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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역사....(.다음백과.)

doll eye 2017. 5. 13. 12:01

회의주의

다른 표기 언어 skepticism , 懷疑主義

요약 회의주의는 지식을 형성하는 온갖 분야에 걸쳐 전개되었다. 형이상학이나 과학 분야에서는 확실한 지식의 획득 여부가 문제시되었다. 의학에서는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에 관한 확실한 지식의 획득이, 윤리학에서는 규범·관습의 수용과 가치 판단의 객관적 기준이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대표적인 회의주의의 형태는 지식 일반에 관한 것으로 인식론적 회의주의라고 불리며 어떤 것이 과연 완전하고 충분한 확실성을 갖고 우리에게 알려지는가를 문제삼는다.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의심이 일어나는 영역에 따라 구분될 수 있고, 의심하는 사람의 동기에 따라서도 구분될 수 있다. 또 회의주의는 얼마나 엄격하고 철저한가에 따라, 즉 특정 영역 및 지식을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냐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될 수도 있다.

회의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이 어떤 기초에 입각해 있으며 실제로 무엇을 확립하는지 물음으로써 그 주장의 적합성 또는 신뢰성에 도전해왔다.

고대부터 회의주의자들은 독단적인 철학자·과학자·신학자의 주장을 비판하는 논증을 전개해 왔다. 온갖 독단주의에 반대하는 회의주의자들의 논증은 서양철학사에 등장하는 여러 철학 문제와 그 해결책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회의주의는 지식을 형성하는 온갖 분야에 걸쳐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형이상학이나 과학 분야에서는 확실한 지식의 획득 여부가 문제시되었다. 의학에서는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에 관한 확실한 지식의 획득이, 윤리학에서는 규범·관습의 수용과 가치 판단의 객관적 기준이, 종교에서는 전통을 달리 하는 교리들이 회의주의의 의심을 받았다.

또 흄이나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은 경험 세계의 배후, 즉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식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회의주의의 대표적 형태는 지식 일반에 관한 것으로 인식론적 회의주의라고 불리며 어떤 것이 과연 완전하고 충분한 확실성을 갖고 우리에게 알려지는가를 문제삼는다.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의심이 일어나는 영역, 즉 의심이 이성을 향하느냐, 감각을 향하느냐, 사물 자체의 인식을 향하느냐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될 수 있고, 의심하는 사람의 동기, 이를테면 이데올로기적 이유인가, 실용적이거나 실천적인 이유인가에 따라서도 구분될 수 있다.

또 회의주의는 얼마나 엄격하고 철저한가에 따라, 즉 특정 영역 및 지식을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냐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될 수도 있다.

현대 회의주의

회의주의(懷疑主義)

비합리적 회의주의는 19세기 쇠렌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실존주의로 발전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전통 회의주의를 이용하여 헤겔주의와 자유주의적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면서 신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정당화되지도 않고 정당화될 수도 없는 '신앙에의 도약'만이 확실성을 보장해준다.

근대 신정통 신학자와 실존주의 신학자는 회의주의가 인간이 신앙과 신에의 헌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궁극적 진리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이러한 견해를 비종교적 형태로 전개한 사람이었다. 그밖의 회의주의의 여러 종류는 다양한 형태의 현대철학 속에 나타나 있다.

영국의 관념론자 F. H.브래들리는 자신의 저서 〈현상과 실재:형이상학 소론 Appearance and Reality:A Metaphysical Essay〉에서 고전적 회의주의를 이용, 세계는 경험론이나 유물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참된 지식은 현상 세계를 초월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비판적 실재론자 조지 산타야나는 〈회의주의와 동물적 신념 Scepticism and Animal Faith〉에서 자연주의적 회의주의를 제시했다.

직접적이거나 직관적인 경험에 의거한 해석은 모두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인간은 생물학적·사회적 요소에 따라 '동물적 신앙'으로써 세계를 해석한다. 그결과로 얻어지는 믿음은 비록 정당화되지 않고 터무니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세계의 풍부함을 유지·발견하도록 해준다. 회의주의의 유형은 논리실증주의(→실증주의)와 다양한 형태의 언어철학(→분석철학)에서도 나타난다(→ 논리실증주의, 언어철학).

