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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현대사회에서 실존이라는 방공호를 찾다

뭉크(Munch)의 〈절규〉는 불안이나 절망에 동화되는 감정을 드러낸다. 그림을 보면 덩달아 초조해지거나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너울거린다. 날카로운 비명으로 가득할 것만 같다. 뭉크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저녁, 시내와 바다 사이에 난 피곤했고 몹시 지쳐 있었다. ··· 해가 막 서산 너머로 지고 구름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때 자연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래서 이 그림을 그렸다. 진짜 피처럼 구름을 그렸다. 그 색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절규〉

뭉크, 18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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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 되는 하늘이나 땅, 강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엄습해오는 불안이 자연조차 일그러지게 나타냈다. “예술은 자연에 대립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다만 내면에서 온다. 예술은 인간 결정(結晶)에의 충동이다.”라는 그의 생각을 직접 보여주는, 그 절정에 이른 기념비적 작품이 〈절규〉일 것이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담은 그림만 50여 점에 이를 정도니 불안과 절망이 얼마나 깊숙이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불안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인간 존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당장 어떤 두려움의 대상을 눈앞에 마주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불안은 아니다. 태곳적부터 인간 내면에 본성으로 자리 잡은 신비스러운 무언가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실존주의 관점에서 불안은 인류가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세계와 연관된다.

실존주의는 20세기 초중반, 전쟁 · 대공황 · 원자폭탄 등 과학기술에 대한 기대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실망감을 안겨주고 가공할 공포로 인류에게 다가오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과학기술 발달과 산업화로 비롯된 경제 부흥이 인류에게 부푼 희망을 안겨주는 듯했다. 하지만 내적으로 정신적 불안이 자라났다. 특히 세계대전과 원자폭탄으로 인류가 절멸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끝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 과학의 위력에 대한 자부심은 이 사건으로 인한 불안 앞에 무릎을 꿇었다.”각주1) 라는 야스퍼스의 침통한 독백은 실존주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기술의 지배적 영향 아래서 수단으로 전락해 소외 상태에 빠진 인간은 곧 실존 상실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적 합리성을 거부하고 실존 회복을 추구한 실존주의의 바탕에는 합리적 이성주의에 저항하는 힘이 자리 잡고 있음은 당연했다. 세계대전 이전부터 합리적 이성주의는 이성의 도구화를 통해 인간을 형식 안에 가두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일기에서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빈틈없는 체계를 세웠다 할지라도 내가 그 속에 살고 있지 않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실존주의는 비합리주의로 기우는 몇몇 경향에도 회의의 눈길을 보낸다. 이성의 절대화를 비판하며, 역동적 변화 과정에 있는 삶에 주목한 생철학, 내면에 꿈틀대는 무의식에 주목한 정신분석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의지나 무의식을 강조하려는 시도가 역으로 비합리적 영역으로 달아남으로써 일면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실존주의는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일면성을 실존을 매개로 극복함으로써 각각 분리 · 고립화되어 있는 두 영역을 상호의존과 통일로 나아가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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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미지1/5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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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로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 야스퍼스(Jaspers, 1883~1969),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 사르트르(Sartre, 1905~1980) 등을 꼽을 수 있다. 후설(Husserl, 1859~1938)은 실존주의로 구분할 수 없으나, 현상학적 인식방법을 통해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르트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로 규정하는 데 반감을 품었다. 보편적 철학 체계보다는 개인의 실존을 중시했기에 실존주의자라는 규정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 존재의 현실에 주목하고,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으로 자신의 존재와 미래를 정립하려는 문제의식, 실존 중심의 사고방식에 공감한다는 점에서, 또한 이미 철학사에서 하나의 역사적 명칭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점에서 실존주의로 규정하겠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이해

실존주의 존재론은 서양 철학의 전통이던 존재 증명과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어떤 것의 존재함 자체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방식을 벗어난다. 키에르케고르는 “나는 하나의 돌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어떤 무엇이 돌이라는 것을 증명”각주2) 할 뿐이라고 한다. 존재 증명은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다. 법정에서 범죄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는 피고가 범죄자임을 밝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돌이든 범죄자든 왜 ‘없음’이 아니라 ‘있음’인지를 증명하는 방식은 추상적 개념 규정의 전개에 머무를 뿐이기 때문에 결코 증명될 수 없다.

후설의 현상학도 사변적 존재 증명을 거부하고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현실성의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예측되지 않는다. ··· 현상학의 대상도 존재하는 것으로서 정립된다.”각주3) 모든 자연과 현상을 인식과 무관한 외부의 존재로 파악한 데카르트와 다른 문제의식이다. 데카르트에게 자연의 물체는 인간 정신과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길이 · 높이 · 크기 · 깊이 등 연장이 특징인 독립적 실체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보자면, 자연의 물체는 객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사물이란 돌 · 동물 · 식물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형성물이다. 이 모든 것은 주관적-상대적이다. ··· 사물 · 객체는 우리에 대해 주어져 있지만, 원리적으로는 세계 지평 속에 있는 사물 · 객체로서 의식되는 것으로 주어져 있다.”각주4) 각 사물은 우리의 의식과 무관한 독립적 실체일 수 없다. 사물은 주어져 있기는 하되 ‘의식되는 것’으로서 주어져 있다. 세계는 어떠한 ‘나타남’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나타남’은 주관적 작용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는 주관적-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이 점이 바로 자연과학적 객관성과 철학적 객관성의 근본적 차이다.

〈다보스의 여름〉

키르히너, 19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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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히너(Kirchner)의 〈다보스의 여름〉은 주관적-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세계를 회화적으로 반영한다. 뒤로 꽤 높은 산봉우리들이 이어져 있고, 산자락을 따라 촘촘하게 다양한 모양과 색색 집이 들어서 있다. 시원한 분수를 뿜어대는 아름다운 정원도 보인다. 후설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모든 사물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나타남’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화가가 본 풍경은 화가의 의식과 연관을 맺으며 드러낸 것이다. 색은 물론이고 사물과 사물의 거리, 예를 들어 집과 산, 산과 산 사이의 거리도 화가의 선험적 · 주관적 의식과 맞물린 방식으로 나타난다. 주관적으로 의식된 객체이기 때문에 화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밖에 없다. 녹색이 감도는 푸른색 하늘, 분홍을 머금은 구름, 붉은색 · 푸른색 · 보라색으로 구분한 근경 · 중경 · 원경의 산은 키르히너의 의식이 결합된 표출일 뿐이다. 그렇게 사물은 의식된 객체로 존재한다. 만약 의식된 객체가 아니라면 결코 현실적이 될 수 없다.

야스퍼스도 주관과 분리된 독립적 실체로서 객관 세계를 부정한다. “존재론은 결국은 언제나 내재론(內在論)이며, 인간에 의해서 인식되어 존립하는 것에 대한 교설, 존재자로서의 존재에 관한 교설이다.”각주5) 세계는 우리와 대립해 있는 객관이 아니다. 세계는 인간이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의식에 의해 대상화됨으로써 현실적 존재로서 나타난다. 또한 세계 자체는 이해될 수 없기에 인식 대상이 아니다. “여러 세계상은 항상 특수한 방법으로 인식된 세계고, 그것이 잘못되어 세계 존재의 일반으로까지 절대화된 것이다.”각주6) 의식과 연결된 세계는 세계 일반이 아니라 잘라진 일부일 뿐이다. 부분적 현상이 보여주는 광경일 뿐이지 사물의 근거도, 전체로서의 세계도 아니다. 우리는 항상 세계 속에서 여러 대상을 소유하지만, 보편화 · 일반화된 세계 자체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자신의 본질이나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르와 야스퍼스의 문제의식을, 의식이 거리를 없애거나 방향을 잡는 방식으로 사물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구체화한다. “가장 가까운 것은 우리로부터 가장 짧은 거리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을 지나쳐 들르며 지나쳐 보게 된다.”각주7) 의식은 거리를 없애는 작용을 통해 대상에 개입한다. 예를 들면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 안경은 거리상으로 코 위에 놓여 있을 정도로 가깝지만,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그림보다도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 가까이 있는 안경을 거쳐서 멀리 있는 사물을 보는 순서로 의식되지 않는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안경이 아니라 먼 곳의 사물이다. 안경은 가깝기는커녕 흔히 우선 발견되지도 않는다.

