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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다음백과에서

doll eye 2017. 4. 12. 17:34

신성 로마 제국

다른 표기 언어 Sacrum Romanum Imperium

요약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은 1254년 이후부터 쓰였다.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청과 함께 서유럽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중요한 곳이었다.
초기 신성 로마 제국은 정치적 관점과 그리스도교도의 역사에서 각각 해석할 수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이탈리아 등의 왕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지만 각 영역은 자국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신성로마 제국의 기원·기능·정당성에 대한 해석은 주로 세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첫째, 제국이 궁극적으로 교황의 자유재량 아래 있다고 보는 교황측의 이론, 둘째, 황제의 권력과 권위의 원천으로서 기능한다는 제국 또는 프랑크의 이론, 셋째 로마 인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라는 로마인의 이론 등이 그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은 1254년 이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1034년부터 콘라트 2세가 통치하는 영토를 가리켜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이 쓰였고, 1157년부터는 '신성제국'이라는 이름이 쓰였다. '로마 황제'라는 이름은 오토 2세(983 죽음) 때부터 유래한 것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보다 유서가 깊다. 하지만 샤를마뉴 대제에서 오토 1세 때까지는 '황제이며 존엄한 자'(imperator augustus)라는 표현을 특정 영토와 연결짓지 않고 썼다. 초기 신성 로마 제국에 관해서는 정치체제의 한 사례로 고찰할 수도 있고 정치이론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또는 전체 그리스도교도의 역사와 관련지어 다룰 수도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제국을 구성한 독일·이탈리아의 여러 왕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렇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를 제국 구성국들의 역사와 혼동하거나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제국을 구성한 각 영역은 각기 자국의 본체를 유지했고 역대 황제는 대관식 때 각기 자기가 속한 나라의 왕관을 썼다. 오토 1세 이전의 황제는 실제로 로마에서 교황이 주관하는 대관식을 치르기 전에는 황제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를 5세 이후의 황제는 황제로 선출되자마자 당연히 대관식을 치른 것처럼 예외없이 황제의 권위를 주장했다. 후자의 경우는 로마 교황이 주재하는 대관식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황제라고 부르기 어렵다. 이런 변칙이 있었음에도 적어도 중세 때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청과 함께 서유럽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중요한 곳이었다(→ 교황제).

여러 시대의 신학자·법률가·군주·반역자·문학가·귀족 등은 제국에 관한 각기 다른 해석을 내려 제국의 기원·기능·정당성에 대해 제각기 다른 관념을 가졌다. 서로 다르고 때로는 모순되는 이들 견해 중에는 다음 3가지가 유력하다. ① 교황은 교황 나름의 고유한 의도로 제국을 만들었다. 그때문에 제국은 교황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세속적 부분이므로 궁극적으로 교황의 자유재량 아래 있다고 보는 교황측의 이론, ② 황제의 권력과 권위의 원천으로서 정복과 패권에 중점을 두고 황제가 직접 신에게 책임진다는 제국 또는 프랑크의 이론, ③ 로마 법의 전통에 따라 제국은 로마 인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라는 로마인(여기서는 로마 귀족)의 이론 등이 그것이다. 이들 3가지 이론 중에는 그 중요성에서 3번째 설이 가장 낮았다. 교황의 본질적인 역할을 넌지시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이론은 명백히 반교황을 의도한 것이었다.

세계주의자와 지방주의자가 제국에 관해 각기 품은 관념들을 구분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세계주의자에 따르면 제국은 세계적인 왕국이었다. 그러나 지방주의자에 따르면 황제는 세계 지배에 아무런 야심도 갖지 않았고 황제의 정책도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제한받는 것이었다.

