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미국 우선주의’에 대한 갈망이란 해석이 나온다. 유권자들이 이에대한 갈망이 워낙 크다보니 인류 보편적인 건전한 상식이나 화합, 포용 등의 가치를 넘어섰다는는 것이다.
‘트럼피즘’으로 불리는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추구하는 가치는 미국 우선주의로 정리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 이기주의’로 폄하하기도 한다. 공화당 주류 정치인들조차 등을 돌린 ‘막말’과 ‘기행’으로 점철된 트럼프를 미국 국민들이 선택한 것은 이같은 미국 우선주의에 깊숙히 동조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된다 싶은 자유무역협정(FTA)은 폐기하고, 미국의 오랜 동맹관계조차 미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재고하겠다는 것이 트럼프의 주장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국경을 넘는 이민자들을 장벽으로 가로막고 미국 내 불법 이민자들은 축출하겠다는 것이 트럼프의 공약이다.
트럼프가 한때 출연했던 NBC방송의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에서 도움이 되지 않거나 부족하다 싶은 대상에게 외쳤던 “당신 해고야(You’re fired)”를 국가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에 다름 아니다.
일등국민을 자처하며 이민자들과 화합하고 세계화를 부르짖어온 미국인들이 이같은 트럼프의 공약을 추종하리라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팍팍한 현실이 결국 미국인들의 선택을 강요했다.
무슬림을 추종하는 자생적 테러리스트의 잇따른 총기난사, 백인 경찰을 향한 흑인사회의 저격, 중국산 수입품이 미국의 쇼핑몰을 장악한 현실, 미국의 생산현장을 점령한 히스패닉 이민자들, 이런 것들을 더이상 견디지 못한 미국으로 하여금 트럼프를 선택하도록 몰아세웠다.
미국 우선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고립주의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판 고립주의다. 지난 6월 치러진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는 고립주의 현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난민을 배척하고 EU와 섞이기를 거부한 것이 브렉시트라면 이민자를 축출하고 자유무역을 부정하는 것이 트럼피즘의 실체다.
다수가 힐러리 승리를 예상했을 때, ‘제2의 브렉시트’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했던 트럼프의 경고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다수 전문가들과 언론의 예측이 보기좋게 빗나갔다는 점도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의 공통점이다.
고립주의는 비단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EU 내에서는 영국의 뒤를 쫓아 추가 탈퇴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고 중국의 경우 군사굴기라는 ‘마이웨이’를 추구하고 있다.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뜻이다. 캐나다 퀘백주와 스페인의 카탈루냐, 미국 텍사스에서 분리독립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도 고립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번 선거는 또 경제회복 부진, 불법 이민자 문제, 자유무역 확대에 따른 일자리 감소 등 산적한 국내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던 기득권 정치세력에 대한 심판과 분노의 표출로 볼 수 있다.
8년간 영부인으로서 백악관 생활을 했고 뉴욕 상원의원을 거쳐 오바마 1기 행정부에서 국무장관까지 지낸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미국의 기득권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인사였다. 사설 이메일 서버를 사용한 힐러리의 부도덕함은 지탄의 대상이 됐고, 국무장관직을 클린턴재단 축재에 활용한 정황은 밑바닥 민심의 시각에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워싱턴DC 주류 정치권의 적폐로 여겨졌다.
동성결혼 허용 등 미국 사회의 급진적인 진보화를 우려하는 보수진영에서 민주당 정부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결기도 힐러리를 지지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다.
[워싱턴 = 이진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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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초 예상과는 달리 주요 경합주를 휩쓸며 대이변을 연출했다. 트럼프는 한국시간 9일 오후 3시 현재 핵심 승부처로 꼽혔던 플로리다, 오하이오, 노스캐롤라이나 주를 휩쓴 것은 물론 미시간, 위스콘신 등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 지역에서까지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 승리를 거뒀거나 앞서가고 있다. 텍사스 주 등 텃밭을 포함하면 총 30개 주에서 승리를 거둘 전망이다. 선거인단도 승리에 필요한 270명을 훌쩍 넘긴 300여 명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된다. ‘힐러리가 303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승리를 거둘 것(로이터)’이라던 당초 예상과는 정반대다. 선거 직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빗댄 ‘트럭시트(Truxit)’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을 정도로 충격적인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대선은 인구 구조상 민주당과 힐러리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거였다. 공화당 지지층인 백인 유권자 비중이 줄고, 민주당 지지층인 유색인종 유권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압승했던 1980년 대선 당시 레이건 공화당 후보가 백인 유권자들로부터 56% 지지를 얻어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2012년 공화당 밋 롬니 후보는 레이건보다 백인 지지율이 3%포인트나 높았음에도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에게 3.85%포인트 차이로 패배했다.
