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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 바로크시대 이전의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 ...
doll eye
2013. 6. 1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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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크시대 이전의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 ...
- 바로크의 음악 17세기 초에 르네상스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혁신적인 젊은 음악가들이 일반 문화예술의 르네상스 정신에 자극되어 새로운 양식, 다시 말해서 화성적인 반주를 가진 단선율의 양식을 장조 하게 되었다. 이것이 모노디아(Monodia)즉 단 음악이다.
- 이 단음악이 정착 되었을때 르네상스음악이 완성된 것이지만 이 선율음악은 대위법적인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서창적인 선율과 이를 뒷받침하는 단순한 화성적인 반주로 가장 직접적인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독창가곡이나 오페라, 그리고 오라토리오로서 나타났는데, 이러한 양식에 의해 근대적인 음악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그러나, 한편 옛 겹선율에 의한 복음악이 모두 쇠퇴해버린 것은 아니며 당분간 신구 두 개 의 양식이 서로 접촉하고 영향을 주며 사용되었다.
- 독일이나 네덜란드의 많은 음악가는 그 풍부한 화성적 가능성에서 복음악적인 방향으로 나갔고, 이에 반해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음 악가는 르네상스적인 단음악을 택하고 오페라나 아리아, 그리고 소나타와 협주곡의 양식을 창안 발전 시켰다.이 두 개의 조류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하이든이나 모짜르트등의 고전음악에서 화해하고 교류하게 된다.
- 이 르네상스 정신의 최고의 발현시대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부터 18세기 전 반기에 바하나 헨델이 대위법적인 음악을 완성한 복음악의 전성기에 이르는 약 150년간을 바 로크음악시대라고 부른다.
- 원래 바로크(Barock)라는 말은 주로 미술에서 사용된 시대양식의 개념으로서 스페인의 베라스케스, 네덜란드의 란브란트 등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변화있는 색채, 웅대한 구도, 장식 적인 곡선, 극적이고 정열적인 표현 등이 바로크예술의 특징이다.
- 바로크 음악은 원칙적으로 저음에 기초를 두어 그위에서 화성적인 성부를 배정해 가는 통주 저음기법을 기반으로 대조적인 협주양식, 즉 강주와 약주, 전 합주와 독주, 밝은 것과 어두운 것과 같은 대비적인 효과를 추구하고 심리적인 감동과 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선율울 장식하고 화성에서 으뜸음을 중심으로 힘차고 색채감과 극감을 더해 준다. 그리고 마로크음악의 사회 적 바탕은 절대주의의 귀족 제도로서 주로 극음악과 기악음악의 분애로서 이탈리아가 그중심 이 되었다.
-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대체로 극음악이 탄생한 1600년경부터 바흐가 죽은 1750년경을 말하는데 이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에 싹튼 인간중신적 세계관이 팽배해져서 점차 시민계급을 성장시켰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합리적인 관념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바로크(Baroque)란 말은 "찌그러진 진주"라는 의미로서 이 시대의 음악은 안정감 대신 약동감을 특징으로 하여 웅장하고 거대하면서도 거기에 다채로운 장식이 함께 가해지는 것이다.
- 대체로 17세기 전반을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단성음악 양식과 18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한 대위법적 다성음악 양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 바로크 음악의 시작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활동한 카메라타(Camerata)라는 문예인들의 새로운 음악 관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위법적 음악이 가사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가벼운 기악반주 위에서 가사가 명료하게 전달되는 새로운 음악 형태를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단성음악(Monody)이다.
- 이것을 적용하여 카메라타 일원인 갈릴레이(V. Galilei, 1520∼1591)와 카치니(G. Caccini) 1545∼1618)는 최초로 반주가 딸린 서정가곡을 만들었다.
- 단성음악의 선율반주는 저음 현악기로 연주되는데 이것은 작품전체를 통하여 계속되기 때문에 통주저음(Basso Continuo)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통주저음은 저음부 아래에 화음을 지시하는 숫자를 붙였기 때문에 숫자저음(Figured Bass)이라고도 부른다.
- (1) 오페라(Opera)의 탄생16세기말경 이탈리아 피렌체의 음악애호가 바르디(G. Bardi, 1534∼1562)의 집에 젊은 음악가와 시인들이 모여 새로운 음악을 연구했는데 이 집단을 카메라타(Camerata)라고 불렀다.
