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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흐름

doll eye 2019. 5. 6. 12:21

철학의 흐름


이 글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의 2부를 구성하기도 하지만 독자적인 포스트로도 읽혀질 수 있을 거란 판단

입니다.

 

구조주의 사유체계를 알기 위해서는 플라톤에서 포스트 모더니즘까지 발전해온 서양 철학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포스트 모더니즘 이전까지의 서양 정신의 흐름이 이해되지 않고서 불쑥 구조주의 사유가 도출되어 나왔다는

가정 자체가 어불성설인 까닭입니다.

 

우선 살펴보아야 할 것은 고대 그리스의 두 거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노선입니다.

 

이 두 거인은 동양정신과 대비되는 특유하고도 독창적인 "서양정신"의 정초자들로 그 위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대하지만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만을 간추려 설명하려 합니다.



아래 글은 네이버 지식인에서 제가 어떤 이의 질문에 대답한 내용입니다.

 

제가 드리는 답변은 단적으로 "왜 플라톤이 서양철학 아버지"이며 화이트헤드가 말한바 "모든 철학이

플라톤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로티의 표현대로 "서양 정신의 생각 전체를 최초로 생각해낸 사람"

인지를 설명드리는 것입니다.


즉 어찌하여 그렇게나 플라톤이 위대한가를 말씀드리는 것이죠.

우선 생각해야할 것은 플라톤과 그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죽기까지 단 한권의 책도 남기지 않았답니다.

대개 그의 사상은 플라톤의 "대화편"속에서 언급되는데 이것이 이쪽의 전문가들에게는 매우 골치 아픈

문제로 작용합니다.

즉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이론이고 어디서부터가 플라톤의 이론인지 그 구분이 영 불분명하다는 것이죠. 예컨대 플라톤 하면 떠오르는 것이 "이데아론"이지만 이 이데아론조차 그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제 자신의 이데아론이 가지는 난점을 발견한 플라톤은 말년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젊은 소크라테스의 이데아론을 반박하는 노인 파르메니데스를 서술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란 플라톤에 의해 날조된 가공인물"이라는 설까지 있답니다.

아마 낭만주의자들을 위해서라면 신화속의 인물인 소크라테스를 남겨두는 것이 좋겠지만 전문 철학계의

일반적인 정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함께 묶어 "플라톤의 이론"으로 취급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

습니다.

따라서 오늘 제 답변에서 언급하는 플라톤은 학계의 관례대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위대함에 관한 것

입니다.

그 위대함은 다름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가 가진 속뜻과 일맥상통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이 말이 의미하는바 "주제나 분수를 알자"쯤으로 아주 쉽게 생각하는데 사실 이

말이 가지는 뜻은 경천동지한 것이며 그러기에 감히 소크라테스를 4대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부족

함이 없는 위대한 명언입니다.

소크라테스=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이 탐구해온 것은 "세계나 우주와 사물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만물은 ~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그들이 주장한 것이었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들을 탐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토를 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오히려 전자의 문제보다 더 핵심적일 수 있는 다른 문제는 바로 "인간을 아는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주장하죠.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만일 파란 렌즈의 안경을 끼고 붉은 장미를 본다면 그 장미는 본래의 색깔이

아니라 보라색으로 보일 것입니다.

즉 그 장미의 색깔이 원래 붉든 말든 나에게 보여지는 건 언제나 보라의 장미에 관한 지식을 뿐입니다.

곧 우리가 탐구하는 세계란 본래적인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 인간에게서 여과된 세계"입니다.

크라테스는 인간을 탐구하는 것- 세계가 그냥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인간의 "선천적 안경"에 의해 여과

되어 투영되는 세계라면-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가진 "선천적 안경"의 기능과 용도와 규격을 탐구

하는 것이야말로 세계 자체를 탐구하는 것보다 우선 선행되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세계를 탐구하는 것은 물론 훌륭한 주제이지만 그 이전 세계를 그 세계이게끔 조망하는 인간에 대해서

먼저 알자는 것 "너 자신,나 자신,우리 인간 자신을 먼저 알자."가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의

철학적 속의미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세계에서 인간으로 즉 "외부에서 내부로의" 철학적 관점 전환을 이끌어낸 것이죠.

