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총리 측에 따르면 고인은 이날 오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졌다. 병원 측에 따르면 김 전 총리 가족들은 이날 오전 김 전 총리를 자택 인근 순천향병원으로 옮겼고, 김 전 총리는 병원 도착 당시 사망한 상태였다.
김 전 총리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김 전 총리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본부로 배속됐을 때부터 시작된다. 육군본부 정보장교로 배정된 김 전 총리는 당시 전투정보과 상황실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전투정보과장이었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등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인연으로 김 전 총리는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박영옥 여사와 결혼한다. 2015년 세상을 떠난 박영옥 여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인척 관계로 묶인 김 전 총리를 이름을 부르기보다 `임자`라고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 전 총리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들어선 제2공화국 장면 내각 시절 `정군운동`을 벌이다가 항명 파동으로 강제 전역됐다.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5·16 쿠데타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고, 이후 예비역 육군준장으로 특진했다. 군사정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오른팔` 격으로 실세로 군림한 김 전 총리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군사정부의 민정 이양이 결정되자 김 전 총리는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라이벌들의 견제로 여러차례 장기간 외유를 떠나기도 했던 김 전 총리는 `특명전권대사` 직함으로 1년 넘게 외국을 다니며 수교협상 임무를 맡기도 했다. 1964년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막후교섭으로 한일협정 성립에 큰 역할을 했고, 당시 작성된 `오히라-김종필 메모`는 한일협정의 초안이 됐지만 김 전 총리는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다시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특히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체결된 한일협정과 관련해 `한국과 일본 사이 일제강점기에 대한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한일기본조약 때문에 일본측의 명확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하는 점은 지금도 비난을 받고 있다. 여기에 배상금 액수조차 `헐값`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김 전 총리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빠른 시일 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합의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당했고,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현실 정치에 복귀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지만 4위에 머물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제15대 대선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을 잡은 이른바 `DJP연합`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DJP 연합의 성공으로 당시 자민련 총재였던 김 전 총리는 국무총리에 올라 공동 정부 한 축을 맡았다.
DJP 연합은 내각제 개헌 이행 여부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후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다가 2016년 대선을 준비하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에게 "내가 비록 힘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돕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복리씨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정석환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