카롤링거 왕조
샤를마뉴(카를 1 세)800~814
루트비히 1세814~840
로타르 1세843~855
루트비히 2세855~875
카를 2세875~877
카를 3세881~887
스폴레토 왕가
비도891~894
람베르트894~898
카롤링거 왕조
아르눌프896~899
루트비히 3세901~905
프랑켄 왕가
콘라트 1세911~918
카롤링거 왕조
베렝가르915~924
작센 왕가
하인리히 1세919~936
오토 1세936~973
오토 2세973~983
오토 3세983~1002
하인리히 2세1002~24
잘리어 왕조
콘라트 2세1024~39
하인리히 3세1039~56
하인리히 4세1056~1106
제위 요구자
루돌프1077~80
헤르만1081~93
콘라트1093~1101
하인리히 5세1105/06~25
수플린부르크 왕가
로타르 2세1125~37
호엔슈타우펜 왕가
콘라트 3세1138~52
프리드리히 1세1152~90
하인리히 6세1190~97
필리프1198~1208
벨프 왕조
오토 4세1198~1214
호엔슈타우펜 왕가
프리드리히 2세1215~50
제위 요구자
하인리히(7세)1220~35
하인리히 라스페1246~47
홀란트의 빌렘1247~56
콘라트 4세1250~54
대공위시대
리처드1257~72
알폰소(카스티야 왕 알폰소 10세)1257~75
합스부르크 왕가
루돌프 1세1273~91
나사우 왕가
아돌프1292~98
합스부르크 왕가
알브레히트 1세1298~1308
룩셈부르크 왕가
하인리히 7세1308~13
합스부르크 왕가
프리드리히(3세)1314~26
비텔스바흐 왕가
루트비히 4세1314~47
룩셈부르크 왕가
카를 4세1346~78
벤첸1378~1400
비텔스바흐 왕가
루페르트1400~10
룩셈부르크 왕가
요프스트1410~11
지기스문트1411~37
합스부르크 왕가
알브레히트 2세1438~39
프리드리히 3세1440~93
막시밀리아 1세1493~1519
카를 5세1519~56
페르디난트 1세1556~64
막시밀리안 2세1564~76
루돌프 2세1576~1612
마티아스 1세1612~19
페르디난트 2세1619~37
페르디난트 3세1637~57
레오폴트 1세1658~1705
요제프 1세1705~11
카를 6세1711~40
비텔스바흐 왕가
카를 7세1742~45
합스부르크 왕가
프란츠 1세1745~65
요제프 2세1765~90
레오폴트 2세1790~92
프란츠 2세1792~1806
역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신성 로마 제국 창설의 조건

서유럽에는 새로운 로마 제국이 탄생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첫째 조건은, 이탈리아 서쪽이 이미 정치적인 현실성을 잃었음에도 '세계적이며 영원한 로마 제국'이라는 관념이 여전히 존속했다는 점이다. 둘째 조건은 서유럽 이민족의 다수가 제국에 관해 '그리스도교 왕권'(imperium Christianum) 또는 '그리스도교도의 제국'이라는 관념을 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관념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기도문 가운데 제국과 황제를 위한 기원을 덧붙여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을 세계의 마지막 국가로 설정해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의 틀 속에 끼워넣었다. 이 관념에서는 세계의 종말이 곧 신의 나라로 들어가는 실마리가 된다. 서유럽에 제국을 수립하기 위한 3번째 필요조건은 제국을 세우는 데 충분한 권력과 지위를 지닌 인물, 곧 프랑크 왕 샤를마뉴라는 후보자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샤를마뉴 대관식 직전의 정세

비잔틴 제국의 상황 역시 신성 로마 제국 수립의 한 요소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교황은 비잔틴 황제를 받드는 다른 사제와 마찬가지로 사제직을 인가받은 황제의 신하였다. 그러나 8세기말 이탈리아 반도에서 제국의 지배권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슬람 세력과 대립하게 된 제국은 힘을 동방문제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미 568년 이탈리아를 침입했던 롬바르드족에게서 이탈리아 영토를 지킬 수 없었다. 그때까지 역대 교황은 롬바르드족의 위협에 대비해 비잔틴 황제와 라벤나의 총독에게 충성을 맹세해왔다. 그러나 사태는 일변하여, 751년 롬바르드족이 라벤나를 빼앗고 총독을 추방했다. 로마 교황은 비잔틴 황제에게 보호를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으므로 프랑크 왕 피핀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754년 피핀은 이탈리아를 침입해 롬바르디아의 왕 아이스툴프를 내쫓고 756년 라벤나 총독령을 교황에게 바쳤다. 이렇게 해서 교황의 세속적 권력이 생겨났고 프랑크 왕권과 교황청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생기게 되었다.

교황은 정식으로는 황제에게만 줄 수 있는 '로마인의 보호자'(patricius Romanorum)라는 호칭을 프랑크 왕에게 주었다. 이 호칭을 받은 사람은 교황청을 방위하고 유지할 권위까지 받게 되는 것이었지만 교황은 비잔틴 제국과 본질적인 연계를 끊기를 주저했다. 이 점은 샤를마뉴가 774년 롬바르디아의 마지막 독립군주 데시데리우스를 물리친 뒤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772~795 재위) 때 두드러졌다.

