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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이념을 먹고 자라지만, 예술은 이념을 먹으면… [매경 포커스]

doll eye 2022. 9. 27. 23:18

정치에 환멸 느낀 소설가는
가장 정치적인 소설을 썼고

전쟁·불평등 비판 영화 주인공은
"정치신념 없다" 외쳤다


예술이 아름다움 추구한다면
정치는 공동체의 이익에 집중
둘 다 인간 다루지만 목적지 달라

정치는 이념을 먹고 자라지만
예술은 이념을 먹으면 시들어

  • 허연 기자
  • 입력 : 2022.09.27 17:10:26   수
  •  
 매경 포커스 / 허연의 인문학이 필요한 시간 ◆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참여 작가였던 조지 오웰은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바르셀로나로 달려가 국제의용군에 가담한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통일노동자당 민병대에 들어간 그는 목에 총상을 입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매 순간 큰 환멸을 느낀다. 명분이 좋아 의용군이지 그들은 이념별·노선별로 나뉘어 정파투쟁이나 벌이는 오합지졸이었다. 오웰은 당나귀에서 기관총을 내리는 걸 놓고도 회의를 하는 민병대를 떠난다.

결국 내전은 프랑코 파시스트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오웰의 실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연이어 일어난 야만적인 2차 세계대전과 인민의 정부를 내세운 스탈린의 전체주의를 바라보면서 또 한 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정치와 이념에 환멸을 느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 '동물농장' '1984' 등 풍자소설을 잇달아 발표한다.



조지 오웰
정치를 조롱하고 자유를 옹호한 그의 작품들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탈정치를 외친 오웰이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정치 소설가가 되는 아이러니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예술과 정치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르다. 하지만 예술, 정치 모두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결코 떼어놓을 수는 없다. 따라서 인류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정치와 예술을 축으로 벌어진 배반의 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돼 왔다.

◆ 예술은 정치와 별개인가 종속적인가


세계적인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7년 어느 뒷골목을 걸으며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의 주제는 매우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였다. 토스카니니는 나치 독일을 떠나지 않고 지휘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푸르트벵글러를 비난했다.

"지금 같은 세상에 예술가는 압제적인 국가를 위해 연주해서는 안 됩니다."

푸르트벵글러는 이렇게 응수했다.

"바그너와 베토벤이 연주되는 곳이면 인간은 어디서나 자유롭습니다. 그 작품들을 들으면 자유로워집니다. 음악은 비밀경찰이 손대지 못하는 곳으로 인간을 데리고 가니까요."

푸르트벵글러는 논란이 많은 지휘자다. 그의 2차 세계대전 중 행적 때문이다.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독일하에서 히틀러와 괴벨스가 보는 앞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대에 올랐다. 그는 제국 음악국의 부의장을 지냈고, 나치전당대회에서 히틀러가 내세운 게르만 민족주의를 다룬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연주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나치 당원인 적은 없었다. 그보다 활동이 많지 않았던 카라얀마저 나치 당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좀 의외의 일이다. 그렇다고 그는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베를린 필을 유대인들 피신처로 만들어 유대인을 보호하는 데 애쓰기도 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그가 나치 독일의 대외선전 정책에 봉사했고, 자의든 타의든 나치의 자랑스러운 국가 문화자산 역할을 했다고 비난한다.

독일의 음악역사가인 헤르베르트 하프너는 푸르트벵글러의 행동은 예술지상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술도 한 시대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푸르트벵글러의 행적을 일도양단해서 말하기는 힘들다.

푸르트벵글러가 현실적인 행보를 통해 살아남은 정치적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하프너의 말처럼 예술밖에 모르는 예술지상주의자였는지 쉽게 결론이 내려지지는 않는다. 현실적인 시각으로 보면 모든 예술은 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작품에는 한 예술가가 살았던 시대의 고통과 환희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단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치는 역사 속에 치욕으로 남았고, 푸르트벵글러의 음악은 살아남았다는 사실뿐이다. 이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인지도 모른다.