이런 근본적인 관점 전환은 서양철학사에서 단 세번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두번은 데카르트에 의한 "신에게서 인간으로"의 관점 전환이고, 마지막이 니체에 의한 "보편적

인간에서 구체적 인간으로"의 관점 전환입니다.)


마치 물리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관점을 전환했으며 아인슈타인이 "절대적

우주에서 상대적 우주"로의 관점전환을 이루어냈듯이 말이죠.

그와 더불어 플라톤과 함께 철학이 탐구해야할 세 가지 목록이 단숨에 결정지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변함이 없고요.

그래서 소크라테스=플라톤은 화이트헤드나 로티가 평가한 대로의 위대함을 지금까지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 세가지는 첫째가 세계이고, 둘째가 인간이며, 마지막이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첨언하자면 플라톤이라는 인물과 서양정신의 시발점은 동시동연적입니다.

 

여기서 동양에서 말하는 "인간"과 서양에서 말하는 "인간"의 차이점을 말해야 되겠습니다.


플라톤과 동시대인이라 할 만한 "석가모니"나 "노자"에게서 참다운 인간이란 세계속에 스스로 동화되어

인간 자체가 세계 자체와 동일해지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이에 반해 서양의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은 세계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세계 내의 다른 존재자와는 "류"가

틀린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실재로서의 "인간"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인간은 그것 자체로 이미 고유한 존재라는 "사고"가 서양 정신의 근저를 관통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플라톤이 서양 정신의 아버지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학문의 아버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세계 또는 세계 내의 다른 것과 유별나게 차이지는 인간만의 독자적인 개성을

다름 아니라 "이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성"이란 곧 추상력 즉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입니다.


논리적 능력은 한마디로 동양에서는 완벽한 사각지대입니다.

내가 알기로 동양의 지성 중에서 논리에 대한 핵심을 꿰뚫고 있었던 사람은 "한비자"가 유일입니다.

기타 인도의 "니야야 학파"나 공손룡,혜시같은 이들도 이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들은 논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아래의 글은 제 포스트 "데카르트 스토리"에서 초보적인 "논리적 추리"가 무엇인지 서툰대로 설명한 것입니다.

 



예컨대 오늘 인천에서 부산까지 가는 여객선이 오직 한 척뿐이고 그 배에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 승선했는데 저녁 뉴스를 보니 그 객선이 침몰해 전원 사망했다는 속보가 전해졌다면 나는 통곡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나는 내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직접 전해듣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남편의 죽음을 한척의 객선,전원 사망등의 자료를 가지고 "추리"를 통해 알아내었다.

아주 쉬운 일 같지만 이런류의 사고를 할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는 없다.


또다른 예를 보자.

어떤 마을 안에 철수와 영희 이외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데 오직 이것만을

가지고서 나는 그 마을에는 두 명의 사람만이 산다는 사실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이것도 아주 쉬운 일 같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고의 힘이다. 객선의 경우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이라고 하는 "전체 개무율"-전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부분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고 하는

삼단논법의 대전제-이란 이름의 논리학의 법칙을 사용했고 나중의 경우는 1+1=2 라고 하는 수학의

원칙을 사용했다.

수학과 논리학을 통틀어 "형식학문"이라고 말하는데 형식학은 추리의 뼈대이며 골격이다.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모든 학문의 "방법적 도구"로 사용됩니다.

만일 그 무엇이 학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논리적이야 한다는 얘기지요.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고유한 속성을 "논리적 지성"으로 파악한 것과는 달리 동양의 지성들은

인간의 논리적 측면을 배제시킨채 인간을 정의합니다.

우선 공자는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보았고 석가나 노자는 인간을 "범신론적 존재론"의 측면에서 고찰

했습니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인간은 세계 자체 내지는 세계 내의 그 어떤

존재자와도 대치될 수 없는 고유한 "이성의 힘"을 지닌 논리적인 존재자로 취급하고 있는 반면

동양의 계보에서는 인간이란 세계와의 합일을 꾀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 존재자로 인간을 정의합니다.