롬바르디아의 왕이 된 수호자 샤를마뉴는 과거의 적과 마찬가지로 교황에게 위험한 존재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능성은 첫째, 동서간의 관계가 더 멀어진 점, 둘째, 비잔틴 황제와 프랑크 왕 사이에서 교황의 처신이 과거보다 곤란해진 점, 셋째, 로마와 이탈리아 중부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지배력이 약해진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751년 라벤나 총독 추방 이후 사실상 실권을 쥔 교황은 아마 서유럽에서 황제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사실 '콘스탄티누스의 기부장'(위조되었다는 설이 있음)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제국의 옥새와 "이탈리아 및 서방 여러 지역의 모든 주(州)"를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781년 이래 교황문서에는 이미 황제의 통치를 기초로 한 연대표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교황은 자기 나름의 화폐를 주조했다. 그러나 이런 야망은 샤를마뉴가 롬바르디아 왕이 되었을 때 사라졌다.

신성 로마 제국과 샤를마뉴의 대관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가 프랑크 왕과 비잔틴 황제의 대립관계를 이용해 독립을 유지하고자 한 데 비해 교황 레오 3세(795~816 재위)는 프랑크 왕에게 종속적인 태도를 보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도 로마에서도 사태는 안정을 잃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레네가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를 폐위시키고(797) 최초의 여황제가 되었다. 로마에서는 반교황파 귀족들이 이 기회를 포착해 교황을 공격했다. 교황은 보호자 샤를마뉴에게 달아났다(799). 샤를마뉴는 고문관인 알퀸(앨퀸)의 권고를 받아들여 레오의 권위를 보증해주었다.

그러나 사태는 여전히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800년 가을 샤를마뉴는 '교회의 위엄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로마로 출발했다. 12월 25일 성베드로 대성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때 교황은 샤를마뉴의 아들을 왕으로 성별(聖別)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샤를마뉴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자마자 갑자기 레오는 샤를마뉴의 머리에 제관을 씌웠다.

줄지어 앉아 있던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이며 존엄한 분'이라고 환호하는 가운데 교황은 샤를마뉴 앞에 무릎을 꿇고 고대 황제 대관식의 관행에 따라 샤를마뉴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교황의 행동은 샤를마뉴에게 대관을 베풀어 자기의 지위를 견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명백했다. 교황의 행위에 놀라고 화를 냈다고 전해지는 샤를마뉴는 계속해서 중대한 문제, 즉 콘스탄티노플의 승인을 받아내는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교황에게는 샤를마뉴를 황제로 봉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어쨌든 이 대관은 비합법적이고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비잔틴 제국의 눈에는 샤를마뉴가 찬탈자로 비쳤지만 실제로 샤를마뉴가 영유하고 있던 제국의 영토라면 과거의 로마 공작령과 총독령뿐이었고 그밖의 면에서도 과거 그대로 프랑크 왕과 롬바르디아 왕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806년 샤를마뉴는 자신의 영토를 세 아들에게 분할해주었다. 만약 위의 두 아들이 샤를마뉴보다 먼저 죽지 않았다면, 그리고 814년 셋째 아들 경건왕 루트비히 1세(814~840 재위)에게 분할하지 않은 땅을 물려주지 않았다면 샤를마뉴 대제의 제국이 존속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800년에 치러진 황제 대관식은 직접적 효과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실은 더욱 넓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첫째, 동서간의 분리가 결정적인 정치적 사실이 되었다. 812년 흐지부지 끝난 전쟁 뒤에 비잔틴 황제 미카일 1세는 샤를마뉴가 황제라고 칭하는 것을 일단 승인했다. 그러나 미카일은 콘스탄티노플 황제만이 유일하고 진실한 로마 황제의 계승자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둘째, 샤를마뉴의 제국은 콘스탄티노플과의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이것은 적어도 1204년까지 계속되었다.