물리학자이자 초기 실증주의자 에른스트 마흐, 버트런드 러셀, 논리실증주의의 산실인 빈 학파의 거두 루돌프 카르나프 등은 사변적 형이상학을 공격했는데, 이러한 공격은 경험이나 논리적 동어반복을 초월한 지식의 획득가능성에 대해 회의주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러셀과 저명한 과학철학자카를 포퍼는 귀납원리가 정당화될 수 없음을 강조했으며, 특히 포퍼는 경험적 검증에 기초한 인식론을 비판했다.

언어분석의 창시자 프리츠 마우트너는 모든 언어가 언어 사용자에 상대적이며 결국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의 회의주의를 제시했다. 진리를 이야기하는 모든 시도는 객관적 사태가 아니라 언어적 형식으로 귀결되므로 결국 실재에 대한 완전한 회의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마우트너의 언어 회의주의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 표현된 견해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고대 회의주의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에 엘레아 학파는 변화하는 다자의 세계, 곧 감각 세계의 실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실재를 일상 경험의 범주로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와 그의 제자 크라틸로스는 세계가 끊임없는 유동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영구불변의 진리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크세노파네스는 참된 지식과 거짓된 지식을 구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었다(→ 그리스 철학).

소크라테스와 2명의 소피스트에 이르러 회의주의는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지식에 늘 의문을 제기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록 〈변명 Apologia〉에서 자신이 정말로 아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하면서 궁극적으로 참된 견해란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모든 견해는 인간 각자의 의견일 뿐이라는 회의주의적 상대주의를 피력했다. 나아가 또다른 소피스트 고르기아스는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나아가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전달할 수가 없다고 함으로써 회의주의에 바탕한 허무주의적 주장을 폈다.

회의주의 철학을 표방한 최초의 학파는 BC 3세기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서 발전한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 학파였다. 이 학파를 이끈 아르케실라우스와 카르네아데스는 주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에 맞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대신에 어떤 지식이 이성에 입각한 것이냐 아니면 추정에 입각한 것이냐를 알 수 있는 표준만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제한된 개연적 회의주의는 키케로가 아카데메이아의 학생이던 BC 1세기까지 이 학원의 견해였다.

고대 회의주의의 또다른 주요형태는 피론주의였다. 아이네시데무스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은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자들을 비판했는데, 그 까닭은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자들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하면서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개연성이 많다고 하는 등 사실상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피론주의자들은 나아가 다양한 종류의 지식에 반대하는 일련의 방법으로 판단중지(epochē)를 제시했다(→ 에포케). 피론주의적 태도는 피론주의의 마지막 지도자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의 저작 〈피론주의 개관 Outlines of Pyrrhonism〉·〈수학에 반대하여 Adversus mathematicos〉 등에 담겨 있다. 섹스토스 엠피리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사람들을 평정(ataraxia) 상태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말했다. 실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불안하고 좌절했으며, 판단중지에 이를 수 있다면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중세 회의주의

그리스도교의 권위가 절정에 달한 중세에는 회의주의가 주로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의 형태로 연명했다. 〈아카데메이아 학파에 반대하여 Contra academicos〉에서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를 묘사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견해에 매력을 느꼈으나 계시를 통해 그 견해를 극복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으로써 인식을 얻으려 했다. 서유럽보다 고대의 학문을 더많이 접한 이슬람 치하의 스페인에서는 반합리주의적 형태를 띤 회의주의가 알 가잘리 등 이슬람 신학자들과 유다 하 레비 등 유대 신학자들 사이에서 발전했다.

특히 유다 하 레비는 사람들이 신비적 신앙 속에서 종교적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회의주의에 입각하여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공격했다.

16세기 회의주의

근대 회의주의는 16세기 르네상스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지적 위기와 회의주의적 고전들의 재발견에서 비롯했다.