 

그리고 명백하게도 비타주리는 전자쪽의 "인간해석"에 더 후한 점수를 주는 쪽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시대인 유클리드는 "기하학"의 체계를 완성하여 논리학과 수학이라는 두 축을 바탕

으로 한 고대 그리스의 "합리성"은 서양정신과 학문의 골격과 혈관을 형성하기에 이르지요.



제가 서양의 인간해석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그 막대한 "실전효과"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존재론적 윤리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흐름이 동서양 모두에게 동일한 맥락으로 역사가 전개되었다면

우리 인류는 지금까지 라디오 하나 백열전등 하나 생산하지 못했을 거라 단언합니다.

아마 머리를 감는 샴푸 하나 못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서양에서 동양사고의 중핵을 이루는 존재론적 윤리적 고찰에서도 뒤진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의 "공화국"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공자의 정지철학이나 도덕체계에 견주어 전혀 꿀릴

것이 없는 위대한 체계입니다.

플라톤 이전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은 동양의 존재론에 비겨 그 말하는 바가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단지 이들이 강조되지 못한것은 "논리적 지성"이 가지는 엄청난 "실전효과"때문에 완벽하게 존재론적 윤리적 관점이

압도당해 버린 때문이지요.

 

논리적 지성이 가진 "실전효과"를 비유를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대수학"이라고 부르는 수학의 한 분야를 살펴봅시다.

비트겐슈타인이 초등학교 교사 시절 다른 과목에 대해서보다 "대수학"에 뒤떨어지는 아이들에게는

학부모들이 판단하기에도 심한 "회초리"를 들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만...

 

동양에서는 미지수를 쓰는 대수방정식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물론 지금같은 경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기본적인 대수방정식의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대수체계를 가진 A라는 나라와 그걸 가지지 못한 B라는 나라가 전쟁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두 나라 모두 똑 같은 성능의 화포를 보유하고 있다고 전제하면 A나라의 경우 말단 이등병이라도 화포의

사정 거리와 목표지점을 간단한 방정식을 응용하여 손쉽게 계산할 수 있지만 B나라에서는 이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정 거리를 계산하지 못해 쩔쩔 맬 것입니다.

도대체 대수방정식을 쓰지 않고는 이 문제는 풀기가 난감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흔히 "서양은 물질문명은 동양에 앞서지만 서양정신은 동양정신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이상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몸이 가야 마음이 가고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법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은 이에 비례하는 정신문명을 같이 보유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위의 유언비어를 날조한 원인을 "아Q정전"의 지은이 "루신"은 "아편전쟁" 이후 중화인이 만들어낸 일종의

자기 합당화라고 조롱합니다.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중국인이 작은 섬나라 영국에게 두들겨 맞고서 내 놓은 아Q식 자기만족법이라는 겁니다.

수학시험 빵점을 맞은 학생이 백점을 맞은 학생에게 "넌 그래봐야 정신은 나에게 뒤진다."고 말한다면

"맞아. 정말 너는 정신은 나보다 앞서."라고 맞장구칠까요? 아닐 것입니다.

"빵점 맞은 새끼가 정신이 나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아편전쟁에서 참패한 중국이 서양인을 보고 "니네들보다 정신은 우리가 앞선다."고 얘기하면 "맞아"라고

수긍할 서양인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대수학 체계도 못 갖춘 새끼들이 정신문명 운운이라니... 정말  답 안 나오는 놈들이구만"이 맞을

것입니다.

 

정신문명 어쩌구 저쩌구 할 바엔 그 시간에 그들의 "합리성"을 하나라도 더 배워 동등한 물질 수준을 만들어 놓고서

큰소리쳐야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서양의 정신을 휘 저어 놓습니다.

예수의 "인간"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개념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비록 절대자에게 영적으로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틀리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은 세계의 다른 존재자와 차별성를 가지는 존재임이 부정되진 않습니다.

 

예수 이후 서양 정신의 주된 과제는 고대 그리스의 "학문적 지성"과 예수의 "종교적 영성"을 어떻게든 결합하려 하는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종교와 학문은 근본적으로 다른 부류이기에 데카르트 이전까지의 서양 정신은 이 무익한 결합을 위해 천오백년을

낭비해버렸습니다.