나아가서 사물은 존재하지만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만이 실존한다. 바위나 나무는 존재하지만 실존하지는 않는다. 말(馬)은 존재하지만 실존하지는 않는다.”각주8) 모든 사물이 비현실적이며, 인간에 의한 가상 혹은 표상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물은 어찌됐든 현실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비현실이거나 가상은 아니다. 하지만 실존은 자신을 대상화할 수 있고, 스스로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는 존재에 국한된다. 식물과 동물은 주어진 환경만이 자신의 세계고, 언어와 의식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실존의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실존 영역에 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존재론의 의의를 서양 철학의 고질적 경향인 이원론을 극복하는 즉 존재와 의식을 분리시키는 관점을 극복하는 데서 찾는다. “존재와 현상의 이원론은 철학에서 시민권을 얻을 수 없다. 나타남은 수많은 나타남의 모든 연쇄를 가리키는 것이지, 존재하는 전 존재를 독차지하는 숨은 실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각주9) 실존주의는 현상학을 통한 일원론을 지향한다. 전통적 형이상학은 사물 외면과 인간 내면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에 머물렀다. 하지만 사물의 외면을 참된 본성이나 실재로 여길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사물의 감추어진 실재나 본성은 예감하거나 상상할 수는 있어도 도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존주의가 주목하는 사물의 현상 즉 ‘나타남’은 사물의 외면과 본성이 같은 가치를 지니며 함께 드러난다는 점에서 통합적 · 일원론적 파악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타남’은 사물과 인간의 의식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킨다는 점에서도 일원론적 관점이다. ‘나타남’ 즉 사물의 현상은 추상적이기 때문에 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 “현상도 하나의 추상적인 것이다. 현상은 의식에 ‘나타나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것은 종합적 전체로서만 있을 수 있고, 의식은 현상과 마찬가지로 종합적 전체의 계기를 이루는 것에 불과하다.”각주10)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이 빨간색을 띤다고 할 때, 그 ‘빨강’은 추상적이다. 현상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추상적 특징을 갖는 의식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성립한다. 의식과 세계의 현상이 추상을 통해 연결됨으로써, 하이데거가 세계-내-존재라고 부른, 인간과 세계의 특수한 결합을 지닌 세계 속의 인간이 성립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론은 실존주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대부분의 논의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곧 인간학이라고까지 규정한다. “실존주의는 인간학이라는 이름하에 결집된 모든 학문과의 근본적 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학이 자체의 기초를 구축하려고 노력한다고 볼 때, 실존주의는 인간학 자체다.”각주11)

내던져지고 불안한 존재로서의 인간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불안한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불안하다. “불안은 공포나 그와 비슷한 여러 개념과 전혀 다르다. 그 개념들은 특정한 것에 결부되어 있지만, 불안은 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의 자유로운 현실성이다.”각주12) 인간이 불안한 이유는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머물지 않고 쉴 새 없이 스스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잡으려 하자마자 곧 빠져나간다. 동물에게는 불안이 없다. 동물은 본능적 충동이 지배할 뿐, 정신으로 규정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지 않기에 가능성이 실현되지 못하는 데 대한 불안도 없다. 정신이 적으면 적을수록 불안도 적다.

불안은 공포와는 다른 개념이다. 공포는 일반적으로 특정 대상에서 오는 감정 상태다. 예를 들어 범죄 대상이 되거나 높은 낭떠러지 앞에 섰을 때 공포를 느낀다. 특정 대상이 만들어내는 감정이기에 그 대상을 없애면 공포도 사라진다. 하지만 불안은 정신의 가능성에서 오기에 뚜렷한 대상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정신 자체의 특성에서 오는, 불확정적이고 일상적 성격을 갖는다. 불안에서 달아날 수 없다. 불안은 정신의 자유에서 오기에 허물이 아니다. “정신과 육체의 종합이기 때문에 불안해질 수 있으므로, 불안이 깊으면 깊을수록 인간은 위대하다.” 불안이 깊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의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야스퍼스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처한 상황을 통해 불안의 조건을 구체화한다. “모든 것은 불쾌할 정도로 뚜렷하게 인류의 몰락을 예언하는 듯하다. 점점 더 신속한 상품 교환을 낳는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으로 현존재가 변해가고 있다. ···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세상에서 인간의 실제 행동이 자유를 말살시키는 방향으로 줄달음질 치고 있다.”각주13) 인간 존재의 본질이 정신에 있지만, 합리주의가 만들어낸 사회가 정신을 질식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성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그 결과 현실의 인간은 물질적 만족에 자신을 내맡긴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두주자 역할을 하던 유럽에서 전체주의가 자라나고 전쟁은 자유를 결정적으로 괴멸시키려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존재는 자기 붕괴 의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놀렌도르프 광장〉

키르히너, 19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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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히너의 〈놀렌도르프 광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존을 상실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키르히너가 베를린에 정착했을 때 놀렌도르프 광장은 이미 술집과 바가 모여 있는 대표적 유흥가로 자리 잡았다. 산업화에 의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표면적으로는 활기가 넘치는 듯했지만, 도시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거리는 사치와 향락에 젖은 도시인과 창녀로 가득했다. 그림에는 광장 주변의 건물과 대형 버스, 사람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검은색으로 거칠게 표현된 사람들이 마치 유령처럼 거리를 떠돈다. 개인의 생생함이나 독특함은 사라진 채 군중의 일부가 되어 도시의 배경을 장식하고 있다. 오른쪽 건물은 심하게 휘어져 마치 곧 쓰러질 것만 같다. 건물도 사람도 불안을 머금고 흔들린다.

〈두 명의 부상자〉

헤켈, 19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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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켈(Heckel)의 목판화 〈두 명의 부상자〉에는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부상당한 병사가 나온다. 앞의 부상자는 머리를 심하게 다친 듯 머리 전체를 붕대로 감쌌다. 뒤로는 병사가 해골에 가까운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듯하다. 당시 유럽을 휩쓴 세계대전으로 도시 곳곳에 부상자가 넘쳐났다. 이들의 상당수는 노동력을 상실한 채 도시 빈민으로 전락해 뒷골목을 전전하며 구걸로 목숨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았고, 사람들은 삶의 의미조차 찾지 못한 채 어두운 시대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인간의 상실이라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시대에 실존주의는 본래적 인간의 회복과 비약을 추구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현존재(現存在)로서의 인간은 세계 안에 삶과 정신이 거주한다는 의미에서 ‘세계-내-존재’다. “현존재의 존재규정이 선험적으로, 세계-내-존재라고 부르는 존재구성에 근거하여 고찰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현존재 분석의 올바른 단초는 이 구성의 해석에 달려 있다.”각주14) ‘세계-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세계의 구조와 이념을 규명해야 한다. ‘내-존재’는 그 안에 있는 현존재의 실존을 가리킨다. 결국 인간의 실존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이해하는 게 필수다.

그래서 현실 세계를 규정하는, 합리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기술 세계에서 현존재가 처한 상황에 주목한다. “모두의 현존은 온갖 것을 계획하고 계산하는 일에 몰두하도록 어디에서나 도발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즉 방금 전까지 놀다가도 이내 곧 일에 시달리고, 또 금세 쫓기다가 금세 밀려나는 그런 식으로 어디에서나 도발적으로 요청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각주15) 효율성이 지배하는 현실 사회에서 사람들은 계산 가능성의 지배를 받으면서 분주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경쟁 속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언제든지 경쟁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파국적 절망감이 정신을 옭아맨다. 현존재의 본질인 정신이 자기 내면을 향해 시선을 둘 여유도 없다. “현대인은 사유 앞에서 달아나며 도피한다. 사유의 도피가 생각 없음과 무사유의 근거다.”

현대인의 모든 생활을 규정하는 경쟁과 합리성의 원리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불안 속에 있다. “불안은 존재자를 전체적으로 탈락시킨다. 여기에 우리 자신이 존재자의 한가운데에서 함께 탈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그러므로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렇다.”각주16) 또한 우리가 한시도 기술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일상적 불안이 지배한다. 결국 인간은 기술세계에 끊임없이 내던져진 존재로 살아간다. “우리는 불안 속에서 떠 있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불안이 전체로서의 존재자를 미끄러져 달아나게 하는 까닭에 우리로 하여금 뜨게 한다.” 그런데 불안은 두려움의 대상에서 곧바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가 강조했듯이 불안은 인간이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공포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두려워하는 존재자 자체 즉 현존재다.” 세계는 불안의 조건일 뿐이고 불안의 핵심은 인간 자신에게 있다.