이유는 인구 구조의 변화였다. 1980년 88%에 달했던 백인 유권자 비중이 2012년 72%로 떨어진 반면, 흑인·히스패닉·아시아계 등 유색인종 유권자 비중은 12%에서 28%로 늘어난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백인 유권자 비중은 70%로 낮아지고 유색인종 유권자 비중은 30%까지 높아졌는데, 이같은 인종 구성을 2012년 대선에 적용시킬 경우 오바마의 리드 폭은 5.4%포인트로 확대된다.
고학력 백인 유권자 증가도 힐러리에 유리할 것으로 예상됐다. 쿡 폴리티컬 리포트에 따르면 2012년 전체 유권자의 36%을 차지했던 대졸 이상 백인 유권자 비중은 이번 대선에서 37.4%로 늘어났고, 고졸 이하 백인 유권자 비중은 36%에서 32.8%로 감소했다. 그리고 힐러리는 트럼프 보다 대졸 이상 백인 유권자들로부터 12.3% 더 많은 지지(이달 3일 블룸버그 여론조사)를 얻고 있었다. 한 마디로 ‘질래야 질 수 없었던’ 선거였던 것이다.
트럼프가 이처럼 불리한 선거구도를 깨고 대이변을 연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복합적이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힐러리 이메일 스캔들 재수사 발표가 선거 막판 선거판을 뒤흔들었고, 트럼프가 막판 총력을 ‘러스트 벨트’(낙후된 중서부 제조업지대)의 백인 중산층 노동자들을 상대로 펴면서 이들을 결집시켰고, 여론조사는 물론 외부에 자신의 의사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은 숨은 표, 이른바 ‘샤이 트럼프’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어 냈다는 데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트럼피즘’으로 집약된 유권자들의 변화와 개혁 열망이 표로 대거 반영되면서 승패가 갈렸다는 게 해외 언론의 분석이다. 실제로 CNN·ABC 등 방송사 공동 출구조사 결과 드러난 민심의 키워드 역시 ‘변화’였다. 대통령 선택의 기준과 관련해 응답 유권자의 38%가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인물인가를 보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풍부한 경험’과 ‘판단력’은 각각 22%, ‘나에 대한 관심’은 15%에 그쳤다.
힐러리는 변화에 대한 유권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실패했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힐러리가 승리한 버지니아 주에서조차도 ‘누가 더 변화에 적합한 인물이냐’는 질문에 79%가 트럼프를 꼽았다. 반면 힐러리를 꼽은 유권자는 15%에 불과했다. 당내 경선에서 대세론만 앞세우다 변화를 앞세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바람몰이에 속수무책 무너졌던 2008년의 뼈아픈 실패를 이번에도 반복한 것이다. 이후 절치부심했던 힐러리는 “경력과 업적을 자랑하는 모습은 마치 마이크로소프트 같다. 그런데 시장은 애플같은 사람을 원하고 있다”며 자신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했던 존 포데스타를 선대위원장으로 영입했지만, 이번에도 “백악관,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모두 거쳐 준비됐다”며 자신의 경륜과 안정감만 부각하는데 주력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경제 문제에 대한 유권자들 관심도 승패를 가른 요인이었다. 유권자들의 58%는 차기 대통령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이슈로 ‘경제’를 꼽았지만 힐러리는 경제 문제, 특히 일자리에 대한 확답을 주지 못했다. 트럼프가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를 감소시키는 불합리한 무역협정을 손봐 일자리를 미국 내로 도로 가져오겠다”고 시종일관 강조한 끝에 위스콘신 등 민주당의 아성이었던 북부 지역의 표를 가져온 것과 대비된다.
