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去彼取此(거피취차>

doll eye 2019. 6. 25. 15:59

최진석 교수의 삼성사장단 회의 강연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를 최초의 철학자라 부른다. 천명(天命)을 벗어나 인간의 길을 건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믿음에서 벗어나 생각을 하면서 신으로부터 독립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신이 아니라 물을 만물의 근원으로 본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로 친다.

 

공자와 노자는 인간의 길, 도(道)를 추구했던 철학자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세계에 다가가는 방법이 달랐다.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를 극복하고 예를 따르는 것, 노자는 거피취차(去彼取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는, 바람직한 것을 버리고 바라는 것을 취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말하자면 공자는 바람직한 일과 좋은 일, 해야 하는 일, 즉 규범적으로 정해진 일을 강조한다는 차원에서 근대성에 가까운 반면 노자는 바라는 일, 좋아하는 일,하고 싶은 일에 방점을 찍으면서 현대성에 근접한다.

 

공자에서는 주도권이'우리'에게 있지만, 노자에서는 그것이 '나'로부터 시작된다.사실 공자에게서 강조되는 보편적 이념이란 원래 존재한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노자는 가치관이나 이념처럼 사회를 꾸미는 기준은 억지로 만들어진 개념적 구조에 불과하다고 봤다. 그런 기준이 행사되는 한, 사회나 조직은 '구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구분한 다음에는 '배제'를 하는데, 이는 결국 어느 한쪽에 서서 다른 한쪽을 억압한다는 의미다. 자발성이나 자율성은 유린당한다. 이런 억압을 떨치고 스스로 자발성 속에서 삶을 실현하라는 게 노자에게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그런 자발적 개인의 통합으로 사회와 국가를 이룰 때 진정한 강국이 건설되는 법이다. 바람직한 기준에 모두 집중 통일하는 것보다 각자가 바라는 것을 자발적으로 수행하여 이룬 통합으로 이루어진 조직이 더 강하다. 요즘 기업에 부는 인문학 열풍은 사실 지속적 발전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위기의식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창조, 창의, 상상력으로 무장하지 않고서는 이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조여오는 한계를 돌파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인문' 즉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에 새롭게 적응하는 일이 바로 창조나 창의이다. 인문학은 그리스 시대나 중국 춘추전국 시기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 '신(神)의 주관'이란 개념 틀에서 '인간의 독립성'을 주창하기 시작하면서 풍요해졌다.

 

인문학은 그 내용을 쉽게 정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는 항상 달라지기 때문에 그 시기를 사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내용과 방법도 변하고, 즉 존재의 지평이 순간마다 변하기 때문에 딱히 하나의 개념이나 방법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런데 인문적 통찰, 인문적 창의성(상상력)을 이미 정해진 배움(學)의 틀로 받아들이면 문제가 생긴다. 인문적 통찰의 기본은 학문 체계로 수용해서 거기에 대해 내 가치관을 피력하는 도구의 도구로 활용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인문적 활동 즉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노자는 독립적인 기준으로 스스로를 보지 못하는 삶, 자기 삶의 양식이 자기로부터 나오지 않는 삶에서 스스로에게서 생산되는 기준으로 사는 삶으로 전진이 필요하다고 묻는다. '도덕경'에서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보태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爲學日益 爲道日損)"고 말한다. 쌓고 또 쌓아서 두터워진 이념이나 신념 혹은 바람직한 기준의 틀을

"덜고 또 덜어내면, 무위의 지경에 이른다(損之又損,以至於無爲)." 무위의 단계에 이르면 집단의 틀에서 기능하기보다는 집단을 이겨내고 자신의 주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 대답하는 데 익숙한 사람보다 질문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보면 중진국 레벨에서 정해진 기준을 수행하는 차원에 있다가, 기준을 생산하거나 장르를 만들어야 하는 창의적 선진국 단계로 진입해야 하는 단계에서 중심 기능을 하는 학문으로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노자가 반문명론적이고 소극적이며 현실도피적이라는 해석은 오해다. 노자 철학은 무위를 통해 천하를 장악하는 정도까지의 현실적 성취를 도모하는 철학이다.