그렇기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거가 규정하는 불안이 다분히 추상적이고 막연할 수밖에 없다. 시대적 상황은 단순히 조건으로만 작용할 뿐 불안의 본질이 정신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기에 불안은 인간의 내재적 특성에서 오기에 뭉크의 〈불안〉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나타난다. 그림을 보면 불안은 특정 개인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앞의 소녀는 당장이라도 숨이 막힐 듯 불안에 떨고 있다. 하지만 불안에 떠는 모습은 뒤편의 신사 그리고 뒤로 끝이 없을 듯 이어지는 사람 모두 마찬가지다. 또한 이들의 배경에는 오직 하늘과 땅 등 자연만 있을 뿐이어서 인간 자신 이외에 다른 불안 요인은 찾아볼 수 없다. 스스로에게서 비롯되는 불안이기에 모든 인간은 뭉크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그러하듯이 숙명처럼 일상 속에서 짊어지고 있어야 한다.

〈불안〉

뭉크, 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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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의 문제는 사회적 실천에서 다양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자유를 향한 정신의 가능성 자체에서 불안을 도출하는 키에르케고르는 논리 자체 내에 종교적 해결로 향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숨어 있다. 하이데거는 세계가 연관되어 있지만 조건일 뿐이고 불안은 근본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이다.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는지를 규정할 수 없음은 규정의 미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규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시대에 본래 일어나는 상황을 깊게 사유하여 사태에 알맞게 논의하고 해명함으로써 해결에 도달할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사회적 측면과 종교적 · 초월적 측면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사르트르의 불안 개념은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거에서 출발하지만 내용 전개 과정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불안이 인간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한다. “불안은 두려움과 구별된다. 두려움은 세계의 존재에 관한 두려움이고, 불안은 자기 앞에서의 불안이다.”각주17) 자유를 향한 정신의 특성이 불안의 기반임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현기증이 불안인 것은, 높은 절벽에서 혹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느냐, 또는 인간이 상황에 작용하는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두려움의 감정 또는 불안의 감정으로 나뉜다.” 여기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불안을 인간이 상황에 작용하는 것으로 볼 때, 인간과 상황의 직접 연관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묘한 차이는 불안 개념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적주의나 무위로 이끌어가는 불안이 아니다. 책임을 느껴본 모든 사람이 잘 아는 불안이다. ··· 실존주의의 불안은 다른 인간에 대한 책임으로서도 설명된다. 불안은 우리를 행동과 분리하는 커튼이 아니다. 행동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각주18) 불안 자체로 머무는 정적이나 숙명처럼 떠안는 무위와 구별한다. 불안은 사회구성원에 대한 책임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실천적 개념이다.

사르트르는 부대장과 병사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부대장이 공격 책임을 지고 병사 몇 명을 죽음의 땅에 보낼 때, 상부의 명령과 자신의 판단이 작용한다. 그 판단이 여러 생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결정하면서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로운 선택이지만, 다른 인간에 대한 책임과 연결됨으로써 실천적 행동에 직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자유는 막연한 정신의 가능성을 강조한 키에르케고르와 구별된다. “인간은 그가 되려고 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존주의 제1원리다.”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구체적 실천과 연관된 자유다.

사르트르는 불안 개념을 매개로 마르크스주의의 경직화된 인간 이해를 비판한다. “엥겔스가 보기에 한 사람의 구체적 성격은 추상적 이데올로기의 한 성격이다. ··· 이 보편성의 순간은 경제의 보편성과 상응한다.”각주19) 인간을 구체적 개인이 아니라 경제적 토대에 기반을 둔 계급 구성원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추상적 상태에 머문다. 관념적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최종분석에서 경제적 조건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는 수동적 산물이며 조건반사의 결과로 이해한다.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우연히 어떤 계급이나 계층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한 인간을 결정해버린다. 개인의 구체적 경험과 사고는 부차적 지위로 전락한다. 사르트르는 실제 삶을 우연한 출생에 맡겨버리는 관점을 거부한다.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자는 어른만을 고려한다. 마치 첫 월급을 타는 나이가 돼서야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생각된다. 각자의 고유한 어린 시절을 망각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소외와 사물화를 체험하는 것처럼 말한다.” 실제 인간은 직접 노동자로서 일을 할 나이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우선 부모의 노동을 통해 아이로서의 소외와 사물화를 체험한다.

〈사춘기〉

뭉크, 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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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같은 계급에 속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성장기의 특정 단계에서 다양한 굴곡을 겪으며 개인의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 뭉크의 〈사춘기〉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성장하면서 겪는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사춘기 소녀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잔뜩 웅크린 어깨와 팔 그리고 다리가 무언가 위축된 모습이다. 그녀의 뒤로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와 함께 불안한 상태를 드러낸다. 어린 소녀가 앞으로 겪게 될 상황과 변화의 불투명함 혹은 죽음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오는 불안을 나타낸 듯하다. 그만큼 아직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기대만큼이나 걱정도 많은 시기다. 화가 자신도 그러했듯이 현실의 인간은 성장 과정에서 마주치는 경험을 통해 개별적 성격이 상당 부분 형성된다. 하지만 관념적 마르크스주의는 개인의 삶에 다양하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사실상 배제하고 있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마르크스가 사용하는 개념 즉 착취, 소외, 물신화, 사물화 등은 실존적 구조를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생산력이나 생산관계와 같은 사회적 요인만이 아니라, 성(性)을 비롯하여 성장과정에서의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는 실존주의 입장에 설 때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사유 방법을 통합할 수 있다. 성을 매개로 인간이 자기 계급에 동화되는 지점 즉 보편적 계급과 개인 사이의 매개로서 개별 가족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실존에 대한 이해는 마르크스적 인간학의 인간적 기초로서 제시된다. ···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을 근본으로 삼아 자체 속에 재통합시키지 않는다면, 마르크스주의는 비인간적 인간학으로 쇠퇴하게 된다.”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인간

키에르케고르는 불안과 함께 절망을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영역으로 여긴다. 절망은 정신의 병이기에 자기의 정신을 전제로 한다. “자기에 대한 절망이 모든 절망의 공식이다.”각주20) 외부적 요인이 절망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소녀가 연인의 죽음이나 배신으로 절망하고 있다면, 그 소녀는 연인이 옆에 없다는 사실 자체에서 절망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절망한다. 만일 그가 그녀의 연인이 되었더라면 사랑의 감정에 휩싸여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시간을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남자 없이 자신을 마주하며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고통이다.

절망은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이다. 인간으로서 자기를 찾기 위한 통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능동적 의미를 지닌다. 절망과 거리를 두고 기분 좋고 한가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오히려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상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고, 또 명성을 얻으며 현실에서 만족스럽게 살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잃고 있다. 정신적 의미에서의 자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정신은 내부로 향한 것 즉 자신과 관계하는 것인데, 절망 없이 현실의 일상에 만족한다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기회도 없고, 그만큼 정신으로서의 자신도 상실한다.

그래서 모든 절망은 개념으로 말하면 정신에 의해 스스로 의식된 상태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 특히 죽음을 향한 절망을 적극적으로 촉구한다. “출범하라, 그대 존재의 연극이여! 인생은 한번 써버리면 그대에게 다시 돌아갈 수 없노라! 죽음에서 돌아온 자 그 누가 있단 말이냐? 인생은 죽음처럼 존재를 결박할 줄 모른다. 인생은 죽음처럼 설득력을 지니지 못했다. 죽음은 탁월한 설득력을 지녔다.”각주21) 인생과 죽음을 대비한다. 여기에서 인생이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일상생활에 빠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생은 일상의 만족이라는 늪에 빠져 있기에 자신을 심각하게 되돌아볼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생은 존재를 결박할 줄 모른다. 죽음을 자신의 문제로 마주함으로써 진정 자기 존재에 접근할 기회가 생기기에 죽음은 무엇보다도 설득력이 있다.

하이데거는 더 적극적으로 죽음 문제를 실존을 위한 필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불안이 개인의 실존을 위해 가장 적극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은 개인의 자의적이고 우연하고 나약한 기분이 아니라, 현존재가 근본적으로 처해 있는 상태며, 현존재가 내던져져 있는 존재로서 종말을 향해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준다.”각주22) 인간은 죽음이라는 종말을 ‘향해’ 실존한다. 단순히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일반적 내용이 아니다. 죽음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 능동적 작용이다. 죽음을 자신의 실제 현실 가능성으로 가져온다는 점에서,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는 것이다.

