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회와 정부가 암호화폐 투자자 피해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블록체인·암호화폐 정책결정에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블록체인 업계에서는 한국에 비해 앞서가는 해외 정책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변화를 촉구하는 실정이다.
블록체인 산업분야는 세계 시장이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데다 통상 새로운 법안을 준비할 때 외국 사례를 검토·분석하는 게 일반적 과정인 만큼 앞선 해외정책에 주목하는 것이다. 해외 주요국의 정책 기조가 국내에도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7월 발표된 `크립토 파이낸스 컨퍼런스` 보고서에 따르면 암호화폐공개(ICO·투자자 공모와 유사)에 호의적인 국가 1위는 미국, 2위가 스위스로 나타났다. 지난해 국가별 투자 규모를 기준으로 상위 100개 ICO 중 실제 진행된 프로젝트 수를 집계한 결과다. 미국은 총 30개, 스위스는 15개의 프로젝트가 시장 진출에 성공했다. 신산업 정책을 빠르게 확립해 초기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두 국가의 움직임은 향후 국내 입법 참고 사례가 될 수 있다.
스위스는 주크시에 `크립토밸리`를 조성해 가장 먼저 블록체인·암호화폐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국가로 꼽힌다. 이미 2014년 대표적 암호화폐인 이더리움의 TGE(Token Generation Event·토큰생성이벤트)를 진행했고, 이후에도 다양한 토큰의 발행을 폭넓게 허용해 많은 경험을 축적한 국가이기도 하다.
스위스 주크시에서는 암호화폐나 블록체인 관련 사업을 별도의 허가를 받지 않고 추진할 수 있다. 블록체인이나 핀테크 기업들이 몇몇 원칙만 지키면 쉽게 금융 계좌를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100만 달러 미만의 자금을 모금한 기업들은 규제에서 더 자유롭다.
스위스를 비롯해 블록체인 기업들이 모여들고 있는 유럽국가의 공통적 특징은 정부가 법적 규제 대신 발빠르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스위스가 지난 2월 발표한 가이드라인은 토큰을 3가지로 나눠 각자 다른 규정을 적용시킨 것이 핵심이다. ICO와 토큰을 지불형(payment), 기능형(utility), 자산형(asset)으로 구별한 뒤 자산형 토큰은 자금세탁방지 규정 등 기존의 증권법에 따라 규제 받도록 했다. 다른 두가지 유형은 `투자`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보다 자유로운 가이드라인을 적용한다. 자산형 토큰은 토큰경제를 통해 실제 주식이나 채권처럼 물리적 자산이나 수익, 배당금, 이자 등을 제공하는 형태를 말한다.
지불형 토큰은 지불 수단으로만 사용되는 디지털 화폐를, 기능형 토큰은 각종 디지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권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토큰을 말한다. 물론 이들 토큰도 `투자`의 기능을 수행하면 증권으로 간주한다. 앞서 지난해 싱가포르도 유사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으며, 리투아니아 등 여러 유럽 국가들도 이 흐름에 따르는 추세다.
스위스 금융시장감독관리당국(FINMA)이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블록체인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마련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요한 슈나이더 암만 스위스 경제부 장관도 수차례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 산업의 허브 국가로 만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업계 관계자들은 스위스가 ICO 등 암호화폐 사업을 펼치기에 가장 좋은 이유로 "금융 당국에 프로젝트를 사전에 알리면 규제 대상에 해당되는지를 명확히 확인해주기 때문"이라는 점을 꼽았다. 업계에서는 금융당국이 지금까지 수많은 암호화폐를 검토하면서 블록체인 기술을 이미 이해하고 있어 문의 과정이 수월하다는 점도 중요한 것으로 판단한다. 국내에서 한국 정부의 부족한 전문성과 산업 육성 의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낮은 법인세도 유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주크의 실질 법인세율은 연방세와 지방세를 합쳐 14.5% 수준이지만 해외 기업이 입주하면 최저 8.5% 수준까지 낮춰준다.
이같은 산업육성 전략은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스위스 정부가 지난 2013년부터 블록체인 산업에 친화적 정책을 펼치며 주크시에 조성한 일명 `크립토 밸리`에는 130여개국 170여개의 블록체인 기업이 입주했다. 스위스에서 가장 작은 도시이면서 약 12만 4000명의 인구를 지닌 주크시는 약 10만 9000개의 일자리를 가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스위스를 비롯해 몰타·에스토니아 등 일부 유럽 국가와 싱가포르·홍콩 등 아시아 국가들이 산업 육성을 위해 `친시장` 정책을 펴고 있지만 여전히 미국의 거대 시장을 완전히 뛰어 넘지는 못하고 있다. 미국이 블록체인 산업을 비교적 강하게 규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외의 결과다. 기술 분야 고급 인력 수급과 산업 기반, 자본 시장 규모 등이 압도적인 점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1년 반 동안 전 세계에서 진행된 모든 ICO 중 6분의 1 이상이 미국에서 진행된 것으로 알려지는 가운데, 미국은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자국 증권 시장 보호 탓에 암호화폐 관련 산업이 많은 규제를 받는 국가로 평가된다.