- 1597년에 시인 리눗치니(O. Rinuccini, 1563∼1623)의 대본에 페리(J. Peri, 1561∼1633)가 오페라《다프네(Dafne)》를 작곡하였다. 두 번째 작품도 리눗치니 시(詩)에 페리와 카치니가 작곡한 《에우리디체(Euridece)》를 1600년에 상연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에우리디체뿐이다.
- 그런데 근대적 개념의 오페라에 접근되는 진보적인 오페라를 만든 사람은 몬테베르디(C. Monteverdi, 1567∼1643)이다. 그는 1607년 《오르페오(La Favola d` Orfeo)》를 상연하였는데 대규모의 합창과 관현악, 무용 등이 한데 어울려 이전의 오페라라는 표현양식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기악의 서주로 시작하였고 댄스음악이 있고 신포니아라고 하는 기악곡이 사이에 포함되었다.
- 그리고 스카를라티(A. Scarlatti, 1660∼1725)를 중심으로 한 나풀리악파가 생겼으며 프랑스에서는 륄리(J. Baptiste Lully, 1632∼1686)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가 생겼으며, 영국과 독일에서도 오페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 (2) 오라토리오(Oratorio)와 칸타타(Catata)오페라보다 조금 늦게 종교음악의 한 형식으로 태어난 오라토리오는 초기의 모습이 오페라와 매우 유사하였다. 오라토리오의 특성은 오페라와 달리 종교적 내용으로 무대장치, 연기가 없다는 것이지만 초기의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연극적인 형태를 모두 갖추었다. 최초의 오라토리오는 카발리에리(Emilo de Cavalieri, 1550년경∼1602년)의《영혼과 육체의 극》인데 성서적 내용이 약하고 연극적인 면이 강하여 오페라와 유사한 점이 많다 하겠다. 그후 카리씨미(Giacomo Carissimi, 1605∼1674)가 쓴 《예프테, Jephte》로써 오라토리오의 음악양식을 확립하였다.
- 바로크말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는 헨델(George Friederch Handel, 1685∼1759)이다. 그는 극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여 합창을 증가시켰고, 소재도 성서적 내용이외에 고대 그리이스의 신화적 인물을등장시키는 등 기존의 오라토리오의 음악 양식에서 탈피하여 오라토리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불후의 명작 《메시아, Messiah》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범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다.
- 칸타타의 음악형식구조는 오라토리오와 유사하다. 다만 그 규모가 축소되어 전례용으로 사용되기 적합하였다. 17세기중엽부터는 성서적 내용 이외에도 서정적인 세속가사를 사용하여 칸타타의 영역을 넓혔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은 200여편의 코랄을 사용한 교회 칸타타를 작곡하여 바로크 칸타타의 최고경지를 이룩했다.
- (3) 기악음악바로크시대의 기악음악은 중세에세부터 내려오는 악기의 발달과 양식의 확립, 새로운 악기의 출현으로 성악음악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 건반악기는 독주용악기로도 사용되었으나 통주저음의 필수적인 악기로 어떠한 기악음악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바로크시대에 이르러 최고의 음향을 자랑하는 오르간을 위시하여 클라비코드, 쳄발로 등은 독주나 합주용 악기로 인기가 높아 많은 작품을 남겼다.
- 1709년에는 크리스토포리(B. Cristofori, 1655∼1713)가 만든 피아노(Clavicembalo col Piano e Forte)가 등장하여 피아노 문헌의 첫장을 열었다.
- 현악기 부분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는데, 르네상스를 점유했던 비올족이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의 현악기군을 이루는 바이올린 족으로 대치되어 관현악 음악의 중심을 이루었다. 특히 크레모나(Cremona)출신의 아마티(N. Amati), 과르네리(G.B. Guarneri), 스트라디바리(A. Stradivari)등의 바이올린 제작자들이 우수한 악기를 만들어 바로크 현악을 더욱 수준 높은 음악으로 끌어 올렸다.
- 르네상스를 지배하던 루트는 바로크시대에 들어오면서 그 빛을 잃고 퇴조하여 그 명맥만을 유지시켰다.