진정한 실존은 죽음을 향한 존재에서 드러난다. “‘사람은 결국 한 번은 죽는다. 그러나 우선은 이것이 나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말하려 한다. ‘사람은 죽는다’에 대한 분석은 일상적 죽음을 향한 존재의 존재양식을 의심의 여지없이 드러낸다.” 우리는 ‘사람은 죽는다’라는 사실에 무관심한 평온을 갖는다. 흔히 삼단논법을 얘기할 때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식으로 논증한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전제다. 하지만 ‘사람은 죽는다’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죽음은 실질적이지 않은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불특정한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죽는다’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옛날에 죽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게 내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대부분 죽음을 애써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죽음을 은폐하며 회피하는 태도가 워낙 질기게 일상성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주변에 심각하게 아픈 가족이나 친구가 있어도 우리는 죽음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픈 사람에게 습관적으로 이제 곧 괜찮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원래의 안정된 삶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 안심하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회피하는 마음의 안정감을 마련해준다. 그런데 이 안정감은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병에 걸려도 의지만 있으면 나을 수 있다는 위안을 스스로에게 한다. 이를 통해 죽음을 회피하고 무관심한 상태로 다시 돌아간다.

문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관성적 삶이 순종을 부른다는 점이다. “‘그들’의 소리 없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사람은 죽는다’라는 ‘사실’에 대해서 무관심한 평온을 가질 때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오늘의 내 생활이 그대로 계속되리라는 생각과 같다. 말 그대로 일상의 반복 안에 자신을 맡기는 생활이다. 죽음이 없다고 생각할 때 끊임없는 미래만을 생각한다. 오늘이 무한하게 반복될 수 있으니 오늘의 소중함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오늘 현실에서의 자기 실존이 갖는 소중함을 망각할 때 순종이 스며든다. 그저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경쟁 규칙만 충실히 따르는 삶만 남는다. ‘그들’의 소리 없는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다.

〈죽음과 삶〉

클림트, 19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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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은 클림트의 〈죽음과 삶〉에서 보듯이, 죽음이 자기 옆에 바짝 다가와 있는지 모르거나 애써 회피하며 산다. 그림에서 죽음과 삶은 어두운 공간을 경계로 분리되어 있다.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어놓은 벽이다. 삶의 영역에서 사람들은 편안한 듯한 모습이다. 맨 위로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평화롭게 잔다. 아래로 고개를 숙인 남녀는 생활에 쫓기며 사는 피곤한 일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변으로 성적 욕망에 들뜬 표정,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 등 다양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얼굴이 나온다. 대부분 자기 삶이 이 상태로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얼마나 옆에 바짝 다가와 있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일상의 반복에 적응하며 산다.

〈죽음과 소녀〉

뭉크, 18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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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죽음과 소녀〉는 죽음에 결박되어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소녀가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포옹한다. 해골은 몸을 뺄 수 없도록 등 뒤로 팔을 휘감고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왼쪽으로 솟아오르는 정자들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엄마 자궁 속의 모습인지 갓 태어난 모습인지 모를 아기가 있다. 죽음이 태어나서부터 살아가는 순간순간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님을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불안에 일상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화가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하다. 뭉크는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죽음이 주는 절망을 이렇게 토로한다. “나의 삶은 죽음과 함께한다. 여동생, 어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그들은 죽고 스스로를 죽였고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났다. 왜? 왜 사는 것인가?” 죽음 앞에서의 불안이 뭉크를 삶과 예술에 천착하게 만들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감으로써 실존에 다가서고, 새로운 삶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상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의 산출은 존재에 대한 철저한 해석을 통해 존재에 대한 완전한 실존론적 개념을 확보하기 위한 지침을 제공한다.” 일상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의 산출이란 평소에 죽음을 생각함을 의미한다. 완전한 실존론적 개념을 확보한다는 말은 진정한 자신을 깨닫는다는 의미다. 종합하면 죽음을 현실 문제로 생각할 때 진정한 자신을 찾게 된다. 우리는 평소에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잊은 채 살아간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오늘 잘 살고 있는지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생활만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되돌아볼 기회가 없다. 죽음은 앞을 향한 질주밖에 모르는 생활을 잠시 멈추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적극적 역할을 한다.

사르트르는 죽음을 실존주의 인간 이해의 핵심으로 여기는 하이데거의 관점에 상당히 비판적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개별화에서 시작하여, 죽음은 개인 인격의 죽음이고,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해줄 수 없는 유일한 것임을 우리에게 지시한다. 그런 다음, 현존재에서 출발하여 죽음에 부여한 이 비할 데 없는 개별성을 이용하여, 현존재 자체를 개별화한다.”각주23) 사르트르는 죽는 것이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라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현실에서는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화나 증언 혹은 조국을 위해 죽는다는 명목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의 죽음에만 특별히 있는 인격 구성적 능력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으로부터 인간 존재의 가능성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나 자신의 가능성이기는커녕 우연한 사실이다.”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사실이다. “우리가 사실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탄생과 죽음의 이런 동일성이다.” 실레(Schiele)의 〈임신한 여인과 죽음〉은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다룬다. 오른편 만삭의 여인이 평온한 표정으로 뱃속 아이를 응시한다.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한 사랑스러움과 기대가 가득한 모습이다. 아기가 이 여인에게서 태어나는 일은 지극히 우연적 사실이다. 언제 어디서 태어날지는 전적으로 우연에 의존한다. 여인과 아이 앞에 바짝 다가간 죽음의 그림자도 누구나 겪는 우연적 사실이라는 점에서 탄생과 같다. 이 그림은 7년 후 자신에게 닥칠 탄생과 죽음을 예견하는 듯하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아내가 임신 6개월쯤 되었을 때, 유럽에 번진 악명 높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고, 화가 자신도 며칠 뒤 죽음을 맞이한다.

〈임신한 여인과 죽음〉

실레, 19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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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존재를 향한 가능성이기보다는 오히려 나에게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죽음을 발견하지도 못할 것이고, 나의 죽음을 기대하지도 못할 것이며, 나의 죽음에 대해 태도를 취하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발견할 수 없다. 죽음은 자신을 타인에게 맡겨지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벗어나 외면적인 것으로 남게 할 뿐이다.

더 큰 문제는 하이데거의 관점이 인간을 지나치게 개별화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코기토의 관점에서 파악된 나의 가능성은 본래적 실존 속에서 파악되든 비본래적 실존 속에서 파악되든, 모두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기도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코기토 즉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라는 정신적 가능성이 개별적 존재 수준으로 고립되는 문제가 생긴다.

자기로 다가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끊임없는 기대다. “인생은 하나의 긴 기대다. 목적 실현에 대한 기대고,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한 기대다.” 단순히 여러 가지 대상을 기대한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기대 대상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 목적 실현 자체에 대한 기대라는 점에서, 기대의 기대 즉 자신에 대한 내적인 기대다. 인간의 자유도 기대로부터 온다. 자유는 주관성에서 오는데, 죽음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주관성과는 거리가 멀다. 진정한 주관성은 기대로부터 형성된다.

자유와 유대로서의 인간

실존주의를 순수하고 고립된 개인으로의 후퇴로만 여긴다면 한 면만 이해하는 데 머문다. 키에르케고르는 개인과 인류가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개인이 자신임과 동시에 인류임은 모든 순간을 통해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인류의 발전이 개인에게 구체화된 상태로서 보일 경우 인간의 완전성이다.”각주24) 인간이 자신이면서 동시에 인류임은 곧 모순을 의미한다. 현실의 인간은 이 모순에 의해 자신을 인류와 결합시킨다.

후설은 개인과 인류의 연결을 지각작용을 통해 구체화한다. “우리는 연속적으로 흐르는 지각작용 속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각작용을 통해 동시에 다른 인간과 연계를 갖는다.”각주25) 단순히 인간이 무리 지어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각에 합당한 것을 공동체화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점에서 의식적 작용이다. 인간은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언어와 묘사 능력을 통해 물음을 던지고, 추론 · 논증 · 확증을 거쳐 결단을 내린다. 이 과정이 의식적 삶의 공동체 속에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지각작용을 통한 유대 안에 있다.

야스퍼스는 유대를 실존을 위한 필수 요소로 규정한다. “실존은 다른 실존에 의해서 그리고 동시에 다른 실존과 함께 자신이 될 때에만 나타난다.”각주26) 실존은 고립 상태가 아니다. 개별자로서 홀로 있는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 상호간 의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공동체에 의해서만 자신이 될 수 있다. 상호 의식적 이해는 사귐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과 연관된다. 사귐은 인간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의식작용은 사귐에서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사귐과 유대가 개별성의 부정은 아니다. “인간의 본래적 가치는 그가 가까이하는 유(類)나 형(型)에 있지 않고, 대리하거나 바꿔칠 수 없는 역사적 개별자에 있다.”각주27)

실존주의의 기본 목표는 어느 때나 개인으로서 독립성을 가지는 일이다. 철학은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오히려 독립성을 통해 진정한 유대로도 나아갈 수 있다. “그 자신인 자만이, 고독 속에서 참됨을 증명할 수 있는 자만이 참되게 이웃과의 소통에 들어설 수 있다.” 여기에서 인간이 개인과 동시에 인류임은 곧 모순을 의미한다는 키에르케고르의 규정이 생명력을 얻는다.