SEC는 ICO를 기존 증권법으로 규제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증권 시장과 투자자 보호를 위해 IPO(Initial Public Offering·기업공개·주식공모)와 같은 수준으로 감독하겠다는 의미다. 암호화폐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아 블록체인 산업에 호의적인 조치는 아니지만, 토큰을 마치 주식처럼 자산으로 인정하고 투자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셈이어서 ICO 자체를 금지한 한국과는 차이가 크다. 이미 SEC는 일부 토큰을 유가증권으로 규정한 바 있다.
업계와 일부 전문가들은 SEC의 결정이 암호화폐의 특성을 무시한 처사라고 반발하고 있다. 스위스 등 다른 국가의 가이드라인처럼 자산형 토큰을 제외한 기능형 토큰 등은 증권으로 보기에 힘들다는 주장이다. 다만 이들은 SEC의 분명한 입장 표명이 향후 규제를 예측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 의미를 두는 분위기다.
은행이 암호화폐 사업에 관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 부정적인 점은 한국의 상황과 유사하다. 많은 미국 은행들이 해당 사업을 위한 계좌를 개설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은행들도 정부의 ICO 금지 방침에 따라 관련 기업의 사업용 계좌 개설을 거부하는 동시에 암호화폐 거래를 위한 개인용 계좌 개설도 꺼리고 있는 상태다.
일부 전문가들은 국내 정책 수립에 미국의 정책이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한다.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토큰 종류 별로 최소한의 규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향보다 자본시장법·증권법 등 기존법과 유사한 규제를 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블록체인업계 한 관계자는 "한국은 ICO를 허용하고 있는 국가 중 비교적 보수적인 미국의 규제를 참고할 가능성이 높은데, 한국 시장은 미국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스위스나 싱가포르 등 선도국가들의 시도와 결과를 모두 면밀히 검토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외국의 일부 정책 전문가도 미국 시장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럽의회에서 블록체인 산업 분야 입법을 담당하고 있는 안타나스 구오가 의원은 "미국은 세계 최대인 자국 증권 시장을 보호하려는 유인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서 "유럽의 경우 기능형 토큰 뿐 아니라 증권에 가까운 시큐리티 토큰(Security token)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기회로 인식해 육성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임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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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산업분야는 세계 시장이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데다 통상 새로운 법안을 준비할 때 외국 사례를 검토·분석하는 게 일반적 과정인 만큼 앞선 해외정책에 주목하는 것이다. 해외 주요국의 정책 기조가 국내에도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스위스는 주크시에 `크립토밸리`를 조성해 가장 먼저 블록체인·암호화폐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국가로 꼽힌다. 이미 2014년 대표적 암호화폐인 이더리움의 TGE(Token Generation Event·토큰생성이벤트)를 진행했고, 이후에도 다양한 토큰의 발행을 폭넓게 허용해 많은 경험을 축적한 국가이기도 하다.
스위스 주크시에서는 암호화폐나 블록체인 관련 사업을 별도의 허가를 받지 않고 추진할 수 있다. 블록체인이나 핀테크 기업들이 몇몇 원칙만 지키면 쉽게 금융 계좌를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100만 달러 미만의 자금을 모금한 기업들은 규제에서 더 자유롭다.
스위스를 비롯해 블록체인 기업들이 모여들고 있는 유럽국가의 공통적 특징은 정부가 법적 규제 대신 발빠르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스위스가 지난 2월 발표한 가이드라인은 토큰을 3가지로 나눠 각자 다른 규정을 적용시킨 것이 핵심이다. ICO와 토큰을 지불형(payment), 기능형(utility), 자산형(asset)으로 구별한 뒤 자산형 토큰은 자금세탁방지 규정 등 기존의 증권법에 따라 규제 받도록 했다. 다른 두가지 유형은 `투자`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보다 자유로운 가이드라인을 적용한다. 자산형 토큰은 토큰경제를 통해 실제 주식이나 채권처럼 물리적 자산이나 수익, 배당금, 이자 등을 제공하는 형태를 말한다.