변종학문이며 사이비 학문인 "신학"이 득세하던 때-비트겐슈타인의 표현대로라면 룰이 다른 언어게임- 암흑의 시기가

중세를 덮었습니다.

 

신학적 논의가 왜 사이비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면 여길 클릭 해 보세요.

신학적 논의의 대부분은 이런 식의 궤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궤변들을 청소하기 위한 선구적 작업의 거보를 뗀 최초의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 입니다.

데카르트의 위대성을 제 포스트에서 다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데카르트 철학의 결론 중에서 오늘날 살아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봄이 현명하리라.

그런데도 왜 데카르트는 위대하며 그의 철학이 근대 철학의 시발로서 인정되는 것일까?


데카르트 이전까지만 해도 "신의 존재"는 최초의 가정이었고 대전제였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것을 역전시킨다.

신의 존재 이전 사유하는 나의 존재, 그 자아의 확실성이 규정되고 난 이후라야 신의 존재도 나타나는

철학이란 중세 신학이나 형이상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혁신적인 것이다...

데카르트의 관점전환은 우리가 흔쾌히 근대의 출발로 부르는 학문 이외 다른 분야와의 공통점에서도 일치

한다.

르네상스란 결국 인문주의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 중세와 근대를 분기했다.

그리고 그는 철학의 물줄기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주류 철학의 시조"라고 불릴 만하다.

그가 정초한 인식론은 그의 말대로 제일철학이 된 듯 싶다. 

20세기 서양 철학의 양대 주류라 할 만한 현상학과 분석철학은 많이 다른 전통이긴 하지만 "인식론적

전통"을 계승하는 면에서는 다를바가 없다. 

오늘날 인식론의 전통을 한걸음 물려세운 전통들 예컨대 니체주의나 실존주의 구조주의등은 여하한

경우라도 "비주류 철학'이라는 딱지를 떼어내지 못한다.

어쩌면 데카르트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직도 윤리학이나 형이상학을 제일철학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관점이 좋든 나쁘든 그것이 철학의 현재 모습을 결정한 기본적인 노선이라는 데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다.

 


데카르트 이후에 나타난 "흄"은 학문세계에서 "신학"과 "형이상학"을 완전 폐기 처분하고 영구 추방하여 학문의 영역을

결정지었습니다.

학문과 비학문 사이의 경계를 확정하는 일 우리는 이걸 칼 포퍼의 용어를 빌어와 "구획 기준의 문제"라고 부릅니다.

 

흄의 "인간 오성 연구"에는 철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기억하고 있는 "흄의 포크"라고 하는 유명한

결구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결론을 받아들인후 지금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어떤 쑥대밭을 만들어야 하는가?

우리가 특별히 강단의 형이상학 책이나 스콜라의 신학책을 두고서 이러한 질문을 해 보자.

이것은 "수와 양에 관한 추상적 추리(수학과 논리학)"를 수반하는가?;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실과 실재에 관한 경험적 추리(자연과학과 인문과학)를 수반하는가?;아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불속에서 태워버려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담고 있는 내용이란 궤변과 환상 그 이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흄은 포크의 두날-그러니까 논리적인 추상추리와 실증적인 경험추리만을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학문의 영역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지요.

그리고 이건 지금까지 변함없이 학문의 영역으로 인정됩니다.

이제 애물단지 신과 그것 이외 몽롱한 형이상학 체계는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채 도주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흄은 학문에 관한 아이덴티티를 명백히 구체화한 위대한 근대정신입니다.

 

흄 이후 또다른 거인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위치를 한층 격상시킵니다.

칸트 이전까지 "인간"이 세계 자체보다 상위가치라는 생각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인간이 세계와는 다른 그 무엇이긴 해도 세계의 가치보다 인간의 가치를 위에 둔다거나 최소 동등가치가 된다는

생각은 언감생심이었지요. 아래는 제 이전 포스트 "흄과 칸트 스토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칸트 인식론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 스스로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말한 부분이었다.

