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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 굴렁쇠로 한국 알린 '시대의 지성' 떠나다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작고

doll eye 2022. 2. 27. 21:55

22세 때 비평 `우상의 파괴`로
문단에 큰 파문 일으키며 명성
미디어 통해 최고 논객 활약
한예종 설립 등 문화행정 족적

췌장암 투병 끝 89세로 영면

  • 김슬기 기자
  • 입력 : 2022.02.27 17:05:44   수정 : 2022.02.27 19: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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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매일경제신문과 인터뷰하는 모습. [매경DB]
한국 지성사에 큰 별이 떨어졌다.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지난 26일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유족 측은 "낮 12시 20분쯤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큰 통증 없이 돌아가셨다"며 "유언은 따로 남기지 않으셨다"고 밝혔다. 2017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지만, 말기 췌장암으로 투병하면서도 마지막에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올해 들어서는 본인 스스로 하던 모든 일을 정리하고 있던 상태였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내고 언론인, 학자, 문화행정가 등으로 일생을 지낸 고인은 한국 사회에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거인이었다.

1933년 충남 온양에서 출생(호적상 1934년생)한 고인은 서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0년 서울신문을 시작으로 1972년까지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면서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활약했다.

1966년부터 이화여대 강단에 선 이후 1989년까지 문리대학 교수를, 1995∼2001년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2011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됐다. 30여 년간 이화여대에서 국문학도를 가르쳤다.

이 전 장관은 문학평론가로 가장 먼저 이름을 떨쳤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우상의 파괴'라는 글을 써서 문단 권력을 정면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문단의 거두였던 소설가 김동리, 모더니즘 시인 조향, 소설가 이무영을 각각 '미몽(迷夢)의 우상' '사기사(詐欺師)의 우상' '우매(愚昧)의 우상'이라고 비판한 글이 한국일보 논설에 실리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했다. 시인 김수영과의 '불온시' 논쟁에서 격렬한 글 사위를 주고받기도 했다. 문학의 현실 참여를 두고 문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창작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 언론을 통해 난타전을 벌인 것이다.

수십 개의 직함을 가지고 살았던 고인이지만 무엇보다도 '문학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했다. 2015년 매일경제 인터뷰에서는 "나는 학자가 아니었다. 문학 하는 사람이었다. 그 문학을 대학에서 강의한 거다. 문학만이 세상만사를 설명할 수 있다. 문학은 자연도 다루고 윤동주처럼 별도 노래한다. 세상에는 문학의 대상이 아닌 게 없다"고 말했다.

60년 이상 평론과 소설, 희곡, 에세이, 시, 문화 비평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방면의 글을 써왔다. 다작을 하면서도 그는 시대를 성찰하는 '화두'를 늘 던졌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3년)는 "우리의 피부 빛과 똑같은 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통찰을 통해 한국인의 특성을 독창적인 관점으로 짚어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1982년)은 하이쿠, 분재, 트랜지스터, 쥘부채 등 일본인이 가진 축소지향적 요소가 일본을 공업사회의 거인으로 끌어올렸다고 주창해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찍이 '정보화 시대'를 외쳤던 그는 '디지로그'를 통해 사이버의 디지털 공동체와 식문화의 아날로그 공동체를 이어주는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 파워가 2006년 희망의 키워드가 될 수 있다며 '어금니로 씹는 디지털'의 시대를 예견하기도 했다. 말년에도 자신의 삶이 굴곡 많은 시대를 두루 거친 것과 자신의 발언이 사회 속으로 퍼져간 것을 그는 감사했다. 2020년 매일경제 인터뷰에서도 "누이 쫓아 달래 캐던 소년이 '디지로그'와 '생명화 시대' 강연을 하는 사람이 세계에 어디 있겠나"라고 감사하며 말했다.

문화예술 행정가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회식·폐막식을 총괄 기획했다. 냉전 이후 처음으로 양 진영이 참가하면서 화해의 장을 열 수 있는 올림픽에서 그는 전 세계에 '벽을 넘어서'라는 구호를 외쳤다. 한국 전통의 '여백의 미'를 살린 기획이 개회식에서 등장한 굴렁쇠 소년이었다. 이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발전된 한국의 모습은 전쟁고아의 이미지에 불과했던 한국의 인상을 새롭게 바꾸어놓은 이벤트로 기억된다.

고인은 6공화국 때 문화공보부를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함에 따라 1990년 출범한 문화부의 초대 장관에 임명됐다. 장관 재임 때 한 일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외국어인 '로드 숄더'를 그가 창시한 단어인 '갓길'로 바꾼 일이다. 국립국어원을 세워 한국어의 성체를 견고히 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설립해 예술 영재의 터전도 닦았으며,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경복궁 복원 계획도 수립했다. 2015년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대뜸 '은퇴 선언'을 하면서 "모든 공적인 직함을 내던지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던 그다. 고인은 "나에게 지금까지는 죽음이 생과 함께 있었지만, 이제는 죽음과 직면했다. 오늘 할 수 있는 일들에만 전력투구하겠다. 지금 쓰고 있는 책만 10종이 넘는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1월 24일 출간된 대화록 '메멘토 모리'는 마지막 저서가 됐다. 이 시대의 지성이,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마지막 질문에 답한 책이다. 신과 종교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묻는 24가지 질문에 답하며 그는 코로나19가 찾아온 세상을 "코로나의 창궐에 대해서는 죽음을 통해 황폐화된 개인을 응시하게 된 것이며 죽음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2012년 딸을 암으로 잃은 뒤 기독교에 귀의하며 '영성(靈性)'에 천착해왔다. 지난해 10월에는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고인의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진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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