- 관악기는 여전히 정립되지 않았으나, 관현악에서 그 중요성이 더 새져서 악기의 사용 빈도수가 높아갔다.
- 바로크시대의 작곡가들은 르네상스시대에 유행했던 몇몇 기악형식을 여전히 사용하였고, 아울러 새로운 음악형식을 개발하여 근대적인 기악 음악으로 그 모습을 점차 바꾸어나갔다.
- 르네상스의 기악형식이었던 푸가(Fugue)는 바로크시대에 와서는 독립된 기악작품은 물론 성악, 합창곡에서도 그 기법이 사용되었다.
- 모음곡(Suite)은 무곡을 여러 개의 부분으로 확대해서 독주와 합주용의 기악 음악형식으로 사용되었다. 모음곡은 주로 같은 조성의 알르망드(Allemande), 쿠랑트(Courante), 사라반드(Sarabande), 지그(Gigue)를 주로 하여 그밖에 지그의 앞과 뒤에 미뉴에트(Minuet), 부레(Bouree), 가보트(Gavotte)등이 삽입되기도 하였다.
- 바로크시대에 와서 르네상스의 세속 성악음 들을 성악과 기악의 혼합 내지는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형태가 흔하였는데 이것이 다악장 형식의 소나타(Sonata)라는 이름으로 흡수되었다.
- 많은 바로크 소나타는 두 개의 바이올린과 콘티누오를 위하여 작곡되었는데 이것이 트리오 소나타이다. 다른 형태의 소나타로 (Sonata da Camera)와 교회소나타(Sonata de Chiesa)라는 두 종류로 분류지었고 일반적으로 같은 조성의 4악장으로 구성된다
- .바로크시대의 협주곡은 합주협주곡(Comcerto Grosso)과 독주협주곡(Solo Concerto)의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합주협주곡의 확립자는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이고 독주협주곡은 3악장 형식으로 오늘날의 협주곡 악장의 구성원리를 제공하였다.
- 대표적 작곡가는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로서 근대적 개념의 협주곡 완성자이다.
- 관현악을 의미하는 신포니아(Sinfornia), 서곡(Overture), 협주곡(Concerto) 등이 있었으나 용어의 구분처럼 음악적 내용의 구분이나 표준은 서 있지 않았고 관현악의 형태도 아직 악기의 구성이나 기준이 일정치 않았다. 관현악의 주된 악기는 현악기였고 관악기나 타악기는 간헐적으로 사용되었다.
- 1) 안토니오 비발디 - Antonio Vivaldi 1678-1741
- 2)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
- 3) 요한 세바스찬 바하 - Johann Sebastisn Bach 1685-17501)
- 안토니오 비발디 - Antonio Vivaldi 1678-1741비발디는 1678년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1741년 7월28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 서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시대의 바이올린 주자인 동시에 작곡가이다. 비발디는 바하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준 위대한 음악가로 40여곡의 오페라와 100여곡의 라고 하는 복수의 독주악기와 합주부로 구성되는 과 단일협주 곡, 그리고 실내악곡, 성악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들 작품들이 객관적으로 반드시 최상급은 아니라 할지라도 충실하고 형식적으로 잘 정돈되어 바로크음악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사원의 바이올린 주자로 있던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고 또한 죠반니-레그렌치에게 지도를 받았다. 그는 1703년에 성직에 들어 갔으나 몸이 약해 미사를 하는 것은 면제를 받았다. 1709년에 베네치아의 자선병원 부속 음악학교의 바이올린 교사가 되었고 1716년에는 음악장이 되었다. 이 학교에서 재직하였던 15 년 동안 수많은 협주곡과 성악곡을 작곡하였고, 후기에는 오페라 작곡과 함께 그 흥행에도 관여했다. 또한, 평생 500여개의 콘체르토와 45개에 달하는 오페라곡을 발표했다. 비발디를 비평하는 사람들은 그가 같은 콘체르토를 500번이나 되풀이하였다고 할 만큼 그 의 작품은 일률적이고 반복되는 공통성이 있다. 전체작품 중 거의 반 이상이 바이올린 곡이며 100곡이상이 바순, 첼로, 오보에, 플루트 등의 협연곡이다.