칸트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의 외부에 사물이 있고 그것을 우리의 정신이 파악한다는

의미였는데 칸트는 이걸 뒤집어 버린다.

"우리의 정신이 먼저 있고 사물이 우리 정신의 형식(안경)에 맞게 짜맞추어져 들어온다."

인식의 능동이론이라고 불리우는 이것이야말로 칸트가 얼마나 위대한 철학자였는지를 보여준다.

이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사람은 누구나가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너무나 당연해보이는 이 생각이 우리에게 형식적으로나마 체계화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였다.

서양에서도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그 시발로 보아야 한다면 우리에게서는 반만년중 한세기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쉬운 생각을 왜 못했을까?

나중에 보면 당연하지만 최초로 그걸 발상하는 사람에게는 초지능적인 비범함이 필요하다 "콜럼부스의 달걀"과도 같이.

 

나는 철학자들이야말로 과학자들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물리관이 바뀐다고 해도 그 사람의 인생관 일부를 바꿀지언정 전부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철학사상은 인류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다.

가장 극명한 예가 바로 "계몽철학"이다.

천부인권과 자유와 평등...계몽철학 이전 시대의 신분제 가치관을 현재의 가치관으로 바꾼 철학이다.

이걸 바꾸는 것은 고도의 물리학 이론이나 첨단의 정밀과학 이론이 아니라 그저 소수의 계몽철학자들이 필요할 뿐이었다. 물론 그것의 실천은 인류전체의 몫이지만 최초의 발상에는 반드시 비범한 철학자가 필요하다.

 

칸트 이전 그저 수동적 능력만이 부각되었던 인간의 지성에 세계 자체를 그 세계이게끔 만들어주는 "능동성"을 첨가하게

되니 한 사람의 인간이야말로 세계 전체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게 각인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주욱 살펴보면 플라톤에서 칸트에 이르는 서양 철학의 근저에는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한 지성적

측면이 전면부로 내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성을 가지고서 지성이 담당할 수 없는 영적 세계까지 월권했거나 하는 "과잉의욕"도 있었지만 이 흐름 전체가 "주지

주의"라는 이름 아래로 불리워질 수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비록 풍기는 아취는 각각이지만 대륙의 합리론,영국 경험론,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데카르트,흄,칸트는 어김없이

"주지주의자"였고 이 영향력은 지금도 막대합니다.

오늘날 주지주의 전통을 계승한 현상학이나 분석철학을 "주류철학"으로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서양정신의 전체 맥락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까닭입니다.

 

"망치를 들고서 우상을 파괴하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착수한 것이 바로 "주지주의"에 대한 맹반격이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과연 지성 뿐인가? 물론 아니다라는게 니체의 대답이지요.

니체는 "의지"로서의 인간이 진정한 인간의 참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의지" 그 중에서도 "타인의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에의 의지"(니체의 마지막 저서의 제목과도 같은)가 인간을 규정한

다고 사자후를 토합니다.



주의주의라 불리우는 이 노선의 선조격은 프랑스의 계몽철학자 "장 자크 루소"였고 쇼펜하우도 역시 주의

주의를 말한 사람이지만 기본적으로 루소는 체계적이지 못했고 쇼펜하우어는 아직껏 칸트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주지주의"의 허물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지만 니체는 전혀 새로운 철학-주지주의를 완벽하게

떨쳐버린 철학을 들고와서 주지주의 일색의 서양전통을 난타하기 시작했으며 근본적으로 "기독 윤리"로

근저를 구성하고 있었던 기존의 대세에 대항하는 "초인윤리학"-초인윤리는 니체의 주의주의가 결과한

새로운 도덕체계로 권력에의 의지를 완전히 발현시킬 수 있는 초인을 위한 윤리체계라고 서툰대로 정의

하면 됩니다.

니체의 주의주의와 초인윤리,이에 대한 긍정성과 문제점을 논하는 것은 차후 예정하고 있는 "니체 스토리"

에서 언급할 작정입니다.-을 내세웁니다.

 


제가 니체에게서 얻어낸 것 중 가장 큰 건더기는 "윤리학과 미학은 동일 범주에 있다."는 것입니다.