막판 유세 전략 차이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트럼프가 공격적으로 경합주와 열세지역을 파고들며 힐러리 흔들기에 총력을 기울였던 반면 힐러리는 최대 경합주인 플로리다를 내버려 둔 채 민주당 우세지역을 찾았고, 거기서도 승리를 기정사실화한 채 ‘화합’을 강조하는 안이한 행보를 보였다. 트럼프는 선거 전날인 7일 플로리다, 노스캐롤라이나, 펜실베니아, 뉴햄프셔, 미시간 등 무려 5개주(약 3000㎞)를 넘나드는 강행군에 나서는 승부수를 던졌다. 승리의 전제 조건인 플로리다에서의 승리를 확실하게 다지고 초박빙인 노스캐롤라이나와 펜실베니아를 차지한 뒤 나아가 미시간과 뉴햄프셔에서 막판 바람을 일으켜 뒤집기를 하려는 전략이었고,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노현 기자 / 임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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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보로서도 그랬지만 그가 살아온 70년 세월 속에 평탄하게 흘러간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사업가에서 연애인으로 그리고 정치인으로까지 끊임없이 변해왔지만 그 과정에서의 돌출행동은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엄중한 자리에서 그가 과연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트럼프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부침을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인내심을 키웠고 강철과 같은 인물로 성장했다고 스스로 주장한다.
트럼프는 1946년 뉴욕 퀸스에서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와 어머니 메리 매클리오드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트럼프 가문은 1885년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 출신 집안으로 부동산 개발업으로 자수성가했다. 트럼프의 아버지는 “노동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며 첫째 형인 로버트와 함께 트럼프에게 유리병 줍는 일을 시켰다. 트럼프 형제는 건설 현장을 돌아다니며 모은 병을 팔아 용돈벌이를 했다. 트럼프의 괴팍한 성격은 공사판에서 만났던 거친 사람들과 사이에서 생긴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는 13살까지 다녔던 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의 얼굴을 때리는 ‘대형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그의 부모는 트럼프가 8학년이 되던 1959년에 그의 거칠고 반항적인 행동을 바로잡고자 사립 기숙학교인 뉴욕군사학교로 전학시켰다. 트럼프는 자서전에서 “아버지는 나 자신을 높이는 자세로 살라고 훈육시켰다”며 “나에게 ‘킬러’가 돼라고 가르쳤다”고 회고했다.
이 시기에 트럼프는 아버지가 관리하던 2만4000가구의 집세를 받는 등 집안일을 도우면서 부동산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64년 포덤대에 입학했지만 부동산 분야를 전문적으로 배우고자 관련학과가 개설된 위해 펜실베이니아대 경영학부(워튼스쿨)로 편입했다.
트럼프는 주로 소규모 임대업을 했던 아버지와 달리 화려하고 큰 건물 투자에 관심을 가졌다. 1970년대부터 오피스 빌딩, 호텔 등 대규모 사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특히 1974년 파산 직전이었던 코모도어 호텔의 소유권을 뉴욕시에 단돈 1달러에 넘기는 대신 99년간 임대권한을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트럼프는 교통의 요지였던 이 자리에 그랜드하얏트호텔을 세워 크게 성공했다. 이 밖에도 그가 36세였던 1991년에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 주상복합 건물인 ‘트럼프타워’를 세우면서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바꿔놓은 인물’로 평가받았다. 1980년대 후반에는 당시 경영 부진에 빠져있던 이스턴항공을 인수해 자신의 이름을 붙여 ‘트럼프셔틀’이라는 항공서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처럼 트럼프는 사업마다 자신의 이름을 붙여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능력을 보였다.
한평생을 승승장구해온 것처럼 보이는 트럼프이지만 세계 경제가 요동칠 때마다 실패의 쓴 맛을 봤다. 1990년 부동산 경기 침체가 시작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1년만에 절반 넘게 떨어져 파산을 맞았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은행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플라자호텔, 트럼프셔틀, 유람선사업 등을 매각하면서 사업 재편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트럼프는 그 해 포브스가 선정하는 억만장자 부호에서 누락되면서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절대로 재기할 수 없는 인물”로 꼽혔다.