하이데거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인류인, 인간의 특성은 인정하되, 유대에 대한 강조가 개별 존재의 실존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경계한다. 그가 휴머니즘에 반대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무슨 ‘주의’라고 하는 명칭이 갖고 있는 지배력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태는 대중성의 고유한 독재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각주28) 다분히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으로 규정하는 사르트르의 문제의식을 비판하는 성격을 지닌다. 휴머니즘 반대가 비인간적인 것의 변호는 아니다. 문제는 휴머니즘이 현실에서는 대중성 형식으로 현존재의 개별성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주장에도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함을 이해할 때, 이러한 본질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 인간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면서 존재의 진리를 지킨다.” 그가 보기에 사르트르의 주장은 플라톤 이후로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고 하는 형이상학적 본질과 실존 개념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 단지 명제의 주어와 술어를 바꾸어놓았을 뿐 실존과 본질을 분리시켰다는 점에서 같은 한계를 보인다. 존재가 세계 속에 내던져 있음은 본질에 속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을 통해 실존한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라는 명칭을 고집하면서 실존과 본질 사이에 벽을 쌓았다는 비판이다.

사르트르는 자유로부터 인간에 접근한다. “신이 없다면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 실존주의의 출발이다. ··· 사람은 자유로우며 사람은 자유 그것이다.”각주29) 신이 없다면 인간은 고정된 인간성이나 의존에서 벗어나 고독한 상태에서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기에 진정한 자유에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고립된 존재로서의 자유일 수 없다. “코기토로 자신을 파악하는 사람은 모든 타인을 발견하고 자기 존재의 조건으로 보게 된다. ··· 타인은 나 자신을 아는 데 불가결하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로 고립적 주체를 세웠다면, 사르트르는 반대로 타인과 마주 선 ‘우리’를 파악한다.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확실한 존재다. 나에게만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타인의 경험적 자아는 동시에 세계 속에 나타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성급한 측면이 있다. 본질 개념을 놓고 사르트르와 하이데거가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은 있었던 것이다. 본질은 인간존재에 대해서 ‘그것은···이다’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본질이란 행위를 설명하는 성격의 전체다.”각주30) 사르트르는 과거에 있던 것으로서의 본질을 설명한다.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과거의 사실들이다. 실존이 과거로 설명될 수 없는 것 즉 본질에 대한 판단 이전의 것을 지닌다는 점에서 본질에 앞선다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하이데거가 제기한, 세계 속에 내던져 있다는 의미에서의 본질과는 다른 맥락이다.

사르트르는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구분을 통해 자유로서의 인간을 구체화한다. “즉자존재는 바깥과 대립하는 안, 판단, 법칙, 자기의식 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자는 비밀을 가지지 않는다. ··· 어떤 부정도 내포하고 있지 않는 완전한 긍정성이다.” 즉자존재는 있는 그대로 즉 자기 자체로 충만한 상태다. 다른 존재와의 구별 속에서 자신을 정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떠한 외부나 부정성도 없는 우연성 자체다.

대자존재는 즉자존재가 결여하고 있던 부정성에서 시작한다. “무(無)는 존재에 의한 존재의 문제화다. 다시 말하면 바로 의식 또는 대자다. ··· 대자는 사건으로서 존재한다. 세계 속에 던져져 있고, 하나의 상황 속에 버려져 있는 한에 있어서 대자는 존재한다.” 무는 부정적 판단에서 생겨난다. 예를 들어 카페에서 A라는 사람을 찾을 때 그를 제외한 대상물 즉 카페를 장식하고 있는 온갖 시설이나 장식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앉아 있는 다른 사람은 A가 아닌 것, 혹은 배경이나 필요조건으로서 의식에서 사라진다. 무화(無化) 과정이다. 대자존재는 다른 존재와 구별하면서 스스로 정립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식하기 위해 ‘무엇이 아닌지’라는 부정성이 필수다. 왜 동물이나 타인이 아니고 자신으로서 존재하는지 근원적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 한에서 대자는 존재한다.

부정이 나에게서 왔기에 의식이며 자유다. 자유는 진정한 자신을 찾는 데서 생겨난다. 있는 그대로의 즉자존재가 아니라 대자존재로 나아갈 때 자유가 대두되기에, 자유는 무와 부정성을 통해 현실이 된다. 자유의 거부는 자기를 즉자존재로 파악하는 시도다. 여러 결정론은 인간에게서 부정성과 자유를 앗아감으로써 오직 즉자존재로 남아 있게 만든다.

자유에 의해 비로소 대자존재 즉 진정한 의미의 인간으로 향한다. 인간은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려는 기도에 의해 규정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만들어진 조건을 끊임없이 극복한다. 스스로를 객체화하기 위해 노동, 행동, 제스처 등을 통해 상황을 넘어서면서 이 상황을 드러내고 결정한다.”각주31) 결국 인간은 무(無)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도함으로써,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지는 ‘투기(投企, project)’로서의 존재다.

초월자와 극복에 대하여

불안 · 절망과 함께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은 어디에서 활로를 찾아야 하는가?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에서 희망을 찾는다. “무한한 체념에서 영원한 가치를 발견한다. 신앙에 의해 비로소 존재 파악이 문제로 된다.”각주32) 불안은 불안으로 끝나지 않는다. 불안은 정신에서 오기에 자유의 가능성, 절대자를 향한 길을 열 수 있다. “절대자를 찾아내려면 의혹이 아니라 절망에서 출발해야 한다.”각주33) 신앙을 통해 원상태로, 진정한 자신으로 복귀할 수 있다. 불안을 통해 절대자로 나아감으로써 인격의 분열을 치유하고 불안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얻는다. “신앙을 가진 자는 절망에 대해 영원한 확실한 대항수단 곧 가능성을 갖고 있다. 신에 대해서는 어느 순간에나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건강한 모순을 해소하는 신앙의 능력이다.”각주34)

야스퍼스는 실존주의가 허무주의로 전락하지 않는 방법을 초월자에서 찾는다. 신앙을 부정하며 현실 인간에게 희망을 찾으려는 시도는 또 다른 허무주의를 낳을 뿐이다. “인간의 신격화가 허무주의로부터 구제해주는 듯하지만, 그 자체가 숨겨진 허무주의다.”각주35) 인간에게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영웅에 의존하여 인간의 신격화로 향하지만 결국 환멸을 느끼고 또 다른 허무주의에 빠진다. 어느 순간 다만 인간에 불과하다는 경험을 하면서 더 깊은 허무주의에 빠진다. 실존주의는 허무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불안을 벗어난 안정은 오직 초월자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성이라는 한계 내에 있기 때문에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요는 초월자 속에 보존되어 있다. ··· 신의 불변성은 안정의 암호 중 하나다. 그곳을 향해 인간은 자기를 넘어 내달린다.”각주36) 시간 속에서 지속되는 안정은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현실은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변화하기에 순간적으로 안정을 느낄 뿐, 또 다시 불안으로 빠져든다. 안정은 시간의 끝에서만 찾을 수 있다. 시간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초월자다.

초월자는 전통 신앙에서의 신(神)과는 다른 개념이다. 예수와 석가를 절대자로 신봉하고 이를 통해 신의 계시와 기적을 실현하려는 기존 신앙과 다르다. “철학적인 면에서 소크라테스 · 석가 · 공자 · 예수는 인간이었다. ··· 네 사람이 가진 핵심은 기본적 인간 상황이며 인류 문제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각주37) 그들은 역사적 존재이기에 보편타당성을 기대할 수 없다. 문제 제시와 질문을 통해 궁극적인 인간 가능성을 실현했을 뿐이다. 초월자를 통해 안정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한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

놀데, 19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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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데(Nolde)의 〈십자가의 예수〉는 절대자로서의 예수보다는 절대자를 향한 예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대부분의 성화에서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고요와 평온 상태에 있는, 절대자로서의 예수를 묘사한다. 하지만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불안에 휩싸여 있는 분위기다. 원색에 가까운 붉은색 · 청색 ·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강렬한 색채 대비와 거친 형태 묘사를 통해 고요보다는 격정 가득한 장면을 보여준다. 신성보다는 인간성, 안정보다는 안정을 희구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주문받지 않은 제단화는 신성과 거리가 먼 분위기로 인해 성직자의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놀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정신적 열정에 있었으며 이를 성서적 주제를 통해 확인하려는 면이 강했다.