윤리적 최고가치인 "선"과 예술적 최고가치인 "미"는 원리적으로 같은 것이란게 제 생각입니다.

언젠가 도올 선생이 TV강의를 하면서 "좋은 것(선)은 그러기에 아름답다(미)"라는 말을 들으며 "저 양반도 이건 나와

같구나."하는 생각에 무릎을 친 기억이 있습니다만...

 

니체는 서구 정신의 두 전통적 흐름인 "주지주의"와 "기독 윤리"를 파괴해 버리지요 "니체와 전통해체" 많이 들어보았을

겁니다.

 

니체는 흄만큼 적대자가 많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니체를 작정하고 두들기려면 그 분량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니체의 독창성과 상징성은 인류 정신사에서 발군합니다.

그의 체계가 옳고 그른 것은 둘째 문제이고 니체가 얼마나 천의무봉한 사고를 했는지에 대해서라면 다른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니체는 서양 철학사에서 "주의주의 인간관"을 들고나와 보편적 지성의 독재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구체적 인간의

의지적 측면을 부각시켜 "보편적 인간에서 구체적 인간으로의" 인간해석의 세번째"관점 혁명"을 이끌어낸 사람입니다.

 

니체 이후 서양 철학은 두 개의 지류를 가지게 됩니다.


전통적 주지주의 노선과 니체에 의해 촉발된 주의주의 노선이라는...전자의 대표격이 현상학과 분석철학이고 후자의

대표가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입니다.

물론 "방법론"으로서 "현상학"을 차용하고 내용적으로는 "주의주의"를 견지하는 학자들도 있지요.

대표적인 사람이 "장 폴 사르트르"와 "자크 데리다"입니다.

 


니체 이후 그를 능가하는 주의주의 철학자는 없다는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이것은 칸트 이후 후설이나 비트겐슈타인을 배출한 주지주의 노선과 비교하자면 열세를 금치 못하는 상황을 가져와서

아직껏 이 노선의 철학이 "비주류"로 불리우는 이유 중 하나를 제공하지요.

사실 이 노선을 과연 철학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실존주의는 주관성 내지는 주체성으로 정의된 구체적 인간의 개별적 실존이 전면부로 나오는 사조를 말합니다.

이건 칸트가 보편적이고 능동적 지성으로 구성된 인간이 세계에 우선한다는 사고에 보편적 인간을 대체하는 실존적

의지적 인간을 대입시킨 사조로 보면 큰 무리가 없습니다.

 

구조주의 사유체계 는 의지적이고 지성적이고간에 주체를 한 걸음 물려세우고 주체 밖의 구조로 인간을 정의하는

유형의 사고를 말합니다.

외부의 구조에 보편성을 주는 사고가 전통적 구조주의라면 그 외부구조의 보편성도 "해체"하는 것이 "포스트 구조주의"

입니다.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를 한데 묶어 "현대 프랑스 철학의 성향"이라는 차후 포스트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주의주의 노선의 대략적 흐름이 위와 같다면 주지주의는 어떨까요?

 


칸트 이후 이성의 능동성이 확보된 이래 이 계열에서 한 최초의 작업은 능동성까지 첨가된 이성을 가지고서 무적의 칼

을 휘두르는 일이었습니다. 그

들은 흄의 경고를 무시한채  지성의 힘을 남발하여 "능동적 이성 형이상학"의 거대한 공룡을 만들지요.

바로 헤겔의 혼미한 체계가 그것입니다.

물론 흄이 말한 바를 충실히 따르는 "존 스튜어트 밀"이나 "어네스트 마흐" 같은 소수 학자들이 있었지만 밀의 경우 그

관점은 인식론적이기 보다는 윤리학적이거나 사회학적이었고 마흐의 경우는 최초부터 물리학적이었습니다.

 

현대 주지주의의 새로운 이정표를 확립한 "에드문트 후설"은 헤겔식의 체계를 보고 "철학이 도저히 이래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지요.



현상학이 무언지를 설명하자면 좀 길지만 제가 현상학을 다루는 포스트는 처음이라서 그 분량에 구애받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최대한 짧게요.