◆ 피카소는 누구보다 정치적인 작가였다


"내 교향곡은 대부분이 묘비다. 너무 많은 국민이 죽었고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려지지도 않았다. 친척들조차 알지 못한다. 내 친구도 여러 명 그런 일을 당했다. 친구들의 묘비를 어디에 세우겠는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음악밖에 없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러시아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상록인 '증언'을 읽다가 찾아낸 구절이다. 순간순간 잔인한 현실 속에서 예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전쟁이나 테러를 막지도 못하고 배고픈 예술가의 가난조차 해결해주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순간 예술은 나약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견에 불과하다. 예술은 현실에 대한 순간적 대응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영속적인 일을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공포정치 시절을 살았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죽어가는 친구들을 위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가슴을 쳤을 것이다. 그는 사라진 친구들의 묘비명을 세워주기로 한다. 그가 세운 음악 묘비명은 암울하고 비장했다.

후세를 사는 우리들은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15번이나 교향곡 7번을 들으며 쇼스타코비치가 살았던 우울한 한 시대를 기억한다.

이 같은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스페인 소피아미술관에 있는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는 압권이다. 시대의 대작 게르니카에도 역사의 아픔이 숨겨져 있다.

스페인의 독재자였던 프랑코는 히틀러를 부추겨 자신에게 적대적인 바스크 지역 게르니카라는 작은 마을에 폭격을 하도록 한다. 이 폭격으로 장날을 맞아 마을 광장에 나왔던 무고한 양민 1500명이 학살당한다.

피카소는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는다. 피카소는 무고한 사람들이 자국 위정자에 의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작업실에 틀어박혀 '게르니카'를 그렸다. 게르니카는 1937년 파리 국제박람회 스페인관에 걸려 세계를 경악하게 했고, 전시회 수익은 구호기금으로 쓰였다.

우리가 흔히 소위 순수작가라고 생각하는 피카소는 의외로 정치적인 행보를 많이 보였다.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느 한순간도 나는 회화가 단순히 즐거움만 주는 기분 전환을 위한 예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피카소를 '정치적인 작가'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 예술이 정치에 종속돼서는 안돼


192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토마스 만은 이렇게 말했다. "예술의 휴머니즘은 전적으로 비정치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예술의 성장은 국가의 형태나 사회 형태와 무관하다. 만약 예술이 혁명적 몸짓을 보인다면 진보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원초적인 방식인 것이다."

적절한 표현이다. 예술은 인간을 그리기 때문에 역사와도 유관하고 정치와도 밀접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은 그 자체로 정치는 아니다. 정치가 목적이 아닌 인간이나 아름다움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예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아니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작품에는 창작자가 살았던 시대와 상황, 인간적 고뇌와 경험 등이 고스란히 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이 정치와 무관하다는 주장이 오히려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이 정치에 종속돼서는 안 된다.

사실 예술가들은 정치를 했다기보다는 인간 본연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에 분노했던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진정한 선(善)과 아름다움은 인간이 존중되고 자유가 보장되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사르트르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치적인 작가라기보다는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제도에 저항했다. 그는 예술가로서 표표히 살기를 원했다.

그는 흔히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아나키스트의 전형이었다. 그는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권위주의와 불의에 맞서 평생을 싸웠다. 노벨상마저 거부한 그는 가장 순수하게 살았던 아나키스트로 손꼽힌다. 재미있는 건 비정파적인 행태도 결국 하나의 정파가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다.


 채플린
찰리 채플린과 존 레넌은 굳이 표현하자면 평화주의자였다. 두 사람 모두 정치적이었지만 궁극의 목표는 평화였다.

채플린은 이념적으로 따지자면 민주주의의 본질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입장에서 빈부격차와 전쟁을 비판하는 '모던 타임스'와 '살인광 시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이 작품들 때문에 매카시 광풍에 휘말려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혔고 FBI의 감시 대상이 됐다.

결국 채플린은 미국에서 추방당해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망명지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난 정치인이 아닙니다. 정치적 신념도 없습니다. 난 자유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게 제 유일한 정치적 이념입니다. 그저 영화를 더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물론 채플린의 주장과 결이 다른 예술론을 펼친 사람도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같은 사람은 "정치와 예술은 절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 명의 위대한 화가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명의 해방된 사람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랑시에르 역시 '인간'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일단 인간을 해방하고, 그 해방된 인간으로 하여금 예술을 행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과 정치는 결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과 정치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예술과 정치 모두 인간을 다루지만 그 목적지는 다르다. 예술이 감동과 아름다움이라는 목적지를 향해간다면 정치의 목적지는 공동체의 이익이다. 정치에는 국경이 있고 이념이 작동하지만 예술에는 이 두 가지가 없다. 그 자리에 인간이 있을 뿐이다. 정치는 이념을 먹고 자라지만 예술은 이념을 먹으면 시들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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