종교개혁에 의해 제기된 회의주의적 쟁점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루터 사이의 논쟁에서 나타났다. 에라스무스는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의 자료를 이용, 논쟁중인 쟁점들은 결코 해결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판단중지하고 교회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루터는 참되고 확실한 종교적 지식은 양심을 통해 얻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라스무스의 견해는 종교적 지식에는 적절한 증거가 없으므로 신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전통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교 회의주의를 발전시켰고, 루터의 견해는 훗날 칼뱅의 견해와 더불어 내적 체험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마련했다. 에라스무스의 뒤를 이어 인문주의자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2세와 주술적 신비주의 철학자이자 의사인 H. C.아그리파는 스콜라주의와 르네상스 자연주의, 그리고 인간을 '참된 종교'로 인도한다는 다른 많은 견해에 대항하여 회의주의의 주장을 피력했다.

가톨릭 학자 장티앙 에르베는 1569년 자신이 편집한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에 관한 책의 서문에서 회의주의의 주장이 칼뱅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답변이자 진정한 그리스도교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17세기 회의주의

회의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미셸 드 몽테뉴와 그의 사촌 프란시스코 산체스 몽테뉴에 의해 철학적으로 일반화된 모습을 띠고 나타났는데, 두 사람은 모든 영역에서 인간이 주장하는 지식은 극히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미셸 드 몽테뉴는 자연과 관습에 따라 살면서 신이 계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아들일 것을 권했고, 프란시스코 산체스 몽테뉴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선에서 극히 제한된 경험과학적 정보를 획득하는 데 노력할 것을 옹호했다. 미셸 드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17세기초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피에르 샤롱, J.P. 카뮈, 라 모트 르 바이예 등이 미셸 드 몽테뉴의 견해를 널리 퍼뜨렸으며, 많은 반종교개혁가들이 칼뱅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미셸 드 몽테뉴와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의 주장을 이용했다.

미셸 드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새로운 과학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학문 분야를 반대하고 경건주의와 결합했다.

1620년대에는 이러한 새로운 회의주의를 반박하거나 완화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원래 회의주의자였던 에피쿠로스주의자 피에르 가생디와 당시 지적 혁명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마랭 메르센은 실재에 관한 지식을 인식론적으로 의심하면서도 과학이 세계에 관한 쓸모 있고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인정했다.

가생디와 메르센의 건설적 회의주의는 산체스 몽테뉴의 태도를 새로운 과학에 대한 가설적·경험적 해석으로 발전시켰다. 르네 데카르트는 새로운 회의주의를 근본적으로 반박했다. 데카르트는 거짓일지도 모르는 모든 믿음을 의심하는 회의적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정말로 의심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 곧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발견할 수 있으며 또 이러한 진리로부터 참된 지식의 기준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코기토 에르고 숨).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기준을 사용함으로써 신 존재, 즉 신이 우리를 기만하지 않고 우리의 명석·판명한 관념을 보증하는 존재임을 확신할 수 있으며, 외부 세계의 존재와 아울러 수학적 자연학을 통해 세계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회의주의에서 출발하여 실재의 지식에 대한 새로운 토대를 찾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7세기 전체를 통해 메르센, 가생디, 시몽 푸세, 피에르 다니엘 위예 등 회의주의적 비판가들은 데카르트의 회의적 방법을 철저히 밀고 나가면 그의 새로운 체계가 완전한 회의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로크를 비롯한 영국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합리적'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의심하기란 블가능하다는 상식에 호소하여 회의주의를 약화하려 애썼다.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선 지식을 지지하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것은 아니며, 상식이라는 기준을 사용할 경우 우리의 많은 믿음은 적절한 기초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팡세 Pensées〉에서 회의주의를 아주 강하게 드러낸 블레즈 파스칼도 완전한 회의주의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파스칼에 따르면 완전한 회의주의에 대해 결코 이성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인간은 신의 도움만을 받아 의심을 극복해야 한다. 17세기 회의주의는 피에르 의 저술, 특히 〈역사적·비판적 사전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1697~1702)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탁월한 변증론가인 벨은 고대·근대의 철학·과학·신학 이론들이 혼란·역설·모순 등에 귀착한다면서 그 이론들에 도전했다. 또 회의주의에 입각해 분석할 경우 데카르트·라이프니츠·스피노자·말브랑슈 등의 이론은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 심지어 세계의 존재까지도 의문시한다고 주장했다.