그러나 1996년 이후 세계 경기 회복과 더불어 호텔, 카지노 등 리조트 사업이 살아나면서 트럼프도 보란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부동산 이외에 연예사업에도 발을 넓혀 미스USA, 미스유니버스 등 미인대회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NBC방송의 리얼리티 쇼 ‘어프렌티스’를 공동으로 제작해 직접 사회를 맡으면서 “넌 해고야(You‘re fired)”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정치적으로는 잦은 혼란을 겪었다. 실제로 1987년까지 민주당 당원이었던 트럼프는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영향을 받아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트럼프의 선거 슬로건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가 레이건 전 대통령이 대선 당시 사용했던 것과 같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평소 트럼프가 “레이건 시절의 미국은 존경받는 나라였다”며 “내가 당선된다면 미국은 다시 존경받는 나라가 될 것”이라며 자신이 ‘제2의 레이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공화당 이적 당시 대선 출마 의지를 밝히고 신문에 전면 광고를 싣는 등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다 돌연 번복했다. 1999년 대선에 나서겠다며 개혁당으로 이적한 뒤에도 선거운동 직전에 불출마를 선언에 논란을 빚었다. 두 차례 모두 트럼프가 자서전을 발간한 시기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이를 홍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트럼프는 2001년 민주당으로 복당해 이번 대선에서 경쟁을 펼친 힐러리 클린턴에게 무려 10차례에 걸쳐 기부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중 4번은 2008년 힐러리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로 기부금은 최소 10만달러(1억136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트럼프는 당시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트럼프드(Trumped!)’에서 “힐러리는 좋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에 트럼프는 “비즈니스 목적이었을 뿐”이라고 일축했했다.
[박대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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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보로서도 그랬지만 그가 살아온 70년 세월 속에 평탄하게 흘러간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사업가에서 연애인으로 그리고 정치인으로까지 끊임없이 변해왔지만 그 과정에서의 돌출행동은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엄중한 자리에서 그가 과연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트럼프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부침을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인내심을 키웠고 강철과 같은 인물로 성장했다고 스스로 주장한다.
트럼프는 1946년 뉴욕 퀸스에서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와 어머니 메리 매클리오드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트럼프 가문은 1885년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 출신 집안으로 부동산 개발업으로 자수성가했다. 트럼프의 아버지는 “노동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며 첫째 형인 로버트와 함께 트럼프에게 유리병 줍는 일을 시켰다. 트럼프 형제는 건설 현장을 돌아다니며 모은 병을 팔아 용돈벌이를 했다. 트럼프의 괴팍한 성격은 공사판에서 만났던 거친 사람들과 사이에서 생긴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는 13살까지 다녔던 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의 얼굴을 때리는 ‘대형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그의 부모는 트럼프가 8학년이 되던 1959년에 그의 거칠고 반항적인 행동을 바로잡고자 사립 기숙학교인 뉴욕군사학교로 전학시켰다. 트럼프는 자서전에서 “아버지는 나 자신을 높이는 자세로 살라고 훈육시켰다”며 “나에게 ‘킬러’가 돼라고 가르쳤다”고 회고했다.
이 시기에 트럼프는 아버지가 관리하던 2만4000가구의 집세를 받는 등 집안일을 도우면서 부동산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64년 포덤대에 입학했지만 부동산 분야를 전문적으로 배우고자 관련학과가 개설된 위해 펜실베이니아대 경영학부(워튼스쿨)로 편입했다.
트럼프는 주로 소규모 임대업을 했던 아버지와 달리 화려하고 큰 건물 투자에 관심을 가졌다. 1970년대부터 오피스 빌딩, 호텔 등 대규모 사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특히 1974년 파산 직전이었던 코모도어 호텔의 소유권을 뉴욕시에 단돈 1달러에 넘기는 대신 99년간 임대권한을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트럼프는 교통의 요지였던 이 자리에 그랜드하얏트호텔을 세워 크게 성공했다. 이 밖에도 그가 36세였던 1991년에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 주상복합 건물인 ‘트럼프타워’를 세우면서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바꿔놓은 인물’로 평가받았다. 1980년대 후반에는 당시 경영 부진에 빠져있던 이스턴항공을 인수해 자신의 이름을 붙여 ‘트럼프셔틀’이라는 항공서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처럼 트럼프는 사업마다 자신의 이름을 붙여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능력을 보였다.
한평생을 승승장구해온 것처럼 보이는 트럼프이지만 세계 경제가 요동칠 때마다 실패의 쓴 맛을 봤다. 1990년 부동산 경기 침체가 시작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1년만에 절반 넘게 떨어져 파산을 맞았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은행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플라자호텔, 트럼프셔틀, 유람선사업 등을 매각하면서 사업 재편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트럼프는 그 해 포브스가 선정하는 억만장자 부호에서 누락되면서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절대로 재기할 수 없는 인물”로 꼽혔다.