 

 

도덕경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무위를 행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無爲而無不爲)/ 천하를 차지하려면 항상 무위적으로 일처리 해야 한다. (取天下常以無事·개방적 상태에서 자율적으로 맡긴다)/만약 어떤 틀을 정해 놓고 그 이념에 맞게만 일을 하게 하면 천하를 차지할 수 없다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천지자연은 장구하다 (天長地久)/ 천지자연이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자신을 살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무위(無爲)란 이념이나 신념의 지배력이 제거된 상태에서 오직 자발적 생명력으로만 독립된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또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이다.

기준과 이념을 근거로 하는 방식은 유위(有爲)다. 무위적 상태에서라야 '나'는 세상을 봐야 하는 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다. 보이는 대로 보고서 거기에 적응하는 일들을 우리는 창의적, 창조적 또는 선도적이라고 표현한다.

 

노자는 사람이 마음속에 기준을 갖거나 전체 사회가 하나의 이념으로 묶이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면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볼 수밖에 없어 유연성이 사라진다. 무언가에 갇히는 순간, 인간은 뻣뻣해진다.

 

 

혁신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늘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판단을 하는 것이지 이미 있는 프레임을 지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 움직이는 세, 변하는 세상에 대해 우리의 판단도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따라가야 한다. 봐야 하는 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 대로 보고 반응하는 것, 이게 무위이자 혁신이다. 나의 진실을 세계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진실을 내가 수용하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의 관건은 누가 보이는 대로 봤느냐 하는 점이다. 항우와 유비는 세상을 봐야 하는 대로 본 인물이고, 유방과 조조는 세상을 보이는 대로 봤다. 사실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이 인생이다 보니 '보이는 대로 보기'가 쉽지는 않다. 이런 지식이나 경험을 완벽하게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들을 머리 위에 두고 나를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그것들을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게 우리의 과제다.

 

한국인은 여전히 독립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 꿈과 이상은 멀리 있고, 삶을 지배하는 기준은 나 자신이 아닌 외부에 있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이런 현실이 문제라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채 퇴화하는 건 아닌가.

 

 

물론 사회 발전 단계와 조건에 따라 집단적·조직적 공통 이념을 수행해야 성취되는 단계도 있지만, 그 또한 개인의 자발적 자존감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제 물어야 한다. 보편적 이념의 수행자가 될 것인가, 자기 꿈의 실현자가 될 것인가.

 

 

많은 회사가 '부(部)'제에서 '팀(team)'제로 바꿔가는 건 개인의 독립적 자발성을 이끌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구성원을 각자의 고유명사 속에서 자율적 행복을 누리는 존재로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조직의 부품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책임자처럼 느낄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이다.

 

노자는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다"고 말한다. 개념의 틀로 이루어진 이념의 운용 주체인 '천하'를 위한다는 사람은 자신을 구체적인 실재 세계로부터 유리시킨 사람이다. 이 사람은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념'을 수행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함석헌 선생은 한국 사회에서 혁명이 완수되지 못하는 이유를 혁명의 주체들이 스스로는 혁명되지 않았으면서 정해진 혁명의 이념만을 수행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외에 나가서 온갖 어려운 봉사 활동은 할 수 있어도 자기 부모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은 쉽지 않고,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온몸을 바치지만, 가정을 민주적으로 꾸리지 않는 사람은 구체적 터전을 버리고 보편이나 이념의 공간으로 이탈해버린 사람이다.

 

 

진정한 덕성, 힘, 자유, 활동은 천하(보편 세계)에 있지 않고 자신의 몸에 있다. 보편적 이념으로 삶을 지배하려고 하지 마라. 삶은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내 몸 안에 있다. '자기'를 위하는 것은 천하와 대립하거나 또는 초월하자는 게 아니라 그 천하를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자기의 자발성, 생명력에 집중하는 것이다. 집단이 만든 이념으로 개인을 통합하면 사회가 약해진다. 자발적 개인들이 집단을 만드는 게 더 강한 사회다.