- 그의 음악적 특징은 강한 리듬과 넘치는 활력 그리고 거의 항상 사용되는 직선적인 주제 등이다. 바순 콘체르토로 어둡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표제적인 협주곡 "밤"과 같이 줄거리가 있는 음악을 여러 곡 만들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사계"가 1725년에 발표되었다. 봄의 새노래, 여름의 폭풍, 가을의 추수, 추운 겨울을 상징하는 이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악기의 음색을 새롭게 표현한 비발디의 음악은 많은 작곡가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계" 1725 "올란도 핀토 파쪼" 1724 "귀스티노" 1724 "그리셀다" 1735 "충실한 목동" 1737 "바이올린 콘체르토" "적장 홀로페르네스에게 승리하고 돌아오는 유다"
- 2)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독일 할레(Halle)에서 1685년에 출생한 헨델은 8세때에 이미 음악적 재질을 인정 받았으며, 1706년 함부르크가극장 관현악부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1705년 그의 처녀작 가극 를 상영하는데 성공하였으며, 1706년에는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체류하면서 수 편의 가극을 상영하였다. 1710년에 귀국하여 하노버 선제후의 악사장으로 선임되었다가 1711 년 영국으로 건너가 가극를 상연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로 런던 에 체류하면서 연금을 받았으며, 왕립 음악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실명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 작풍이 웅대하고 장엄하여 영궁의 귀족적 취미와 신흥산업 부르조아 취미에 적합하였다. 많은 작품을 지었는데 가극 40, 성극 80, 서악 70외에 기악곡-합창곡이 많다. "알미라" 1705"리날도" 1711"메시아" 1742"요한수난곡" 1724"수상음악" 1717"하프시코드모음곡" 등등...
- 3) 요한 세바스찬 바하 - Johann Sebastisn Bach 1685-1750바하는 1685년 3월 21일 독일중부 츄우린겐의 산악지대 아이제나하에서 태어나, 1750년 7 월 28일 역시 독일의 아리프찌히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난 바로크 음악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작곡가이다."바하"라고 하면 마치 서양음악이 바하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우리는 일상 바하가 입에 오르게 되고 그의 음악의 고고한 고전미에 감동하고, 또 음악사를 논할 때 으례이 맨 먼저 들먹이는 이름이 바하이다. 그만큼 역사에 남긴 바하의 업적과 비중이 크기 때문이며, 그의 음악이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줄 만큼 위대한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 사실, 바하가 나오기 전 17세기 경에는 음악은 여러 가지 양식이 잡다하게 생겨 혼란을 빚을 정도로 분파작용을 거듭하고 있었다. 18세기 전반에 있어서, 바하를 이러한 여러갈래의 양식을 자 화해시켜서 독자적인 양식을 수립한 , 이를테면 바로크 음악을 집대성한 위대한 대가라고 하겠다.
- 바하는 주로 과거의 전통을 따르기는 했으나, 당시의 새로운 양식도 흡수하여 대위법적이면서도 새로운 양식을 도입한 독특한 음을 만들었다.
-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근대적인 의미 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음악 양식, 이를테면 교향곡이니, 협주곡이니, 현악4중주니 하는 이른바 고전주의 양식을 수립한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와는 판이한 한계를 갖는 바하는 바로크음 악의 맨 마지막 정상을 이룬 대가이다.
- 바하는 음악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대대로 이가족에서는 유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전 후 200년 동안에 약 50명의 음악가가 나왔다니 대단한 음악적인 가계라고 하겠다. 바하도 어렸을때부터 음악가인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비롯한 음악교육을 받았는데, 10살때에는 불행이도 양친을 잃고 고향인 아이제나하를 떠나 올드루프에 있는 그의 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하의 손에 의해 양육되어 그 동안 오르가니스트인 형으로부터 크라비어와 오르간등을 배웠다. 바하는 15살이 되자, 류우네브르크에 있는 교회부속 학교에 들어가 고등 교육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하였고 유명한 오르간 주자인 베므를 비롯한 당시의 대오르간 주자로 함부르크의 카라리이나 교회에 있는 디트리히-북스테푸데 등에게 지도를 받았다. 또한, 이웃 체레시를 자주 왕래하면서 프랑스식으로 편성된 궁정악단의 연주를 들어 프랑스음악에 대한 견식도 넓혔다. 그 후, 바하는 1703년 바이마르로 옮겨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근무하다가 이룬슈타트의 오르간 주자로 다시 옮겼고, 1707년에는 뮤르하우젠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그 이듬 해에 바이마르의 궁정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의 명예로운 지위를 얻어, 여기서는 직접 자기가 오르간의 설계를 하는등, 오르간에 많은 개량을 가했다. 또한, 그의 오르간 작품의 태반은 이때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바하는 교회음악에 대한 염원과 정열을 억누를 길이 없어 1723년 라이프찌히의 토마스 교회부속 학교 합창장겸 시의 음악 지휘자가 되었다. 바하는 눈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27년간 이 직에 충실히 근무하면서 맣은 작품을 썼다.