초월자는 존재증명을 통해 접근할 대상이 아니다. “초월자는 세계가 자체로 존립하지 않으며 자신 속에 근거를 두지도 않고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를 가리킬 때만 존재한다.”각주38) 세계 안에 있는 존재인 인간이 불안을 넘어 안정으로 가고자 하는 초월적 열망과 함께 존재한다. 초월자는 아득히 멀고 숨겨진 신, 증명할 수 없는 신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초월적인 것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내적 안정을 향한다.

하이데거도 실존에서 출발하는 신 개념을 강조한다. “근거는 자신에 의해 정초된 것, 다시 말해 근원적 원인에 의한 인과관계 정초를 필요로 한다. ··· 이것이 철학에서 문제시되는 신에 대한 합당한 명칭이다.”각주39) 신은 인간 자신에 의해, 스스로의 근거를 근본적인 자기 원인에서 찾을 때 마주하는 개념이다. 자기 원인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경외하는 마음은 무의미하다. 하물며 자기 원인에게 기도를 하거나 제물을 바치는 일,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추는 일을 할 수는 없다.

사르트르는 초월자나 신앙을 거부한다. 실존주의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야스퍼스 중심의 기독교적 실존주의, 다른 하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다. 둘의 공통점은 실존을 중시하고 주체성에서 출발한다는 것뿐이다. 진정한 실존주의는 인간에서 출발하여 인간으로 향한다. “사람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각주40)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어야 한다. 야스퍼스가 비판하는 인간의 신격화와 다른 의미다. “인간이란 항상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므로 실존주의는 인간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려하고,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존재한다. 부단히 현실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실존주의 인식론

선험적 주관성을 통한 현상 인식

키에르케고르에게 주관성을 배제한 객관적 인식은 허구다. “실존과 관계되는 인식만이 본질적 인식이다. 그것은 주체적 사고다.”각주41) 인식은 주체가 실존하면서 자신의 진리를 심원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진리란 주체가 받아들여 소화하는 것이다. 개별 사물에 대한 지식은 순수한 직접성일 뿐이다. 약간의 반성을 포함하더라도 무한한 내적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인식은 내적이고, 불안과 절망에 휩싸여 있는 자신을 향하고, 또한 그러한 자신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다.

후설은 자연과학적 인식과 구별되는, 선험적 주관주의로서의 현상학적 인식을 주장한다. “나는 현상학적 환원을 즉 모든 초월적 정립의 배제를 수행한다. ··· 오로지 모든 종류의 인식과 인식 형태를 명백히 하려는 학문이라면 어떤 종류의 자연적 입장의 학문도 이용할 수 없다.”각주42) 경험에 의한 자연적 사고는 일상생활이나 학문에서 인식 가능성의 어려움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 가능성 문제에 접근하는 인식 비판을 수행할 수 없다. 현상학적 인식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주관적 의식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어떤 현상 변화를 인식할 때 의식이 전제된다. “원초적 시간 대상은 과거 지향을 갖는 지각 속에서 구성된다. 이와 같은 의식 속에서만 시간은 주어질 수 있다.” 현실의 세계와 사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화하면서 존재하는데, 변화는 시간 속에서만 일어난다. 그런데 시간은 세계와 사물 자체에서 생기는 개념이 아니다. 오직 주관적 의식에 의해 주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험적으로 지니는 주관성에 의존한다. 또한 인식은 ‘이다’와 ‘아니다’, ‘같음’과 ‘다름’, ‘단수’와 ‘복수’, ‘그리고’와 ‘또는’ 등 다양한 선험적 범주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주관성에 의존한다.

현상학의 목적은 체험 탐구다. “현상학적 탐구 영역은 체험 영역에 있다. 이때의 체험을 ‘사태’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사태 자체로!’라는 현상학의 모토가 이해된다.” 사물이나 인간 행위는 언제나 체험 안에 나타난다. 체험을 통하지 않는 현상은 없다. 그런데 체험은 시간성이나 판단 수단 등의 주관성과 분리될 수 없다. 체험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주관성은 이성적이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작용하는 주관성을 탐구 대상으로 삼아 이성을 밝혀내는 것이 현상학의 목적이다. “가장 위대한 혁명은 과학적 객관주의, 수천 년 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의 객관주의를 선험적 주관주의로 전화시키는 일이다.”각주43) 하지만 단순한 객관주의 반대가 아니다. 체험 안에 객관과 주체가 통일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원론적 분리를 넘어 일원성에 도달한다.

클림트의 〈철학〉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이 추구한 객관적 진리에 비웃음을 보낸다. 빈 대학 강당에 제작한 세 점 중 하나다. 클림트는 “왼쪽의 인물들은 생성 · 결실 · 소멸, 오른쪽은 수수께끼 같은 지구, 아래쪽에서 떠오르는 것은 빛의 형상 즉 지식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한다.

〈철학〉

클림트, 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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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의 벌거벗은 인물들은 위로부터 생성 · 결실 · 소멸을 보여준다. 맨 위로 세상을 향해 태어난 아이가 생성을 상징한다. 중간의 결실에는 키스를 나누며 사랑하지만, 고개를 숙여 불안과 두려움에 떨기도 하는 현실이 나타난다. 그 밑으로 늙어서 쭈글쭈글해진 사람들이 절망감에 머리를 감싸고 있다. 맨 아래는 검은 옷을 입은 죽음의 여신이 기다린다. 클림트가 보기에 철학은 세계 속에 우연히 태어나고, 살면서 결국은 인간의 유한성에 불안과 절망에 휩싸여 살아야 하는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보수적인 빈 대학 교수들은 이 작품을 정통에 대한 이단으로 여기고 비판했다. 전통적 형이상학에 갇혀 객관적 진리 추구에 매달려 있던 철학자들로서는 달가울 리 없었을 것이다.

야스퍼스는 과학적 인식방법으로서 현상학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어떤 현상을 체계화된 이론 틀이라는 좁은 통로를 통해 보지 않고, 현상이 의식에 나타나는 그대로 파악하고 기술하려 한다. 후설과 마찬가지로 그 과정에서 선험적 주관성이 핵심 역할을 한다. 새로운 철학으로 등장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도 객관 대상에 대한 경험과학이라는 점에서 객관주의 전통이 지니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심리학과 사회학은 경험과학으로서 등장했다. ··· 그들의 실제적 인식은 일반적 소문이라는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소문은 인간의 눈을 어둡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며, 현실을 가린다.”각주44)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철학은 외면적으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개념적 구별에 따라 연관된 상황과 의미를 분석하고 사실을 확정하는 인식방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관찰과 구성 방식으로 대상과 주체를 분리시키고, 이성을 통해 객관적 대상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이비 과학적 태도다. 궁극적 본질을 규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도그마에 해당한다.

의식은 오직 현상에만 접근할 수 있다. 세계든 인간이든 나타나는 현상 그대로 접근하는 것만이 과학적 인식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완성이 아닌 과정이다. “철학이란 도상(途上)에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질문이 해답보다 중요하며, 온갖 해답이 새로운 질문으로 변한다. 그런데 도상에 있다는 것에는 깊은 만족 가능성, 고양된 순간에는 철학적 사유의 완결 가능성까지도 숨겨져 있다.”각주45) 본질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시간이라는 한정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이다. 여기에서 완결 가능성이란 기존 사변적 형이상학이나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처럼 어떤 명제나 지식 내용으로서의 본질에 도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존을 받아들이는 인간 존재가 역사적으로 현실화된다는 의미다.