그러나 1996년 이후 세계 경기 회복과 더불어 호텔, 카지노 등 리조트 사업이 살아나면서 트럼프도 보란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부동산 이외에 연예사업에도 발을 넓혀 미스USA, 미스유니버스 등 미인대회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NBC방송의 리얼리티 쇼 ‘어프렌티스’를 공동으로 제작해 직접 사회를 맡으면서 “넌 해고야(You‘re fired)”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정치적으로는 잦은 혼란을 겪었다. 실제로 1987년까지 민주당 당원이었던 트럼프는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영향을 받아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트럼프의 선거 슬로건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가 레이건 전 대통령이 대선 당시 사용했던 것과 같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평소 트럼프가 “레이건 시절의 미국은 존경받는 나라였다”며 “내가 당선된다면 미국은 다시 존경받는 나라가 될 것”이라며 자신이 ‘제2의 레이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공화당 이적 당시 대선 출마 의지를 밝히고 신문에 전면 광고를 싣는 등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다 돌연 번복했다. 1999년 대선에 나서겠다며 개혁당으로 이적한 뒤에도 선거운동 직전에 불출마를 선언에 논란을 빚었다. 두 차례 모두 트럼프가 자서전을 발간한 시기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이를 홍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트럼프는 2001년 민주당으로 복당해 이번 대선에서 경쟁을 펼친 힐러리 클린턴에게 무려 10차례에 걸쳐 기부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중 4번은 2008년 힐러리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로 기부금은 최소 10만달러(1억136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트럼프는 당시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트럼프드(Trumped!)’에서 “힐러리는 좋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에 트럼프는 “비즈니스 목적이었을 뿐”이라고 일축했했다.
[박대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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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출구없는 시대의 선택
트럼프 당선, '담대한 희망'에서 '깊은 절망'으로
트럼프 당선이 확정된 날 필자가 재직하는 학교는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수없이 쏟아지던 전자메일이 거짓말 같이 멈추었다. 교수들은 트럼프 당선의 의미를 평가하기 보다는 헛웃음을 지으며 애써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다.
몇 몇 직원들은 도저히 학교에 올 수 없다고 휴가를 냈고, 일부 직원들은 목 놓아 울기도 했다. 캔사스 대학이 위치한 도시인 로렌스는 보수주의가 강한 이 곳에서 외딴 섬같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작은 대학 도시다. 이곳에 트럼프 당선이 던져준 충격은 상상 이상이다.
낙관적 미래에 대한 전망 사라져
오바마 대통령이 2008년에 등장할 때의 캐치프레이즈가 “담대한 희망”이었다. 그 희망이 깊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절망의 깊이는 도저히 당선될 수 없을 것 같은 후보가 당선되어서 앞으로 4년은 더 기다려야 새로운 대통령을 뽑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정도가 아니다. 이 절망은 훨씬 더 근본적이다.
트럼프 당선의 절망은 진보적 미래를 그리는 정치세력의 지적 실패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대침체(The Great Recession)라고 칭해지는 2008년의 경제 위기 이후 유럽이 긴축재정을 피며 오랜 기간 동안 경제 위기가 심화되고, 중동과 아프리카의 이민자 유입으로 사회가 분열될 때, 미국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뽑고, 양적완화, 의료보험 확대, 최저임금 인상, 동성애 합법화, 소수 인종의 고위직 진출, 지구온난화에 대응할 수 있는 환경 보호 정책 등 중도좌파적 정책을 꾸준히 확대했다.
혁명적 변화는 아니지만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리버럴리즘과 사회과학적 연구에 의해 증명되는 온건한 중도 좌파적 정책에 기반하여 점진적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지배했다. 러시아의 권위주의 정권, 중국의 공산당 일당 독재, 유럽의 혼란, 중동의 테러리즘, 일본의 장기침체에 대비되어, 미국의 리버럴리즘이 유일한 희망의 이데올로기였다. 비록 담대한 희망이 아니라 소심한 희망이었지만, 희망은 희망이었다.
