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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핫이슈] 한국 리버럴의 외침 "나도 고발하라"

doll eye 2020. 2. 14. 10:16






한국 사회에서 제일 정의가 모호한 단어 하나를 들라면 `진보`를 꼽고 싶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 보수의 몰락이며, 위기며 하는 담론은 수도 없이 나왔다. 몰락했을지언정 보수는 그래도 실체는 있다. 그런데 진보는 실체를 모르겠다.

대관절 대한민국에서 정치세력으로서의 진보는 어느 당인가. 더불어민주당인가, 정의당인가. 나는 이들을 정치진영 구분에서 좌파로 분류하는데는 동의하지만 진보로는 인정 못하겠다. 아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선 진보를 보통 `리버럴`이라고 한다. 이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리버럴은 리버럴리즘에서 나온 말이고 직역하면 자유주의다. 자유는 진보뿐 아니라 보수의 핵심가치이기도 하다. 자유시장경제가 보수 아닌가. 개인에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최대 자유를 보장한다는 아이디어에서 리버럴리즘은 시작됐다. 존 로크는 국가는 개인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작동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믿음은 아담 스미스를 거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같은 사람들로 이어졌다. 이들은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만 정부가 나서 현실의 불평등을 평등하게 만드는데는 반대한다. 자유가 우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조 리버럴이다. 그러나 오늘날 누구도 스미스나 하이에크를 `리버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미국에서 리버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뿌리를 내린 `큰 정부`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정당으로는 민주당이 근접해 있다. 이들은 양도불가능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인정하되 너무 지나친 현실의 불평등을 개선시키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믿는다. 현대 복지국가를 가능케 한 이념이다.

영미권 학자들은 개념상 혼란을 막기 위해 최소 정부를 지향하는 리버럴을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생활양식으로서의) 리버럴`로, 큰 정부를 선호하는 리버럴을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진보적) 리버럴`로 별도 규정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선 `리버럴`하면 프로그레시브 리버럴로 알아먹는다. 모두스 비벤디 리버럴은 `보수`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중요한 것은 무슨 리버럴이 됐든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근대의 정신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먼저고 집단은 다음이다.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이 지점에서 털끝만한 차이도 없다. 사유재산권과 행복추구권, 이를 실현하려는 양도불가의 개인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리버럴이 아니다. 그 자유의 기본 아이템 중에는 비판과 표현의 자유가 포함된다. 비판에 대해 열린 자세 그것이 리버럴의 기본 생활모드여야 한다.

진보를 자칭하는 한국의 정치세력들을 좀 보라. 이들만큼 피아 구분이 경직되고 외부에 폐쇄적인 진보 정치세력을 세계 어디에서 찾을수 있으려나. 그들은 내부 비판에 대해서는 더 닫혀 있다. 진중권, 김경률 같은 문제 제기자에 대해 ‘배신자` `사문난적`의 낙인을 찍고 족보에서 지워버린다. 모두가 `대깨문` 정신으로 끝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명의 사문난적이 나왔다. 노동·인권 방면 연구활동을 해 온 진보성향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가 최근 경향신문에 더불어민주당의 퇴행을 꼬집는 글을 기고했다. 제목이 `민주당만 빼고`다. "많은 사람들의 열정이 정권 유지에 동원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한 줌의 권력과 맞바꿔지고 있다." 그러면서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고 했다. 비판 참 통렬하다. 난 여기서 한국 리버럴리즘의 원형질을 본다. 내편, 네편을 가리지 않는 비판정신이다.

민주당은 임 교수와 경향신문의 칼럼게재 담당자를 선거법 위반 혐의로 서울남부지검에 고발했다. 나는 이것이 `우리는 리버럴 아니다`는 민주당의 자기정체성 고백으로 들린다. 그에 대해 진짜 리버럴 성향의 여러 지식인들이 분기탱천하여 너도나도 "나도 고발하라"는 취지의 글을 올리고 있다. 한국 리버럴은 다 죽은줄 알았더니 그래도 몇몇은 살아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한국이라 해서 왜 진짜배기 리버럴이 없겠나. 치열한 젊은 시절을 보내고 누구 못지 않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 현실 정치의 모순을 지각하지 못할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현실정치가 `반(反) 리버럴적` 사고구조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는 바람에 이들이 마음붙일데가 없었던 것 아니겠나. 말하자니 피곤하고 싸우자니 낙인찍힐것 같고 해서 침묵해온것 아니겠나. 그러나 한국 리버럴은 오랜 침묵을 떨치고 일어서야 한다. 진짜 리버럴이 전면에 나설때 지금은 화석화되어버린 진보라는 단어에 다시 생기가 감돌 것이다. 그때는 큰 심리적 저항없이 현실 정치를 보수·진보로 구획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좌우가 맞다.

[노원명 논설위원]


***** 13일 민주당이 고발취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