의식에 나타나는 그대로를 엄밀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입각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는 실존의 깊이로부터 이성을 의심했다. ··· 회의가 이성에 대한 적대는 아니다. 합리성으로 모든 양식을 무제한 획득하려 하기에 회의는 감정철학이 아니다.”각주46) 이성과 실존은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은 이성을 지녔기에 세계나 사물과 달리 실존하고, 실존은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분명해진다. 하나가 상실되면 다른 것도 상실된다. “이성을 상실하면 철학 자체도 상실된다. ··· 오성의 필연성에 따르지만 오성 자체를 완전히 소유함으로써 협소한 오성에 빠지지 않는 진정한 이성의 회복이 변함없는 철학의 과제다.”각주47)

이성 없이 내면을 바라볼 수 없기에 이성 없는 실존이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또한 실존을 상실한 이성은 아무리 풍부한 체계를 갖춰도 의식 일반의 단순한 지적 운동, 사변적 관념론으로 빠져든다. 헤겔이 추구한 정신의 자기 변증법은 실존을 상실하고 이성이 지적 일반자로 전락하여 더 이상 이성이라 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하이데거는 “철학은 현존재의 해석학에서 출발하는 보편적인 현상학적 존재론인데, 해석학은 실존에 대한 분석론으로서 ··· 후설이 놓은 토대 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각주48) 면서 현상학적 방법을 옹호한다. 추상적으로 구성되고 증명된 듯이 보일 뿐인 개념의 자기 전개에 반대한다. 현상을 통해서만 철학이 성립한다. 중요한 인식방법은 이해다. 사변적 개념 구성과 달리 이해는 결코 허공을 떠다니지 않는다. 언제나 구체적으로 처해 있는 바를 이해한다. “이해는 현존재가 이해함을 근거로 지켜보거나 둘러보거나 바라보는 등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존하면서 형성할 수 있게 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이해는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어떻게든 알고 있게 한다는 점에서 실존적 인식방법이다.

인식론 자체가 실존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철학은 존재 관점에서 존재자를 탐구하는 도상에 있다.”각주49) 그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심리학, 마르크스의 사회학을 비롯해 새롭게 대두된 문화인류학 등은 인간을 대상으로 설정할 뿐, 인식방법에 존재의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철학의 종말에 해당한다. “이러한 학문은 기술을 통해 인간이 공작하고 구성하는 다양한 방식에 따라 세계를 가공함으로써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설립한다.”각주50) 철학이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관한 경험적 학문으로 전락한다. 주체성을 통해 모든 객체성을 자신에게 타당한 구조를 통해 정립하는 현상학적 인식방법만이 종말에서 철학을 구원할 수 있다.

사르트르 역시 실존에 기초한 인식을 강조한다. “의식은 자체가 아닌 존재의 도움을 받아 발생한다.”각주51) 의식이 드러날 때는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서 주체를 드러내 보인다. 기존의 객관주의적 인식은 일종의 원시적 착각 속에서 작업했다. 예를 들어 그들에 의하면 인식은 먹는 작업이다. 인식된 대상을 삼켜 배를 가득 채워 충실하게 만들고, 그것을 소화함으로써 동화하는 것이다. 인식이 하나의 형식적 작용에 불과했다. 하지만 감각도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을 전제로 하기에 인식은 주관성과 필수불가결하게 결합된다.

사르트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경계로 마르크스주의를 상당히 친근하게 생각했지만,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실존주의적 인식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결합시키는 방식을 추구한다. “변증법적 이성은 구성하거나 구성된 이성이 아니다. 이 이성은 세계 내에서 그리고 세계에 의해 스스로 구성되는 이성이다.”각주52) 변증법이 이성의 결과물인 개념을 대상으로 구성 작업에 몰두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이성을 독립적 체계로 여길 때 텅 빈 정신으로 전락한다. 이성은 주체가 그 안에 있는 세계에 의해 구성된다. 그렇기에 이성은 합리적 인식으로서의 특성을 유지해야 하지만, 역사적으로 정립된 합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존재를 사유로 환원할 수 없다고 보았고, 사유를 인간 활동의 한 종류로 보는 일원론적 견해를 지녔다. 하지만 현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존재에서 출발하는 사유에 대한 변증법적 운동을 포기하고, 사유를 보편적 · 일반적 변증법에 용해시켰다. 인간이 없는 변증법으로 전락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통해 마르크스가 원래 의도한, 존재와 사유의 통일적 관계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직관과 판단 중지, 상호주관성

후설은 현상학적 인식에서 직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현상학은 직관하고 해명하면서 그리고 의미를 규정하고 구별하면서 탐구를 수행한다.”각주53) 현상학은 고정된 체계를 갖춘 이론화 작업이나 계산 가능한 수학적 작업을 통한 객관화를 지향하지 않는다. 모든 체험, 특히 지적 체험은 직관을 통해 이루어진다. 체험은 직관에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비교와 구분, 결합 등의 작업을 직관 내에서 수행한다. 가능한 한 오성을 제한적으로 사용할 것과 순수 직관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것을 주문한다.

후설에 의하면 선험적 주관성을 통한 현상 인식은 직관과 함께, ‘판단 중지’ 작업을 통해 과학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 “자아는 세계의 어떤 잔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정립된 것인데, 이것은 판단 중지를 통해서만 즉 세계의 타당성 전체를 ‘괄호침’으로써만 가능하며, 또한 유일한 정립으로서 가능하게 된다.”각주54) 판단 중지는 순수한 의식 현상만을 파악하기 위해 경험적 세계와 관련된 사항에 괄호를 침으로써 모든 판단을 중지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선험적이고 순수한 자아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판단 중지가 탐구 대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이론적 타당성을 괄호로 묶을 뿐이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 비교될 수 있다. 후설은 방법론적 회의가 지닌 중요한 의의를 인정한다. 의심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부정하고,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을 근거로 논의의 여지가 없는 지식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엄밀한 학문적 기초로 작용할 수 있음을 신뢰했다. 하지만 후설이 보기에 데카르트의 방법은 철저하지 못한 점이 있다. “데카르트가 모든 예측적 사념 특히 세계를 통째로 판단 중지에 예속시키지 않았다는 점, 판단 중지를 수행하는 자아를 통해 획득한 가장 중요한 의의를 정확히 이끌어내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다.” 데카르트의 한계는 크게 나누면 두 가지다. 하나는 판단 중지의 범위로, 인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세계를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와 수학에 연관된 순수한 세계로 구분하고, 전자에 대해서는 회의를, 후자에 대해서는 전제로 인정하는 불철저함으로 보였다. 그 결과 연역적 사고라는, 특정한 인식방법을 전제하는 오류를 보였다. 더 철저하게 엄밀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경험만이 아니라 순수 수학이나 논리학, 나아가서는 연역적 · 귀납적 사고방법을 포함하여 모든 이론적 요소까지도 판단 중지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 모든 입장을 환원하여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할 때 비로소 순수하고 선험적인 자아에 도달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환원을 통해 도달한 자아 자체를 주목하지 못하는 한계다. 데카르트처럼 회의를 통해 수학적 사고라는 사고 방법론으로 달려가는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정립된 자아로 나아가야 선험적 주관성을 중심으로 한 순수한 영혼에 이를 수 있다.

극단적 환원을 통해 도달한 선험적 주관성은 자아의 고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후설은 ‘상호주관성’이라는 발상을 통해 개별 인간과 인류를 인식론적으로 연결한다. “개별적인 점에 관해 타당성의 상호주관적 일치가 표준으로서 뚜렷이 나타나고, 그래서 타당성과 이것을 통해 타당한 것의 다양성 속에서 상호주관적 통일이 성립한다.” 서로간의 이해에서 경험과 성과가 삶과 유사한 연계 속에서 관계를 맺는다. 불일치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서로간의 토의와 비판을 통해 일치가 성립된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끊임없이 타당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 참된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사르트르는 대체로 후설 현상학의 핵심 문제의식을 공감하고 수용한다. 하이데거는 인식에서 직관이 차지하는 위상을 동일하게 강조한다. “어떤 양식이나 수단을 통해 인식이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해도, 인식이 대상과 직접 관계 맺고, 수단으로서의 모든 사유가 목표로 하는 것은 직관이다.”각주55) 직관이 그리스 철학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식의 모든 해석을 주도해왔다. 사르트르도 직관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직관 이외에 다른 인식은 없다. 연역과 추론은 부당하게도 인식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실은 직관으로 이끌어 주는 방편에 불과하다.”각주56) 인식의 다른 수단은 직관에 이르는 순간 사라진다.