지불형 토큰은 지불 수단으로만 사용되는 디지털 화폐를, 기능형 토큰은 각종 디지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권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토큰을 말한다. 물론 이들 토큰도 `투자`의 기능을 수행하면 증권으로 간주한다. 앞서 지난해 싱가포르도 유사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으며, 리투아니아 등 여러 유럽 국가들도 이 흐름에 따르는 추세다.
스위스 금융시장감독관리당국(FINMA)이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블록체인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마련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요한 슈나이더 암만 스위스 경제부 장관도 수차례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 산업의 허브 국가로 만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업계 관계자들은 스위스가 ICO 등 암호화폐 사업을 펼치기에 가장 좋은 이유로 "금융 당국에 프로젝트를 사전에 알리면 규제 대상에 해당되는지를 명확히 확인해주기 때문"이라는 점을 꼽았다. 업계에서는 금융당국이 지금까지 수많은 암호화폐를 검토하면서 블록체인 기술을 이미 이해하고 있어 문의 과정이 수월하다는 점도 중요한 것으로 판단한다. 국내에서 한국 정부의 부족한 전문성과 산업 육성 의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낮은 법인세도 유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주크의 실질 법인세율은 연방세와 지방세를 합쳐 14.5% 수준이지만 해외 기업이 입주하면 최저 8.5% 수준까지 낮춰준다.
이같은 산업육성 전략은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스위스 정부가 지난 2013년부터 블록체인 산업에 친화적 정책을 펼치며 주크시에 조성한 일명 `크립토 밸리`에는 130여개국 170여개의 블록체인 기업이 입주했다. 스위스에서 가장 작은 도시이면서 약 12만 4000명의 인구를 지닌 주크시는 약 10만 9000개의 일자리를 가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스위스를 비롯해 몰타·에스토니아 등 일부 유럽 국가와 싱가포르·홍콩 등 아시아 국가들이 산업 육성을 위해 `친시장` 정책을 펴고 있지만 여전히 미국의 거대 시장을 완전히 뛰어 넘지는 못하고 있다. 미국이 블록체인 산업을 비교적 강하게 규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외의 결과다. 기술 분야 고급 인력 수급과 산업 기반, 자본 시장 규모 등이 압도적인 점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1년 반 동안 전 세계에서 진행된 모든 ICO 중 6분의 1 이상이 미국에서 진행된 것으로 알려지는 가운데, 미국은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자국 증권 시장 보호 탓에 암호화폐 관련 산업이 많은 규제를 받는 국가로 평가된다.
SEC는 ICO를 기존 증권법으로 규제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증권 시장과 투자자 보호를 위해 IPO(Initial Public Offering·기업공개·주식공모)와 같은 수준으로 감독하겠다는 의미다. 암호화폐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아 블록체인 산업에 호의적인 조치는 아니지만, 토큰을 마치 주식처럼 자산으로 인정하고 투자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셈이어서 ICO 자체를 금지한 한국과는 차이가 크다. 이미 SEC는 일부 토큰을 유가증권으로 규정한 바 있다.
업계와 일부 전문가들은 SEC의 결정이 암호화폐의 특성을 무시한 처사라고 반발하고 있다. 스위스 등 다른 국가의 가이드라인처럼 자산형 토큰을 제외한 기능형 토큰 등은 증권으로 보기에 힘들다는 주장이다. 다만 이들은 SEC의 분명한 입장 표명이 향후 규제를 예측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 의미를 두는 분위기다.
은행이 암호화폐 사업에 관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 부정적인 점은 한국의 상황과 유사하다. 많은 미국 은행들이 해당 사업을 위한 계좌를 개설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은행들도 정부의 ICO 금지 방침에 따라 관련 기업의 사업용 계좌 개설을 거부하는 동시에 암호화폐 거래를 위한 개인용 계좌 개설도 꺼리고 있는 상태다.
일부 전문가들은 국내 정책 수립에 미국의 정책이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한다.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토큰 종류 별로 최소한의 규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향보다 자본시장법·증권법 등 기존법과 유사한 규제를 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블록체인업계 한 관계자는 "한국은 ICO를 허용하고 있는 국가 중 비교적 보수적인 미국의 규제를 참고할 가능성이 높은데, 한국 시장은 미국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스위스나 싱가포르 등 선도국가들의 시도와 결과를 모두 면밀히 검토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외국의 일부 정책 전문가도 미국 시장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럽의회에서 블록체인 산업 분야 입법을 담당하고 있는 안타나스 구오가 의원은 "미국은 세계 최대인 자국 증권 시장을 보호하려는 유인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서 "유럽의 경우 기능형 토큰 뿐 아니라 증권에 가까운 시큐리티 토큰(Security token)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기회로 인식해 육성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임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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