셋째, 샤를마뉴의 대관에 따라 사를마뉴와 그의 후계자는 교황이 전체 그리스도교도의 지배자라는 교황측의 주장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다. 샤를마뉴도 알고 있었듯이 샤를마뉴 자신과 이후의 모든 황제는 교황측의 주도로 성립된 황제권이라는 점에서 묘한 처지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래서 샤를마뉴는 813년 아들 루트비히와 공동으로 황제 권한을 행사하기로 결심하고 교황의 출석을 요구하지 않은 채 아헨 궁정성당에서 의식을 거행했으며 참가한 프랑크 귀족들의 환호로 대관 승인의식을 대신했다.

루트비히는 샤를마뉴에게서 왕관을 받았거나 아니면 제단에서 자기 손으로 왕관을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의식은 분명히 800년 로마에서 있었던 의식과는 대조적이었다. 이후에는 '교황의 제국'과 '프랑크인의 제국', 즉 제국에 관한 2개의 상반된 견해와 이론 간의 다툼이 중요한 논제가 되었다.

카롤링거 제국

루트비히 1세는 '제국'이라는 말을 다양한 영지를 하나로 유지하는 통일된 관념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는 각 나라의 왕이라는 명칭을 버렸다. 이것이 817년에 나온 '제국칙령'의 기초가 된 관념이다. 루트비히 1세는 맏아들 로타르 1세를 공동 황제로 봉했고 로타르의 동생 페팽과 루트비히(독일인 왕)에게는 부속왕국인 아키텐과 바이에른을 각각 주었다.

그러나 루트비히 1세의 생각은 보수적인 프랑크인 귀족들의 반대를 불러일으켜 마침내 내란으로 발전했다. 대립하는 쌍방의 회유에 능한 교황에게는 이 분쟁이 반가운 일이었다. 이미 816년 루트비히 1세는 교황 스테파누스 5세(또는 4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교황의 손으로 성유를 받은 바 있었다. 또 로타르 1세는 아버지 루트비히가 813년에 그랬던 것과 같이 교황의 중개없이 제위에 올랐고(817), 자기의 지위를 튼튼히 하기 위해 823년 로마에서 교황 파스칼리스 1세 힘을 빌려 대관식을 치렀다.

이렇게 해서 제국은 프랑크 왕령이 아니라 교황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토가 되었다. 로타르의 아들 루트비히 2세는 850년 교황이 얹어주는 황제의 관을 썼고, 로타르가 죽은 855년부터 자기가 죽은 875년까지 단독으로 제위를 지켰다. 그 뒤를 이은 카를 3세는 881년부터 동프랑크의 유력자들로부터 폐위당한 887년까지 제위에 있었다.

888년 이후 프랑스·독일·이탈리아는 부르군트 왕국과 로타링기아(로렌)를 미결 영토로 남겨둔 채 각기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후 교황이 이탈리아 귀족 가운데서 잇달아 황제를 선임했는데 교황 자신도 이탈리아 귀족정치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우선 동프랑크 왕 아르눌프의 도움을 받아 스폴레토의 비도(891~894 재위), 이어 그의 아들 람베르트(894~898 재위)가 황제가 되었으며 아르눌프 자신도 896년 제관을 썼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교황에게는 거의 이용가치가 없었고 또 그들로서도 당시의 침체된 교황권을 이용할 일도 없었다.

901년에 제관을 쓴 루트비히 3세는 905년 프리울리의 베렝가리오(베렝가르)에 의해 폐위되었다. 베렝가리오는 915년 교황의 손을 빌려 대관식을 올렸다. 베렝가리오가 죽은(924) 뒤에는 유력한 로마 귀족 크레셴치 가문이 권력을 수중에 넣고 황제의 칭호를 금했다.

오토 제국

이탈리아에서 제국이 해체과정에 있던 사이에도 알프스 북부에서는 제국에 대한 여러 관념들이 남아 있었다.

제국에 관한 프랑크의 전통적 생각은 샤를마뉴 대제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과거 샤를마뉴가 통치한 것처럼 여러 국가를 통치하는 지배권을 쥐고자 한 것이었다. 과거 서프랑크의 왕 카를(샤를) 2세(대머리왕)는 로마에서 제관을 받기 6년 전인 869년 로타링기아를 정복했을 때 자신을 '황제이며 존엄한 자'라고 선언했다. 독일의 작센 왕조 초대 왕인 하인리히 1세(919~936 재위, 대관식을 치르지는 않았음)는 933년 헝가리에서 승리를 거두고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마찬가지로 그의 아들 오토 1세(936~973 재위)도 955년 레흐펠트 전투 뒤에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것이야말로 프랑크족이 품은, 로마와는 관련이 없는 제국에 대한 관념이었다. 936년 동프랑크 왕위를 이은 오토 1세는 샤를마뉴 대제의 진정한 후계자였다. 그는 성직자를 장관으로 기용하고 벤드족에게 그리스도교를 포교할 목적으로 엘베 강가에 선교를 위한 교구를 설치했다. 서부 카롤링거 가문의 프랑스 왕 루이 4세는 오토의 보호 밑에 있었으며 부르군트 왕 콘라트는 오토의 지지를 얻어 왕좌를 유지한 데 지나지 않았다.

