바보 황제라고 불린 클라우디우스 같은 사람도 있었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실용적인 황제였다. 황제는 `통치자가 아니라 정치가`라고 생각한 그는 원로원을 교묘하게 이용해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슬그머니 정치 형태를 바꾸었다. 스스로 전쟁에 뛰어들 용기는 없었지만 인재를 보는 눈이 있었기에 용병술로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그는 한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활용할 줄 아는 정치의 달인이었다.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이렇게 묘사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눈에서 성스러운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뚫어지게 바라볼 때 그 사람이 마치 태양에 눈이 부신 듯 고개를 떨어뜨리면 무척 기뻐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황실 인물도 이탈리아인도 아니었다. 그의 등장은 로마의 실용주의적 면모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변방 출신이었던 그는 소박함과 정숙한 이미지로 안정된 통치를 펼쳤다. 트라야누스 가도, 트라야누스 포룸 등 건설 사업을 벌이면서 평화로운 시대를 이끌었다.

티투스는 2년 동안만 통치했지만 그의 명성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의 리더십은 폼페이 화산 폭발 때 여실히 드러났다. 대재앙이 일어나자마자 티투스 황제는 곧바로 현장으로 가 구조활동을 주도했고,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는 부정부패를 용납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목욕탕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목욕탕에서 직접 국민을 만났다.

 

왼쪽부터 로마제국을 통치했던 황제 셉티미우스, 콘스탄티누스, 트라야누스, 아우렐리우스, 하드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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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는 양면성을 지닌 황제다.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성벽`을 건설하는 등 제국의 방위에 큰 힘을 쏟아 제2의 창건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그는 로마보다 그리스풍을 더 좋아하고, 동성애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등 모순적인 면모가 많다.

티베리우스는 비극적이고 어두운 성격을 가진 황제였다. 그의 인간 혐오는 온갖 잔인한 폭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영리한 측면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로마 영토를 넘보는 게르만족의 행동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단지 라인강을 건너지 못하는 정도로만 관리했다. 만약 게르만족과 일전을 위해 대군을 출동시켰다면 원로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의 입지는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힘을 아끼면서 라인강이라는 지형적·심리적 저항선을 효율적으로 지켜낸 전략가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황제였다. 특유의 통치력으로 자신 외 3명의 황제를 완전히 통제하였고 내전으로 100년 넘게 혼란스러웠던 로마 정국을 안정적으로 만든 첫 번째 로마 후기 황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고안하고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완성된 이 분할통치 시스템 때문에 동서로마는 점차 분리의 길을 걷게 된다.

마지막으로 동서로마를 잠시나마 통일시킨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기억할 만한 황제다. 그는 로마제국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 나아가 인류의 역사까지 뒤바꾼 황제로 남을 만하다. 그는 세계 60억명 인구 중 20억명이 믿는 종교를 지구상에 뿌리내리게 한 이다. 그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언한 행위는 인류 역사를 바꿨다. 그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의 13번째 사도라 불리며 후기 로마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라 여겨진다. 군사적 능력까지 갖춘 장수였던 그는 막센티우스나 리키니우스 같은 정적들을 물리치고 지금의 이스탄불에 자신의 이름을 본뜬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만들어 로마의 새로운 수도로 삼는다.

그래도 역시 이야깃거리는 괴짜 황제들이다. 악행으로 유명한 네로는 의외로 시적 감수성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가 쓴 책에는 네로의 성장기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소년 시절 네로는 대부분의 인문 교양 분야를 공부했지만, 철학책은 읽지 않았다. 그의 스승들이 미래의 통치자에게 철학은 적당한 학문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로는 시와 음악 쪽으로 관심을 돌렸고, 열정적으로 시를 썼다. 그는 점점 냉정하고 논리적인 지도자보다는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시인이자 음악가의 감성을 가진 인물로 성장했다. 그가 원한 건 위엄이나 존경이 아닌 대중의 갈채였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경제정책에 있어 로마 최고의 황제였다. 전쟁과 대화재로 망가진 로마를 재건해야 할 책무를 가지고 왕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는 토지를 소유하고도 집을 짓지 않는 사람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정책까지 펴가며 대중의 마음을 얻었고 로마를 재건했다. 로마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콜로세움을 세운 주역이기도 하다. 부족한 로마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돈을 모았던 그는 사람의 소변에도 세금을 매긴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소변은 가죽제품을 연마하는 데 중요한 재료였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이 이 세금에 불만을 표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소변세로 걷은 금화에 코를 갖다대고 "돈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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