따지고 보면 20세기 이후의 모든 사회적 변화는 항상 새로운 지적 기획, 유토피아적 미래를 그리는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혼돈의 시기가 지속되었지만, 1917년 10월에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 있었다.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 칭해지는 1920년대 미국은 연일 소요와 파업이 지속되었다. 귀족 강도의 시절(The Robber Barons Era)라고 칭해지는 경제적 독점과 불평등 착취의 시대에 노동자와 시민들이 분노 속에 요구한 것은 사회주의적 정책들이었다. 맑스와 레닌의 사회주의적 이념이 희망이 대안이었다. 낙관적 희망이야말로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는 원천이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대부분의 국가들이 사회주의나 복지자본주의로 전환하였다. 미국은 경제정책에서는 노동계급에게 경제적 과실을 안겨 총수요를 확대하는 케인즈주의, 사회적으로는 1965년의 인권법 제정으로 미국 인권 역사의 신기원을 연 자유주의 이념이 지배하였다. 미국을 자유주의 복지국가로 바꾼 루즈벨트 대통령의 많은 정책들이 192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심지어 1980년대의 보수화도 희망적인 지적 기획의 산물이다.
일부에서는 트럼프가 클린턴에 이긴 이 번 선거를 레이건이 카터에게 이긴 1980년 대선에 비교한다. 사업가일 뿐만 아니라 연예계에 몸담고 있던 트럼프나 배우였던 레이건이나 다를 바 없고, 정치계에 오래 있었던 카터와 클린턴이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영국의 대처리즘으로 대변되는 보수화는 우파의 지적 성과의 산물이다. 1970년대 스테그플레이션의 문제를 해결하는 노벨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의 통화주의와 시카고 학파의 신자유주의라는 보수의 지적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1984년 레이건 재선 당시의 슬로건이 “미국의 새아침 (Morning in America)”이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 뒤에 아무런 지적 기획이 없다.
불만스런 현실…강한 권위에 대한 의존 높여
21세기도 16년이 지난 지금,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불만은 넘치는데 어떻게 이를 해결하고 낙관적 미래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한 진보의 담대한 기획이 없다.
현재의 사회적 불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전복적 방안은 황당하게도 권위주의와 테러리즘 뿐이다. 그러니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가진 대중은 권위주의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권위주의적 후보의 선택이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체제 내 전복으로 보인다.
실제로 출구조사에서 미국 유권자들은 후보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강력한 지도자를 꼽았다.
2012년에는 가치를 공유하는 후보의 중요성이 27%로 가장 높았는데, 올 해는 가치 공유의 중요성이 16%로 줄어들었다. 반면 후보 선택의 가장 큰 이유로 강력한 지도자를 꼽은 유권자가 36%로 2012년 대비 2배 상승하였다. 구체적 정책이나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권위주의에 기반한 어떤 막연한 변화만이 그들이 기댈 수 있는 희망이다.
위로 아닌 위로를 삼자면 공화당도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공화당의 주류로 부터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트럼프의 막말에 더해 보호무역주의, 대중주의, 대외고립주의, 이민자 적대는 공화당 주류의 의견과는 달랐다.
선거 직후라 공화당 인사 중 트럼프의 정책을 수용하자는 정치인들이 의견 피력을 많이 하지만, 그 기류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공화당을 새롭게 지지하고 나선 백인 노동계급을 외면하기도 어렵다. 양 당 모두 지지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클린턴의 패배는 선거 전술의 실패, 유권자의 변화뿐만 아니라, 진보의 지적 기획의 부족의 결과라는 면에서 오랫동안 아프게 기억될 것이다.
심리적인 치유는 상대적으로 빨리 되겠지만, 새로운 지적, 정치적 대안을 마련하는데는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릴 것이다. 미국의 진보와 지식인들은 상당 기간 트럼프 당선의 충격을 트라우마로 안고 살게 될 것이다.
잔뜩 ‘화가 난’ 백인 노동계급
왜 미국의 백인 노동계급, 특히 남성들은 트럼프를 지지하고 나선 것일까? 미국 시간으로 11월7일 월요일 선거 전날 필자가 가르치는 경제사회학 대학원 수업에서 이번 선거의 전망과 트럼프 부상의 의미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때 학생들이 몇 가지 놀라운 얘기를 했다.
필자가 재직하는 학교는 미 중부에 위치하고 있어 수업을 듣는 박사 과정 학생들 중 위스콘신, 미시건 지역 출신들이 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 지역이었다가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 충격을 안겼던 그 곳이다.
그 중 자신을 노동계급 출신으로 규정하는 박사과정생이 이런 주장을 하였다.