벨은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지적 활동의 신뢰성을 약화하기 위해 감각적 정보, 인간의 판단, 논리적 설명 등에 대한 회의주의의 주장을 능숙하게 이용했다. 벨은 인간이 이성적 활동을 포기하고 신앙과 계시에 맹목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야만 인간은 참된 신앙을 결정하는 아무런 기준 없이 자신의 양심만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18세기 회의주의

18세기 사상가들은 대개 베일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형이상학적 지식에 대한 요구를 포기했다.

경험론자이자 관념론자인 조지 버클리는 현상과 실재를 동일시하고 유심론적 형이상학을 제시함으로써 회의주의에 대항했다. 그러나 경험을 초월한 세계를 부정했기 때문에 또다른 회의주의자로 여겨졌다. 벨을 계승한 18세기의 주요인물은 데이비드 이었다. 경험론과 회의주의를 결합한 흄은 귀납적 증거와 연역적 증거 둘다 사실의 진리를 확립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지식은 경험을 초월해서는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경험 안에서 어떤 필연적 관련이나 경험의 근원을 찾을 수 없다. 세계에 대한 믿음은 이성이나 증거에 기초하지도 않고 자연의 제일성(齊一性)에도 호소하지 않으며 단지 습관과 관습에 의존할 따름이다. 즉 믿음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외부세계·자아·신 등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일상적이지만 이러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인간은 믿음을 토대로 세계를 과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지만 만일 그 믿음을 정당화하려 한다면 완전한 회의주의에 이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이렇게 완전한 회의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인간에게 정당화될 수 없는 믿음, 즉 상식을 회복하도록 해준다. 흄의 이러한 신앙주의는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적인 것이었다.

귀납과 인과성의 기초, 외부세계와 자아에 관한 지식, 신 존재 증명 등 흄의 회의주의적 분석의 중심 주제는 그뒤 철학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토머스 리드는 흄의 회의주의가 데카르트에게서 시작하는 근대 철학의 근본 가정이 낳은 논리적 결과라고 논박했다. 그리고 이 불행한 재앙을 초래하는 근본 가정은 상식적 원리를 위해서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흄과 칸트가 지적한 것처럼 리드는 흄의 회의주의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상식적인 삶에 호소함으로써 핵심을 비켜나갔을 뿐이었다.

즉 그는 믿음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도 아니었고 믿음을 의심하는 주장에 대해 반박한 것도 아니었다. 칸트는 흄이 인간의 모든 지식에 근본적으로 도전했다고 보았다. 흄의 회의주의에 대답하기 위해 밝혀야 할 점은 지식이 가능하다는 사실보다는 지식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문제였다. 칸트는 형이상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회의주의를 표명한 반면 경험적 지식은 어떤 보편적·필연적 조건들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즉 이 조건들에 의해 모든 가능한 경험의 형식인 시간·공간과 범주에 대한 참된 인식이 성립할 수 있으며, 이 형식을 모든 가능한 경험을 초월한 세계에 적용하면 모순과 회의주의에 이르게 된다.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 즉 경험의 원인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다.

칸트는 자신이 회의주의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의 철학이 회의주의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칸트주의에 대한 저명한 비판가 G.E. 슐체는 칸트의 이론에 따를 경우 사물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유대인 비판가 잘로몬 마이몬은 설사 선천적 개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경험에 적용하면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칸트에 대한 또다른 회의주의적 비판가 J.G.하만은 흄과 칸트의 철학이 신앙주의에 새로운 기초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즉 실재에 대한 인식을 이성적 수단으로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신앙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하만은 흄의 노력에 기초하여, 칸트에게 신앙주의적 그리스도교도가 되라고 설득하는 가운데 반(反)합리적 회의주의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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