951년 오토는 이탈리아를 침입해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를 독일 왕의 신하로 만들었으며, 962년에는 교황 요한네스 12세의 손을 빌려 제관을 썼다.

800년 샤를마뉴가 대관할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주도권을 쥔 쪽은 교황이었다. 그러나 오토 제국은 샤를마뉴의 제국에 비하면 판도가 꽤 한정되어 있었다. 이 무렵 '황제이며 존엄한 자'라는 칭호는 의미가 반감되어 오토 시대에는 오로지 로마 교회의 보호에만 한정되었으며, 제국의 영토도 줄어들었다.

오토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아무도 서프랑크령에 대한 통치권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후 제국이라는 것은 단일 지배하의 독일과 북부 이탈리아의 연합체를 뜻한 데 불과했다. 또 그들은 비잔틴 황제에 도전해 지배권을 비잔틴 제국에까지 미치려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은 급속히 세력을 회복했고 이 시기(10~11세기) 팽창과 재정복에 나설 준비를 했으므로 두 제국의 관계를 조정하는 일이 새삼스럽게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그뒤 두 제국 사이에 전개된 항쟁의 결과로 제국의 로마화에 박차가 가해졌다.

오토 1세가 로마 황제의 칭호를 구하지 않은 데 비해 오토 2세(공동황제 967, 단독황제 973~983)는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 2세에 대항하여 스스로 로마 황제라고 선언했으며 자기의 제국을 로마 제국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변화는 콘라트 2세 치세(1024~39)에 일어났다. 1040년 이후에는 대관식을 치르기 전의 선출 황제(또는 황제가 지명한 후계자)에게 '로마인의 왕'이라는 호칭이 붙여지게 됨으로써 이 변화는 더욱 가속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형식의 변화가 고대 로마 제국의 유산을 요구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비잔틴 제국과의 경쟁관계에서 빚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오토 3세의 치세(983~1002)는 이런 발전의 중간기를 형성한다.

그는 제국의 이념에 이질적인 요소를 덧붙여 새로운 통치이념을 만들기 위해서 로마, 카롤링거 왕조, 그리스도교 등의 여러 요소를 도입했다. 로마는 그 수도였고 교황은 그리스도교 지배를 발전시키기 위한 황제의 부관 역할을 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오토 3세 이후에도 존속한 중요한 특색은 교황이 완전히 황제에 종속되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초상화에는 교황이 아니라 황제가 성 베드로의 대리인으로, 때로는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로 그려졌다.

962~1046년은 사실상 제국의 전성기였다. 한편 교황청은 황제의 보호 아래 있을 때 이외에는 로마의 당파에 이용되는 정쟁(政爭)의 도구로 타락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

정세는 11세기 중엽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의 하나는 유럽 경제의 급속한 부흥이었다. 유럽 경제의 부흥은 독일에는 불리한 세력 교체를 가져왔다. 한편 유럽 경제의 부흥보다 중요한 직접적 원인은 교황청의 부흥이었다. 1056년 황제 하인리히 3세(1039~56 재위)가 죽은 뒤 주도권은 교황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후 1065년까지는 나이 어린 하인리히 4세(1084 대관, 1106 죽음)의 치세가 이어졌고 교황측에는 동맹자(특히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가 출현함으로써 교황의 주도권이 더욱 강력해졌다. 유럽 민중도 교황을 전그리스도교도의 지도자로 받들게 되었다.

황제의 통치를 고마워하는 사람들은 제국의 영내에서조차 독일인뿐이었고 부르군트족이나 이탈리아 주민은 아니었다. 부르군트족이나 이탈리아의 주민으로서 황제의 통치를 고마워한다는 것은 독일인 지배에 대한 종속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로마를 제국의 수도로 삼은 사람은 오토 3세뿐이었으며 4년도 채 되지 않았다. 다른 황제들은 자기들의 힘을 모두 알프스 북부로 집중했다.