 


후설이 착수한 일은 "철학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분과학문이 속출하면서 과거 철학의 영역이었던 것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이제 남은 거라곤 정체

불명의 폐허들만 있었던 그 시기 후설은 분과학문들과 차별성을 가지는 그 무엇이 있어야만 이것이 철학

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 거란 판단을 했습니다.

후설은 분과학문의 유형을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으로 나누고 헤겔의 변증법을 차용한 당시 독일 인문

학들의 특징을 "역사주의"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물리학을 주축으로한 자연과학의 특징을 "자연주의"로 설정하면서 철학이 몰락하게 된 원인은

인문학만이 가지는 역사주의와 자연과학만이 가지는 자연주의가 철학에 유입되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립니다.

그의 저서인 "서양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서 그는 철학은 인문학도 자연과학도 아닌 독자적인

자기영역을 가진 학문이며 그러기에 그들의 "역사주의"와 "자연주의"의 기법으로 철학을 재단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되는 "학문의 위기 상황"이 도래한다는 열변을 토합니다.

철학 자신만이 가지는 고유한 기법,그래서 정초된 것이 "학적인 진실로 학적인""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

곧 현상학입니다.

 

현상학은 근대의 세 거인 데카르트,흄,칸트의 장점만을 취한 일종의 리모델링 학문입니다.

후설은 우선 데카르트에게서 "방법적 회의"라는 기법을 가져옵니다.

어떤 대상에 철학적 엄밀성을 부여하려면 일푼의 의심이라도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며 이를 재구성한 것이

바로 "에포케"라고 하는 현상학적 환원, 즉 괄호치기의 방법이지요.

비유를 통해 설명하자면 어떤 꾸러미에서 붉은 사과를 골라본다고 가정해봅시다.

자연주의의 방법은 붉은 사과를 직접 골라내는 직선적인 방법을 쓰지만 현상학은 그 꾸러미 속에서 일단

"붉지 않은 것"들을 우선 솎아냅니다.

파란것,노란것 등 이런 색깔을 가진 것을 먼저 "괄호치기"합니다.

이렇게 제1차적인 현상학적 환원이 끝나면 남은 것들은 "붉은 것들" 밖에는 없겠지요.

그러면 이제 두번째의 괄호치기에 들어갑니다.

제 2차 환원에서는 "사과가 아닌 것"을 괄호치기합니다. 

두번째 에포케가 시행되고도 남아 있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붉은 사과이지요.

이 남은 것을 후설은 "순수 잔여물"이라 부르고 이 괄호치기의 방법을 "본질직관의 방법"이라고 칭합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을 세계에 적용한 결과는 데이비드 흄이 내린 결론과 동일하지요.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괄호치기하고도 살아남는 것은 오직 "현상들" 뿐입니다.

현상 배후에 자리한 "실체"라거나 칸트가 말한 "물자체"는 도저히 괄호밖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세계가 아니라 현상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 전체가 괄호치기되었다고 할 만한데 물론 후설 자신 세계자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대해 부정적

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괄호안으로 들어간 것에 대한 탐구는 결단코 철학이 탐구삼아야 할 영역은 아니라는 명백한 자기주관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는 세계의 순수잔여물로 현상을 확보한 후 곧바로 이 괄호치기를 인간에게 적용합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괄호치기 해 나가던 후설에게서 도저히 괄호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한가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니라 "의식의 지향성"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괄호치기 할 수 있지만 지금 괄호치기를 행하는 의식작용이 괄호안으로 들어갈 순 없는 일이지요.

그럼 무엇이 의식의 속성으로 존재하기에 괄호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까요? 바로 "지향성"이 그것입니다.

내가 세계를 괄호치기 하고 육체를 괄호치기 하고 있다면 괄호치기할 그 무엇이 있어야 가능하며 "그 무엇"을 지향하는

의식적 속성이야 말로 인간 정신의 순수잔여물로 확보되니까요.

 

분석철학적 시각으로 말한다면 "지향문장에는 반드시 목적어가 필요하다."이고 목적어가 필요할 수 밖에 없는 이 속성을

지향문장의 본질로 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의식의 지향성"은 인간을 괄호치기해나간 결과 남는 "순수잔여물"입니다.