“자신이 고향에서 느낀 바로는 여론조사와 언론이 보도하는 것보다 중서부 지역에서 트럼프 지지가 높을 것이며 설사 클린턴이 결국 이기더라도 상당한 놀라움을 안길 것이다. 사람들이 매우 매우 화가 나 있다 (very를 두 번 강조하며 말하였다).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하면 경멸하는 여론이 있어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펜실베니아도 안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펜실베니아는 중요 여론조사 기관이 모두 80-99%의 확률로 클린턴이 이긴다고 전망할 때였다.
선거 결과가 나온 후 그 학생에게 다시 물었다. 중서부에서 트럼프 지지율이 높을 것이라고 본 근거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그의 대답은 노동계급은 전통적으로 침묵을 미덕으로 삼고 있지만, 히스패닉 노동자들의 존재를 매우 잘 인식하고 있고, 경제적 과실이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는데 불만이 많다는 것이다.
사회학자인 아네트 라루(Annett Lareau)가 <불평등한 어린시절>에서 주장했던 노동계급 출신들은 제도적 환경에서 스스로를 제약하는 감각(Sense of Constraint)을 가지고 있다는 관찰과 일치한다. 여론조사의 실패 원인도 이들 침묵하는 계급의 의견을 반영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백인 노동계급의 트럼프 지지를 그들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모두 옹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백인 노동계급의 트럼프 지지 뒤에는 인종주의와 성차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저학력 백인 노동자들은 히스패닉계 이민노동자 유입으로 노동공급이 늘어나서 저숙련 일자리의 임금에 하방압력이 가해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많은 사회과학적 연구들이 이민노동자 유입이 본국 노동자의 소득을 낮춘다는 근거가 없다고 보여주지만, 모든 연구 결과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버드대 보하스 교수(George Borjas)는 이민노동자 유입과 본국 노동자의 소득은 음의 상관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필자도 한 논문에서 저학력 저숙련 이민노동자의 유입이 본국 노동자 소득을 낮추는 효과가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트럼프의 이민자 추방 정책이 인권의 측면에서는 지지하기 어려워도 경제적으로 백인 노동계급에게 이득을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가져올 가능성은 상당하다.
백인 노동계급이 임금 하락 압박에 직면했을 때 인종주의적 해결책을 지지하는 것은 역사적 선례가 있다. 미국의 자유 이민 정책에 반했던 가장 차별적인 법률이 바로 1882년의 중국이민제한법(The Chinese Exclusion Act)이다.
골드러시 이후 미국 서부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줄어들자, 미국의 노동계급은 중국 이민자들을 비난하며 적대시하였다. 중국이민제한법을 지지하고 이끌었던 사람이 노조 지도자였던 데니스 키어니(Denis Kearney)와 노동자당(Workingman’s Party)이었다.
일본이 더 이상 일본 이민자를 미국에 보내지 않기로 약속한 “신사협정”은 이러한 미국 노동계급의 인종 차별 분위기의 연장이다. 그 때와 지금의 차이는 인종주의의 대상이 아시안에서 히스패닉으로 바뀐 것뿐이다.
경기 침체 속 인종주의 득세
노동계급이 인종주의적 차별을 지지할 때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이 조건을 뒤집으면 노동계급이 인종주의를 버리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조건이 된다.
미국 역사에서 이태리인, 아일랜드인, 동유럽 출신들은 “얼굴 하얀 흑인(White Negro)”으로 간주되며 큰 차별을 받았다. 그런데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이들 백인 내부의 민족적 차별은 완전히 사라진다. 1965년의 인권법이 가능했던 것도 1950년대와 60년대가 자본주의의 황금기였기 때문이다.
경제가 발전하면 파이가 커지고 모두가 파이를 나눠도 모자람이 없다. 모든 그룹의 상향적 사회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종 간 경쟁이 무뎌진다.
뉴욕시립대의 리차드 알바(Richard Alba)는 이런 상태를 “비(非)제로섬게임(Non zero sum game)”이라고 칭한다. 이 환경에서 인종주의는 줄어들고 노동계급은 인종적 화합을 도모한다.
하지만 경제성장률이 낮아서 분배가 중시되는 제로섬게임의 상황이나 소득이 줄어드는 경제 후퇴의 상황에서는 인종주의가 창궐하게 된다. 구조적 장기침체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인종주의를 완화시킬 구조적 환경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계몽과 교육이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문화를 확산시킬 유일한 방법이지만, 이번 선거로 증명되었듯 이 방법은 한계가 분명하다.
