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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180623

doll eye 2018. 6. 23. 13:45

***김종필 전 국무총리 별세…향년 92세

5·16 주도·국무총리 2회·9선 의원…한국 정치사 풍미했던 `풍운아`
YS·DJ 이어 마지막 `3金`의 퇴장

  • 정석환 기자
  • 입력 : 2018.06.23 11:00:25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92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김종필 전 국무총리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1900년대 중·후반 한국 정치사를 풍미했던 3김시대의 모든 멤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김 전 총리 측에 따르면 고인은 이날 오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졌다. 병원 측에 따르면 김 전 총리 가족들은 이날 오전 김 전 총리를 자택 인근 순천향병원으로 옮겼고, 김 전 총리는 병원 도착 당시 사망한 상태였다.
김 전 총리는 노환으로 별세한 것으로 전해졌다.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지난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고, 그해 열린 제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또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를 지낸 김 전 국무총리는 박정희 정권·김대중 정부 시절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냈다.

김 전 총리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김 전 총리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본부로 배속됐을 때부터 시작된다. 육군본부 정보장교로 배정된 김 전 총리는 당시 전투정보과 상황실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전투정보과장이었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등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인연으로 김 전 총리는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박영옥 여사와 결혼한다. 2015년 세상을 떠난 박영옥 여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인척 관계로 묶인 김 전 총리를 이름을 부르기보다 `임자`라고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 전 총리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들어선 제2공화국 장면 내각 시절 `정군운동`을 벌이다가 항명 파동으로 강제 전역됐다.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5·16 쿠데타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고, 이후 예비역 육군준장으로 특진했다. 군사정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오른팔` 격으로 실세로 군림한 김 전 총리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군사정부의 민정 이양이 결정되자 김 전 총리는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라이벌들의 견제로 여러차례 장기간 외유를 떠나기도 했던 김 전 총리는 `특명전권대사` 직함으로 1년 넘게 외국을 다니며 수교협상 임무를 맡기도 했다. 1964년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막후교섭으로 한일협정 성립에 큰 역할을 했고, 당시 작성된 `오히라-김종필 메모`는 한일협정의 초안이 됐지만 김 전 총리는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다시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특히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체결된 한일협정과 관련해 `한국과 일본 사이 일제강점기에 대한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한일기본조약 때문에 일본측의 명확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하는 점은 지금도 비난을 받고 있다. 여기에 배상금 액수조차 `헐값`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김 전 총리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빠른 시일 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합의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당했고,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현실 정치에 복귀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지만 4위에 머물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제15대 대선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을 잡은 이른바 `DJP연합`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DJP 연합의 성공으로 당시 자민련 총재였던 김 전 총리는 국무총리에 올라 공동 정부 한 축을 맡았다.

DJP 연합은 내각제 개헌 이행 여부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북 유화책에 이견을 보인 자민련이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에 가담하면서 DJP 연합은 최종적으로 무너졌고,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정국 역풍 속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국회의원 4명 배출에 그치면서 김 전 총리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다가 2016년 대선을 준비하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에게 "내가 비록 힘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돕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복리씨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정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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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허업"..김종필, 생애 고비마다 남겼던 어록들이후민 기자 입력 2018.06.23. 12:45 수정 2018.06.23. 13:19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90년 1월 한자리에 모인 김대중(왼쪽부터), 김종필, 노태우, 김영삼. (운정김종필기념사업회 김종필 화보집) 2015.11.23/뉴스1

(서울=뉴스1) 이후민 기자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과 '3김 시대'를 이끈 주역인 김 전 국무총리는 생전에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김 전 총리가 생전 고비마다 남겼던 숱한 어록들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다음은 김 전 총리가 생전에 남긴 말들이다.

"나라가 혼란하고 좌익이 발호하고 있는데 군이 가만있을 수 있겠냐"(1960년 6월, 최영희 육군참모총장을 찾아)

"나는 일본에 독도를 폭파하자고 제안했다"(1962년 10월29일, 미국 외교 문서,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이 독도에 대해 묻자)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납니다"(1963년 2월25일, 외유(外遊)길에 오르며)

"정치인의 행로가 항상 순탄할 수만 있는가. 나의 쓰라린 행로를 신이 나에게 운명지어준 시련으로 믿고 어떤 경우에도 열과 성을 다하겠다"(1965년 12월, 공화당 3차 전당대회)

"목수가 집을 짓는다고 해서 자기가 살려고 짓는 것은 아니다. 이 나라 조국 근대화의 싹을 북돋기 위해 집을 짓는 데 도왔을 뿐이다"(1968년 5월31일, 동아일보 인터뷰)

"5.16이 형님이고 5.17이 아우라고 한다면 나는 고약한 아우를 둔 셈이다"(1987년 1월1일, 관훈토론회)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1990년 10월,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며)

"역사는 기승전결로 이루어진다. 5·16은 역사 발전의 토양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를 일으킨 사람이며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그 계승자이고, 김영삼 대통령의 변화와 개혁은 그 전환에 해당된다"(1993년 5월16일, 5·16 민족상 시상식)

"있는 복이나 빼앗아 가지 말라"(1995년 1월1일, 민자당 대표시절 민주계의 대표퇴진론을 거론하는 세배객에)

"환갑 진갑 고희 희수 산수 미수 졸수 백수 등 인생에는 많은 마디마디가 있으나 겨우 세번째 마디에 왔다.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는 74세에 총리가 돼 전후 독일을 부흥시켰다"(1995년 1월17일, 69세 생일에)

"인생이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것은 아니다"(1995년 1월12일, 기자간담회)

"내가 제일 보기 싫은 것은 타다 남은 장작이다. 나는 완전히 연소해 재가 되고 싶다"(1997년 5월29일, 자민련 중앙위원회 운영위)

"역사는 끄집어낼 수도, 자빠뜨릴 수도, 다시 바로 세울 수도 없는 것이다"(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해)

"10월에는 10월의 논리가 있고, 12월에는 12월의 논리가 있다"(1997년 10월4일, 자민련 당사 월례조회에서)

"일자리는 시위를 한다고 해서 생겨나고 지켜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일자리를 더 많이 뺏길 수 있다"(1998년 5월15일, 불법·폭력시위 자제를 위한 대국민 호소문)

"의원내각제를 한다면 내가 물러나도 괜찮다"(1998년 6월9일,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

"나는 참는 데에 이골이 났다"(1998년 8월18일, 청구동 자택에서)

"허공에 연을 띄워놓고 말하는 사람들과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1998년 8월21일, 김윤환 전 의원과의 회동설에 대해)

"봉분 같은 것은 필요 없고 '국무총리를 지냈고 조국 근대화에 힘썼다'고 쓴 비석 하나면 족하다"(1998년 11월18일, MBC 시사매거진 인터뷰)

"지기 전에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싶다"(2001년 1월, 이인제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이 자신을 '지는 해'에 비유한 데 대해)

"노병은 죽진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다.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면서 나름대로 재가 됐다"(2004년 4월19일, 정계은퇴 선언하며)

"정치는 허업(虛業)이다. 기업인은 노력한 만큼 과실이 생기지만 정치는 과실이 생기면 국민에게 드리는 것"(2011년 1월6일,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

"민주주의와 자유도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경제력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 배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나"(2013년 12월10일, 운정회 창립총회에서)

"애석하기 짝이 없어. 신념의 지도자로서 국민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분이야"(2015년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서)

hm3346@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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