- 바하의 작품은 모든 분야에 걸쳐 있고, 그 수도 대단히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오랜 시간, 세상에서 잊혀졌다가 1829년에 멘델스존이 바하의 을 연주한 데서 일반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진가를 재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작품이 출판되지 않았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가 장 중요한 이유로는 그 작품의 성질이다.
- 작품의 태반이 종교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따라 서 통속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구조가 복잡하고 내객이 깊어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에 원인이 크다고 본다. 그의 작품이 다성부적이고 대위법적인 처리가 대부분인 것은 사실이며, 당시에도 "너무 기교적이고 자연성이 없다" 는 비판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풍부한 인간적 감정이나 정화된 고고한 기풍이 느껴지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마태수난곡" 1727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1734 "커피 칸타타" 1735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번-6번" 1721 "토카타와 푸가 d단조" "골드베르그 변주곡" 1742
- 1. 시대적 특징 14세기 초엽의 최초의 신음악이라고 불리우는 아르스 노바의 탄생이후 두 번째의 신음악이 탄생되었다. 그것이 바로크(Baroque) 음악이다. `바로크`라는 용어는 16세기 말경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보통 1600 ~ 1750년까지의 역사적 기간과, 그 시대의 음악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 그러나 다른시대와 마찬가지로 바로크 시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역사가들이 1600 ~ 1750년의 음악에 바로크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은 그 음악이 당대의 건축, 회화, 문학, 나아가서 자연 철학이나 철학과 어느 정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뿐 아니라 어떤 시기에 생산된 음악이든지 간에 당대의 다른 예술에서 표현된 경향, 관념들을 그 나름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 바로크라는 말은 `불규칙적인 모형`을 뜻하는 포르투칼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말은 비정상적인, 기교만 과장된, 감각이 나쁜, 괴상한 등의 헐뜯는 뜻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 그러나 음악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전 시대의 음악과 견주어 볼 때 새로운 양식이 그들에게 생소하게 보여졌을 것이라는 의미로 바로크를 이해해야 한다
- .2. 작곡자의 생애(바흐)마을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J.A. 바흐의 여섯 아들 중 막내로 독일 중부 지방에서 태어났다. 9살에 부모를 여의고 오르간 주자인 큰형 집에서 15살까지 기거하다가 독립하여 라이프치히에서 65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교회 중심의 음악 활동을 하였다. 1,000여 곡이 넘는 그의 작품 중 종교 성악곡이 차지한 비중이 컸던 것은 이러한 환경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바흐는 23살이 되기까지 몇몇 교회에서 오르간 주자로 일을 하였으나 직장에 대한 불만으로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다가 32살까지는 바이마르의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머물렀다. 이 곳에서 다수의 > 과 코랄(독일 루터파 교회의 찬송가)을 오르간으로 변형, 편곡한 곡 등 많은 오르간 작품을 만들었다. 29살 되던 1714년에는 악사장으로 승진되어 4주에 한 곡씩 작곡하였다. , 등 힘찬 서정성이 가득 담긴 독창곡 중심의 칸타타가 이때 만들어졌다.
- 승진에 대한 불만으로 32살 때 쾨텐의 레오폴드 영주 밑으로 직장을 옮긴 바흐는 바이올린을 위한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 모음곡 등 많은 실내약을 작곡하고 그 유명한 >도 이 당시에 만들어졌다. 1723년 38살 되던 해에 라이프치히의 칸토로 취임한 바흐는 세상을 뜬 1750년까지 27년동안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한 사람의 취향만을 만족시켜야 했던 궁정 악장의 직분에서 공무원과 교회 봉사의 직책을 겸하게 된 바흐는 매주 일요일마다 새로운 칸타타를 작곡하게 된다. 첫 해게 60개(매주 일요일과 축제용)의 완전한 칸타타 일군을 만들고, 다음 해에도 60개의 제이군 칸타타를 작곡하였으며, 2년 걸쳐 제삼군을 작곡하는 등 이 시기의 바흐는 왕성한 창작열을 보인다.