제국에 관해 9세기에 체계화했던 교황측의 논리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73~85 재위) 치하에서 더욱 넓고 견고한 기초 위에 부흥되었다.

이 시기에 서임권 투쟁으로 알려진 1076~1122년의 항쟁이 발생했다. 실제 논점은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황제가 차지하는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의 옥새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교황뿐이며 교황은 합법적으로 황제를 폐위할 수 있지만, 자기는 누구의 손으로도 어떻게 될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교황의 독립에 대한 요구는 급속하게 황제에 대한 우월성의 요구로 바뀌어갔다.

서임권 투쟁은 1122년 교황 칼릭스투스 2세와 황제 하인리히 5세 사이에 보름스 협약이 이루어짐으로써 일단 해결되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도전에 대해 황제측은 자신의 지위를 지킬 새로운 기초를 모색해야 했다. 그레고리우스의 호적수였던 하인리히 4세는 여전히 부왕에게 물려받은 권리를 주장했으나 12세기에 들어와 하인리히 5세(1105/1106~25 재위), 로타르 2세(1125~37 재위), 붉은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1152~90 재위), 하인리히 6세(1190~97 재위) 등은 논법을 바꿨다.

그들은 교회측 법률가의 논거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법을 부흥시켜 얻은 여러 무기를 내세웠다. 그결과 새롭고 좀더 숭고한 제국의 관념이 만들어졌다. 이 점에 관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은 1157년 프리드리히 1세가 '신성한 교회'(Sancta Ecclesia)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뜻에서 제국을 '신성제국'이라고 칭한 것이었다. 자기가 보편적 권위를 갖는다는 교황의 주장에 직면해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여러 황제는 교황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권리를 주장했다.

또 제국측 법률가도 '제후의 선거로 선출된 사람은 교황이 인정하기 전에도 진정한 황제'라고 주장했다. 교황과의 싸움, 그리고 서임권 투쟁 와중에 줄어든 황제권의 영토적 기반을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은 황제를 이탈리아로 달려가게 했지만 황제의 군대는 이탈리아에서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쳤다. 이 국민적 저항 때문에 프리드리히 1세는 롬바르디아 동맹을 격파하지 못하고 1183년 콘스탄츠에서 한때 평화조약을 맺었다. 황제의 종주권은 인정되었지만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권위는 결정적인 손상을 입었다. 프리드리히의 아들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녀와 결혼한 뒤에는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지위를 회복하는 데 노르만족의 힘이 이용되었다.

교황청은 로마가 제국령으로 편입되는 것을 두려워해 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1197년 하인리히 6세가 일찍 죽은 뒤 독일에서는 내분이 이어졌다. 이 내분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1198~1216 재위)에게 유리했다(오토 4세가 새 황제로서 정식 대관식을 올린 것은 1209년임). 하인리히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1215~50 재위)는 자신의 이탈리아 정책에 대한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제후들에게 많은 양보를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롬바르디아 제압에 실패하고 1239년 파문당했으며 1245년에는 폐위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죽음(1250)과 그 뒤를 이은 23년간의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는 중세 제국의 실질적인 종언을 뜻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구제도의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교황청은 프랑스 앙주 가문의 샤를을 초청했다. 1273년에 독일 왕위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1273~91 재위)가 이어받았으나 루돌프는 단순히 제후연합의 우두머리에 불과했고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디아의 명목상 권리를 유지했을 뿐,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는 포기했다.

프리드리히 2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

루돌프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지만 제국의 존엄성을 획득하지 못했으며 이후 제국은 유명무실했다. 프리드리히 2세 이후 1세기 동안 로마에서 대관식을 올린 황제는 하인리히 7세 한 사람뿐이었는데 이 대관은 1312년 아비뇽의 교황이 보낸 사절단에 의해 치러졌다(→ 교황제). 루트비히 4세(1314~47 재위)는 민중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1327년 로마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그러나 이 의식은 교황의 허가없이 치러진 것이었다. 이후 제국의 종언에 이르기까지 정식으로 대관한 황제는 카를 4세(1355년 교황사절단이 대관), 지기스문트(1433년 교황이 대관), 카를 5세(1530년 교황이 볼로냐에서 대관) 등 3명뿐이다.