 

후설은 의식의 지향성을 계속 추궁하여 칸트가 말한 "능동성"을 확보해 냅니다.

그는 이걸 "초월적으로 사념하는 능력"이라고 부르지요.

 

현상학은 결국 의식의 지향성과 현상들, 괄호치기등을 주요골자로 "역사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항하는

철학고유의 영역을 확보해냅니다.

그리고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요.(후설의 전집은 아직 발간중에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현상학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현상학의 이념을 소개한 책들이 발표되었고 그것을 탐구대상에

직접 적용한 결과는 아직 미간행되었습니다.)

 

오늘날 현상학의 의미는 많이 넓어져서 괄호치기의 방법을 주요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학자 모두를 "현상학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이 괄호치기에 능숙한 학자들이 이를 이용하는 의도가 자신의 체계를 건설하기보다는 타인의

체계를 무장해제시키는데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자크 데리다."입니다.

물론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예외가 있긴 해도...

 

현상학과는 다른 분석철학 특히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고유영역을 확보하는 새로운 단층을 일구어냈습

니다.

그는 철학은 하나의 이론체계라기 보다는 하나의 활동이라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진리를 구성하는 명제의 총화는 과학의 전 체계이기 때문에" 철학은 명제를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철학은

과학이 과학이게끔 윤리가 윤리이게끔 종교가 종교이게끔 만들어주는 "사고의 명료화 작업"에 다름 아닙

니다.

그가 사용한 것이 "언어분석"의 기법입니다.

각종 언어는 각자 자신만의 특정한 문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 문법을 타고 넘어 월권행위를 하는 언어의

헛수작에 지성이 미혹당하여 진여를 간파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며 이걸 지적해 줌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메타학문으로서의 철학이 가진 철학

만의 고유영역이라고 주장하지요.



후설과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정의함에 있어서의 공통점은 "철학은 도대체 분과학문으로서의 과학

(인문과학이나 자연과학)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서양 철학의 근본 골격은 다른 존재자와는 차별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특정한 존재자가 "지성"을 가지고서 인간 자신이나

세계 또는 양자의 관계를 탐색하는 것을 주요 연구과제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 토대를 제공한 사람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고요. 기본적으로 이 견해는 철학이라기보다는 "학문일반"의 보편적

속성을 잘 나타낸 것이지요.

 

철학이 학문일반의 개념을 탈피하면서 철학만의 자기영역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데카르트부터였습니다.

앎 자체에 관한 이론 바로 "인식론"이 제일철학으로 인정되었고요.

흄을 거치면서 그 이전까지 제일철학의 행세를 해 왔던 형이상학과 신학이 철학 밖,아니 아예 학문 밖으로 내쳐집니다.

칸트에 이르러서는 인간 지성의 위력에 능동성까지 부여되어 지성의 힘이 득세하던 "주지주의 전통"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니체는 전혀 다른 "주의주의"전통으로 인간을 탐색함으로 오만하던 지성에게 겸손하라는 충고를 해 주었고 이전과는

다른 전통의 철학을 정초하여 그 계보가 실존주의를 거쳐 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전개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주지주의 계열에서는 후설과 비트겐슈타인이 독자적인 방법으로 주지주의적 인식론적 주류 노선을 견지하면서 "철학의

정체성"을 이끌어 내어 이 전통이 오늘날의 주류철학을 구성합니다.

 

제가 중세 철학을 다루지 않은 것은 순수하게 주관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학문으로서 중세철학에서 우리 지성이 건져낼 것이 거의 없다는게 제 개인적인 소신입니다.

이건 학문이 아니라 종교와 학문을 결합한 사이비적 엉성함밖에는 못 느껴져서지요.

물론 그 중에는 "윌리엄 오컴"이나 뛰어난 유명론자 "아벨라르"같은 날카로운 지성도 있었지만서도...

 

중세 최고의 철학자로 평가되는 토마스 아퀴나스 스토리를 써 볼까하는 심정이 반반입니다만.



마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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