- 3. 작품 해설(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E장조 BWV1042)
- 제1악장 알레그로 E장조 2/2박자 3부형식으로 된 이 악장의 중간부는 제시된 주제의 여러 가지 변주와 조바꿈을 하게 되고 소나타 형식이 전개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전 합주가 먼저 주제를 제시한다. 이 주제에 포함되어 있는 동기 네 가지가 이 악장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모든 주제는 여기에서 파생한 것이다. 다음에 독주 바이올린이 연주되기 시작하나 바하의 다른 협주곡에서 는 대개 독주악기 자체의 주제를 따로 두고, 총주의 주제와 대립시키고 있는데, 이 곡에서는 모두가 총주의 주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제1부는 제시된 주제의 동기 네 개가 교차해서 나타나고, 그 사이를 바이올린이 수식해 가며, 침착한 가운데 협주 곡풍의 화려함을 나타낸다.제2부는 조바꿈으로 기분을 새롭게 한다. 그리고는 주제를 다섯 번 변주한다.제3부는 제1부의 완전한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 제2악장 아다지오 C샤프단조 3/4박자이 느린 악장은 전곡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악장이다. 바소, 오스티나토(같은 음형이 같은 성부에서, 같은 음높이로 반복되는 것) 위에 독주 바이올린이 장식적인 대위 선율을 연주하는 친밀감을 주는 곡이다.침착하고 깊이가 있는 낮은음의 주제가 반복되고 있다. 독주 바이올린이 낮은음 주제를 노래하다가 새로운 주제를 연주하면 반주부도 이 주제를 따라간다.그러나 낮은음 주제가 다시 나타나 깊은 정서를 풍겨준다.
- 제3악장 알레그로 앗사이 E장조 3/8박자 고풍의 론도 형식을 취한 이 악장은 상쾌한 기분에 넘친 단순한 악장이다. 이 곡은 프랑스의 발레 론도의 형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먼저 현합주의 총주로써 명쾌한 주제를 제시한다. 이 론도의 주제가 네 번 나타나서 제가끔 다른 멜로디를 내는데 그것들은 모두가 독주 바이올린의 화려한 기술을 발휘하도록 작곡된 효과적인 것이다.
- 1. 시대적 특징이 시대의 커다란 업적은 화성 음악의 확립, 소나타 형식의 확립과 발전, 기악 음악의 확립과 발전 즉 교향곡, 근대적 협주곡,현악 4중주, 피아노 3중주 등의 기악 형식과 연주 형식의 확립 등이다.
- 고전주의 시대는 보통 J.S. 바흐가 죽은 해인 1750년부터 1800년대의 중반으로 보고 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경계가 그렇게 쉽게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왜냐하면 낭만 음악의 거장인 슈만과 쇼팽이 1810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 해를 시점으로 보자는 견해와 베토벤이 죽은 1827년까지를 고전주의 시대로 보자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 하여튼 고전주의 시대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이른바 `빈 악파`의 세 악성들이 활약한 화려한 시대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 18세기는 이른바 `계몽주의`가 풍미한 시대로서 상식이 통하는 사회,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이렇게 개인이 자신의 내면 생활에서 마음껏 즐기는 것이 계몽주의의 특징인 현상이었다
- 고전주의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18세기 사상은 다음과 같이 네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 첫째로 18세기는 범 세기적인 시대였다. 즉 한나라에서만 좋은 음악으로 인정되는데 그치지 않고, 많은 민족에게서 이해되는 음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낭만 시대와 더불어 이 시대가 `공통관습시대`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 둘째로, 이 시대는 인본주의를 추구한 시대였다. 이러한 이상들은 `프리메이슨 운동`으로 구체화돠어 전유럽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으며, 모차르트도 여기의 열렬한 회원이었다. 셋째로...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긍~정적으로!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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