야스퍼스는 후설의 상호주관성을 사귐 개념을 통해 수용한다. “전달이 없으면 이성은 잠시도 존재하지 못한다. 현존재적 현실성, 의식 일반과 정신은 모두 전달에 의해 운동하고 변화한다.”각주57) 의식적 사귐의 과정에 이성이 침투한다. 실존은 정신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개별 존재의 사귐 과정에서 본질에서 본질로 통하는 전달이 생긴다. 진리는 사귐과 전달에 의해 나타난다. 사르트르도 인간의 속성 안에 상호주관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주관성은 상호주관적 실재로서 시간화하는 객관성을 통해 표현된다. 상호주관성은 우연적 · 일시적 집합에서 표현된다.”각주58) 예를 들어 누군가가 강물 위로 몸을 기울이면 주위 사람도 같이 몸을 기울인다. 택시나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도 이들의 행위에 주목한다. 같은 호기심에 의해 다수가 하나로 통일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야스퍼스는 명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윤리적 행위에 의해 전체 삶의 질을 정화시키려면 일상적 의식에서 일어나는 철학적 사고와 명상의 경험이 손을 잡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각주59) 그는 석가를 비롯한 인도 철학의 명상법에 관심을 갖는다. 명상을 통해 의식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명상을 통한 몰입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합리적 사고 즉 단순한 의식의 상태를 넘어 초월적 경험으로 승화된다. 특히 철학이 도정에 있는 것일 때, 명상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을 강조한 석가의 가르침이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명상〉

야우렌스키, 19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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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우렌스키(Jowlensky)의 〈명상〉은 고요와 몰입 상태를 회화적으로 묘사했다. 추상화된 이미지를 중시한 청기사파의 표현 방법이 명상의 의미를 전달하기에 적합한 듯하다. 세로 선과 가로 선 그리고 이를 통해 형성된 공간을 단순한 몇 가지 색으로 채우면서 정적의 한가운데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명상가의 얼굴을 보여준다. 이미 깊은 몰입의 경지에 들어간 듯 현실의 온갖 분열에서 벗어나 초월 상태에 이른 모습이다. 같은 제목으로 여러 점의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봐서, 야우렌스키는 명상 방법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야스퍼스는 철학적 명상의 특징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철학적 명상에는 첫째, 자기반성이 있다. ··· 둘째는 초월해가는 명상이다.”각주60) 철학적 명상에는 성스러운 대상이나 장소, 고정된 형식이 없다. 오직 내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만이 있다. 자신이 그날 한 것, 생각한 것, 느낀 것을 스스로 떠올리면서 자기반성에 이른다. 또한 시간에 제약되지 않는 영원한 것을 확인하고 나의 자유를 통해 존재 자체에 닿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초월에 도달한다.

실존주의에서 출발하는 변증법적 인식

키에르케고르에서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변증법적 사고는 실존주의 인식론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인간의 특성 자체가 변증법적 통일에 의해 마련된다. “인간은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 순간과 영원의 종합,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각주61) 인간은 육체의 유한성이나 시간적 제약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마음과 육체, 시간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과의 종합이다. 종합이라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데, 정신을 통해 둘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고 적극적인 제삼자로서 인간 존재가 정립된다.

인간이 처한 절망도 변증법적 통일로 이해할 때 진정한 의미가 전달될 수 있다. “절망은 어떤 병보다도 훨씬 변증법적일 뿐만 아니라 절망에 관한 한 온갖 징조가 변증법적이며, 그 때문에 피상적 고찰은 절망의 현존 여부를 잘못 판단하기 쉽다.” 현실에서 절망하고 있음은 최대의 불행 · 비참함 · 파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절망은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뛰어남을 보여준다. 절망은 정신의 한 규정으로서 영원한 것에 연관되고, 어느 정도 영원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

야스퍼스도 인간 존재를 대립물의 통일로서 파악한다. “이성은 무한한 변증법을 야기한다. 양자택일, ‘~도 ~도’, ‘이것이냐 저것이냐’, 화해나 분리에 만족하지 않고 이러한 모든 것을 넘어서서, 정지 속에서 정지하지 않고 앞으로 뚫고 나간다.”각주62) 실존주의는 외견상 통합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통합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존재와 무(無)가 대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존재 없이 존재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둘은 통일적 관계다. 또한 믿음에 관계하는 신앙과 이성에 기초한 불신앙이 서로 배척하고 결합하면서 철학적 신앙의 기반이 마련된다. 초월은 초월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실성을 통해 초월을 손에 넣을 수 있으며, 시간의 한계를 통해 시간의 소멸에 도달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실존주의에 변증법적 운동 개념을 연관시킨다. “어떠한 경우에도 시간적 현존재에 있어서 안정은 없다. 운동은 개별자와 보편자, 현실성과 광대함, 실존적 신앙의 자명한 직접성과 이성의 무한한 운동 사이의 긴장을 갖는 실체의 근거에 의해 불가피하게 된다.”각주63) 고정된 것, 완성된 것은 스스로 진리와 무관함을 드러낸다. 진리는 시간 가운데 언제나 도상에 있고 운동 속에 있다. 어떤 판단이나 결정도 궁극적일 수 없다. 삶도 유한한 것에서 안전을 바라고 소유와 지속을 모색한다면 체념하는 삶에 머물게 된다. 본래적 삶, 고양된 삶은 제한 없는 요구와 큰 위험을 동반하는 모험을 한다.

사르트르는 더 적극적으로 변증법을 실존주의와 결합시킨다. 실존주의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현상학적 인식에 기초하여 변증법적 사고를 체계적으로 정립한다. 특히 변증법적 운동 개념을 통해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역동성 · 실천성을 강화한다. “실존주의의 방법을 전진-후진적, 분석-종합적 방법으로 규정한다. 또한 이것은 대상과 시대 사이의 풍요로운 왕복 운동이다.”각주64) 전진과 후진, 분석과 종합을 통해 개별은 고립을 벗어나서 전체와 관계를 맺는다. 개별 대상만이 아니라 전체 역시 운동 속에 있기에 단순한 전체가 아니라 역사성을 지닌 전체가 된다. 요컨대 시대와 대상의 무기력한 병렬관계가 갑자기 활기찬 갈등관계로 바뀐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이 앙상한 화석처럼 굳어진 것도 개별과 전체 사이의 역동적 운동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지식인에게서 변증법적 운동은 보편성 영역을 떠나지 못한다. 변증법적 운동을 일반성 안에서 규정한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방법을 ‘추상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탐구라고 강조하며, 그릇된 보편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가장 광범위한 결정으로부터 가장 세부적인 결정으로 차츰 거슬러 올라가면서 인간에 대한 지식이 변증법적으로 생성되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현실의 마르크스주의는 개별 인간의 구체적 행동과 실제 생각에 주목하지 않는다. 단지 겉모습을 관찰하고 특수한 것을 보편적 틀에 맞춰 녹여버린다. 단지 겉모습과 겉모습의 관계를 구성한 후 진리로 환원시켰다고 착각한다. 개별 인간이 사라진 역사의 법칙을 구성하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려 든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연관과 변화는 역동적 변증법과 거리가 멀다. 사실상 현실에 대한 주관적 개념의 규정일 뿐이다.

〈새로운 천사〉

클레,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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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Klee)의 〈새로운 천사〉는 마르크스주의자인 벤야민(Benjamin)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 그림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천사의 눈은 크게 뜨여 있고, 입은 헤벌어져 있고,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이런 모습일 게 분명하다. 그는 얼굴을 과거로 돌리고 있다. 우리가 사건의 연쇄를 바라볼 때, 그는 파국만을 본다. ··· 낙원에서 불어오는 강풍이 날개를 부풀릴 뿐만 아니라 바람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이제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강풍은 천사를 그가 등지고 있는 미래 쪽으로 막무가내로 데려간다. ···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강풍이다.”각주65) 벤야민은 그림의 천사를 통해 역사의 진보를 설명한다. 역사는 과거로 향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역사의 천사는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의 진보는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를 미래로 향하게 만든다. 즉 역사의 진보는 필연적 역사의 법칙으로 작용한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이러한 의미의 역사 발전 법칙은 허구고 속박이다. 필연성을 속박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에게서 벗어난 필연성은 자유로운 실천을 방해하는 속박으로 작용한다. “게으른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것을 한데 구겨 집어넣고, 실제의 인간을 그 신화의 상징으로 만들며, 인간존재의 복합성을 포착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을 편집광적 꿈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우리의 출발은 구체적이고 생생한 개인이어야 한다. 추상적 마르크스주의자는 사소한 것에는 감동하지 않기 때문에 개별적인 것에는 무관심하고 거대한 이론적 틀에 집착한다. 인간존재의 복합성에 관심을 갖는 실존주의를 단지 좁은 시야로 매도한다.

하지만 진정한 필연성은 개별성에서 출발한다. “개별적 객체화 속에서 자신을 타자로 인지하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이같은 발견은 필연성에 대한 체험이다.” 필연성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작업에서 필연성은 출발한다. 필연성으로 나아가는 개별적 체험은 실천의 자유에 의해 실현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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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출처

사유와 매혹 2
사유와 매혹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로 서양 철학 전체를 조망하는 새로운 개념의 철학사이다. 미술작품을 단순한 참고 도판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 작품을 분석해 철학의 흐름과 어떻게 맞물려 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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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 철학과 미술 생철학공리주의 · 실증주의 · 실용주의마르크스주의정신분석학실존주의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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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실존주의 존재론과 인식론사유와 매혹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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