 

 

 

<통치자는 백성을 믿고 말을 아껴야…>

 

 

스스로 이루도록 이끌어라

 

자신의 잣대로 판단 말라 리더가 조짐을 읽는 능력이 있으면 정해진 것을 강요하지 않고 자발적 참여 이끌어 낼 수 있어 잔소리를 줄여야 성취와 功은 백성들에게 돌려야 功을 이루게 이끌어 줬으면 리더의 역할은 그것으로 충분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삼성 사장단 회의에서 강의한 '노자에게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 내용을 지난주에 이어 소개한다.

 

최진석 교수는 베이징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저서로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인간이 그리는 무늬'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등이 있다.

 

 

길거리에 귀걸이를 하고 옅은 화장까지 한 채 마치 여자처럼 꾸미고 지나가는 젊은 남자를 봤다고 하자.

 

매우 낯선 풍경이다. 여기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대개는 '좋다' 아니면 '나쁘다'고 판단할 것이다. 만약 이 정도에 그쳤다면, 미안하지만 리더의 자격을 아직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리더는 '조짐'을 읽는 사람 리더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가치관이나 신념, 자기 취향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현상이 반영하는 맥락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이 생경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풍경을 '조짐' 혹은 '신호'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좋다' '나쁘다'는 자신에게 이미 있는 이념이나 신념을 근거로 할 뿐이다. 신념에 맞으면 '좋다' 하고, 맞지 않으면 '나쁘다' 한다. 정치적 판단의 전형이다. 이런 판단이 많으면 이념과 신념들 사이 충돌만 있지 화해는 없다. 제3의 창조는 불가능하다.

 

조짐을 읽으려면 질문해야 한다. 전에는 없던 일이 지금 일어났다면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 해해야 한다. 이 궁금증이 질문을 하게 하는 것이다.

 

 

조짐을 읽는 더듬이는 '질문' 리더는 질문이라는 덕목에 유념해야 한다. 대답이라는 건 이미 있는 지식이나 이론을 흡수한 다음,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다시 뱉어내는 일이다. 이때는 누가 많이 혹은 원형 그대로 뱉어낼 수 있는가가 승부를 가른다. 대답을 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오직 지식이나 이론이 지나다니는 통로나 중간역일 뿐이다. 반면 질문은 궁금증이나 호기심 즉 자신의 욕망이 튀어나오는 행위다.

 

 

질문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신념이나 이념의 맹목적인 지배를 받거나

지식이나 이론의 전달자 혹은 수용자로 남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하는 궁금증의 주인,

욕망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기서 인문적 통찰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업가는 경계에서 결단하는 존재 기업가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다. 자신의 의사 결정이 승패를 바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아니 생사를 결정하기도 한다. 생사의 경계에 있는 유일한 직종이다.

 

 

공직자, 정치인, 교수에겐 이 정도 긴장감은 없다. 경계에 서 있다는 건 어느 한 편에도 의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모든 이념과 신념은 모두 한 편에 서는 것들이다. 기업가가 경계에 있다는 말은 바로 어느 한 편에도 서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념이나 신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특정한 기준이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사람은 경계에 서서 고도의 불안을 감당하는데, 이불안이 그 사람을 예민하게 유지해 준다.

 

 

이 예민함이 바로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더듬이'가 된다. 지식, 감각, 경험, 욕망, 기억이 한 덩어리로 폭발해 나오는 통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다. 이 더듬이는 매우 성숙한 상태의 자유이자 자발성이다.

 

우리가 차근차근 축적하는 모든 지적 작업은 바로 이 더듬이가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는

정확성을 기대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말하는 더듬이는 이미 정해진 것들로부터 제한을 받거나 지배를 받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할 때만 빛을 발할 수 있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리더는 기존의 지식이나 이론의 수행자가 아니라, 욕망의 자발적 발휘자로 등장한다. 바로 대답이 아니라 질문하게 되면서 조짐을 읽게 되는 것이다.