독일에서는 이무렵 내전으로 왕권이 이미 약해져 있었다. 또 제후들은 1250년 이후 결정적으로 기초를 굳힌 선제후회의를 통해 황제선출제도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지도적 지위를 쌓아올리고자 했던 프랑스의 요구는 독일·이탈리아의 제국주의자에게 최후의 분발을 촉구하는 역할을 했다.

한편 냉정한 현실주의자인 카를 4세(1347~78 재위)는 제국을 명백히 독일적인 제도로 한정하기 시작했다. 교황 클레멘스 5세와 맺은 협약에 따라 그는 정식으로 이탈리아를 포기했고, 정해진 대관식 날에 로마로 들어가 같은 날 그곳을 떠났다. 이어서 그는 독일의 제국법, 특히 선제후의 권리 확립에 관심을 돌렸다. 이 관심은 1356년 '금인칙서' 제정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런 변화는 제국의 마지막 호칭에 반영되었는데 프리드리히 3세(1440~93 재위) 치세에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 국민의 신성 로마 제국'(Sacrum Romanum Imperium Nationis Germanicae)이 되었다. 프리드리히의 후계자 막시밀리안 1세(1493~1519 재위)는 1508년 로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교황이 동의한 형식을 따라 '선출황제'(imperator electus)라는 이름을 얻었다.

근세의 신성 로마 제국

'금인칙서' 발포 후 제국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독일 역사의 일부이다.

지기스문트(1411~37 재위)나 카를 5세(1519~56 재위) 같은 몇몇 황제들은 먼 옛날과 같은 황제 대권의 부분적인 회복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또 투르크족과의 싸움에서 제국은 그리스도교 전체에 대해 어느 정도 주도권을 쥐기도 했다. 그러나 제도에서 제국의 역할은 계속 쇠퇴해갔다. 종교개혁은 제후의 권리를 확고히 해주었고 제후들의 자립을 북돋아주었다.

카를 5세가 통치한 땅은 광대했지만 그것은 여러 왕국의 엉성한 집결체에 지나지 않았다. 카를 5세는 가톨릭을 옹호하며 종교개혁에 대항했다. 하지만 제국의 부흥이란 정신에서도 현실에서도 이미 중세 제국의 부흥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조약(1555)에 따라 독일은 정식으로 2개의 종교집단으로 분열되었고, 황제는 한 종파의 우두머리를 차지하는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다.

또 지기스문트가 죽은(1437) 뒤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7세(1742~45 재위)에 의한 잠깐 동안의 중단을 제하면 제위는 선거라는 형식을 거치면서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세습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황제와 제국 사이의 이해 분열을 낳았다. 1556년 이후 제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재로 여러 독일 제후들이 합친 느슨한 연방체에 불과했다.

30년전쟁을 끝낸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은 연방 방식의 체제에 마지막 획을 그었다. 그럼에도 제국의 산만한 구조는 여전히 어느 정도까지는 18세기의 세계주의적 정신에 걸맞았고, 또 독일 서부의 기사나 귀족에게는 제후의 절대정치에 대항하는 안전판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각국의 민족주의가 고조되었고 제국은 시대에 뒤지는 존재가 되어갔다.

프랑스의 역대 왕은 13세기말 이래 제국의 외곽에 있는 여러 땅을 병합하면서 황제의 지위를 탈취하려 했다.

나폴레옹 1세의 출현으로 이 야망은 마침내 달성될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샤를마뉴 대제를 자처한 나폴레옹은 1806년 프란츠 2세(1792~1806 재위)의 호칭을 박탈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자신의 '새 질서'에 짜넣기로 결심했다. 이미 무력해 적을 막아낼 수 없는 황제의 자리였지만 결국 프란츠는 제위를 다른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않은 채 1806년 8월 6일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오랜 제국의 권위를 포기했다.

이렇게 해서 신성 로마 제국은 막을 내렸다. 제국이 영향을 미친 범위나 성격은 언제나 논의의 표적이 될 것이다. 논의야 어쨌든 제국은 유럽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제국이 소멸한 뒤에도 제국의 영향력은 그치지 않았다. 중세 제국에 관한 논의는 1871년 제2제국(독일 제국) 창설의 관념적 배경이 되었다. 또한 히틀러의 제3제국까지도 샤를마뉴 대제, 오토 대제, 프리드리히 2세의 업적을 종종 아전인수식으로 끌어붙이거나 왜곡해 자신의 존립에 활력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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