더욱이 백인 노동자계급의 몰락은 최근의 경제적 위기 이전에 시작되었다. 2008년 이후의 저성장과 회복은 그 몰락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러스트벨트(rust belt)라고 칭해지는 미국 중부의 제조업 공장 지대를 다녀보면 몰락하는 도시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과거 제조업 부흥의 시절에 건설했던 도로 등의 기반시설은 넘쳐나지만 이 시설을 이용하는 차량과 사람의 숫자는 적고 이 모든 시설이 낡아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떠나고 남아있는 노동계급이 느낄 절망감이 바로 음산한 회색 도시의 느낌이다.
절망과 분노는 자기파괴적 행위로 이어진다. 작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Angus Deaton)은 최근 논문에서 21세기 들어 중년의 기대수명과 생존률이 다른 모든 그룹에서 상승했는데, 유일하게 저학력 백인은 하락했음을 보고해 미국 사회에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사망률 상승의 원인도 마약 알콜과 같은 향정신성 약품 중독과 그로 인한 질병의 확산 때문이다. 마약, 알콜 관련 사망율이 81%, 간질환이 50% 늘었다. 경제구조의 변화로 인한 생활 양식과 문화의 파괴다. 과거 흑인 문화로 간주했던 언더컬쳐가 저학력 백인 노동계급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학력 백인은 2008년에는 오바마의 다양성에 기반한 “담대한 희망”을 지지했다가 2016년에는 트럼프의 인종주의가 만들 “위대한 미국”으로 옮겨갔다. 트럼프의 위대한 미국이 저학력 백인 노동계급에게 진정한 희망을 주지 못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진보진영에서 다음 선거에서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이 무엇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방황하는 진보…어떤 미래를 만들지에 대한 전망 보여줘야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임할 때는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누가 당선될 것인지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트럼프의 등장에 충격을 받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불안해 하지는 않았다.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네이트 실버(Nate Silver)를 비롯한 메타 여론조사 분석가들이 선거 결과를 너무나 정확하게 예측하였기 때문이다. 올해도 이 예측이 반복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 기대에 비례해 트럼프 당선이 지식인 사회에 가져온 충격은 크다.
언론에 보도되었듯 폴 크루그만(Paul Krugman) 뉴욕시립대 교수는 “우리가 몰랐던 우리나라(Our Unknown Country)”라는 칼럼에서 지식인들이 미국, 주로 시골 지역에 사는 저학력 백인들의 생각과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아마 많은 지식인들이 이 고백에 동감할 것이다.
미국 사회는 과거 어느 때 보다 계급 간의 지리적, 물리적 분리가 심하다.
서부나 동부의 대학에서 일하던 교수가 필자가 재직 중인 캔사스대로 옮겨온 후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있다. 동교 교수들이 중부 캔사스에 가서 살 수 있는지 걱정한다는 것이다. 동서부 해안 지역의 엘리트에게 중부는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곳이다.
학력 구성의 측면에서 동부와 서부의 대도시들, 남부의 발전하는 ‘선벨트(sun belt)’ 지역은 고학력 집중 현상이 심화된 반면, 그 외 모든 지역은 저학력 노동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현상이 심화되었다. 사회적 접촉을 통해 가치관을 공유할 기회가 구조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인터넷의 발전은 사회구성인자들의 유기적 화합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소수 부류끼리 끼리끼리 대화를 나누어도 외롭지 않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뒤르껨이 근대는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사회적 유대가 변화했다고 주장했는데, 지금의 환경은 가치관의 측면에서 유기적 연대에서 오다쿠가 되어도 외롭지 않은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기계적 연대로 옮겨가고 있다.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돌아선 백인 노동계급 남성이 다양성이라는 가치관에 공감하고 그러한 변화를 지지할 가능성은 오히려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진보적 대안으로 남는 것은 계몽과 교육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에게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고, 부를 공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현재의 정치적 환경에서 이를 실현할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트럼프 승리가 진보진영에 던진 정치적, 지적 숙제의 부담은 매우 무겁다. 가장 암울한 전망은 어쩌면 세월이 흘러 인구 구성이 바뀌어 새로운 가치관을 공유하는 시민의 숫자가 늘어날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더 희망적인 전망은 트럼프 시절의 암울함을 겪은 후 노동자계급이 민주당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담대한 희망의 구체적 모습을 제시할 때까지 노동자계급의 지속적 지지를 담보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중 누구도 그 구체적 모습이 무엇인지 적어도 아직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