 

노자 리더십의 핵심은 결국 조짐을 읽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있다면 정해진 것을 강요하지 않고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유위(有爲)가 아니라 무위(無爲)로서 가능해진다.

 

 

무위는 정치 리더십에도 적용된다. 노자는"가장 훌륭한 통치는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만 안다. 그다음 단계는 통치자를 친밀하게 느끼며 찬미한다. 더 낮은 단계에서는 통치자를 두려워한다. 가장 낮은 단계는 백성들이 통치자를 비웃는 상황이다 (太上, 下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라고 말했다.

 

 

이상적인 체제에서 백성이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만 겨우 아는 건 그가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팔짱 끼고 가만히 있다는 게 아니라, 백성이 과중하게 느낄 통치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통치자가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무장해 이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하되 반드시 자기 뜻대로 하려 하지 않는다 (爲而弗志)"는 것이다. 통치의 주도권이 통치자가 아니라 백성에게 있을 때 가능한 풍경이고, 이 풍경은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을 때라야 비로소 그려질 수 있다.

 

 

구성원들이 지배 권력을 두려워하고 비웃는다는 말은 구성원 자신과 지배 권력 사이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그 구성원들은 조직의 참여자가 아니라 비평가로 남게 되면서 조직은 자체 붕괴를 시작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개인, 조직, 사회, 국가도 외부의 것들이 무너뜨릴 수는 없다. 항상 자체 붕괴가 먼저 시작되면서 외부의 침략자들을 초청하게 되는데, 자체 붕괴의 신호탄은 구성원들이 비평가 행세를 하게 될 때다.

 

 

영화가 재미있고 없고를 좌우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주목할 대목은 감독이 관객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핵심이란 점이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관객의 수준을 믿지 않으면 의도대로 영화가 읽히지 못할 걸 걱정하게 되고, 그러면 불안한 마음에 관객이 읽어야 할 내용까지 모두 영화에 담게 된다. 이때 관객이 그 영화 속으로 들어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여백이 사라진다. 이 여백에서 감독과 관객은 충돌하고, 그 충돌이 감동을 산출하게 되는데, 여백이 사라졌다면 감동의 가능성은 당연히 말살된다.

 

 

강한 이념과 기준이 불신의 씨앗, 통치자가 백성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통치자가 강한 이념이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기준에 맞출 수 있는 백성은 매우 적다. 기준은 말뚝처럼 박혀 있고, 세계는 움직인다. 백성은 움직이는 세계의 표상이다. 고정된 상태에서 움직이는 표적을 보면서, 표적이 움직인다고 불평하는 바보로 전락하는 일은 순식간이다.

 

가정에서 부모·자식 간 갈등도 대개 부모의 선의(善意)에서 비롯된다. 자식을 잘되게 하기 위해 부모가 가진 선의가 기준이 되는 순간, 부모는 자식이 그 기준에 부합하면 예뻐하고 그렇지 못하면 미워하게 된다. 선의로 가지는 기대와 희망이 비록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확립되는 순간 자식에게는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말을 아끼라 그래서 노자는 "말을 아끼라(悠兮, 其貴言)"고 한다. 바로 '잔소리'를 줄이는 것이다. 잔소리는 통치자가 백성에게 지켜야 할 것으로 제시하는 이념이나 기준이다. 이것을 줄이는 일은 백성의 자발성이 발휘돼서 이루는 자율적 성취가 바로 세계 변화를 정상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해지는 일이다.

 

 

자식이 출세하고 부모에게 공을 돌리는 일은 아름답다. 하지만 거기에 자식 스스로 느끼는 자부심은 자리하기 어렵다. 백성이 공을 이루고 그것을 통치자에게 돌리는 일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런 구조 속에서는 백성 스스로 자발성과 자율성에 대한 동기가 자라나지 못한다. 성취와 공을 자식과 백성에게 돌려줘라. 리더는 공을 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다.공이 이뤄지도록 이끌어주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바로 무위(無爲)의 리더십이다.

 

 

                                                                 정리=이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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